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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구두에 새하얀 양복, 새빨간 셔츠, 자주·파란색의 원석이 붙은 주먹만한 크기의 목걸이…. 아흔두 살의 김흥수 화백은 여전히 멋졌다. “하얀색 패션은 내가 원조”라며 ‘김흥수 패션’에 행커칩까지 꽂은 노화백은 예상했던 것보다 건강해보였다.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긴 했지만 팽팽한 피부며 힘 있는 목소리는 얼마 전 몸이 안 좋아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는 말이 안 믿겨졌다. ‘한국의 피카소’ ‘화단의 이단아’ ‘타고난 정력가’ 등 무수한 수식어를 몰고 다니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국 화단의 거목 앞에서는 세월도 서두르지 않은 듯했다.
잦은 병치레로 최근 몇 년 새 외부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던 노화백이 모처럼 세상 외출을 나섰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갤러리 에프엔아트(fnart)가 개관 기념으로 9월 10일부터 10월 16일까지 김흥수 화백의 초대전을 마련한 것. 전시 오픈에 앞서 8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김흥수미술관에서 김 화백을 만났다. 오후 5시부터 시작된 인터뷰는 건강상 오래 앉아있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김 화백의 옆에는 마흔세 살 연하의 제자이자 부인인 장수현(49·김흥수미술관 관장)씨가 꼭 붙어 있었다. 1992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결혼을 한 이후 김 화백의 그림자로 살았던 장 관장은 지난해 큰일을 겪었다. 난소암에 걸려 큰 수술을 했고 몇 달간의 항암치료를 견뎌야 했다. 2년 전 김 화백이 폐렴으로 쓰러진 후 건강을 미처 회복하기도 전이었다. 그동안 하던 일은 모두 ‘올 스톱’이 됐다.
올 들어 조금씩 몸을 추스른 장 관장은 최근 들어서야 미뤄둔 미술관 일 등을 챙기고 나설 만큼 여유를 찾았다. 장 관장은 “전시회 때문에 신경을 썼더니 몸이 안 좋아 얼굴이 부었다”면서 사진 찍는 것을 극구 거절했다. 말과는 달리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장 관장은 나이보다 어려 보였고 미모도 여전했다. 장 관장은 인터뷰 내내 김 화백의 말에 맞춰 자료를 찾아와 보여주고 김 화백이 기억을 더듬을 땐 말을 거들기도 했다. “차 좀 드시면서 쉬었다 하시라”는 장 관장의 말도 소용없이 김 화백은 기억을 끄집어내고 설명하느라 바빴다.
김 화백은 보청기를 끼고도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해야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가끔 질문과 대답이 어긋나고 끊어진 기억 때문에 침묵이 끼긴 했지만 김 화백은 오랜만의 인터뷰에 신이 난 듯했다. “목걸이가 멋지다”는 인사말에 “유명한 공예가 선생님의 작품”이라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죽을 지경이 돼도 아이들 가르치고 있다”
지난 7월 예술가들의 ‘명예의 전당’인 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이 된 김 화백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며 소감을 물어봤다. “뭐 어차피 될 것…, 무덤덤해.” 김 화백의 대답은 그야말로 무덤덤했다. 김 화백은 그동안 여러 차례 예술원 회원 심사에서 떨어졌다. 예술원 입회는 기존 회원이 신입회원을 심사하는 방식이다. 사실 김 화백은 작품으로보다는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했다. 두 번의 이혼, 제자와의 결혼, 누드화 등 ‘여성편력의 대가’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하모니즘(음양조형주의)의 대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예술원 회원이 되기 위한 자격이 넘치는 데도 불구하고 김 화백의 예술원 입회가 번번이 좌절됐던 것도 도덕적 잣대가 적용됐기 때문이다.
