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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음력 1월 15일 자시(子時), 서울 재동 취운정 아래에 수십 명이 모였다. 나철(羅喆)을 중심으로, 대부분 항일외교 투쟁에 몸을 던졌다가 좌절을 맛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단군대황조신위를 북벽에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했다.
나철은 이 자리에서 종교를 '개창'한다고 하지 않았다. '중광(重光)'한다고 했다.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을 다시 밝힌다는 뜻이다. 그 말 한마디에 대종교의 세계관이 다 들어 있다. 단군 이래로 이어져온 민족 고유의 신앙이 부여의 대천교(代天敎), 신라의 숭천교(崇天敎), 고구려의 경천교(敬天敎), 고려의 왕검교(王儉敎)를 거쳐 면면히 흘렀는데, 이제 다시 그 불씨를 살린다는 선언이었다.
대종교인이 아니고서야 이 역사적 계통성을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종교가 자신을 외래종교가 아닌 이 땅에서 자생한 뿌리로 자리매김했다는 것, 그 자리매김이 식민지라는 극한 상황에서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이후의 역사가 말해준다.
1909년 12월, 나철은 '단군교오대종지포명서(檀君敎五大宗旨佈明書)'를 공포했다. 12월 1일 종지를 공지하고, 세모의 소감을 통해 30일 정식 공포했다. 오대종지는 이렇다.
경봉조신(敬奉祖神), 감통영성(感通靈誠), 애합족우(愛合族友), 안고기토(安固基土), 근무산업(勤務産業).
조상신을 공경하여 받들고, 정성으로 영성에 감통하며, 사랑으로 겨레와 화합하고, 터전을 굳건히 지키며, 부지런히 산업에 힘쓰자는 것이다. 읽으면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이 문건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면 생각이 달라진다.
1911년 1월, 충청남도 장관 박중양(朴重陽)은 공주 시교당이었던 사립명화학교에서 단군교 초기 문건을 압수해 조선총독부에 보고했다.
폐교 처분도 건의했다. 박중양이 특히 문제 삼은 것은 셋째 '애합족우'와 넷째 '안고기토'의 해설 부분이었다.
애합족우의 주석은 형제자매가 같은 기(氣)를 받은 한 몸의 손발처럼 서로 의지하고 생사고락을 함께 해야 한다고 적었다. 안고기토의 주석은 대황조에게서 물려받은 근본 땅을 시대가 거듭 변천해도 원래의 근본을 잃지 말고 영원히 보전하라고 했다.
총독부 내무부 장관에게 보고를 올린 박중양의 말을 빌리면, 이것들은 "이미 쓰러진 국가의 회복을 선동하고 배외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이었다.
강제병합 직후인 1910년 음력 8월 1일(양력 9월 4일), 나철은 교명을 대종교로 개칭했다. 열흘 뒤인 8월 10일에는 사신(四愼), 즉 네 가지 삼갈 일을 공포했다.
첫째 조목이 이것이다. "대종교는 시국에 무관하니 마음을 안정하고 천명을 따른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정교분리 선언이었다. 둘째 조목에서는 새로운 법, 곧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 이후 실시된 법을 준수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이것은 선언이었을 뿐이다. 오대종지포명서는 그 뒤에도 지방 교당에서 비밀리에 유포됐다. 총독부의 반응은 냉담했다. 대종교를 종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면 국내에서 합법적인 종교 활동이 불가능해진다. 대종교는 이 압박에 맞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1912년 4월 5일, 대종교총본사는 '삼일신고(三一神誥)'를 간행했다. 본문이 366자에 불과하다. 짧다. 그런데 그 안에 천관(天觀)·신관(神觀)·인간관·수행론이 모두 들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경전 출판이 아니었다. 자신이 체계를 갖춘 종교임을 증명해야 했던 상황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총독부 논리에 따르면 대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그러니 종교로 인정받으려면 신관과 인간관과 수행론을 갖춘 교리 체계를 눈으로 보여줘야 했다. '삼일신고'는 그 증거였다.
