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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꽃지기 원문보기 글쓴이: 양산박
거리 15 km
소요 시간 6h 21m 32s
이동 시간 5h 32m 37s
휴식 시간 48m 55s
평균 속도 2.7 km/h
최고점 857 m
총 획득고도 697 m
난이도 보통
백두대간 (白頭大幹)
박상복
머리에 희끗희끗 눈발 날릴 때
억눌렸던 마음 새장에서 꺼내어
푸른 하늘로 힘껏 날려보낸다
시간과 일에 쫒겨 갇혀 살다가
어느덧 인생 오십줄에 들었다
팔다리 느낌이 예전과 다르다
마음속 상상으로 커다란 날개달고
온세상 구석구석 날아다니다
현실속 작은 마을 갈재에 앉았다
검은머리 한올 한올 백두가 되고
온몸의 진액이 빠질때까지
지리에서 백두까지 걸어가리라
길가에 난 작은 꽃송이
발길에 차이는 거친 돌덩이
세월을 못이겨 쓰러진 고목까지
백두대간 산책길에 만나는 이들
내맘속에 돌돌말아 숨겨뒀다가
한올 한올 꺼내어 느껴봐야지
이세상 소풍이 끝나는 날에
지난 2년동안 산을 다니며 느낀건 우리의 삶의 터전이 산이라는 것이었다. 천만명이 살아가는 거대한 도시 서울에도 그리고 작은 섬에서도 사람들은 늘 산을 이야기한다. 우리나라 전체 면적중에서 약 70 %가 산이라고 하니 우리는 어디에 있으나 늘 산을 보면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산은 항상 가까이 가는 것을 허용했다. 산에서 놀고 또 죽으면 산에 묻혔다.
그런 산이기에 우리는 좋은일 궂은일 있을때마다 산을 찾는다. 친구들과 소풍도 산으로 가고 마음이 울적할때도 산으로 간다. 요즘에는 직장에서 퇴직한 사람이 집에는 알리지 못하고 출근복장으로 집을 나와서는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근교의 산을 찾아 다니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만큼 산은 우리 한국인에게는 마음의 안식처 역할을 해준다.
새벽 5시 50분 집을 나선다
백두대간을 걷는 것은 등산하는 사람들의 로망이 되었다. 그냥 좋아하는 산을 가면 되는거지 뭐하러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면서 100대 명산이니 백두대간이니 다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다가도 더 늙기 전에 꼭 가보고 싶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런 현상에는 우리나라 아웃도어 용품업체와 산악회 운영하는 사람들의 마케팅의 영향도 무시못하겠지만 그 기저에는 위에 얘기한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의 산을 경외시하는 DNA의 영향이 제일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나도 마음 한켠에는 늘 직장을 그만두면 훌훌털고 배낭을 챙겨 산을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멋진 바위와 나무와 하늘이 어우러진 산길을 걷다가 해가 질녘이면 서산으로 물드는 노을을 보고 밤이면 하늘 가득 쏱아지는 별을 바라보면서 잠이 들고 또 아침이면 동쪽 산너머로 올라오는 영롱한 해돋이를 보면서 커피를 마시는 그런 일상을 꿈꾸었었다. 날이 궂어 해가 안뜨는 날이면 고을마다 가득한 운해가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주고 사시 사철 색다른 빛깔로 눈부시게 변모하는 산, 그런 산을 보면서 살것이라고 꿈꾸었었다. 그 뒤에 늘 따라다니는 단서는 아쉽게도 ‘직장을 그만두면’ 이었지만.
사당역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직장을 그만두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 2년동안 주말마다 산하고 친해졌다. 늘 산자락까지만 가까이 오기를 허락하던 산이 허리까지 그리고 어깨에서 마침내 머리까지 허용한다. 오며 가며 만나는 산꾼들의 얼굴 표정이 보살님같고 큰스님같다. 그들은 어느새 매연으로 찌든 얼굴을 깨끗이 씻어내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여유로운 웃음이 묻어나온다. 힘들게 산비탈을 오를때면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도 행복한 미소가 환하게 퍼진다. 그렇게 산하고 친해지면서 나도 백두대간을 걸어볼 수 있을거라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관촌 휴게소가 아니라 관촌 주차장이라 써 있다.
