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란고원의 비밀...악령을 퇴치하는 예수, 단지 엑소시즘인가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2022.05.21 05:00
백성호 기자 구독
백성호의 현문우답구독중
[백성호의 예수뎐]
성서에서 예수는 종종 악령을 물리친다. 이를 단순히 ‘엑소시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다. 예수의 권능이 악마를 물리쳤다는 해석이다. 그렇게만 읽으면 아쉬움이 남는다. 성서의 울림이 거기서 멈추고 만다. 다시 말해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성서 속의 일화는 아무리 작은 것도 우리의 심장을 겨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해 품고 있는 우리의 오해와 착각을 겨냥한다. 예수의 악령 퇴치 일화도 그렇다. 단순히 초자연적인 스토리가 아니라, 거기에는 깊은 영성의 우물이 숨어 있다. 그 우물에서 두레박을 길어 올리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성경에는 예수가 악령을 물리치는 일화가 더러 등장한다. 그런 일화 속에도 영적인 메시지가 숨어 있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중앙포토]
(47)악령을 퇴치하는 예수…단지 엑소시즘인가
갈릴래아 호수의 동쪽으로 갔다. 거기서 바라보는 호수의 풍경은 또 달랐다. 호수 건너편으로 숙소가 밀집한 번화가 티베리아스가 보이고, 북쪽으로는 팔복 교회와카파르나움(가버나움)이 있는 동네가 아스라이 보였다. 하늘에는 구름이 끼어 있었다. 그 사이로 노을이 내렸다.
호수 동편에는 골란 고원이 펼쳐져 있었다. 시리아의 영토였다가 중동전쟁 이후에 이스라엘 영토가 되었으며 지금도 국경 분쟁 지역이다. 그래서 이곳에 이스라엘의 미사일 기지가 설치되어 있다. 호수와 들판, 그리고 바람. 평균 해발고도 1000m의 구릉지대인 골란 고원은 제주도를 연상시킬 만큼 푸르고 아름다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골란 고원도 성서의 공간적 배경이다. 다름 아닌 ‘마귀들과 돼지 떼’ 일화다. 골란 고원의 끝자락 즈음에 성서 속 마을 가라사가 있었다. 호수변 도로를 따라가다 자동차를 세웠다. 고원의 산들은 웅장했다. 단체 여행객들의 짧은 순례 일정에서는 거의 이곳을 제외한다. ‘마귀들과 돼지 떼’ 일화의 공간이라는 점 말고는 볼거리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갈릴래아(갈릴리) 호수 동편에 있는 골란 고원쪽의 언덕이다. 이 일대가 마귀 들린 사람과 돼지떼에 대한 일화가 전해오는 곳이다. [중앙포토]
예수는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가라사로 갔다. 배에서 내리자 마귀 들린 사람이 예수에게 다가왔다. 그 사람은 무덤에서 살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통상 마을 바깥에 있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동굴을 주로 무덤으로 썼다. 마귀 들린 사람은 아마도 그런 동굴에서 생활하지 않았을까.
동네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를 쇠사슬로 묶어놓았다.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버려”(마르코 복음서 5장 4절) 아무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옷도 입지 않고 벌거벗은 상태로 지냈고 너무 사나워 동네 사람들은 그 사람이 있는 길로 지나다닐 수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사람은 마을의 골칫거리였다.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도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마르코 복음서 5장 5절) 했다. 요즘으로 치면 정신질환자가 아니었을까.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간질병 환자도 ‘마귀 들린 사람’으로 보았다.
