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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가장 가까이 있는 일본 영토인 대마도(쓰시마) 는 중세 까지만 해도 왜구로서 쌀과 생활 필수품을 약탈하여 그들의 생활 터전을 만들며 살아가는 미개한 지역이었으나 오늘날은 일본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험한 산길에 터널을 뚫고 국도와 지방도가 섬을 종횡으로 연결하여 현대적 도시 형태를 갖추며 풍요로운 현대 사회로 발전하고 있읍니다.
우리나라와는 백제시대에 왕인박사가 방문하여 글을 전한바 있고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이종무 장군에게 정벌을 명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지리적으로 가깝고 계속적으로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런지 대마도 사람들은 일본 본토와는 달리 한국에 대한 친밀감을 갖고 있으며 그곳 주민들의 소박한 인정미가 어딘가 한국인과 공통점이 있는듯 생각 되었읍니다.
우리와의 긴 관계 속에서 생성된 여러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어서 우리가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문화유적을 답사하고 지키고 보존계승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 되었습니다.
조선국 역관일행 순난비
조선 19대 숙종 29년 조선 통신사 108명이 대마도 와니우라 항 착륙직전 갑자기 물어닥친 풍랑으로 애석하게도 전원이 사망한 바 그 사건을 애도하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 "를 한국이 멀리 보인다는 한국전망대 옆에 건립하였다.
그날 순직한 108명의 명단을 새겨 넣었으며 아직도 누군가가 이 비 앞에 꽃을 꽃아 놓고 있다 한다.
조선국 옹주 묘탑
임진왜란 당시 어느 일본 왜장이 조선국 제 14대 선조의 옹주를 대마도 우나쓰라 항구로 끌고가서 살았는데 한국이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고 하면서 별세 하였다고 하며, 이 묘탑은 1613년 우나쓰라 마을 뒷 산기슭에 세웨 졌었으나 그후 여러차례 옮겨저 현재의 위치에 재건하고 석비를 건립하였다고 함.
백제국 왕인박사 현창비
와니우라의 해변, 한국이 바라보이는 산 기슭에 백제 왕인 박사의 공적을 기리는 현창비가 건립되어 있다.
일본의 고서기에 의하면 백제국 왕인 박사가 일본의 요청으로 천자문 1권과 논어 10권을 가지고 건너가 한문과 학술을 전하고 일본의 학문적 조상이 되었다고 하며
왕인박사가 도일 하기 전의 유적들은 왕인 박사의 고향인 전남 영암의 왕인박사 기념관에 남아 있다고 함.
답사중에 만난 대마도 주민의 모습
대마도의 전형적인 옛 마을 형태와 가옥
운하를 만들어 조운을 편리하게 하였다고 함
대마도에 있는 4군데 해신 신사중 하나인 와다쓰미 신사
충숙공 이예 공적비가 있는 원통사 전경
원통사에 모셔저 있는 고려 금동불
대마도에서 자주 볼수 있는 공동묘지 전경 (일종의 납골당 처럼 보였음)
조선 통신사들을 환승 시켜주던 조그만 포구 전경
저녁식사중 주인 마담의 대마도 춤 사위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는 대마도 도주 종무지공과 결혼하였으나 양국과의 관계만큼이나 복잡다단했고 행복하지 못했다 함.
이 덕혜옹주 결혼과 대마도 방문을 봉축하는 봉축비는 덕혜옹주가 대마도 도주와 결혼한 후 1931년 11월 10일에 대마도를 방문했을 당시 대마도 거주 한인들이 건립했다함.
아메노 모리호시 라는 친한파 일본 외교관의 유명한 말 " 교류는 성심과 신의로써 행해야 한다" 를 기리기 위해 세운 현창비
조선국 통신사 일행들의 안녕과 공적을 기리는 일종의 위령/공적비
구한말 고종때 정치가로서 배일파의 거두인 최익현 선생이 불모로 잡혀와 끝내 숨을 거두신 뜻을 기리기 위한 순국비.
이 비를 세우는데 큰 역활을 하신 전영호 박사님이 해설을 하고 계신다.
최익현선생의 유체가 조국으로 운송되기 전 며칠간 머믈렀고 그 인연으로 순국비가 그 견내에 세워진 수선사 전경
도노구비 고분군중 하나인 3호관
3장의 평평한 돌로 관의 뚜거을 덮었는데 이러한 예는 한국에서도 출토되고 있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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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매년 꼭 가봐야지 하면서 못가는 곳 사할린과 쓰시마 인데 간접으로나마 접하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는 꼭 가봐야지 ...
20명만 되면 정영호 박사님을 모실수 있답니다. 내년에 한번 추진해 보시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