요즘들어 남북관계가 심상치 않다. 지지난 정부때까지 두번이나 남북정상회담을 하면서 금강산 관광이니 개성공단 건설과 남북 이산가족 상봉 등 제법 긁직한 진전을 보이던 남북관계가 공교롭게도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취임후부터 우려하던 일이 마침내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중이던 박왕자라는 주부가 북한군 초병에게 오인사살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남한정부는 북한에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촉구하고 북한은 단순사고로 치부하면서 남북관계는 급랭해졌고, 2010년 3월 서해바다에서 한미 연합훈련중이던 우리 해군함인 천안함이 두동강나면서 40여명의 젊은 장병들이 수장되는 소위 천안함사건에 이어 연평도 포격사건 등 일련의 사건으로 남과 북은 부부싸움끝에 헤어진 부부관계보다도 더욱 더 냉랭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동안 북한은 김정일이 사망하고 그의 젊은 아들 김정은으로 세습되면서 북한 내부결속을 위해 대외적으로는 살벌할 정도로 공격적인 태세를 취하였다. 그 일환으로 핵무기 개발과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에 치중하였는데 그 결과 자타가 공인해야 할 만큼의 성과를 거두었다. 다만, 그렇게 무기개발에 치중하다보니 반대파는 숙청하면서 더욱 독재자의 이미지가 견고해지고 그 인민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대외적으로는 고립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것이 남북간 관계에도 심한 영향을 미치면서 남북관계는 더 이상 당사자가 주도권을 갖고 풀어나가기에는 불가능한 즉 완전히 미국과 중국을 위시로 한 대리인들의 샅바싸움으로 전개되었다. 미국은 남한에 북한의 미사일을 저지할 수 있는 고고도방어미사일 ( THAAD )을 설치하였고, 중국은 그 싸드가 자국의 방어체계를 약화시킨다면서 설치계획 철회를 주장하고 그 압박 수단으로 단체관광객의 비자발급 중지, 사드설치 부지를 제공한 롯데에 대한 불매운동 전개 등 다각적인 조치를 취하면서 한국정부를 압박하였다. 그런 와중에 박근혜가 최순실 등 비선실세 정치로 인해 파면당하고 갓태어난 문재인 정부는 이런 거대한 고래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질식사할 정도로 극심한 압박을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두 거대 이해당사국 뿐만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유럽연합 등 두눈 부릅뜨고 간섭할 기회만 엿복 있는 열강들과의 관계를 슬기롭게 개선하고 마침내 평창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의 가능성이 가시화되는 큰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이렇게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가는 남북관계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소소하게 몇 가지 기대를 해본다. 큰틀에서 보자면 남북간에 긴장이 해소되고, 더불어 이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산가족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고, 남한의 자본과 기술력 그리고 북한의 저렴하면서도 숙련된 노동력을 활용할 산업모델의 실현 등이 있겠으나, 내 개인적으로는 북한에 있는 산을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우선 금강산과 묘향산 등 일부 제한된 범위내에서 여행이 허용되고 더 나아가 휴전선에서 끊긴 백두대간의 줄기가 이어져서 지금까지는 진부령 (진고개)에서 해단식을 갖고 아쉬워하는 발걸음이 거침없이 북쪽으로 이어져 백두산천지에서 물을 마시며 우리의 강산을 노래할 그런 날이 오기를 은근히 기대해본다.
나는 이런 꿈을 꾸면서 백두대간의 산책길에 오른다.
전라남도 남원시 노치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원거리 산행하는 날에는 늘 새벽에 잠을 깨야 한다. 5시에 알람을 맞춰놔도 4시 반이면 일어나게 된다. 이것 저것 챙겨서 7시에 사당에서 떠나는 차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6시전에 집을 나선다. 경칩이 지났지만 새벽 6시에 사위는 그저 으스름 가로등으로 조용하다. 가끔씩 헤드라이트를 밀면서 지나가는 빈택시들이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알려준다. 마을버스도 지하철도 이른시간에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다.