회원 중 한 명이 김 화백의 사생활을 이유로 “그 양반이 들어오면 내가 나가겠다”며 반대를 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예술원 회원이 늦게 된 것이 서운하지 않냐”고 물었다. 김 화백은 “피차 오해도 있고 누가 한쪽에서 잘못했다고 할 수 없다”면서 “지나간 얘기는 안하는 것이 좋겠다”며 입을 닫았다.
“요즘에도 그림을 계속 그리느냐”고 물었다. 김 화백은 벽에 붙어있는 ‘백두산’이란 작품을 가리키며 “작년에 작업한 유화작품”이라며 “10호 이상 작품은 힘들다. 유화보다 드로잉을 하는데 요즘도 누드를 그린다”고 말했다. 누드화 이야기가 나오자 김 화백은 그가 10년째 공을 들이고 있는 ‘미술영재교실’의 아이들 이야기를 꺼냈다. “누드 드로잉을 아이들에게 시켜보니까 발전이 빠르다. 중학생 애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그려오는 것을 보면 놀랍다. 요령을 가르치면 그만큼 쉬운데 그걸 나는 혼자서 개척하려고 하니까 어려웠다.”
미술영재교실은 김 화백이 1999년부터 열정을 바친 일이다. 예술의전당 기획으로 시작했던 것을 김흥수미술관으로 장소를 옮겨 지금껏 이어왔다. 장 관장은 “그동안 ‘미술영재교실’을 거쳐 간 어린이가 1000명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화백은 요즘 미술교육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미술영재교실’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높아졌다. “감각을 살려주는 교육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미술교육은 감각과는 동떨어진 교육을 하고 있다. 머릿속에서 생각을 나오게 해야 하는데 선생님들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면서 간접적으로 그려주는 교육을 하니까 안 되는 거다. 우리 아이들은 머릿속에서 생각을 짜내는 그림을 하니까 스타일이 다르다. 그런데 잘될 만하면 자꾸 아이들을 뽑아간다. 어느 날 안 나와서 전화해보면 선생님이 못 가게 했다는 거다. 거기 가면 그림 망친다고.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남은 아이들은 그 고비를 넘긴 거다. 기가 막히게 잘 그리는 아이들이 많다.” 계속해서 ‘미술영재교실’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김 화백의 말을 끊기가 쉽지 않았다. 김 화백은 “병이 나서 죽을 지경인데도 나가서 가르친다”고 말했다.
지난 7월엔 제주도 저지리 제주현대미술관에서 김 화백과 영재교실 출신의 어린 제자들이 함께하는 전시가 열리기도 했다. 지난 10년을 결산하는 전시였다. ‘아름다운 동행’전이라는 제목으로 김 화백, 장 관장, 제자 30여명의 작품이 나란히 걸려 세대를 초월한 ‘하모니즘’을 연출했다. 김 화백은 전시를 위해 제주도까지 가는 열정을 보였다. 아흔이 넘은 노화백에게는 역시 무리한 외출이었다. 제주도에 다녀온 후 김 화백은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장 관장은 “나이가 나이인지라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면서 “몇 년 전에는 쓰러져도 회복이 빨랐는데 이젠 기초체력이 없어서인지 한번 쓰러지면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아이들 이야기를 하려는 김 화백을 장 관장이 막았다. “이번 전시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서 겨우 주제를 돌렸다. 이번 전시에 나오는 작품 6점은 김 화백의 미술인생에서 대단히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김 화백의 ‘하모니즘’을 완성하게 만든 1960~1970년대의 모자이크 작품과 대형 추상작품 등이 선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500호 크기로 3m50㎝가 넘는 대작 ‘광상곡’(1973년작)은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에 잠시 얼굴을 내민 이후 30여년 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이다.
‘하모니즘’은 내 평생 작업의 이유
김 화백은 새로운 회화형식인 ‘하모니즘’의 창시자다. 김 화백은 1977년 미국 워싱턴DC ‘IMF 미술관’에서 반쪽은 구상, 반쪽은 추상으로 된 작품을 들고 ‘하모니즘’을 선언한 이후 세계 화단에서 “현대미술의 새 장을 열었다” “서양화가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김흥수가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화백에 대한 세계화단의 평가에 비하면 국내의 평가는 사실 인색하기 그지없었다.
