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모- 땃사 바가와또 –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3회)
Namo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청정도론 3권
제21장 도닦음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
paṭipadāñāṇadassanavisuddhiniddeso
세 가지 해탈의 관문p313~
tividhavimokkhamukha
이 지혜가 [무상, 고, 무아의] 세 가지 가운데 하나의 관찰로 일어날 때 세 가지 기능(根)들 가운데 하나의 지배력으로써 세 가지 해탈의 관문이 된다.
67. 세 가지 관찰을 해탈의 관문(vimokkha-mukha)들이라 부른다. 이처럼 말씀하셨다. “이 세 가지 해탈의 관문들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인도한다. ① 모든 상카라들이 한정되어있고 둘러싸여있는 것으로 보게 하고, 마음이 표상이 없는(無相) 경지(dhātu, 界)로 들어가게 한다. ② 모든 상카라들에 대해 마노를 분발시키고, 마음이 원함이 없는(無願) 경지(界)로 들어가게 한다. ③ 모든 법들을 타인으로 보게 하고, 마음이 공(空)한 경지(界)로 들어가게 한다. 이 세 가지 해탈의 관문들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인도한다.(Ps.i.48)”
68. 한정되어있고 둘러싸여있는 것으로: 일어나고 사라짐으로 한정되어있고 일어나고 사라짐에 의해 둘러싸여있다. 무상에 대한 관찰은 ‘상카라들이 일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정짓고 그들의 행처를 찾아보면 그들은 결코 멸을 넘어가지 못한다. ‘그들은 바로 여기서 사라지는구나’라고 그들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의해서] 둘러싸여있는 것으로 본다. 마노를 분발시키고: 마음이 절박감을 내게 하고 괴로움을 관찰함으로써 마음은 상카라들에 대해 분발한다. 타인으로 보게 하고: ‘나’가 아니고, ‘내 것’이 아니라고 이와 같이 자아가 없는 것으로 보게 한다.
69. 이처럼 이 세 가지 구절은 무상에 대한 관찰 등으로 설하셨다고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이렇게 설하셨다. “무상이라고 [상카라들을] 마음에 잡도리할 때 상카라들은 부서짐으로 나타난다.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상카라들은 공포로 나타난다.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상카라들은 공으로 나타난다.(Ps.ii.48)”
70. 그러면 이런 관찰들은 어떤 해탈의 관문들이 되는가? 그들은 표상 없음, 원함 없음, 공함이라는 세 가지 해탈의 관문이 된다.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① 확신(信解, adhimokkha)이 큰 자는 무상(無常)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표상 없는(無相) 해탈을 얻는다. ②편안함(輕安,paspassa)이 큰 자는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원함 없는(無願) 해탈을 얻는다. ③ 영지(靈知, veda)가 큰 자는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공한 해탈을 얻는다.(Ps.ii.58)”
71. 여기서 표상이 없는 해탈이란 표상이 없는 형태로 열반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성스러운 도다. 표상이 없는 경지(요소, 界, dhātu)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 성스러운 도는 표상이 없고, 번뇌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해탈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원함이 없는 형태로 열반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성스러운 도가] 원함 없는 [해탈이고], 공한 형태로 열반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성스러운 도가] 공한 [해탈이다]라고 알아야 한다.
72 그런데 논장(Abhidhamma)에서는 ‘사견을 버리고서 초지(初地,paṭhama-bhūmi=예류도)를 얻기 위하여, 세간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인도하고 그것의 소멸에 이르는 출세간 禪을 닦을 때 감각적 욕망을 멀리 떨쳐버린 뒤 원함이 없는 초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 공한 초선을 구족하여 머문다.(Dhs.71;70)”라고 오직 두 가지 해탈을 설하셨다. 이것은 아무런 방편 없이 위빳사나가 [도에] 이르는 [방법에] 관해서 설하신 것이다.
73. 그러나 『무애해도』에서는 위빳사나의 지혜를 두고 ① “무상이라고 관찰하는 지혜는 항상하다는 고집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공한 해탈이다. 괴로움으로 관찰하는 지혜는 행복이라는 고집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공한 해탈이다. 무아라고 관찰하는 지혜는 자아라는 고집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공한 해탈이다.(Ps.ii.67)”라고 고집을 벗어버림으로써 공한 해탈을 설하셨다.
② 그리고 “무상이라고 관찰하는 지혜는 항상하다는 표상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표상 없는 해탈이다. 괴로움이라고 관찰하는 지혜는 행복이라는 표상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표상 없는 해탈이다. 무아라고 관찰하는 지혜는 자아라는 표상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표상 없는 해탈이다.(Ps.ii.68)”라고 표상을 벗어버림으로써 표상 없는 해탈을 설하셨다.
③ 그리고 “무상이라고 관찰하는 지혜는 영원하다는 희망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원함 없는 해탈이다. 괴로움이라고 관찰하는 지혜는 행복이라는 희망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원함 없는 해탈이다. 무아라고 관찰하는 지혜는 자아라는 희망을 벗어버리기 때문에 원함 없는 해탈이다.(Ps.ii.68)”라고 희망(원함)을 벗어버림으로써 원함 없는 해탈을 설하셨다.
비록 이렇게 설하셨지만 위빳사나의 지혜가 상카라들의 표상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표상이 없음을 설한 것은 아니고 공과 원함 없음은 방편 없이 직접적으로 설하신 것이다. 위빳사나의 지혜가 [도에] 이르는 [방법에] 따라, 성스러운 도가 나타나는 순간에 해탈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원함 없는 해탈과 공한 해탈 두 가지만 [아비담마에서]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이것이 우선 해탈에 대한 설명이다.
붓다사 사낭 짜랑 띳타뚜(3회)
(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불법이라 불리우는 법과율의 가르침이
오랜세월 훼손없이 존속하여 머무소서.
Sādhu! Sādhu! Sādhu!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