'삼일신고'는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천훈(天訓)'은 36자로 우주의 광대함을, '신훈(神訓)'은 51자로 삼신의 속성과 인간과의 관계를, '천궁훈(天宮訓)'은 40자로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경지를, '세계훈(世界訓)'은 72자로 우주와 지구의 탄생을 다룬다. 마지막 '진리훈(眞理訓)'은 167자로 전체에서 가장 길고, 대종교의 인간관과 수행관의 핵심이 담겨 있다.
서일(徐一)은 앞의 네 훈이 결국 '진리훈'으로 귀결된다고 봤다. 천(天)은 인간의 성(性)에, 신(神)은 영(靈)에, 천궁(天宮)은 뇌(腦)에, 세계(世界)는 신(身)에 대응한다. 결국 다섯 훈 모두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는 수행 이야기라는 것이다.
핵심 개념은 두 가지다.
삼신일체(三神一體)와 삼진귀일(三眞歸一).
전자는 환인·환웅·환검의 삼신이 하나임을 말하고, 후자는 진성(眞性)·진명(眞命)·진정(眞精)의 본성을 회복하여 일신(一神)으로 돌아간다는 수행의 목표를 가리킨다. 이 귀일의 과정이 성통공완(性通功完)이다.
성통(性通)은 자신의 참된 마음을 아는 것, 공완(功完)은 그것을 바탕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남을 위해 행하는 것이다.
성통은 개인의 내면이고, 공완은 사회적 실천이다.
이 둘이 하나로 묶인다는 게 대종교 교리의 핵심이다. 수행은 자기 혼자로 끝나지 않는다. 이웃과 공동체와 인류를 이롭게 해야 비로소 완성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이념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삼일신고'의 교리는 다른 종교와 의도적으로 교차점을 만든다.
'천훈'에서 리(理)가 일무(一無)에서 나온다는 것은 노자의 '유생어무(有生於無)'와 통하고, 만 가지 다른 것이 하나의 하늘에서 나왔다는 관점은 불교의 '월인천강(月印千江)'이나 '중용'의 세계관과 상통한다.
'신훈'에서 신이 인간의 머릿속에 내려와 항상 자리한다는 것은 유교의 본연지성(本然之性), 불교의 불성(佛性), 도교의 진원(眞元)과 통한다.
'세계훈'에서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것은 기독교의 천지창조론에 가깝다.
서일은 이것을 더 명확하게 정리했다. '진리훈'의 지감(止感)·조식(調息)·금촉(禁觸) 삼법 수행이 불교의 명심견성(明心見性), 도교의 양기(養氣), 유교의 수신(修身)과 각각 대응한다고 봤다.
공자·노자·석가·예수·마호메트는 다 별 사람이 아니라, 오직 그 마음을 수고롭게 하여 자기의 본 성품을 닦아서 먼저 깨달은 이들일 뿐이라고. 그러니 그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당연하고, 혹시라도 그들보다 나아갈 수 있다면 더 넓은 세상을 열면 된다는 것이다.
이 열린 종교관 때문에 기독교 신자였던 주시경이 제자들과 함께 대종교에 입교하기도 했다. 대종교는 다른 종교를 믿어도 입교를 허용했다. 삼신관과 성통공완, 홍익인간의 이념에 동조하면 충분했다.
서일은 이 세 가지 수행법이 서로 회통하지 못하는 것을 우려했지, 어느 하나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게 단순한 포용 전략이었을까. 아마 그보다는 현실 인식이었다. 제국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하나의 종교가 홀로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닫힌 논리로는 살아남기도 어렵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대종지는 1912년을 기점으로 내용이 바뀐다. 같은 해 9월 대종교본사에서 간행한 '대종교시교문(大倧敎施敎文)'을 보면 다섯 종지가 이렇게 달라져 있다.