김 화백이 거의 평생을 바친 ‘하모니즘’은 어떻게 시작이 됐을까. 김 화백은 ‘하모니즘’을 생각한 것이 한국전쟁 와중이라고 말했다. “권옥연 등 화가 몇 명이 다방에 앉아서 신문을 보다가 ‘프랑스 파리에서 추상화가 시작됐다’는 기사를 읽고 ‘우리도 추상을 시작하자’는 말을 했다. 내가 반대하면서 ‘남의 것 모방하지 말고 우리 것을 하자’고 했다. 그런데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김 화백은 중간 중간 말을 멈추고 “미안합니다. 그동안 인터뷰를 안 했더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기도 하고 “아! 이제 생각이 났다”고도 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김 화백의 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리얼리즘은 객관을 객관적으로, 인상파는 객관을 주관적으로, 추상은 주관을 주관적으로 그린 것이다. 그런데 주관과 객관을 합친 것이 없었다. 모델의 정신세계까지 그리려면 객관과 주관을 함께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그리고자 한 것이 하모니즘이다.”
이 같은 하모니즘에 대한 개념을 생각해낸 것이 1953년이었다. 하모니즘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 1977년이니 하모니즘을 완성하기까지 2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모자이크 작품 ‘강강수월래’(1966년)와 추상시대의 마지막 작품 ‘광상곡’(1973년)은 하모니즘의 단초를 제공한 작품이다. 이 시기의 작품도 많지 않다. 김 화백은 “예술은 창조다. 자꾸 새로운 것을 그려야 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다 보니 비슷한 작품이 많지 않다”며 “그 정신이 나를 살린 것”이라고 했다.
국내에서 그의 누드화를 “풍기문란”이라고 비난하고, 추상과 구상이 함께 그려진 하모니즘에 대해서는 “차라리 반쪽을 잘라서 팔아라”면서 악평을 쏟아낼 때 세계 미술계는 ‘한국인 화가 김흥수’에 환호를 보냈다. 1990년 파리 뤽상부르 미술관에서 있었던 김 화백의 초대전 방명록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한국은 정말 운이 좋습니다. 20세기 말의 그림의 천재가 있으니….”
“나에게 누드는 평화 그 자체”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김 화백이 줄기차게 누드화를 그린 이유는 뭘까. “1954년 반도호텔에 벽화를 그려주고 받은 돈 3000달러를 들고 프랑스 파리로 갔다.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한국과 달리 파리는 너무 평화로웠다. 아카데미에 갔더니 누드를 그리고 있었다. 그 순간 ‘이것이 바로 평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드에서 평화를 찾자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누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내게 누드는 평화 그 자체다.”
요즘에도 누드 드로잉을 한다는 김 화백에게 “부인 드로잉도 해주느냐”고 물어보니 고개를 저었다. “부인이 아직도 예쁘냐”고 물었다.
김 화백은 장 관장을 한번 쳐다보더니 “부인이 아니야”라고 대답했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 부인이 아니다? 무슨 일 있나? 사이가 안 좋은가?’ 짧은 순간에 머릿속에선 수많은 질문들이 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었다.
김 화백은 뜸을 들인 후 “부인이 아니고 동반자”라고 말했다. 김 화백이 부인을 굳이 ‘동반자’라고 하는 이유는 뭘까. “하모니즘을 들고 국내로 들어오니 ‘저것도 작품이냐’면서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림도 안 팔리고 박해가 많았다. 그때 저 사람이 처음으로 내 작품을 칭찬해줬다. 작가적으로 작품적으로 날 이해하고 격려해주고 힘을 준 사람이다. 그러니까 동반자라는 것이다. 예쁘고 말고를 떠나서 절실한 것이 있다.”