버스탑승장소인 사당역 6번출구에는 이미 여러 산악회버스가 시동을 걸어둔채 산꾼들을 태우고 떠날준비를 하고 있다. 내가 탈 버스가 어디에 정차하는지 회원들간 연락을 취해서 아웃백 레스토랑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알고보니 그동안 이 식당이 문을 닫고 배나무골 오리집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서성이던 자유인산악회 회원들이 서로 눈치로 알아차리고 모여들었다. 이미 날이 훤히 밝아진 도로가 분주해지고 7시가 조금 넘어 “백두대간 22기”라고 LED 전광판을 켜고 우리를 싣고 갈 버스가 미끄러지듯 달려온다.
마을 전체가 마치 백두대간길의 성지처럼 잘 꾸며져 있다.
신갈에서 몇 명을 더 태우고 기흥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하고 고속도로를 내달리는 차안에서 한문희 총대장의 인사말과 백두대간의 의의에 대해 설명하는 소리가 귓가로 흘러지나간다. 눈을 감았으나 잠은 오지 않는다. 백두대간을 20회 이상 탄 자칭 백두대간의 전설이라고 자랑하는 총대장의 이야기가 조금 무겁게 들려온다. 이제 대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20번 이상 대간을 타고 정맥이니 기맥이니 하면서 우리를 주눅들게 만든다.
이번에 우리가 시작하는 22기 백두대간팀은 전구간을 50개로 나누어 3월 11일에 고남산구간을 시작하여 2019년 12월 15일 마산봉으로 대표되는 진부령고개에서 끝을 맺는다 한다. 그전에는 대부분의 구간을 무박으로 진행하여 36회에 마쳤다고 한다.
늙은 느티마무 아래 정자가 있고 그 옆에는 백두대간과 정맥을 표시한 한반도 지도 조형물이 있다.
이런 저런 얘기로 지루할 새 없이 달리는 버스는 남원에 거의 다 가서 순천완도고속도로 임시 휴게소격인 관촌주차장에서 잠시 멈췄다가 출발 4시간만인 11시가 다 되어 산행들머리인 노치마을에 도착했다. 목적지가 가까워오면서 길가 산의 풍경이 특이할 정도로 소나무가 많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 지름이 한뼘 반쯤은 되어보이는 소나무가 경사가 급한 산에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렇게 햇볕이 들지 않을 만큼 조밀하게 자라면 다른 나무는 그 틈에서 자라날 수 없다. 설사 한두그루 참나무가 나더라도 제대로 크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얼마전에 벌목을 했는지 도로에서 좀 떨어져 있는 산의 경사면에는 베어져 없어진 소나무대신 참나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극심한 생존경쟁의 자리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한여름이면 좋은 그늘로 수많은 산꾼들과 마을 주민을 보듬어줄 만큼 큼직한 품을 안고 있다.
들머리인 노치(蘆峙)마을은 예전에는 갈재라고 불리었다 한다. 갈대가 자라는 고개라는 뜻이다. 아마 이것도 일제가 우리땅을 침범하고 토지정리할 때 한글대신 한자로 바꾸면서 생겨난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곳에는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유일한 마을이라는 안내문과 백두대간 지도가 새겨진 돌이 세워져 있다. 집마당을 빗자루로 쓸고 있는 촌로가 웃으면서 “오늘도 수백명이 지나갔다”면서 웃음을 건네는 모습이 정다워 보인다. 백두대간이 시작되는 마을 갈재마을 주민들은 마치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것처럼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고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소중한 손님처럼 대하는 순박한 인간애도 느껴진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수없이 찾아드는 사람들을 귀챦아 할텐데 이마을 뿐만 아니라 산행도중 여러 차례 지나치는 마을에서 스치듯 만난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친절하고 웃는 낯이다.
노치샘 - 옛날에는 마을 공동우물로 쓰였을테고 지나가는 나그네의 목을 축여주었을 정겨운 샘물이다.
