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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로마서 8장 28-30절
그리스도와 구원의 서정의 목적
2021년부터 10월 마지막 주에 종교개혁과 관련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그동안 김영규 교수님께서 강의한 것을 나름 정리하여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최근 수요일 살피고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특별히 예정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 설교는 2019년 종교개혁과 관련해서 설교한 정지수 목사님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임을 밝혀드립니다.
일단 종교개혁하면 1917년 10월 31일 루터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굵직한 역사의 맥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고, 또 교회 역사 속에서는 10월 마지막 주를 종교개혁주일로 지키기도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종교개혁주일을 지켜야지만 개혁주의 내용을 충실하게 나타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주일을 지키지 않아도 개혁주의 내용을 충실하게 나타내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종교개혁주일을 지키지만 사실은 개혁주의 내용을 충실하게 나타내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저희 교회 역시 2012년 12월 중순부터 시작하여 2020년까지는 따로 종교개혁과 관련해서 설교한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조금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되어 2021년부터 조금씩 살펴보게 되는 부분이 있게 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종교개혁의 역사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선물의 유산을 받았지만 받은 것을 교회가 잘 펼쳐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무엇보다 종교개혁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극치인 예정론을 밝히지 않거나, 침묵하거나, 더 나아가 부정까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데, 그런 일들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으뜸이 되는 것은 구원의 은혜임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그런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은 단지 우리가 믿을 때부터 출발한다고 가르치지 않고 영원 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데, 거기까지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 가운데 늘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강조입니다.
그러나 루터가 잘 말한 것처럼 자유의지란, 가장 순수하게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의지란 오직 하나님에게만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의지는 피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이고, 창조하신 이상 순수한 의미에서 자유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모든 철학과 헛된 이론들의 기반에는 인간의 자유의지 논리가 있습니다. 성경을 왜곡하고 오해하는 현장 속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혁의 역사를 선물로 주신 그 현장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꿈틀거리고 있었고, 그런 선물의 역사가 두드러지게 비춰지지 않는 일들 속에서는 더더욱 자유의지라는 주제가 왕노릇하고 있었고 또한 왕노릇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오실 날까지 인간은 이 주제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어쨌든 인간은 끊임없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높이는 쪽으로 가려고 하지만 성경은 그런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하나님의 의지와 주권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런 하나님의 의지와 주권이 가장 빛나도록 하고 있는 것이 예정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때문에 개혁주의를 지향한다면, 그리고 개혁주의가 바빙크가 평가한대로 신론적으로 생각한다면 예정론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분명히 새기셔야 합니다. 다수가, 아니 모든 사람이 이것을 반대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가 이 예정론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우리는 이것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예정론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생각해야 하고, 그 은혜로 인하여 힘을 얻고 위로를 얻어야 합니다.
어거스틴 시대에 펠라기안주의라는 이단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성경 이해의 주된 기틀은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역시 17세기 초반에 알미니안주의가 일어났는데, 그들도 다를 바 없이 펠라기안주의 입장을 취하면서 자유의지 입장에 기반을 두고서 성경을 풀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공로주의가 나왔습니다. 이런 공로주의에 대한 답변으로 나온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분명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루터의 가르침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주의는 거기에 머문 결과 바빙크가 평가한 것처럼 인간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구원사 중심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축복된 자리에 이를 수 있는가가 초점이 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신칭의에 머물지 않습니다. 더 높이 올라갑니다. 더 근원적으로 나아갑니다. 인간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론적으로 생각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구원사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 다시 말해 예정론을 중심으로 합니다. 인간 구원에 대한 말씀이 분명 있지만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실 목적으로 그 일을 이루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개혁주의입니다.