“부인보다 더 절실한… 나의 동반자”
김 화백과 장 관장이 만난 것은 1983년이었다. 김 화백은 덕성여대 미대 교수였다. 정년을 앞두고 있었다. 장 관장은 삼수 끝에 미대에 들어온 신입생이었다. 교수와 제자가 나이 차를 극복하고 사랑하는 연인이 되기까진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8년을 함께 살다 1992년 결혼했다. 세상의 수군거림에 대해 김 화백은 신문 지면 등을 통해 당당하게 외쳤다. “내 예술의 모체는 인간이다. 그중에서도 여성이다. 아름다운 젊은 여성. 만약 내가 한 사람만 아름답게 생각하고 사랑했다면 나는 화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술과 도덕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해도 나는 내 방식의 사랑에 충실했다.”
김 화백은 “이해관계를 떠나 장 관장은 모든 것을 나한테 바쳤다. 하모니즘을 알리고 보호해 주는 데 힘을 쏟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를 떠나서 자기 일을 했다면 큰 화가가 됐을 것이다. 그 길을 버리고 자기 청춘을, 일생을 바치다시피 한 것이다. 그것을 내가 저버릴 수 없다”고 말하고 “나 때문에 장 관장이 자기 자신을 망친 것이다. 이젠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 사생활에 대해서는 간섭을 안 한다”고 덧붙였다. 장 관장이 “몸이 아파서 사생활 가질 여유도 없는데 무슨…”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장 관장은 “사실 암수술 후 선생님 병수발 드는 것에서 조금 자유로워지긴 했다”고 했다. 대신 장 관장의 여동생이 김 화백의 곁을 줄곧 지키고 있다.
장 관장은 “할 일이 많다”면서 “김흥수미술관을 사립미술관으로 등록하는 일이 그중 가장 우선”이라고 말했다. 김흥수미술관은 2000년 첫 삽을 뜬 후 어지간히 속을 썩였단다. 돈도 문제였지만 주민들이 “조망권을 해친다”며 동네 입구에 ‘미술관이 웬말이냐’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나서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우여곡절 끝에 2002년 완공한 미술관은 1년도 안돼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 그동안 ‘미술영재교실’로 사용한 것 외엔 방치되다시피 했다. 국립미술관으로 지정받고 싶었지만 법에 묶여 어려웠다.
130여 작품으로 일단 사립미술관으로 등록할 계획이다. 장 관장은 “재작년엔 선생님이 폐렴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작년엔 내가 수술받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마무리짓고 싶다”고 했다.
“우리나라 미술교육 두고 볼 수 없다”
김 화백은 “‘인타뷰’를 오랜만에 해서 생각이 잘 안 났는데 이제 기억이 난다” 면서 “한 번 더 ‘인타뷰’를 하면 잘할 수 있겠다”고 했다. ‘생각이 잘 안 난다’고 했지만 김 화백의 기억은 비교적 또렷했다. 50년도 넘은 이야기인데도 연도며 사람 이름이며 줄줄이 꿰고 있었다. 김 화백 앞에 놓인 커피는 결국 한 모금도 입을 대지 않은 채 차갑게 식어 있었다. 2시간 가까이 줄곧 이야기를 쏟아내는 김 화백에게 차를 권할 틈이 없었다.
김 화백은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말도 많은 듯했다. “미술영재교실도 계속하고 싶다”면서 “우리나라 미술 교육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다”고 했다. 생각보다 인터뷰가 길어져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 취재진에게 김 화백은 “고기 먹고 가라”면서 저녁 먹는 것까지 챙기고 나섰다. 다음 일정이 바쁜 탓에 “그러겠다”고 대답만 하고 밖으로 나와 차를 출발하려던 순간이었다. 어느새 2층 난간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김 화백이 “왜 밥먹으러 안 가느냐”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김 화백을 만나기 전에는 ‘아흔두 살 노화백의 마지막 전시’에 맞춰 기사를 쓰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기사의 제목을 바꿔야 했다. ‘아흔두 살 노화백의 누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