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도서 한 번에 설교하기
본문 : 12:11-14절
주제 : 하나님을 경외하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12:11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12:12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강론
최우선적으로 관심하게 되는 것은 성령께서 “전도서”를 기록하게 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증언하려고 “전도서”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했는데 전도서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다른가? “잠언”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는 말씀이라면 “전도서”는 제목 그대로 “전도”(傳道)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전도서의 호칭이 잠언의 “여호와”가 아닌 모두다 “하나님”으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무려 45번이나 등장합니다. 이는 전도서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한 “전도”(傳道)의 글임을 나타냅니다. 이점이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7:29), 즉 타락했다는 말씀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창조자를 기억하라, 심판하시리라”(12:1, 14)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전도서의 주제를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 첫째는 “모든 것이 헛되다”(1:2)는 점입니다. “헛되다”는 말이 39회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전도서의 구조(構造)는 첫 장에서,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로 시작하여 마지막 장에서,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12:8)고 마치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 둘째는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권면입니다. “하나님 경외”도 7번(3:14, 5:7, 7:18, 8:12, 12, 8:13, 12:13)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도서는 “헛되다”는 것으로 끝이는 것이 아니라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 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고, 사람의 본분(本分)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전해주려는 것이 전도서의 기록목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경외”가 누구의 무엇을 통해서 가능하여지는가 하는 점을 확실하게 세워주어야만 그리스도의 “증인”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 경외가 어떻게 해서 가능해졌으며, 신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경외할 수가 있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없이도 하나님 경외가 가능하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불신자란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엡 2:1)들이요,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다”(사 59:2)한 끊어진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먼저 하나님과 화목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화목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세워주신 메시아언약 안에서만 하나님 경외가 가능한 것이며,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만이 “하나님 경외”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전도자는 마지막 절(12:13-14)에서 “하나님 경외냐? 심판이냐?”하고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지 않고도 자신의 선행으로 “심판”을 면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만일 십자가 복음을 믿지 않고도 하나님 경외가 가능하고 심판을 면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된다는 점에 여러분도 아멘입니까?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1)고 시작이 됩니다.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아십니까? “솔로몬”이라는 이름입니다. 왜 감추고 있을까요? “전도서”는 인생이 추구하는 “권세, 명예, 지혜, 부귀영화” 등 모든 것을 경험해본 “전도자”가 하는 권면이요, 경고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전도자”로 세우신 데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만 주신 것이 아니라,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화”까지 심히 많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에게 “부와 영화”를 주신 하나님은 그가 타락할 것을 모르셨단 말입니까? “부귀와 영화”를 허락하신 하나님은 솔로몬의 “타락”도 허용(許容)을 하신 셈입니다.
왜 허용을 하셨는가? 다윗의 타락을 통해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한, “칭의(稱義)교리”를 계시하게 하셨다면, 솔로몬의 타락을 통해서는, “전도자(傳道者)가 이르되”(1:2)하고 “전도서”를 기록하게 하셔서 “전도”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딤전 1:13)였던 사울을 들어 “로마서”를 기록하게 하신 것과 같은 섭리입니다. 3:11절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말씀하는데, 이는 바로 솔로몬 자신을 두고 하는 말로 여겨집니다.
인생이란 왕복이 아닌 일방통행(一方通行)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인생을 한 번 잘못 살게 되면 시행착오를 만회할 두 번째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헛되고 헛된” 일을 추구하면서 “헛된”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이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1-11절에서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보배를 쌓고,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다”고 모든 것을 경험해보았노라고 진술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그 결과가 어떠했노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2:11)고 진술합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만족(滿足)이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永遠)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3:11)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안식이 없는 삶은 허무(虛無)함뿐이요, 영혼의 갈증은 세상적인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통해서 대리경험을 하게 하셔서 돌이킬 수 없는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전도서를 후대에 전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서는 제목 그대로 “길 안내서”인 셈입니다.
“솔로몬”은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면 어떤 점을 예표하고 있는가? 솔로몬과, 그리스도 간에는 유사성(類似性)과 상이(相異)성이 있습니다. ㉠ “다윗의 왕위에 올라, 성전을 건축한 것, 지혜가 충만하여 그 소문을 만방에 떨친 것, 인생의 밑바닥까지 낮아진 것” 등은 유사성입니다.