지금 우리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지만 똑같은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은 아닙니다. 같은 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효력 있는 부르심의 시기가 다 다릅니다. 사람들은 내가 언제 믿었다는 것에 초점을 둘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강조하는 이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모든 사람, 시간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게 될 모든 사람들 중에 일부를 택자로 정하셨습니다. 단번에, 동시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택자를 위한 모든 수단과 방편까지 정하셨는데, 우리가 수요일에 살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정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선물을 출발점으로 해서 중생의 은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는 칭의, 양자, 성화, 견인과 영화라는 모든 것을 다 정하셨습니다. 단번에, 동시에 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시간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때 어떤 과정을 두게 되는 겁니다. 창조의 역사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이면 하루 만에, 아니 한 시간 만에, 아니 한 번의 말씀으로 6일 동안 창조하신 모든 것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심으로 창조의 질서를 드러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역사 속에서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를 한꺼번에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영원 전에 우리를 선택하실 때 그 선택과 함께 이 모든 것을 주시기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담이 아니지만, 아브라함도 아니고, 다윗도 아니며, 루터나 칼빈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실 때 거기에는 우리의 명단도 함께 있었다는 것이고, 그들을 시간의 역사 속에서 구원하시되 그리스도와 구원의 서정을 주셔서 결국 영화의 자리까지 앉히신 것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하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예정의 대상, 특별히 선택하신 자들을 향한 목적에 대하여 주목하고자 하는데, 수요일에 살펴본 것처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지만 그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향해 가지신 목적이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는 데 있다고 밝히십니다(엡1:4). 그러니까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거룩하고 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할 목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표현되기도 하는데, 29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말 번역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 충실한 번역은 ‘그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입니다. 즉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한다는 것은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고자 하시는 본질입니다.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우리를 향한 목적이 이렇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높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영광되게, 영화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이라고 할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신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마지막 영화의 자리에 가서도 여전히 피조물로 있을 뿐입니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피조물일지라도 영원 전에 선택하시면서 가지신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이라고 할 만큼 우리를 높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작정)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아들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기 때문에 세상적인 의미에서 ‘결국 우리가 편해질 것이다’, ‘결국 우리가 웃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자를 향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선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형상을 갖도록 하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28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이렇게 시작합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이 다 아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이 말씀을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해서 알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우리 모두가 마땅히 알아야 할 진실입니다. 그 진실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작정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어! 나는 아직도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하는 자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곧 그의 작정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또한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기로 하신 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선택하신 자를 의미합니다. 지금 내가 좀 부족한 사랑을 보이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제외되지 않습니다.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면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이끌어 가신다는 겁니다.
지지난주 성찬 설교 때도 말씀을 드렸지만 악인의 형통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강이 아닙니다. 당연히 악인의 형통은 선도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악인의 형통은 결코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는 것과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는 길로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참고로 성경에 보면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이라는 대립이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불만입니다. 왜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을 받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을 보면서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또한 의인의 고난을 보면서 그런 고난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7절과 18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며, 그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으로 우리가 무엇을 바라봐야 할지를 교훈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지 않는 의인의 고난이 우리에게 있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고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조차 복이 되게 하실 목적으로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도 우연적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작정을 따라 미리 정하신 바를 실행의 역사로 옮기실 뿐입니다.
인생의 모든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쉽게 좌절합니다. 쉽게 낙심합니다. 쉽게 속상해 합니다. 또한 우리는 쉽게 분을 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마음을 주시면 후회하고 반성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다시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지으면 또 다시 회개합니다. 이런 모습은 어떤 면에서 사사기의 구조와 같습니다. 죄, 심판, 회개, 구원의 반복이 우리의 인생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반복 속에서 공통점이 있다면 적어도 선택하신 자들을 향해서는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다듬어 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듬어 가시는 것이 이쯤이면 되겠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부패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부패성을 안다면 우리는 단련 받고 또 단련 받아도 부족한 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평생을 두고 단련하시는 겁니다. 선택의 목적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영광의 자리에 앉히고자 하실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가장 높은 기준으로 정하시고, 그 기준까지 끌어올리시고자 하심입니다.