갈재마을 뒷동산에 대여섯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잎은 독야청청 그 푸르기가 비할데 없고 그 아래 굵은 가지 얼기설기 얽혀있는 모습이 마치 하늘을 날며 놀고 있는 용트림같다. 아름드리 줄기는 수백년동안 마을을 지켜보면서 크고 작은 온갖 이야기를 들었으면서 앞으로 또 수백년을 서서 마을을 지켜줄 넉넉한 마음을 품은 할아버지 같다. 우리는 할아버지 같은 당산소나무 앞에서 단체로 사진을 찍고 공식적인 백두대간 산책길의 첫걸음을 내딪는다.
첫회의 산행코스는 갈재에서 시작하여 수정봉을 넘고 여원재에서 도로를 건너 마을을 지났다. 고남산을 넘어 통신중계탑앞에서 다 함께 안전하게 산행을 마친 기념으로 단체사진을 찍고나서 통안재에서 산행을 마쳤다.
굵은 소나무가지가 마치 용트림하는듯 하다.
어느덧 3월 중순 여느때 같으면 따뜻한 봄날이다. 길을 걸으면서 혹시 이른 봄날 제비꽃이라도 있을까, 노루귀라도 피었을까 살펴보지만 아직은 남쪽도 봄이 아니라 한다. 봄이 왔으나 봄이 아니로다. 높은 봉우리 음지에는 아직도 눈이 10여 센티나 덮여 있고 양지 음지 어설픈 중간길에는 눈이 녹아 질척거려 넘어지기 쉽상이다. 그래도 소나무 숲속으로 이어지는 이 산길은 대부분 솔잎이 두텁게 덮여 걷는 발걸음이 아늑하고 포근하다. 침엽수 나무에서 몸에 좋은 피톤치드가 가장 많이 나온다는 한대장 말씀에 숨을 더 깊이 들이마셔본다. 미세먼지가 심한날엔 피톤치드를 마셔야지.
잔솔숲 사이로 대간길이 이어진다.
산아래 어디선가 수정을 캐낸 바위가 있어 산이름을 수정봉이라 지었다는 그럴싸한 이야기에 산꾼들은 보석처럼 빛나는 수정을 상상해본다. 오랜만에 조망이 트여 사방을 둘러본다. 희뿌연 미세먼지 장막뒤 먼곳에 지리산의 웅대한 능선이 기어간다. 옆모습을 보면 오르내림이 많지 않은 밋밋한 능선길이다. 끝에서 끝까지 한나절이면 걸을 수 있을것처럼 만만해보인다. 아직도 흰눈을 덮어 쓰고 있는 저 왼쪽 높은 곳이 천왕봉인가. 봄이 되면 철쭉꽃 만발하는 바래봉과 세석평원, 굽이 굽이 물결치는 반야봉, 토끼봉, 형제봉, 연하봉과 제석봉까지 구분되지 않는 능선길이 봄날 아지랑이 넘어인듯 가물가물 아련하다.
수정봉 정상석
수정봉에서 바로본 지리산 방향 - 짙은 미세먼지로 인해 산줄기가 어렴풋이 보인다.
뜻모르는 고개마루 입망치(笠望峙)를 지나 또 한번의 작은 오르막길을 올라가며 바라본 뒤쪽으로 방금 지나온 수정봉과 그 능선길이 선명하다. 산대장님은 이 봉우리 이름을 산성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 능선길이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사이의 경계로 서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왜구와 맞서 싸우고, 동학혁명때는 또 농민군과 토벌대간의 싸움이 있었던 곳이다.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이 산성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치고 전쟁을 치루던 사람들은 이미 흙이 되고 먼지가 되어 어디론가 날아갔을텐데 그들이 힘들여 쌓고 다듬던 산성의 돌들은 여기 저기 널부러져 흩어져 있다. 이 산성을 양지산성이라고 하니 이 산이름을 양지산이라 하는 것이 더 올바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수정봉 정상석 옆에 세워둔 안내문에 “입망치를 경계로 양지산성 남쪽에 위치한 수정봉”이라 써 있다 ). 그런데 램블러에 사용된 네이버지도에는 이 봉우리 이름이 갓바래봉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제야 입망치(笠望峙)라는 고개이름의 유래를 유추해볼만하다. 갓바래봉 아래에 있는 고개라서 갓바래봉고개를 한자로 그렇게 쓴 것이다.
