화순, 해남, 나주 등 시외지역으로 진출한 시위대는 지역주민들에게 광주의 참상을 알리고 지서, 경찰서, 군부대 등을 털어 다량의 총기를 탈취해 돌아왔다. 카빈, M1 소총, 탄약뿐만 아니라 LMG와 TNT도 시민들의 손에 들어왔다.
이 무기들이 오후 3시경부터 시민들에게 지급되어 총과 실탄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등장, 싸움은 이제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으로 전개된다. 시민군은 자신들의 손으로 광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혈전을 벌였다.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정예부대와 비조직적인 시민군의 싸움이었다. 이날 도청 앞 전투에서는 광주항쟁 기간 중 가장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한다. 시내병원 앞에는 헌혈을 하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로 줄을 섰으며 시민들의 무기 탈취는 계속된다. 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전투지도부가 형성되어 무질서하게 돌아다니는 차량과 무기 소지자를 통제하기 시작했으며 총기조작법과 간단한 군사교육 후 사격에 능한 시민들로 특공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무장한 시민군의 등장과 총격전, 전남대병원 옥상에 설치한 LMG의 위력에 눌려 계엄군은 퇴각을 서두르게 된다.
13:00 무장을 시작한 시위대
- 해남읍에 시위차량 도착.
- 광주에서 시외버스 1대가 해남읍에 도착해 여학생이 마이크로 광주상황을 설명하며 읍민의 궐기를 호소. 이에 약 3천여 명의 군중이 해남교육청 앞 광장에 집결. 성토대회를 갖고 시가행진에 돌입. (현사연 조사 종합)
* "논에서 일을 하다 점심때가 되어 집으로 가던 중 광주에서 온 시위대을 봤다. 해남교육청 앞 광장에 시위대를 중심으로 한 많은 시민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 주변에는 시위대들이 타고 온 버스 2, 3대가 있었는데 유리창은 다 깨져 있었고, 빨간 페인트로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철폐' 등이 씌여 있었다. 광주에서는 공수들이 사람을 대검으로 찔러죽이고 무조건 잡아간다는 말을 듣고 오전까지 조용하던 해남읍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몇몇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빵과 음료수를 사서 시위대들에게 주면서 고생한다고 격려해 주기도 했다. 그날 오후부터 해남읍에 있는 관공서는 모두 문을 닫았다." (구술 : 유승헌, 현사연 조사)
- 군중들 카빈 3백 정으로 무장, 전남대 의대와 경찰국 쪽으로 진출중.
- 도청 함락 직전. 함락될 경우 통신 완전 두절될 듯. 곳곳에서 불길. 인근 읍 면에서도 몰려오는 것 같은 움직임. 군중들의 구호, '지방색이 웬말이냐', '기자들 때려죽여라'. 구호 때문에 기자들 피신, 연락이 어려운 상태.
- 도경 쪽에 포위돼 있던 군경이 군중에게 총을 쏘기 시작. 옥상마다 군인이 올라가 총을 쏘고 있다. 사상자? 수백 발 쏘았다. 주변은 시위대가 여전히 장악.
자동차, 트럭 1백여 대 몰고 다니며, 경찰도 도청 사수 각오로 임하고 있다. 교도소, 무기고 탈취 기도하고 있다는 소문 있어 군경이 대비하고 있다. (월간조선, 1985. 7)
- 도청 앞 발포 동기 : 12시 40분쯤 도청에서 5백 미터 떨어진 금남로에서 시위대가 차 몰고 도청 향해 진격. 군경 3명 사상설. 자세한 상황 모른다. 무서워 나갈 수 없다. (월간조선, 1985. 7)
- 광산 하남파출소 과격분자 8명, 차량 3대로 난입, 카빈 9정 탈취하고 도주(전교사 작전일지)
- 함평. 고속버스, 트럭 등 10여 대의 차량에 분승한 광주 시위대 도착. 함평 경찰서장 환영하에 군중시위. 함평 신광지서 접수, 총기 1백여 정, 실탄 2박스, 버스 등 확보.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영암. 읍내에 시위대 도착.
* "오후 1시가 조금 못 되었을 때였다. 영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지프차를 앞세우고 버스 2대에 가득 탄 시위대가 올라왔다. 차들은 어느 곳도 손상되지 않은 채로 말끔했다. 그러나 차에 탄 학생들로 보이는 시위대원들 중에는 피가 흘러 머리에 헝겊을 동여맨 사람도 있었고, 피묻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 시위대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사거리에서 멈추었다. 지프차에 타고 있던 사레지오여고 교복 차림의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내린 여학생이 그곳에 모여 있던 주민들에게 광주의 상황을 얘기하며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그녀의 절규를 들으며 많은 사람들이 동요했다. 이전에는 광주의 소식을 접하고도 긴가민가 했었는데 전에 들었던 얘기들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구술 : 이강하, 현사연 조사)
13:10
- 폭도들에 의해 전남도청 및 도경 점거. (계엄사 상황일지)
13:23
- 광산 비아 삼거리 과격분자 80명 출현. 군용차 2대, 마이크로 버스 1대로 도로 차단하고 있음. (전교사 작전일지)
13:25
- 헬기 이동보고
1. 보안요원 3명 수송
. 일시 : 용산 출발 11:02, K-57 도착 12:55
. 기종 및 대수 : UH-1H 1대
2. 작전지원 헬기 이동
. K-16 11:15, CAC 도착 13:10
. 기종 및 대수 : UH-1H 10대 (육본 상황일지)
13:28
- 과격분자 1백 명. 차량 3대로 함평에서 목포로 향발. (전교사 작전일지)
13:30 도청 주변에서 사망자와 부상자 속출
- 시위군중의 장갑차 1대가 쏜살같이 공수단이 있는 도청 광장 앞을 통과했다.
공수부대가 집중적으로 사격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장갑차 위에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흔들며 광주 만세를 외치던 그 청년은 웃통을 완전히 벗어버린 채였다. 공수부대가 쏜 총을 맞아 그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장갑차는 학동 쪽으로 빠져나갔다. 이때 이 장갑차를 향해 일제히 가해진 사격에 충장로 입구 도심빌딩 4층에서 머리를 내밀고 구경하고 있던 황효성(60)이 맞아 숨지기도 했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장형태 지사는 도청 마이크를 통해 '공수단을 철수시키고 연행자를 석방토록 최선의 노력을 할테니, 학생 여러분, 자제하고 해산하여 귀가하시기 바랍니다' 하며 눈물어린 목소리로 호소하고 있었다.