저 산의 중턱, 절벽 위 어디쯤이었을까. 그는 예수 일행을 만났다. 예수는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했다. 그러자 ‘마귀 들린 사람’이 예수에게 말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마르코 복음서 5장 7절)
ADVERTISEMENT
예수 당시에는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도 마귀 들린 사람으로 간주했다. 예수가 악령을 퇴치하는 일화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긴 걸까. [중앙포토]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마귀 들린 사람’이 답했다.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근처에는 놓아 기르는 돼지 떼가 있었다. 예수가 “가라!”고 하자 마귀들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2000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비탈을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성서 속의 가라사 마을로 알려진 이곳은 실제로 호수에서 무척 가까웠다. 산비탈만 내려가면 바로 호수였다. 그러니 돼지들이 ‘우르르’ 호수를 향해 내달린 곳은 저기 저 절벽 위쯤 되지 않을까. 해가 떨어질 무렵 산비탈 아래를 걸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궁금했다. ‘마귀 들린 사람과 돼지 떼’ 일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걸까. 거기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
단순하게 읽으면 악령을 퇴치하는 엑소시즘 일화다. 그런데 그뿐일까. 나는 성서를 다시 읽었다. 깊이 읽었다. 이 일화에는 엑소시즘을 넘어서는 깊은 영성의 울림이 담겨 있다. 나는 루카(누가)복음서 4장을 다시 펼쳤다. 예수가 악마를 처음 만난 곳은 광야였다. 그곳에서 40일 동안 악마와 싸웠다. 악마의 이름은 세 가지였다. 빵과 권력, 그리고 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 악마들이 도대체 어디서 생겨났을까. 그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골란 고원쪽에서 바라본 갈릴래아 호수. 이 호수를 향해 돼지떼가 무리지어 떨어졌다고 성경에는 기록돼 있다.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떨어진 악령이 돼지에게 들어가자, 돼지떼는 갑자기 호수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중앙포토]
예수는 인간을 품은 신이자 신을 품은 인간이다. 다시 말해 100% 신이자 100% 인간이다. 그러니 우리가 인간으로서 겪는 희로애락을 예수도 겪었다. 그러한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예수도 공유했다.
어릴 적에는 엄마의 젖을 먹다 토하기도 하고, 걸음마를 걷다 몇 번이나 넘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사춘기 때는 옆집에 사는 또래 소녀를 생각하며 가슴이 뛴 적도 있지 않았을까. 만약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세상의 모든 현자는 인간으로서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이 직접 ‘인간’을 경험하지 않으면 인간을 온전히 알 수가 없다. ‘인간’을 알지 못하면 그들에게 이치를 전할 수도 없다. 어둠을 지나온 사람이 어둠을 안다. 어둠을 지나오지 않은 사람은 어둠을 알지 못한다. 어둠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빛을 일깨우려면 먼저 어둠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악마와 싸웠을까. 그렇다.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악마다. 그와 싸웠다. 그 악마는 머리에 뿔이 달리고 삼지창을 든, 붉은 빛깔 악마가 아니다. 내 안의 가장 향긋한 욕망, 가장 달콤한 집착, 가장 끈적끈적한 고집. 그것이 바로 악마다. 그것이 ‘신의 속성’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묵상할 때 ‘마귀 들린 사람과 돼지 떼’ 일화에서 굳건하게 닫혀 있던 문이 비로소 열린다.
마귀 들린 사람과 돼지떼 일화가 전해오는 곳에서 바라본 갈릴래아 호수. 멀리 위쪽에 보이는 땅이 가파르나움이다. [중앙포토]
나는 묻고 싶다. 예수의 엑소시즘 일화는 누구의 이야기일까. 언뜻 보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읽힌다. 그런데 그게 정말 남의 이야기일까. 어쩌면 우리 자신을 겨냥하는 이야기는 아닐까. 다음 편에서 그런 논쟁을 짚어본다.
〈48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구약성경에는 대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노아의 방주입니다.
성경통독운동을 펼치고 있는
신학자 조병호 박사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노아의 방주’일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말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마다
‘노아의 방주’를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방주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
또 다른 목회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방주를 만들기 위해서
노아가 흘린 땀,
동물들을 돌보던 노아의 마음을
보아라.”
각자의 입장과 필요에 따라
성경을 바라보는 눈도 다릅니다.
우리는 과연 성경을 어떤 기준에서
읽어야 하는 걸까요.
조 박사는 이 물음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다.”
조 박사는 그걸
‘성경적 회복’이라고 불렀습니다.
성경을 읽고서
사색하고,
궁리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일.
그게 바로 ‘신의 속성’을 향해
나아가는 일입니다.
조 박사는 그렇게 성경을 읽으면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심판의 대홍수에서
하나님의 눈물이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서구의 철학은 나누고 쪼개는 식이다.
교회도 그랬고, 신학도 그랬다.
문자와 분석에 얽매인 채,
교리를 매뉴얼화하는 식이었다.
거기서는 부분만 보게 된다.
전체를 보지 못한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동양의 전통적 사고 방식으로
성경을 바라봐야 한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고,
지적이고 인지적인 게 아니라
심정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렇게 바라볼 때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이 말끝에 조 박사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를 꺼냈습니다.
“루터가 돌아가고자 한 것은 성경이었다.
다시 말해 성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펼쳐놓고
읽고, 보고, 느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러니 성경은 일종의 나침반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신의 속성을 회복할 수 있게,
길을 잃지 않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소중한 나침반입니다.
저는 악령을 퇴치하는 예수의 일화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봤으면 합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일,
신의 속성을 회복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