뒤돌아본 수정봉
갓바래봉에서 조금 내려와 전망바위에서 점심을 먹었다. 다른 산과 달리 이 산행에서는 다른 산악회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오롯이 우리들끼리의 산행이니 아무데나 자리잡고 앉아서 쉬어가면 된다. 전망바위에서는 시야가 탁 트여 지나온 수정봉이 잘 보인다. 회원들은 각자 입맛에 맞게 싸온 음식을 먹는데 다른 산악회에 비해 단촐하다는 느낌이 든다. 다른 산악회에서 점심 먹는 풍경을 보면 무슨 잔칫집처럼 갖은 술과 삼겹살에 삭힌 홍어 등 냄새가 진동한다. 여기서는 대부분 빵이나 간단한 반찬을 곁들인 밥을 먹는다. 그러다보니 식사시간도 30분을 초과하지 않는다.
전망바위에서 시원한 풍광을 보며 점심을 먹는다.
전망바위에서 여원치 (女院峙)까지는 내리막길이 짧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기온이 올라 녹은 눈으로 임도가 진흙길이 되어 버렸다.
여원치로 가는 길에 주지암(住智庵)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이는 등산로에서 약 300 미터 벗어나 있어 들르지 못했다. 나중에 고남산을 오르면서 보니 깍아지른 암봉에 지어진 자그마한 암자가 멋드러진 것 같다. 혹시 다음에 이곳을 지날 기회가 있으면 꼭 들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주지암으로 갈라지는 이정표
여원치에서 등산로는 24번 지방도로로 끊어진다. 갓바래봉에서 내려와 마을을 지나고 고남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다시 타야 한다. 요즘 백두대간을 걷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지방정부에서도 안내문이나 이정표 설치 등에 신경을 좀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곳 여원치의 도로변에도 각종 등산로 지도와 이정표 그리고 동학혁명이나 이순신 장군의 백의 종군이야기 등을 써 놓은 안내판을 설치해 놓았다. 특히 이 여원치의 이름 유래에 관한 설명이 있는데 그 내용을 옮겨보면 대략 이러하다.
여원재에서 운성대장군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여원재 (女院峙) : 고려 우왕 6년 1380년 이성계가 이곳 황산벌에 왜구를 토벌하러 파견되었는데 꿈에 한 노파가 나타나서 고남산에 올라 3일간 치성을 드리면 전쟁을 이길것이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꿈에서 깨어난 이성계는 꿈에서 들은 대로 고남산에 제단을 마련하고 제사를 지내고 왜구와의 싸움에서 크게 이겼다. 이후 이성계는 꿈에 나타난 노파가 실제로 이 고개 아래 주막에서 음식을 팔던 주모였으며 왜구에게 죽임을 달했다는 것을 알고 그 혼을 달래주려고 사당을 세우고 여원(女院 : 여인의 집)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그후부터 이 고개 이름이 여원이 있는 고개 즉 여원재라 불리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게 진짜인지 아니면 꾸며낸 이야기인지 되묻곤 한다. 이미 구두로든 글로든 600년 넘게 전해져 내려왔으면서 조그마한 동네이지만 지명으로 굳어졌다면 사실여부를 떠나 시사하는 점이 크다 할 수 있겠다. 이성계는 먼 지방에서의 전쟁에서도 신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이기고 민심에 보답하여 그 공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널리 알리면서 자신의 입지를 확장시킨 것 같다. 이를 바탕으로 추후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울 때 일반 백성들의 극심한 저항을 비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도로를 지나 작은 야산줄기를 탔다가 다시 마을로 내려선다.
여원재에서 곧바로 산길을 타는가 싶더니 등산로는 다시 마을로 내려간다. 이제 날씨가 풀린탓인지 봄농사를 준비하는 농민들의 분주한 일손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대간팀은 여러 블로그와 카페글에 등장하는 빨간 지붕과 파란지붕 사이에 난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서야 본격적인 고남산 등산길에 오른다. 원래 지도에는 이 등산로는 밭두렁과 논두렁을 걸어 이어지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어쩌면 그것들이 사유지라서 주인의 재산권을 침범할 수 없어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등산길을 걷게 되는 것 같다.