이때 동구청 앞에서 학생 4명, 처녀 1명, 노인 2명 등 7명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다는 보고가 광주시청으로부터 도청에 들어왔다. 그 시체는 동구청 1층 바닥에 있다는 것이다. 1시쯤 발포명령과 함께 쏟아진 총알을 맞고 쓰러졌음이 분명했다. 바로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엄청난 상황이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광주세무서 방화중. (육본 상황일지)
13:40
- 공수부대 장갑차 1대가 노동청 쪽으로 전진하면서 도청 광장에 장악지역을 넓히고 군용헬기 1대를 착륙시킨 다음 도청에 와 있던 일반 계엄군(향토사단 소속인 듯) 9명을 태우고 이륙시켰다. 일반 계엄군 철수작전은 1시 48분 두번째 착륙한 헬기가 7명을 싣고 이륙함으로써 끝났다. 도청 광장은 임시 헬리포트가 되어 군용기와 경찰 헬기가 쉴새 없이 이착륙하고 있었다. 공수부대원의 부상자도 후송하고 중요문서도 이송하는 듯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제일은행과 YMCA 사이에 늘어서서 공수부대와 대치하던 트럭들이 중앙로로 후 진하더니 10-20대 젊은이들을 태운 대형 화물트럭 한 대가 갑자기 도청을 향해 급돌진을 했고 이와 동시에 총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계엄군이 다시 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진격했던 트럭은 타이어에 총을 맞아 후퇴하여 동구청 앞에 정차했는데, 짐칸에 있던 두 명의 학생과 운전석의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가로변 은행잎들이 툭툭 떨어지며 인도의 시민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고 한 청년의 등에서도 피가 솟구쳤다. 시멘트 아치가 공중에 풀풀 날리는 10여분간의 난사 끝에 일시 총성이 멎었다. 시민들이 총상자들을 병원으로 운반했으며 인근 병원들이 환자들로 붐볐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 전남지역 계엄분소장 소준열 장군이 담화문을 발표. (말, 1988.5)
14:00 월산동 로터리 헬기 기총소사
* "우리가 탄 차가 월산동 로터리에서 백운동 쪽으로 달리는데 도청 쪽에서 헬기가 날아왔다. 헬기에서 총을 쏘며 지나갔다. 그 총에 맞은 여학생 한 명이 가로수 아래로 픽 쓰러졌다. 나는 얼른 차에서 뛰어내려 그 학생에게로 갔다. 어깨에서 피가 흘러 헝겊으로 팔을 동여맸는데도 계속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상처를 지혈하고 학생을 차에 태워 적십자병원으로 옮겼다." (구술 : 이광영, 현사연 조사)
* "도청 쪽에서 사직공원 쪽으로 이동하는 헬기에서 지축을 울리는 기관총소리와 불빛을 내는 것을 봤다. 헬기는 지상 1백30미터 정도의 높이로 날아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동교(불로동다리) 주변을 향해 쏘았다고 들었다." (구술 : 조비오, 현사연 조사)
* "서석병원 담에 기대 있는데 양동 쪽에서 계림동 쪽으로 날아가는 헬기에서 총을 쏘며 지나갔다." (구술 : 김정기, 현사연 조사)
14:00 무기 탈취를 위해 시외지역으로
* "총을 들고 집단발포를 한 그들과 맨주먹인 우리와의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춘국과 함께 도청과 전남대병원 사이의 길에서 청년들을 규합했다. 청년들이 모여들자 '돌멩이나 각목 따위로 싸울 수 없으니 우리 모두 무기를 갖자'고 선동했다. 청년들 역시 무기 탈취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무기가 있는 나주, 화순, 전남방직, 일신방직으로 열 명씩 조를 짜서 보냈다. 우리는 총을 가진 뒤 광주공원에서 모이자고 했다. 각 방면으로 가는 시위대는 계속 사람들을 규합하여 무기를 탈취하러 갔다." (구술 : 문장우, 현사연 조사)
- 남평지서 무기 탈취.
* "도청 앞 발포를 목격하고 화니백화점 앞에서 가스차를 탔다. 그 차를 타고 15명 가량의 청년들과 함께 총기를 탈취하기 위해 남평으로 갔다. 점심시간에 지난 뒤에 남평지서에 도착했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경찰서는 텅 비어 있었다. 우리를 본 주민들은 무기고 문을 열라며 도끼를 갖다주기도 했다. 경찰서 건물 뒤에 무기고라고 씌어진 창고가 있었다. 도끼로 문을 열고 들어가 카빈 20여 정과 실탄 7,8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남평에서 '전두환을 찢어죽이자' 등의 구호를 외치다 광주로 왔다." (구술 : 최인영, 현사연 조사)
- 나주경찰서 무기 탈취.
- 나주, 영산포.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 계엄군의 발포사실 전함. 광주 삼양 시내버스(운전수 김봉수:27세, 국교 중퇴) 등에 탑승한 시위대 30여 명은 나주읍 주민들과 함께 20여 대의 차량을 획득, 5백여 명이 나주읍 성북동 소재 나주 경찰서 진입, 군용 레커차로 경찰서 무기고 파괴, 카빈 소총 5백 정, M1 소총 2백 정, 실탄 5만 발 획득. 계속해서 영산포읍 영강동 지서에 진입, 탄약 2상자 획득. 이들 시위대는 자신들이 획득한 무기로 완전무장한 후 나주군 노아면, 산포면 등에서 시위. (1980년대 민주화운동)
* "점심을 먹으려고 터미널 앞을 지나다 광주에서 온 시위대를 만났다. 그들이 싣고 온 시체를 보고 공수부대의 만행을 들으니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나는 무작정 시위차량에 탑승했다. 버스에서 '총을 갖고 광주로 가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우리는 나주 경찰서로 갔다. 우리보다 먼저 온 시위대들이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는 것을 보고 금성동 파출소로 갔다. 그곳에도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무기를 차에 싣고 있었다. 카빈과 M1이 약 800여 정 되었고 실탄은 없었다. 카빈과 M1을 우리 차에 나눠 실었다. 우리는 실탄을 구하기 위해 영산포에 있는 영강동 지서로 갔다. 무기고에 실탄이 많이 있었으나 3, 4상자만 싣고 나중에 온 시위대를 남겨놓았다. 그런 뒤 4시경에 광주로 갔다." (구술 : 최성무, 현사연 조사)
- 무안. 광주 무장시위대 30명이 버스로 내려와 군민과 합세하여 무안군 일대 시위. 무안 현경면 지서 습격, 접수. 무안경찰서, 청계지서 습격하여 다량의 M1 소총, 카빈 소총 노획. (1980년대 민주화 운동)
- 영암지역 청년들 광주로와 시위에 참여.
