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 매우 중요한 요14장21절을 보십시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말씀을 가지고(keepeth) 지킨다’는 옛날 번역이 옳습니다. 가진다는 말은 바로
앞의 요14:20절의 말씀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이는 말씀대로 행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마 말씀대로 행한다는 율법적인 요소가 있는 사람이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몰라서
‘가지고’ 라는 말씀을 빼 버린 듯합니다. 그러나 이런 단어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지고 지킨다는 말씀은 골키퍼가 볼을 끌어안듯 주의 계명을 마음으로 꼭 붙잡는다는
의미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이 말씀이 샛별처럼 마음속에 선명하게 들어와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그 분과 하나가 된 약속을 심령에 끌어안고 지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곧 생명이시며 능력이시며 영광으로 나타나십니다.
그 다음에 드디어 우리가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아들과 아버지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셔야 드디어 우리가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귀중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고 아버지를 알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용을 정리하십시다. 요14장에서 첫째는 목적지와 그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아버지를 보여주옵소서 하는 빌립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유다의 질문입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14:22)
이 사람도 눈으로 짠하게 나타내 보이라는 겁니다. 도마의 질문 “도마가 이르되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14:5)라고
할 때에도 주님의 대답은 내가 바로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바로 그 답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빌립의 질문은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인데 그 때의 정답은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 나를 보이고 아버지도 보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당장 내가 지금 보여 주마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변화산에 올라가서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그 광경은 봤으나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이 셋은 그 분들의 대화를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통해서는 우리는 그 영의 세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육신으로는 못 듣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통해서는 들을 수 있습니다.
성령 이전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그 광경은 눈으로 볼 수는 있었으나
그 음성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세 분은 별세에 관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사심에 관해서 말씀하심에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중에 ‘내 아들의 말을 들으라’(마17:5)는 말씀대로 성령이
오신 이후에 비로소 그들이 말씀을 들은 겁니다. 그 아들의 말씀을 듣고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그 아들이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스며들어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하는 빌립의 질문에는 진리의 성령이
바로 그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룟인 아닌 유다의 질문에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왜 당신은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 나타내십니까?’ 라고 할 때 예수님은 전혀 다른 대답을
하시는데, 세상과 너희가 다른 것은 ‘너희는 내 말을 지키지만 세상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엔 진리의 성령이 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지켰을 때에 바로 자신을 계시한다 또는 나타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 안에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가지고 지키기를 싫어합니다.
아담 안에서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은 예수 믿고 죄 사함은 좋아하지만
그리스도를 모시므로 죄 사함과 함께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의 나타나심을
싫어하는 적그리스도의 요소가 다분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아닌 거짓 선생들이 거짓 교인을 만들고 또 거짓교인들의
요구에 따르는 수요공급의 원리에 의해 거짓선생들도 양산이 되고 있는 겁니다.
세상은 말씀을 가지기도 지키기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주의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가
지금 공중에 붕 떠 있습니다. 말씀대로 말씀을 순종이라는 말을 하지만 자신도 되지
않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강조하는 거짓, 불법, 미혹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세상은 진리의 성령과 상관이 없고 주님과 하나가 된 계명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대답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특징은
말씀이 없고, 진리의 성령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지 않고,
따라서 아버지를 모릅니다. 계시가 없으므로 임마누엘 하신 그리스도를 공경함이
없이 방자하게 굽니다. 육신에 속한 유다는 육체로 나타내시는 것으로 알지만
요14:23절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드디어 처소(거처)가 되어 주리라 말씀이 등장합니다. 대단하고 놀라운 말씀입니다.
바로 너희에게만 나타내고 세상(저희)에는 나타내지 않는데, 너희들에게 나를 나타내고
계시해 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너희가 내 말을 지키므로 아버지와 내가 너희 가운데
함께 거하기 위함이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람하고 세상하고 다른 점이라는 겁니다.
요14:24절도 보면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하고 뚜렷이 다른 것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므로 그의 계명을 지키므로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하늘의 모든 것과 땅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통일이 된다는 말씀입니다(엡1:10)
눈에 보이는 다른 만물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합니다. 그래서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라는
말이 있고, 일반은총 또는 특별은총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룩하게
되고(하기오이스)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피스토이스)이 바로 세상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좋은 산앙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