저 파란 지붕집 모퉁이를 돌아 다시 신길로 접어 든다.
고남산(古南山 : 846.5 m )의 유래는 잘 모르겠으나 태조 이성계와 연관지어 제왕봉 또는 태조봉으로도 불렀다 한다. 주변에 이성계와 관련한 지명이 전해지는데 여원치에서 고남산 초입에 있는 마을은 이성계를 수행하던 무학대사가 지세를 보고 고남산의 산줄기가 이 마을 까지 뻗어 내린 모습이 마치 긴 다리를 이어 놓은 것 같다하여 장교리(長橋里)라 지었다. 또한 고남산 아래에서 산신제를 올릴 때 주둔하던 군사와 말들의 식수로 썼던 샘터 주변에 터를 잡은 권씨 일가의 권세가 크다 하여 권포리(權布里)라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http://namw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namwon&dataType=01&contents_id=GC00600015
고남산에 오르는 초입 등로 옆에 쇠로 만든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그 내용을 읽어보면 동학혁명을 일으킨 농민군이 조정의 토벌대와 1894년 갑오년에 이곳에서 크게 싸워 동학 농민군이 대패하여 남원으로 후퇴하였다. 이는 토벌대의 입장에서 보면 농민 혁명군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성공한 전적지가 되는데 이때 방어한 고개 즉 방어치 (防禦峙)라 부르던 것이 모음동화 현상으로 방아치가 되었다고 유추해본다.
방아치에 관한 안내문
대간길에는 오래된 무덤이 많이 보인다.
여기서 나는 작은 딜레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 방아치의 전투에서 누군가에게는 큰 승리였지만 그 반대편에게는 큰 패배였다. 이해관계에서 또는 심적으로 어느편에 서느냐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눈물나도록 크게 기쁜일이지만 그 반대편에 선 사람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었다. 이 전투에서 싸운 농민군이나 조정의 토벌대나 모두 같은 민족의 같은 마을 사람들이었으리라.
우리는 현대에도 이러한 유사한 일들을 자주 격게 된지만 분명하게 예견되는 것은 벌써 50년째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남한과 북한간의 관계이다. 일제가 패퇴한 후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에 따라 갈라섰지만 한번의 큰 전쟁을 치르면서 남북은 세계 패권주의의 대리전을 치루는 장이 되고 말았다. 언젠가 남북이 통일되었을 때 특히 전쟁을 통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통일이 되었을때 그 후유증이 엄청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모처럼 남북간에 조금이나마 관계가 누그러지는 분위기 같은데 이럴 때 구체적으로 상대편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지 궁리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응달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 있다.
방아치를 지나 쉬지 않고 집중해서 한참 올라가다가 총대장이 휴식을 제안한다. 여기서 고남산 정상까지 계속해서 오르막길이니 쉬면서 물도 마시고 에너지를 보충해야 한다고 한다. 모두 배낭안에 아껴두었던 과일을 꺼내 한쪽씩 입에 넣고 그 즙을 씹어 삼킨다. 산행은 어딜가나 만만한 곳이 없다. 그리고 그 힘든 산행 중간에 마시는 한 모금 물과 또 한 쪽 과일은 그와 비례해서 맛이 난다. 자리에 앉지 않아도 약 10여분간의 휴식은 지친 몸에 힘을 보충해준다.
고남산에서 바라본 지리산 방향
고남산의 정상에는 조그만 통신탑이 있고 산불감시인들이 머무는 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이 마을사람인듯 두 명의 촌로가 정상 바위 위에 간이 의자를 두고 앉아 있다가 우리가 가니 잠시 자리를 비켜준다. 대부분의 산에는 산꼭대기에 정상석이 서 있는데 이 고남산 정상부는 불규칙하게 뾰족한 바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대여섯명이 서 있으면 가득 차는 느낌이다. 그곳에 이성계 장군이 산신제단을 쌓았었다는 안내문을 설치해 놓았고 정작 정상석은 약 30 여미터 내려간 곳에 세워져 있다. 커다란 대리석위에 한글로 새겨놓은 산이름이 깔끔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이 든다. 여기서 하산하는데는 30분 정도 걸린다며 넉넉하게 휴식을 취하기로 했으나 달리 앉아서 할일이 없는 상황에서 회원들은 하나둘 하산을 서두른다.