* "나는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로부터 광주의 소식을 전해 듣고 울분을 느껴 신북 청년들을 찾았다. 사월 초파일을 맞아 '호산'에 있는 '망월사'에 놀러가 있던 40여 명의 신북 청년들에게 광주의 소식을 전해 주고, 광주시민을 도우러 가자고 했다. 신북 청년들도 두말 없이 함께 가자고 했다. 부모님들이 만류하여 우리 중 30여 명만이 신북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광주 방면으로 가는 트럭을 얻어타고 광주로 향했다. 우리는 이날 오후 광주에 진입하여 '효천'에서 계엄군과의 전투에 참전했다." (구술 : 강덕진, 현사연조사)
- 영암경찰서 직원, 실탄을 성전 전투경찰 부대로 옮겨.
* "트럭 운전을 하던 나는 그날 마침 집에서 쉬고 있는데 영암경찰서로부터 차를 운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폭력배 단속차 나가는 경관들을 태우고 '도갑사'에 갔다. 거기서 1시간 가량 있다가 점심을 먹고 있는데 빨리 경찰서로 귀환하라는 연락이 왔다.
식사를 하다 말고 영암경찰서로 귀환하니 무슨 영문인지 다찌차에 2만여 발의 실탄과 4, 5상자의 수류탄을 실어주면서 강진군 성전면에 있는 전경부대로 가라고 했다. 경찰서의 형사반장과 경리계 직원, 그리고 현재 경무과에 근무하고 있는 나경장, 이렇게 3명의 경찰서 직원을 태우고 성전의 전경부대로 갔다.
오후 4시쯤 영암으로 돌아오던 우리는 영암읍 남풍리 다리 부근에서 영암읍에서 나오고 있는 시위대 차량을 만났다. 우리는 다시 경찰서로 가서 나머지 무기들을 싣고 성전 전경대로 옮겨야 할 상황이었는데, 경관들이 차에서 내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도 차를 버리고 도망갔다." (구술 : 김용남, 현사연 조사)
- 남평으로 가던 중 도청 앞 발포소식을 듣고 무기 탈취.
* "1시 30분경 광주상황을 시외지역에 알리기 위해 버스를 타고 광주를 벗어났다. 우리가 남평에 도착했을 때, 시민들이 탄 군용 지프차가 질주해 오면서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우리에게 도청 앞 집단 발포 상황을 설명해 줬다. 단순히 광주의 시위상황을 알리기 위해 나주로 가던 우리는 공수들의 총질에 대응하려면 몽둥이나 돌멩이로는 어림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길로 나주경찰서 무기를 탈취하러 갔다. 우리가 나주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경찰은 한 명도 없었다. 무기고의 자물쇠를 망치로 내리쳐도 끄떡없자 레커차로 담을 밀고 들어가보니 비닐 봉지에 쌓인 공기총이 있었다. 그것을 챙기고 다시 옆담을 밀었더니 카빈과 권총이 있었다. 실탄은 없었다. 우리는 실탄을 탈취하기 위해 나주 금성동 파출소로 갔다. 그곳에는 실탄과 수류탄이 있었다. 우리는 총과 실탄을 차에 나누어 싣고 광주 공원으로 갔다." (구술 : 위성삼, 현사연 조사)
* "계엄군의 도청 앞 발포 상황을 외곽지역에서 시위대를 통해 들은 나는 '우리도 무기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광주 시민 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외지역으로 무기를 탈취하러 나섰다. 버스를 타고 나주경찰서에 가보니 무기고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카빈 몇자루 뿐 실탄은 없었다. 그것을 가지고 영산포 경찰서로 갔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시위대들이 무기고의 담을 트럭으로 밀어 붙이고 있었다. 그곳에서 카빈과 실탄 50발을 지급받은 우리는 해남으로 출발했다. 해남읍내에서는 소방차를 몰고 다니며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곳 청년들에게 광주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광주로 갈 수 있는 사람과 차량을 모으라고 지시했다. 차량 7대가 5시에 출발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내가 탄 차와 다른 2대가 먼저 출발했다." (구술 : 이덕준, 현사연 조사)
- 피고인 김봉수, 동 박윤선, 동 유재홍, 동 최재식은 성명불상자 30여 명과 피고인 김봉수가 운전하는 번호불상 삼양 시내버스에 타고 20여 대의 각종 차량에 분승한 성명불상자 5백여 명과 공동하여 총기를 탈취할 의사로 1980. 5. 21 14:00경 나주읍 성북동 소재 나주경찰서에 침입, 근무중인 경찰관들이 겁을 먹고 피신하자 성명불상자 30세 가량의 지휘에 의하여 군용 레커차 후미로 동 경찰서 무기고 문을 들이받아 파괴한 다음 피고인 등이 동소에 들어가 보관중인 카빈 소총 1정씩을 가져가는 등 카빈 소총 94정, 권총 25정, 공기총 1백51정 등을 가지고 나옴으로써 이를 약탈하고(공소장)
- 피고인 이재관, 동 박창남, 동 유재홍, 공소외 임채호 등은 5대의 차량에 분승한 성명불상자 1백여 명과 공동하여 총기를 탈취할 의사로 5. 21 14:00경 나주읍 금성동 파출소에 침입, 동파출소 근무 경장 김종빈 등 3인이 놀라 피신하자 성명불상자가 운전하는 군용 트럭 후미로 동파출소 예비군 무기고 문을 들이받아 파괴하고 피고인 박창남이 그곳에 보관중인 카빈 소총 4정을 가지고 나오는 등 M1 소총 2백여 정, 카빈 소총 5백여 정, 총탄 5만여 발을 가져옴으로써 이를 약탈하고(공소장)
- 피고인 이재관은 상 피고인 최성무, 공소외 성명불상자 30여 명과 공동하여 총탄을 탈취할 의사로 같은 날 14:30경 나주군 영산포읍 영강동 소재 나주경찰서 영강동 지서에 침입하여 탄약 2상자를 가져감으로써 이를 약탈하고(공소장)
14:05
- 갑자기 시위군중 쪽에 있던 스피커에서 학생들의 호소가 터져나왔다. 그는 스스로 학생회 간부라고 소개했다.