㉡ 그러나 상이성은 솔로몬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시궁창까지 타락하여 인생의 고락을 경험했지만, 우리 전도자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셨다”(히 4:15, 빌 2:8)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점을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罪)는 없으시니라”(히 4:15)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영광의 자리에서 무덤에까지 내려가셨으나, 솔로몬은 영광의 자리에서 타락으로 인하여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허무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전도서에는 두 가지 인생관, 가치관이 뒤섞여 등장하므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전도서를 기록한 저자는 “영광과, 타락”, 즉 “하나님 경외와, 이를 떠난 허무”를 동시에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를 대할 때에 통찰력이 필요하게 되는데 전도자 자신의 현재(現在)의 신앙고백과, 그가 타락했을 당시, 즉 불신자의 입장에서 진술하고 있는 과거(過去)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는 점을 분별(分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일 이를 분별하지 못하면 전도자를 정신분열증 환자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
예를 들면,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3:21)고 불신자의 입장에서 말하는가 하면,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12:7)고 전도자의 입장에서 권면합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2:24)하고 무신론자처럼 말하는가 하면,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11:9)고 전도자로써 경고합니다.
이처럼 불신자와 신자 양편을 오가며 중보적인 증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권세는 왕이요, 지혜는 추종을 불허하고, 부귀영화는 비할 자가 없었던 솔로몬이 밑바닥까지 타락했던 뼈아픈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불신자들의 사상(思想)과 욕망과 심리상태를 꿰뚫어보는 “전도서”를 기록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 전도서는 첫 장에서 제기한 문제를, 마지막 장에서 해답을 제시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전도자는 첫 장에서,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펴”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깨닫게 되었는가?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13-14)고 진술입니다.
㉡ 그러면 마지막 장의 요지는 무엇인가? 12:1-2절 안에 “전에”라는 말이 몇 번이나 등장하나 보십시오. 4번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런 날이 이르기 전에, 즉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12:7) “창조주를 기억하라”(12:1)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기”(12:8)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도달하게 된 결론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는 “본분”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12:13-14)는 “심판”입니다.
전도서는 “하나님 경외냐? 심판이냐?”를 결단하게 하기 위해서 기록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율법을 가리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갈 3:24)라고 말씀하는데 전도서도 우리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하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길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간에 있는 내용(2-11장)들은 어떻게 구성이 되어 있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4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 첫째 단락(段落)의 결론은 3:14절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敬畏)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합니다.
㉡ 둘째 단락의 결론은 5:7절인데,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敬畏)할지니라”합니다.
㉢ 셋째 단락의 결론은 7:18절인데,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합니다.
㉣ 넷째 단락의 결론은 8:12-13절에 나타나는데,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敬畏)하여 그를 경외(敬畏)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라고 말씀하면서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고 경고합니다.
전도자의 말 중에 중요한 요점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하늘 아래, 해 아래”라는 말입니다. 이런 표현이 29번이나 등장합니다. 달리 표현할 수도 있는데 시종일관 “해 아래”를 이처럼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해 아래”라는 표현을 구속사라는 맥락으로 보면 하나님 앞에서 추방을 당한 자연인의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이에 빛을 비춰주는 말씀이 로마서에 있습니다.
로마서에는 네 번의 “아래”가 있는데, “법 아래, 죄 아래, 심판 아래, 은혜 아래”(롬 3:9, 19, 6:14)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죄 아래”, 전도서의 표현대로 하면 “해 아래”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게 하심으로, “은혜 아래, 십자가 아래” 살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해 아래서 살아가느냐? 은혜 아래”서 살아가고 있느냐 둘 중 하나라는 점입니다.
전도자는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이 한 말이, “진리(眞理)의 말씀이요, 다 한 목자(牧者)의 주신 바니라”(12:10, 11)고, “진리와, 목자”를 말씀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 말씀하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임마누엘하심으로 신약시대는 그리스도가 “왕이요,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해 아래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헛된 삶을 추구하고 있는 자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목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비관하나 신약성경은, “그(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充滿)하여졌다”(골 2:9-10)고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고 증언합니다.
전도서는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1:9)라고 절망하나 하나님은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 43:19)고 예언하시고, 복음이 밝히 드러나 신약성경은,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새 것이 없는 헛된 것”을 “새 것이 되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전도서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졌다는 점에 이제 분명합니까?
전도서는 유대인들이 초막절에 낭독했다고 합니다. 이는 인생 여정이 초막에 머물다가 떠나는 행인과 나그네와 같은 삶임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명심할 점은 전도서가 하나님 경외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하는, “심판”(審判)으로 끝맺고 있다는 점입니다. “구원과, 심판”은 동전 앞뒤와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이 둘을 함께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복음 초청을 거절하는 자들을 향해서,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11:9) 하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한 전도서입니다.
온유한 주님의 음성 네 귀에 속삭이네
네 마음 문을 두드리니 곧 주님을 영접하라
피하지 말라 피하지 말라
우리가 곁길로 피해도 맘속에 오시리
심판날 당할 때 주님을 너 맞을 준비해
맘속에 주님을 영접하라 주 영접하라 (52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