경봉천신(敬奉天神), 성수영성(誠修靈性), 애합종족(愛合宗族), 정구이복(靜求利福), 근무산업(勤務産業).
신앙의 대상이 조상신에서 보편적인 천신으로 바뀌었다. 영성에 느끼고 통하는 '감통영성'이 정성껏 닦는다는 '성수영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정치적 구호의 냄새가 강했던 '안고기토'가 사라지고, 신앙을 통해 복리를 구하는 '정구이복'이 들어섰다. 총독부 압박에 대응한 변화였다.
그런데 이것을 후퇴로만 보면 단면을 놓친다. 오대종지가 종교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재편되면서, 대종교는 순수한 종교 교단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종교적 수행의 틀 안에서 공공성의 이념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민족주의의 날이 다듬어지면서 안쪽의 뼈대가 오히려 굵어진 셈이다.
1914년 7월 서일은 '오대종지강연'을 통해 이 다섯 종지의 내용을 풍부하게 채웠다.
그는 1916년 총본사 전강(典講)으로 전임한 뒤 1년에 걸쳐 '삼일신고'를 깊이 연구하고 나철의 조언을 받아 '도해삼일신고강의(圖解三一神誥講義)'를 완성했다.
여기에 '신리대전(神理大全)' 주석과 '회삼경(會三經)' 저술이 더해졌고, 계화(桂和)가 주석한 '신사기(神事記)' 까지 합쳐져 1917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책합부(四冊合附)'로 간행됐다. 대종교의 초기 교리가 이렇게 완성됐다.
서일의 오대종지 강연을 따라가면, 경봉천신이 단순한 신앙 의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천신은 대덕(大德)·대혜(大慧)·대력(大力)을 갖추고 세계를 주관하며 만물을 창조한 존재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인류의 시조이자 스승이자 임금이다. 그 삼위일체의 신이 사람으로 화하여 125년을 교화하고, 다시 93년을 임금으로 다스리다가 구월산에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니 하늘을 여신 10월 3일을 개천절로, 하늘로 올라가신 3월 15일을 어천절로 기념한다.
천신을 공경하는 마음은 선(善)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공공성의 심리적·이념적 기초가 된다. 보본(報本), 즉 근본에 감사하고 돌아보는 의식이 개인의 덕성 수양을 거쳐 사회적 실천으로 흘러나오는 구조다.
서일은 한울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안으로 불교 팔관재계를 원용한 팔관법도 제시했다. 살생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음란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말고, 높은 상에 앉아 거만히 굴지 말고, 보고 듣는 것을 혼자 즐기지 말라는 것이다. 팔관법의 틀을 빌렸지만 내용은 대종교의 수행론에 맞게 변용했다. 다른 종교를 이단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일은 우리 민족을 천신의 혈통 자손이며, 태백산 남북에 사는 7천만 명이 모두 형제자매라고 했다. 이 동족간의 사랑은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사랑의 마음이야말로 천지의 화기(和氣)이고 어진 마음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마음을 두어야 개인과 집안이 풍요롭고, 마을이 예의 있게 되며, 동족을 가까이 하여 나라가 부강해지고, 인류를 박애하여 온 세계가 하나로 돌아오게 된다고 역설했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랑의 구조다.
개인에서 집안으로, 집안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동족으로, 동족에서 인류 전체로 확대되는 동심원 구조다. 서일의 동족애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류애로 열려 있다. 단순한 민족주의나 제국주의와 성격이 전혀 다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제의 제국주의가 자기 민족의 이익을 위해 타자를 수단으로 삼는 논리라면, 서일의 애합종족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전 인류로 열리는 사랑의 논리다. '단군교오대종지포명서'에서는 사욕과 이해관계를 다투는 당시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인류가 함께 공영해야 한다는 논설을 폈다. 성통공완에서 공완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구체화한 것이 애합종족이었다.