"도지사는 이렇게 살벌한데 가만있어도 됩니까. 우리는 이렇게 죽어가야 합니까. 대통령께 건의하여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마이크를 빼앗는 듯 낚아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서 외쳐댔다.
"우리의 뜻이 관철되지 않는 한 물러설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무기도 없습니다. 다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국민은 다 죽어야 되는가. 80만 시민이 다 죽을 때까지 우리들의 의사를 관철해 갑시다. 민주회복을 외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있습니다." 이렇게 외치던 그 학생은 갑자기 엉엉 울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왔다. 절규였다. 피맺힌 호소였다.
이 호소가 퍼져나오는 동안 공중에 떠 있는 헬기에서는 전단이 뿌려지고 있었다. 32절지의 조그마한 갱지에 인쇄된 이 전단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광주시민 여러분!
어제밤에는 일부 시위군중의 난동으로 인하여 10명의 군경이 사상하고 경찰서 를 비롯한 일부 관공서와 3개 방송국이 파괴되고 불태워졌읍니다.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시위군중도 다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민 여러분!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 자제하고 즉시 귀가합시다. 더 이상의 혼란은 우리 광주시민에게 더욱 불행만을 초래합니다. 더 이상 주저 말고 즉시 귀가 합시다. 질서회복을 위해 모든 시민이 합심 노력합시다.
1980년 5월 21일 전남북 계엄분소장 육군중장 윤흥정
시민에 대한 위로나 사과 또는 연행자에 대한 처리문제 등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무조건 질서를 위해 귀가하라는 내용의 전단이었다. 시민들을 설득하기에는 너무나 무용지물이었다.
공중에서 전단이 떨어졌으나 그것조차 누구 하나 주워보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 전단을 뿌리는 군용 헬기는 전단살포 작업과 동시에 그 내용을 방송하면서 '시민 여러분의 요구대로 연행된 학생과 시민은 오후 4시 모두 석방합니다'라고 발표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14:00 총상당한 환자들을 병원으로 후송
* "우리 대원 5명은 적십자 완장을 차고 지프차를 타고 다니며 환자를 병원으로 수송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환자수송을 위해 공수들의 진지에도 몇 번 간 적이 있다. 그들은 교도소 앞, 도청 앞, 조선대 정문 앞에 있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접근하여 '환자들이 있으면 병원으로 후송할테니 우리에게 인수해 달라'고 했더니 '통합병원으로 수송할 것이다'며 거절했다. 공수들의 진지마다 민간인으로 보이는 시체가 거적에 덮힌채 방치되어 있는 것을 봤다." (구술 : 이광영, 현사연 조사)
14:10
- 도경 및 도청에 난입했던 시민들은 물러나고 계엄군과 군중은 도경 및 도청 정문 앞에서 대치중이며, 계엄군은 건물 주위를 경계하고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14:20
- 전남 5아 1059 등 고속버스 6대와 승용차 2대에 분승한 광주의 시위대가 목포에 진입하여 광주시민 피해상황을 가두방송함. (현사연 조사 종합)
14:22
- 보성 사거리, 무장 과격분자 40명 버스, 트럭 그대로 시위. (전교사 작전일지)
14:30
- 비아, 영광, 나주, 영산포, 무안, 영암, 화순, 장성 등지의 무기고, 화약고에서 탈취해 낸 카빈 M1 소총, 수류탄, 다이너마이트 등이 반입되어 드디어 젊은이들이 무장을 시작했다. 이들은 대개 손에 6발씩의 탄환을 들고 도청 쪽으로 진주해 왔으며 시민들은 박수와 흥분과 걱정으로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계엄군은 자신들의 행위로 시위대들에게 무장의 필요성을 가르쳐준 것이다. 이때부터 계엄군은 도청으로부터 흩어져 관광호텔과 전일빌딩, 도청 건물 등으로 들어가 숨어서 저격했고 무장한 젊은이들은 건물 기둥 뒤에서 응사했다. 그러나 시민군이 손에 쥔 M1과 카빈은 계엄군이 가진 M16의 무서운 위력을 당할 수가 없었다. 카빈 1백 정이 M16 10정을 따라가지 못하였다. 이후 5시 30분경까지 운집한 군중을 향한 계엄군의 치열한 사격이 계속되었다. 병원은 의사가 부족한다 발디딜 틈도 없이 시민들로 붐벼 수라장이었다. 동명로와 도청 사이의 네거리에도 총에 맞은 3명이 쓰러져 있었는데, 두 명만 겨우 끌어냈을 뿐 여전히 방치된 복판의 한 사람 위로는 계속 총탄이 빗발처럼 오가고 있었다. (5.18 광주시민 의거 진상)
- 효덕동 파출소 무기 탈취
* "21일 오후 금남로에서 어떤 시민으로 부터 '계엄군의 총에 맞아 고개가 떨어져나간 청년의 비보'를 전해 듣고 화가 치민 나는 그 길로 친구와 함께 지프차를 타고 무기를 탈취하러 나섰다. 광-목간 도로를 가던 중 효덕동 파출소가 보이자 무조건 쳐들어갔다. 무기고의 열쇠를 부수고 그곳에 있던 카빈 4, 5정을 차에 실었다. 그때 나주경찰서에서 무기를 가지고 들어오는 차량을 만나 실탄을 지급받고 그들과 함께 광주공원으로 집결했다." (구술 : 김광호, 현사연 조사)
- 목포경찰서 산하 대부분의 경찰, 광주지역 시위진압을 위해 동원.
