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15:5-7).
사도는 5-6절을 통해서 간절한 소원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비록 형태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만 내용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바라는 바를,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라 할 수가 있습니다.
형제는 기도의 첫 머리에서,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무엇이라 부르고 있습니까?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할 것입니다. 사도는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3절에서는, “소망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고, 33절에서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합니다. 이로 보건대 사도는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 하나에도 신중을 기하면서 때에 맞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①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5) 합니다.
㉠ 사도는 어찌하여 이 시점에서 하나님을,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을까요? 먼저 사도가 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증거하고 있는가 하는 것부터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복음을 말씀하는 부분(1-8장)에서는,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5:5, 8) 하고, “사랑의 하나님”으로,
㉯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하고, “은혜의 하나님”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하는 윤리(倫理) 부분(12-16장)에서는,
㉮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15:5),
㉯ “소망의 하나님”(15:13),
㉰ “평강의 하나님”(16:20),
㉱ “지혜로우신 하나님”(16:27) 등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②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니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구원하여 자녀 삼으신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는 때를 따라, “인내의 하나님으로, 안위의 하나님으로, 소망의 하나님으로, 평강의 하나님”으로, 처지와 형편을 따라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말씀입니다.
㉠ 그러면 이 시점에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사도의 의중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임하시는, “인내(忍耐)와, 안위”(安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형제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참고 기다려줌이 필요합니다.
㉡ 그것은 마치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는” 어머니의 인내에 비할 만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증표로,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고후 12:12) 하고, “인내”를 첫손에 꼽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살전 2:7) 합니다. 인내가 없다면 그는 참 목자가 아니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③ 또한 사도가,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는 의중에는, 오늘의 “내가” 있기 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려주셨는가를 일깨워주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 형제가 찾고 있는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입니까? 축복의 하나님입니까?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입니까?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인내(忍耐)를 가지고, 너도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 주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고, 넘어짐에 넘어짐을 되풀이하며, 죄에다 죄를 반복하는 나약한 우리가 바라고 의지할 하나님은, “인내의 하나님, 안위의 하나님”, 그래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참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은, 종래는 독생자를 내어 주시기까지 인내하셨습니다.
④ 3:25절에,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 길이 참으심이란 무거운 짐을 들고 참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 범한 모든 무거운 죄 짐을 들고 하나님께서는 길이 참고 계셨습니다. 그 기간이 얼마 동안이나 될까요? 그래서 구약의 역사가 회개하고 돌아온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까? 참고 기다리시던 하나님께서는 그 배은망덕한 자들의 죄 짐을 자기 아들에게 담당시키셨던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인내는 우리에게 무서운 심판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와 받아주심과 자녀삼아 주심으로 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욱 감격스러운 호칭은 달리는 없다 하겠습니다.
⑤ 바울은 자신이,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딤전 1:13)였다고 말합니다.
㉠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16)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바울의 마음에는 만감이 서려 있었을 것입니다. 형제의 가슴도 감사와 감격으로 벅차오르고 있습니까? 지금도 우리는 실수하고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인내를 깨달으면서, 측량 못할 안위를 거듭 거듭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⑥ 그러나 패역한 인간은 하나님의 인내와 안위를 도리어,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2:4) 하고, 멸시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 하나님께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오늘까지 살아남아 있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10:21) 하고 말씀하십니다.
⑦ 하나님의 인내와 안위를 온전히 실천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本)받아”(5상), 이렇게 말씀합니다.
㉠ 주님의 일생은 인내와 안위의 삶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2-3) 합니다.
㉡ 이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생각하라, 이 예수를 본받으라” 하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다는 것은 곧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을 본받은 것이 됩니다.
⑧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서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5하) 합니다.
㉠ “주사”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셔야만 가능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데는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인내심(忍耐心)이 나에게 부은 바가 되고, 하나님의 안위를 나에게 채워주시게 될 때에, 그 채움 받은 인내와 안위를 가지고 형제에게 나누어 줄 수가 있는(고후 1:3-6) 것입니다.
㉡ 그리하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6) 합니다.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1)해야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찬송하는 입은 하나인데, 마음이 다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⑨ 5절에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사도는 6절에서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사도는 어찌하여 “하나님”이라 했다가 얼른,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하고, 고처서 말씀하는 것일까요?
㉮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7하-28상) 하신,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⑩ 이것이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 하신 의미입니다.
㉠ 3-8절 안에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5번 등장합니다. 그런 중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중)라는 6절의 호칭은 우리 주님께 돌려야할 가장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호칭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우리 주님을 가장 존귀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 3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하고, 소극적인 본을 말씀한 사도는 7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하고 적극적인 본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하는 의도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목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임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⑪ 14:3절에서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말씀했는데, 15:7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주셨다고 말씀합니다.
㉠ 하나님께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받아주셨는데, 우리가 형제를 받아주지 않아도 된단 말입니까? 그래서 “너희도 서로 받으라”(7하) 하십니다.
㉡ 6-9절 안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는 말씀이 3번(6, 7, 9) 등장합니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 하십니다.
㉯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6) 하십니다.
㉰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9) 말씀합니다.
㉢ 14:1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하고 시작된 권면은, 15:7절에서 끝을 맺고 있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으로 절정을 이루는 구조입니다. 인내도, 안위도, 이웃을 기쁘게 함도,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함도,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⑫ 만일 나로 인하여 소자 하나를 실족시키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망케”(14:15)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14:20)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유념해야할 점은, “서로”라는 말입니다.
㉮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라”(14:13) 합니다.
㉯ “너희도 서로 받으라”(7) 합니다.
㉰ 12:10절에서는,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합니다. 나와 다를 뿐 틀린 것이 아니라면 서로 받아주십시다. 내가 먼저 받아주십시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