서일은 종족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한 조건도 제시했다. 정성과 언행일치, 인내심, 관대한 도량. 정성이 없거나 언행이 엇나가거나 이름만 탐내고 공을 다투는 이는 종족을 사랑하지 못한다고 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수행이었다.
오대종지에서 가장 현실적인 항목이 근무산업(勤務産業)이다. 산업은 인류 생활에 직결된다. 몸과 숨을 보호하는 기관이다. 그러니 손발을 부지런히 놀려서, 자신의 삶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공동으로 이익이 되는 일에 몸과 숨을 돌보지 않아야 한다.
이 항목도 경봉천신의 보본(報本) 의식과 연결된다. 한배검께서 인간의 366사를 다스리고, 농사와 길삼, 질그릇 만드는 법을 가르쳐 백성을 살리셨으니, 우리도 그 은혜에 감사하며 부지런히 그 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에 성공하는 것도, 사농공상의 유통에 힘쓰는 것도 모두 한배검에 대한 보본의 대가라는 점이 강조됐다. 근무산업은 단순한 근면 덕목이 아니었다. 신앙 실천의 현실적 표현이었고, 공공성의 물질적 토대였다.
대종교도였던 박은식(朴殷植)의 시각도 오대종지의 공공성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1912년 만주에서 쓴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동양과 서양의 학자들이 모두 적자생존을 말하지만, 하늘의 도는 후하고 박하게 함의 차이가 없다. 그러니 도덕가는 만물일체의 인(仁)을 발휘하여 천하의 경쟁을 그치게 한다. 그것이 구세주의다. 다윈이 강권론을 제창한 이후 제국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게 됐지만,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평등주의가 부활할 시기가 멀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치를 가장 앞서 들 나라가 우리나라라는 것이다.
박은식의 이 역사관은 단순한 민족적 낙관이 아니었다. 제국주의의 폭력이 극에 달할수록 평등의 가치가 역사 속에서 반드시 살아 돌아온다는 확신이었다. 대종교의 공공성이 개인 수행에서 민족 공동체로, 다시 인류 전체로 열리는 구조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나철은 1916년 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삼신께 제천의식을 올리고 순명(殉命)했다. 무기를 들지 않았다.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지 않았다. 그는 종교를 했다. 그 종교가 청산리대첩의 기반이 됐다.
1920년 10월, 대부분 대종교인으로 구성된 독립군이 서일의 지휘 아래 김좌진·나중소·이범석 등의 통솔을 받아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 종교에서 파생된 교육운동이 만주 벌판에 학교를 세웠다. 무오독립선언(1919년 2월)에 서명한 39인도 대종교 인맥이 중심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대종교가 신앙과 실천을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통이 공완으로 이어지는 논리는 교리에 그치지 않았다. 사람을 움직이는 구조였다. 안으로는 참된 나를 찾기 위한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밖으로는 다른 종교와 연합해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을 헌신적으로 전개한 서일의 삶이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준다.
1949년 교육법에 홍익인간이 교육이념으로 명문화됐다. 대종교 지식인들이 정부 고위직에 대거 진출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런데 오늘날 학교에서 홍익인간이 어떤 구체적인 의미로 살아 있는지 묻는다면, 선뜻 답하기 어렵다.
뿌리가 잘렸기 때문이다. 홍익인간은 대종교의 오대종지와 성통공완의 교리에서 나왔다. 수행 없는 공익 활동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공동체 의식 없는 개인 수행이 어디에 도달하는지를 치열하게 물었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그 배경을 지우고 구호로만 남기면 공허해진다.
파편화된 개인주의와 무한경쟁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지금, 오대종지와 삼일신고가 던지는 질문은 백 년 전의 것이 아니다. 나를 먼저 통하게 하고, 그다음에 이웃을 이롭게 한다. 이 순서와 연결이 살아 있을 때만, 홍익인간은 다시 현재형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