- 목포역 광장에 2만여 명 운집. (1980년대 민주화운동)
전남대에 주둔한 공수부대를 공격하자 발포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에 모여든 사람들과 함께 3대의 버스와 1대의 용달차에 나누어 타고 운전을 잘하는 기사들에게 운전을 하도록 했다. 사람들은 조선대에 주둔하고 있는 공수들은 몰아내자고 했다. 그러자 한쪽에서는 전남대에 있는 공수들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우리는 두 편으로 나뉘어 전남대와 조선대에 주둔하고 있는 공수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2대의 차가 조선대로 먼저 출발하고 내가 탄 차와 버스 1대는 전남대 정문으로 향했다. 오후 3시경 전남대 앞에서 공수들과 투석전을 벌이고 있던 시민들과 합세하였다. 공수들은 대개 전남대 안에서 진을 치고 있었고, 1개 소대 정도만 교문 앞에서 우리와 맞서고 있었다. 갑자기 공수 2,3명이 쫓아왔다. 시민들 10여 명은 재빨리 전남대 정문 앞 다리 부근에 몸을 숨겼다. 쫓아오던 공수들이 다리를 막 건너려고 하는 순간 시민들이 공수들을 덮쳤다. 이때 시민 4명은 무서워 도망을 갔고, 남은 6명은 공수 들을 잡아끌면서 두들겨팼다. 이를 본 다른 공수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우리 들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무작정 뛰었다. 나 역시 붙잡고 있던 공수들을 놓고 뛰었다. 한참 뛰는 도중 내 앞에서 도망가던 사람이 발목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나는 도저히 혼자 뛸 수가 없었다. 그래서 55세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를 일으켜세워 끌다시피 하고 도망을 갔다. 순간 뒤에서 누군가 나의 목덜미를 잡아 끌었다. 나는 공수들 3명에게 붙잡힌 것이다. 총에 맞았던 아저씨는 어떻게 되었는지 돌아보지도 못하고 전남대 본관 안으로 끌려갔다. 이미 많은 숫자의 시민들이 잡혀와 있었다. 피가 범벅이 되어 신음하는 사람, 머리가 터진 사람 등 2백여 명은 넘을 것 같았다. 30세 정도로 보이는 한 사람은 두개골이 벌어져 차마 쳐다 볼 수 없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공수 한 명은 그 부상자를 워카끈으로 꿰 매고 있었다. 참혹했던 그 광경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그 기막히고 환장할 장면을… 그들은 짐승이었다." (구술 : 김연태, 현사연 조사)
*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공수들이 시민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을 목격하고 도망치다 그곳을 지나던 미니버스에 탑승했다.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운전수한테 도청으로 가자고 했다. 미니버스가 MBC 방송국 앞을 지날때 나는 차에서 내려 장동 로터리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노동청 쪽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내 옆에 있던 두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한 명은 즉사했고, 부상당한 다른 한 명은 병원으로 옮겼다." (구술 : 김광영, 현사연 조사)
14:35
- 공수부대는 분수대에서 70미터쯤 떨어진 금남로 쪽에 민간인 픽업과 버스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군중들의 동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군중들은 3백 미터 앞쪽에서 계속 대치하고 있는 상태이나 비교적 조용한 모습이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는 시위군중이 몰려와 수십 대의 차량과 장갑차를 끌고 가버렸다고 도지사 비서실로 전화연락을 해왔다. 시내에서는 간헐적인 총성이 나고 있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14:40
- 금남로에 시민 3천 명 운집. 가톨릭센터 앞에서 군용 트럭에 방화.
- 공수부대는 금남로 쪽 저지선 강화를 위해 관광버스로 바리케이드 설치. (10일간의 취재 수첩)
14:53
- 소준열 행정학교장 광주 향해 출발(헬기).
무장시민군과 계엄군의 무력 충돌
* "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은 후 우리는 광주은행 본점 앞에 30여 명이 모여 연좌농성을 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20대 청년이 앞에서 시위를 이끌고 선동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정의가' 등의 노래와 구호를 제창하고 있는데, 도청에서 또다시 총성이 들렸고, 앞에서 주동했던 청년이 팔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달려가자 우리도 재빨리 주변 건물벽으로 몸을 숨겼다." (구술 : 유승규, 현사연 조사)
* "오후 3, 4시경 공수들이 도청 주변에 있는 주요건물 옥상에서 시민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전일빌딩 옥상에 있던 공수들은 광주경찰서 부근의 시민들을 향해 쐈고, 관광호텔 옥상에 배치된 공수들은 금남로 쪽을 향해 갈겨댔다. 이때 광주 경찰서 건너편에 있는 진주다방 주방장이 그 건물 옥상에서 구경하다 총에 맞아 즉사했다. 나는 가톨릭센터 뒤쪽 사거리에 몸을 숨기고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수를 땅바닥에 '바를正'자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약 30-40분에 걸쳐 금남로와 중앙로에 총을 맞고 쓰러진 사상자가 12명이었다. 동네 선배는 내가 그곳을 떠난 후 37명까지 표기하다 분통이 터져 그만뒀다고 했다." (구술 : 임춘식, 현사연 조사)
- 무장청년 15명, 도청 앞에 진격하며 총격전 벌임.
* "남평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해 3시경 충금지하상가 사거리에 도착한 우리는 시위대의 환영을 받았다. 그 무렵 무장한 시민군은 우리가 처음인 것 같았다. 시위대들은 서로 총을 받으려고 했으나 20정 정도밖에 되지 않아 총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만 분배되었다. 특공대라고 불리는 무장청년들이 모여 작전을 세웠다. 도청 주변에 있는 공수부대와 정면대결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서로 흩어져 도청을 향해 진격하기로 했다. 나는 혼자서 가톨릭센터 뒷골목을 통해 도청 쪽으로 가기로 하고 동구청까지 왔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고 조용하자 상황을 살피기 위해 동구청 옆 골목으로 와 금남로 쪽을 내다보았다. 동구청 맞은편에 있는 공 사장으로 가서 싸우면 좋을 것 같아 그쪽으로 달려가는데 '탕!'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나를 겨냥해 쏜 것이다. 목과 어깨 사이를 스쳤다. 몸을 낮추고 기어서 겨우 그 자리를 빠져나와 치료를 받았다." (구술 : 최인영, 현사연 조사)
14:55
- 도청 별관 옥상에 공수부대원 2명이 올라가고 수협 전남지부 옥상과 도심빌딩 위에도 4명이 배치되더니, 조금 뒤에는 도청을 중심으로 높은 곳마다 공수부대원들이 올라가 있었다. 충장로와 학동 쪽 입구는 물론, 부근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본격적으로 발포하려는 계획임이 분명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14:58
- 광주경찰서 쪽으로 병력을 이동배치.