고남산 정상석
고남산의 상징이라며 정상아래 있는 통신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우리는 공식적으로 산행을 다 마쳤다. 이 통신탑까지는 콘크리트 임도가 이어져 있어 아직 눈이 덮여 있는 길을 편안한 마음으로 걸어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가에 서있는 늙은 서어나무 주변에 울긋 불긋 각종 산악회 리본이 달려있다. 이곳이 백두대간 1차구간의 날머리이자 2차구간의 들머리인 통안재이다. 독골재에 비해 마을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행을 마친 홀가분한 기분으로 버스가 기다리는 권포리로 걸어내려다 만나는 작은 축산가와 태양광발전시설은 백두대간길에서 벗어났음을 아무말없이 시사해주는 느낌이다.
통안재에서 백두대간 첫 산행을 마치고 권포리로 하산한다.
권포리(權布里)는 이성계가 고남산에서 3일간 제사를 지낼 때 그 산정아래 우물에서 목욕재개를 할 즈음 이곳에 권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시대에 생성된 마을이 아직도 그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마을 회관앞에 서있는 안내비석에는 이곳에 1960년대에는 천여명이 살았으나 2000년 현재에는 약 80 세대 237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써 있다. 우리나라 농촌마을이 겪고 있는 전형적인 인구탈출현상이 이 마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 작은 돌비석이 말해주는 듯하다.
권포리 마을입구 - 저 뒷쪽으로 고남산이 보인다.
버스옆에는 이전에 백두대간을 선답한 회원분이 응원하는 뜻에서 두부와 김치안주에 막걸리를 준비했다. 나도 못마시는 막걸리지만 반컵받아 마시니 입맛이 돈다. 오후 6시가 되어서 버스는 산행으로 지친 몸뚱아리를 싣고 권포리를 떠난다. 날이 길어졌지만 금방 저녁이 찾아오고 버스창문으로는 서산으로 붉은 기운을 흘리면서 넘어가는 해가 긴 하루의 막을 내려준다. 많은 생각끝에 마음 다잡고 시작한 백두대간 산책길의 첫걸음을 내딪었다. 내년 12월에 진부령에서 종주의 길이 끝날 때까지 이렇게 기분좋은 산행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버스는 3시간 30분 걸려 승차했던 사당역에 오후 9시 30분이나 되어서야 도착했다. 그동안 빠지지 않고 시청했던 주말 연속극 황금빛 내인생이 끝나는 날인데 너무 늦게 도착하여 보지 못했다. 주말에 재방송 보면 되는거지. 그래도 멋진 산행으로 충분히 보상받았쟎아.
첫댓글 전북남원시운봉읍 권포리는 제 고향입니다
진달래가 만발하는 고남산은 봄소풍
단풍이 아름다운 주지암은 가을소풍지로
본가를 지키시던 어머니께서 건강이 염려되어 80세부터는 전주에 올라가 계십니다
권포리에는 정씨가 90%이상 박씨는 두집 뿐으로
고남산은 나뭇꾼들만 다니던 오솔길이 유일했는데 25년전 고남산 KT중계소가 들어서면서 지금처럼 차도가 생겼어요
ㅎ자랑스런 자유인산악회 동지들의 고향방문을 환영합니다 ~^^
장문의 글을 대단하심니다
대간을 시작한 지 벌써 1년이 다가 옵니다. 전에 컴터에 써 놓았던 글을 보니 옛생각이 새록 새록 나길래 사진을 넣어서 올려 봅니다. 이제 1년만 더 지나면 졸업인데 힘내서 열심히 걸어갑시다. ㅎ
대간 첫날의 소중한 기억이 떠오르게 하는 글과 사진 감사합니다
지금은 언니동생하며 반가운 얼굴들이지만 첫날의 서먹함과 쑥쓰러움이 스쳐가는 군요^^
추억소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