- 3시에는 시위대의 장갑차가 광장 쪽으로 전진하다가 공수부대 장갑차가 발포하자 다시 후퇴하기도 했다. 발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옥상에 있던 공수부대는 아무나 도청 부근을 얼씬거리기만 하면 가차없이 쏴버렸다. 도청의 2, 3층과 옥상에서 금남로 쪽을 내려다보며 취재하고 있던 기자들도 실내로 들어가야 했고 이제 도청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어버렸다. 중요한 서류는 이미 헬기로 수송한 뒤여서 몸만 빠져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도청 안에 있던 경찰국도 마찬가지였다. (10일간의 취재수첩)
15:00 시민군, 저공비행 헬기에 사격
- 계엄사가 연행시민 석방 약속을 지키지 않자 시민들이 더욱 흥분.
- 시내 종합병원, 개인병원 총상환자들로 가득 참.
- 비아지서 파괴 후 무기탈취. (전교사 작전일지)
- 무안 해제면 지서 장악. M1 10정, 카빈 20정 획득.
- 3시 40분 무안 망운면 지서 접수.
- 해남. 3천여 명의 군중이 성내리 소재 교육청 앞에서 성토대회, 시가행진. 시위대 대표는 해남읍 안동리에 주둔하는 군부대장 장윤태 중령을 만나 평화적 시위 약속. (1980년대 민주화운동)
- 데모군중 발포행위
일시 : 5.21 15:00
장소 : 광주시내
경위 : UH-1H 1대가 시내상공을 비행중 데모군중의 대공사격을 받은 바 있음
피해 : 무
광주상공 저공비행 금지 요망 (육본 상황일지)
* "백운동 로터리로 시민들이 모여들자 헬기 1대가 나타나 저공비행을 하면서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귀가하십시오' 하는 선무방송을 했다. 우리가 헬기를 향해 사격을 가하자 낮게 떠 있던 비행기는 방송도 하지 않고 높게 떠서 날아갔다."(구술 : 구성주, 현사연 조사)
- 20사단 병력 헬기로 도청 투입 실패. (특전사 전투상보)
광주공원에서 총기 지급
- 시외지역으로 나간 차량들이 무기를 싣고 광주공원과 유동 삼거리로 모여들기 시작.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25인승 미니버스에 탄 시위대가 적십자병원으로 와서 '시민들과 젊은 사람들은 모두 공원으로 갑시다. 광주를 우리 손으로 지킵시다...' 하고 외쳤다. 나는 그 차를 타고 '광주공원'으로 갔다. 계단 앞에 4천여 자루의 카빈 총이 쌓여 있었고, 3백여 명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나 아무 제약 없이 총을 가져가고 싶은 대로 총을 집어갔다. 우리 차에 탄 사람들도 240-250자루의 총과 얼마간의 실탄을 가지고 적십자병원으로 갔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30개 이상의 총을 나눠주었다. 그 때문에 병원 중에서 적십자병원이 제일 먼저 무장을 했을 것이다 ." (구술 : 김광헌, 현사연 조사)
광주시청 2층에서 계엄군 발포
* "광주공원에서 총을 지급받은 우리는 지프차를 타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제부터는 군인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민군이 광주시민을 지키겠습니다'라고 외쳤다. 우리가 시청 앞을 지날때 시청에 있던 공수들이 우리 차를 향해 총을 쐈다. 총알이 유리창을 뚫고 지나갔으나 재빨리 차를 몰아 다행히 부상자 없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구술 : 정영동, 현사연 조사)
* "우리 정자는 동네사람들을 따라 시청 쪽으로 구경 나갔다가 시청 건물 2층에서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총알이 가슴을 뚫고 나갔다. 정자랑 같이 시청으로 구경갔던 동네사람이 정자가 그곳에서 총에 맞아 죽은 것을 봤다고 얘기해 줬다." (구술 : 정석심, 현사연 조사)
- 중앙고속버스 1대, 대한통운 1대, 군용 트럭 1대 주유 후 교도소에 접근. (31사단 전투상보)
자체경비에 나서는 시민군
- 동일 18:00경 위 홍림교에서 상 피고인 김복수, 동 김춘국, 동 유홍렬, 성명 미상의 폭도 25명 정도를 규합하여 총기 사격술, 수류탄 투척술, 계엄군 발견시 신호방법 등을 교육시킨 후 5명을 1개조로 하여 6개조를 편성하고 상 피고인 김춘국은 수정아파트 다리 부근을, 동 김복수는 동소에 있던 탁아소 방면을, 동 유홍렬 등은 피고인과 함께 동소 부근에 소재하는 루디아의상실 부근에 각 배치하여 계엄군이 시내로 진주할 경우에 이를 막아내도록 각 경계임무를 부여하고 (공소장)
- 영암. 청년들 시위대 결성.
* "시위대가 떠나고 나자 시위 동참에 대한 얘기가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영암읍에는 차량이 다 빠져나가고 없었으므로 '도갑사'에서 완행버스 두 대를 끌고 왔다. 여기서 마련한 '김대중 석방하라', '계엄 철폐하라', '신현확이 물러가라'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버스에 부착했다. 영암읍의 시위대는 그 버스를 타고 영암읍의 외곽도로며 읍내를 2회 정도 돌면서 1백여 명의 청년들을 규합했다. 영암 청년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3시 30분경 광주를 향해 출발했다." (구술 : 최철환, 현사연 조사)
- 전남도청에서 5백 미터 떨어진 우체국 쪽에서 학생 2천여 명이 카빈 소총과 실탄을 휴대하고 도청 쪽으로 진출중. 사방에서 총성이 나고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15:16
- 전남 화순경찰서 연소중이며, 폭도들이 화순광업소로 폭약을 가지러 가고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 "나는 지원동에서 도로에 버려진 덤프트럭을 치우고 지역방위를 해야 한다고 모인 주민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어떤 사람이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면서 '화순으로 무기를 탈취하러 가자'고 했다. 화순이 고향인 나는 그곳 지리를 잘 알고 있으니 함께 가자고 나섰다. 트럭 3대와 다른 차에 분승한 시민들이 3시경 화순을 출발했다. 내가 운전한 트럭은 선발대로 광업소에 가기로 하고 다른 차량은 화순읍을 돌면서 광주의 시위상황을 알리기로 했다 20-30명이 화순광업소에 도착해 보니 직원으로 보이는 7-8명이 8톤 트럭에 화약을 싣고 있었다. 화약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총을 들이대며 화약을 달라고 하자 '불만 지르지 말고 가져가시오' 하면서 순순히 내 줬다. 8톤 트럭에 화약이 가득 차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트럭에 나눠 싣고 광주로 왔다. 해질 무렵 도청에 도착했다." (구술 : 신만식, 현사연 조사)
- 화순에서 탈취한 무기, 학동에서 지급.
* "예상했던 대로 3시 20분경 화순으로 간 시위대가 2대의 트럭에 LMG를 설치하고 총기, 다이너마이트, 실탄 등을 싣고 학동 석천다리로 왔다. 나는 차를 세워 무기를 내렸다. 4백-5백 정의 총이 있었으나 M16이나 연발로 나가는 M2는 거의 없었고 단발로 나가는 M1이 많았다. 그리고 실탄은 20발들이 사각 클립과 30발 들이 바나나 클립이 20-30상자가 있었다. 나는 차 안에 있는 20-30명의 시위대원과 모여드는 50-1백 명의 시민들에게 총과 실탄을 나누어주었다. 드디어 완전무장을 한 것이다. 총을 분배한 후 나는 총기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교육을 시켰다. M1은 자물쇠를 잠그면 개머리판에 충격을 줘도 자물쇠가 풀리지 않으나 카빈은 자물쇠를 잠가도 충격을 주면 실탄이 나가므로 개머리판에 충격을 가하지 말라는 것과, 또 클립을 빼도 약실에 실탄이 한 발 남게 되니 클립을 뺀 후 반드시 남은 실탄도 빼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대충 교육을 한 후 '여러분은 1차적으로 총기 교육을 받았으니 이제 총집결지인 광주공원으로 모입시다'라고 한 후 나는 남은 총기를 차에 싣고 광주공원으로 갔다." (구술 : 문장우, 현사연 조사)
15:20
- 도청 앞에서 총격전. 학생들 1천여 명 무장.
* "화순경찰서 무기고에서 80여 정의 무기를 탈취하여 지원동으로 와서 시위대에게 나눠줬다. 우리는 실탄이 없는 총을 들고 시내로 오다 남광주역 부근에서 실탄을 받았다. 나는 실탄 70여 발을 받았다. 차를 타고 외곽지역을 돌아다니다가 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무장시민군 사이에 접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도청 부근으로 왔다. 실제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충장로 3가에서 금남로 쪽으로 오는데 비명소리가 요란했다. 금남로에는 수많은 사상자가 쓰러져 있었다. 나는 충장로 3가에 있는 건물로 들어가 도청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내가 총을 쏘자 도청 쪽에서 공수가 쏜 총탄이 건물벽에 부딪혀 불꽃이 튀었다. 두려움을 느낀 나는 총을 쏘지도 못하고 몸을 숨긴 채 어두워질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한참 후 계엄군의 철수 소식을 듣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구술 : 김태헌, 현사연 조 사)
15:24
- 화순지역 지서 기습, 총기 탈취 후 파괴(카빈 10정). (전교사 작전일지)
- 동일 15:00경 위와 같이 시위하면서 너릿재 터널 부근에서 군용 트럭에 탑승한 무장폭도들이 화순경찰서 역전파출소의 무기고를 탈취하러 가자고 하므로 이에 가담할 것을 결심하고 위 트럭에 동승하여 동일 15:30경 위 폭도들과 함께 동파출소 및 무기고를 쇠파이프와 도끼로 파괴하고 동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는 카빈 소총, M1 소총 등 1백50정과 수량미상의 탄약을 탈취하고 (공소장)
* "화순 역전파출소 앞에서 주민들과 함께 광주의 시위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버스 한 대가 그곳으로 왔다. 그들이 파출소를 습격하여 무기고를 터는 것을 봤다. 그때 시위대들은 각목을 들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미 공수들의 만행을 들은지라 시위대가 나타나자 박수를 쳐줬다."(이선정, 청문회 증언)
* "학동 주유소 부근에서 도청 앞 발포상황을 듣고 있는데 화물트럭 1대가 왔다. 그 차에는 태극기에 덮인 시신 8, 9구가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가슴과 머리에 총을 맞아 죽은 시체들이었다. 그것을 본 나는 계엄군과 싸우려면 우리도 무장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곳에 있던 10여 명의 청년이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트럭에 타고 화순 방면으로 향했다. 우리 차 뒤에는 트럭 2대와 지프차 1대가 따라왔다. 우리는 화순군 동면지서로 갔다. 굳게 닫힌 무기고를 트럭으로 들이받았다. 무기고에는 카빈과 실탄이 쌓여 있었다. 30-40명의 시위대가 들어가 총기와 실탄을 트럭에 옮겨 실었다. 우리는 총을 한 자루씩 높이 쳐들고 구호를 외치며 광주로 왔다. 환호하는 시민들로부터 무장시민군은 광주공원에서 모인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구술 : 김용균, 현사연 조사)
15:38
- 난동자들이 탄 경찰 기동순찰차와 20여 대의 차량이 교도소로 접근중. (31사단 전투상보)
15:40
- 선무방송 헬기 방송중 대공사격으로 3발 관통. (전교사 작전일지)
* "방림동에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해 전남대학 부속병원을 지나면서 보니까 병원 옥상에서 몇 사람의 시민이 낮게 떠서 선무방송을 하는 헬기를 향해 총을 쐈다. 그러자 헬기는 고공비행으로 날아갔다." (구술 : 김광영, 현사연 조사)
15:45
- 폭도들이 버스 1대, 트럭 1대에 탑승, 고속도로를 이용 전주 방향으로 가고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15:50
- 일단의 시위대들이 서부경찰서에 난입, 총과 실탄을 요구하고 있다는 상황이 광주경찰서에 수신. (월간조선, 1985. 7)
- 폭도들이 카빈 3백 정을 휴대, 전남대 의대 오거리에서 분산, 경찰국 쪽으로 총을 쏘면서 이동. (계엄사 상황일지)
16:00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교전
* "오후 4시경 광주은행 본점 부근에 트럭이 나타났다. 트럭에는 30여 정의 카빈이 있었으나 그곳에 있던 시민에 비해 다수가 부족했다. 그때부터 무장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계엄군은 높은 건물 옥상에서 총을 쐈으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시민군도 건물 사이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다 잠깐 나와서 총을 쏘고 재빨리 몸을 숨겼다." (구술 : 유승규, 현사연 조사)
- 화순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위대들이 트럭을 타고 광주시내로 재진입하고 있다는 연락.
- 일단의 시위대들이 도청에서 직선으로 3백여 미터쯤 떨어진 전남의대 옥상에 LMG 2개를 설치, 도청 쪽으로 사격을 시작했으며 군헬기에 사격을 했다. 또 일부 시위대들은 시내 남국민학교와 광주공원에서 청년들에게 총을 나누어주고 사격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총소리는 시가지 전역에서 들렸다. (월간조선 1985. 7)
- 목포. '김대중 석방' '계엄철폐'를 외치며 시가행진. 광주에서 온 시위차량은 목포 청년을 싣고 광주로 향함.
- 오후부터 목포시내 상가 철시, 관공서 텅 빔. 치안 공백상태. 육로, 해로 교통차단, 통신 두절.
- 목포 MBC 방송국에 광주 학생들을 실은 버스 1대 도착, 안으로 들어갔으나 부수지 않고 그냥 나옴. 17:00까지 목포시내 일부에서 데모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조달하기 위해 모금했다는 설. (월간조선, 1985. 7)
* "목포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진 날은 21일부터였다. 오후 3시 30분 이후 광주에서 무장시위대가 버스 4대와 소형 승용차 1대를 앞세우고 목포에 진입했다. 그날 밤 목포시내 각 파출소의 무기를 빼내 시민들의 무장이 시작되었다." (구술:양지문, 현사연 조사)
- 31사단에서 전교사 직접 통제로 작전통제권 전환.
- 7, 11특전여단 도청에서 조선대로 철수 지시. (전교사 작전일지)
- 진도개 '둘' 전군에 발령(국방부 장관 지시에 의거). (계엄사 상황일지)
- 동일 16:00경 전시 군용 트럭에 폭도 30여 명을 승차시켜 광주시 북구 임동 소재 전남방직에 동회사 경비원 성명불상자의 저지를 제압하고 들어가 동회사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는 카빈 소총 1백여 정, 동 실탄 1백여 클립을 임의로 꺼내 가지고 나와 이를 탈취하고 (공소장)
16:05
- 영암경찰서 기습, 무기 탈취 후 도주(520정). (전교사 작전일지)
* "오후 4시쯤 20여 명의 젊은 학생들과 총을 든 30세 안팎의 청년 3명(?)으로 이루어진 시위대가 트럭을 타고 도착했다. 이들은 영암읍 삼거리를 지나 영암경찰서로 향했다. 나는 이들을 계속 따라갔다. 영암경찰서는 이미 비어 있었다.
많은 영암읍민들이 시위대를 중심으로 20-30 미터의 간격을 두고 둘러섰다. 청년 1명이 무기고 옆에 비스듬히 서서 M1 소총을 쏘았다.
시위대원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20정 정도의 총을 가지고 떠났다." (구술 : 김무, 김용남, 현사연 조사)
16:10
- 31사 나주 예비군 대대 부대 앞에 폭도 도착, 공기총 등 소량의 개인화기로 무장, 총기 40정과 탄약 요구 농성, 대대장 직접 설득 해산. (31사단 전투상보)
- 나주경찰서 무기 피탈 내용 : 카빈 7백80정, M1 2백35정, 실탄 4만 6천4백발, 38구경 12정, 45구경 16정.
- 군트럭과 버스 30대 동원, 30명씩 분승하여 영광으로 무기 탈취차 출동.
- 화순경찰서 무기 피탈.
- 화순 역전파출소 카빈 8백 정, 수류탄 일부 피탈. 파출소장 납치. 또 다른 파출소 카빈 2백 정. (월간조선, 1985. 7)
* "도청 앞 상무관 부근에서 공수들이 칼로 짓이겨놓은 시체 2구를 목격하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한 민족끼리 이렇게 잔인한 수가 있을까! 총을 든 공수에게 몽둥이나 돌멩이로는 도저히 대적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무기가 필요함을 느꼈다. 지리를 잘 아는 화순으로 가서 무기를 탈취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친구와 함께 지프차에 올랐다. 고속버스에 탄 시민들은 화순군 구암리 지서로 가고 우리 일행은 화순 역전파출소로 갔다. 무기고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고 경찰은 없었다. 자물쇠를 지프차에 걸고 시동을 걸어 잡아당겼더니 무기고 문이 열렸다. 총은 5자루, 실탄 1박스, 권총알 20개가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곧바로 광주로 왔다." (구술 : 박내풍, 현사연 조사)
16:15
- 시위대, 전남의대 12층 옥상에서 LMG 2대 설치, 5백 미터 떨어진 도청 향해 발사중. 소방차 1대에 석유를 만재, 도청 방화 위해 진출중. 일신방직 무기고에서 카빈 1백50정 피탈. (월간조선, 1985. 7)
- 광주경찰서장 등 간부들은 무기 없는 상황에서 시위대와 맞설 대책회의를 논의했다(전날 군에서 도경 및 광주시내 경찰서, 지파출소는 무기를 회수해 감).
우선 윤병용 서장은 각 과의 기밀문서를 챙기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회의는 '적절한 시기에 철수해야 된다. 군병력을 요청하자'는 등 서로 의견이 엇갈려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윤서장은 회의 도중 전화로 도경에 현재의 상황을 보고하고 1개 소대의 군병력을 요청했다. 여의치 않은 듯 서장의 표정이 무거웠다. 당시 서에는 지원 나온 전투경찰요원과 경찰관 등 1백여 명이 있는 것 같았다. (월간조선, 1985. 7)
16:30
- 영암 신북지서 무기고 습격.
* "광주에서 해남 방면으로 이어지는 지방도로를 타고 시위대가 신북에 왔다.
머리에 붕대를 두른 30대 중반의 남자가 신북지서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물어봤 다. 시위차량이 신북지서를 향해 가자 주민들이 따라갔다. 무기고 자물쇠를 몽둥 이로 내리쳤으나 부숴지지 않자 총을 쐈다. 무기고 문이 열려 안으로 들어갔으나 무기는 하나도 없었다." (구술 : 최항우, 현사연 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