이때 우리가 힘들어 하는 이유는 우리를 향한 목적이 높아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이 너무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를 봐야 할 우리가 세상을 보면서 세상과 비교를 합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고, 의인의 고난을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형상까지 자라갈 수가 없습니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시는 이도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그에게 감사 찬송할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먹고 배부른 까닭에 주를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은 교회조차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주 문제는 늘 있어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지 않고 나타내고 있느냐는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기 가면 더 이상 배고플 일이 없고, 아픔도 없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도록 완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게 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천국을 소망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교회의 위상은 먹고 마시는 것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을 얼마나 많이 누리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삶을 사는 것,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이기 때문에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겁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할 때 어떤 것들이 있는가? 로마서 8장 35절에 보시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누가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들조차 사용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으로 만들어가고자 하십니다. 특히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은 예정론 입장에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것이 영원 전부터 그들을 사랑하기로 하신 것인데, 그런 사랑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로 인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8절, 39절도 보시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택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으려고 해 봐라. 끊을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부정적인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도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으로 우리는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29절로 오시면 선택의 또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표현 때문에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예지예정의 입장을 취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것은 그 사람이 믿을 줄 알고서 선택하신 것이다. 유기는 그 사람이 믿지 않을 것을 미리 아시고서 유기하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미리 아신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같은 로마서 11장에서 해결이 되는데, 2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은 4절에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 5절에 보시면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그러니까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은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인 것입니다. 미리 아신 것이 원인과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아신 것이 선택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지는 예정, 특별히 선택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예지예정은 말이 좋아 예정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철저히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면 시간의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반드시 믿을 수밖에 없도록 이끄십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유기하셨다면 시간의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그 스스로는 결코 가질 수 없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매달렸던 강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증거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 중에서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요6:39).
이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거의 동시에 죽음으로 이 사람에게 구원의 서정이 있을까란 생각을 가질 수도 있지만, 고린도전서 15장 50절과 51절을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심판의 날임과 동시에 구원의 날입니다. 유기자는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겠지만, 택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의 몸 상태로는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썩어지지 아니할 유업을 썩어질 우리의 몸이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은 예수님 재림 때 다 부활체를 입게 됩니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었다가 다시금 살아나게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성경이 밝혀주고 있는 것처럼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게 됩니다. 썩어질 육체가 썩지 아니할 육체로 변화하게 됩니다. 순식간에 그렇게 됩니다.
강도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보장 받습니다. 그리고는 죽습니다. 그에게 과연 구원의 서정이 있을까? 저는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라는 측면에서 그에게도 구원의 서정이 하나도 빠짐없이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순식간에 홀연히 썩어질 육체를 썩지 아니한 부활체로 바꾸시는 것처럼 구원의 서정 역시 그렇게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아는 어떠합니까? 유아의 경우 신앙고백 할 시간적인 틈도 없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은 사람에게 원인을 두지 않기 때문에 선택로서의 유아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믿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선택하셨다고 해서 그것 없이 구원하실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개혁주의 안에서는 단순히 선택하셨기 때문에 구원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선택하시면 시간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때 어떤 과정을 두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방편과 수단을 정하셨기 때문이요, 정하셨다는 것은 누구도 예외 없이 그런 방편과 수단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식으로는 유아이기 때문에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없지만, 시편 19편에서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19:3-4)고 말씀하신 것처럼 들을 수 없는 유아에게 그의 말씀이 미치게 하시고 그 말씀에 반응하게 하심으로 그의 선택이 결코 거짓되지 않음을, 우리는 모를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그들을 구원의 자리로, 영광의 자리로 이끄신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면 선택하신 그들에게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주시는 것이 있는데, 구원의 서정이 그 내용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살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장 6항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택자를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처럼, 그의 뜻의 영원하며 가장 자유로우신 목적에 의해 그것에 덧붙여 모든 방편들을 예정하셨습니다(벧전1:2, 엡1:4,5, 2:10, 살후2:13). 그러므로 선택된 그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었고(살전5:9,10, 딛2:14), 적합한 때에 역사하시는 그의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도록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고, 의롭게 되고, 자녀로 삼아지고, 거룩하게 되고(롬8:30, 엡1:5, 살후2:13), 그의 능력으로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보존됩니다(벧전1:5). 오직 택자 외에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지 못한 다른 어떤 자도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게 되거나, 자녀로 삼아지거나, 거룩하게 되거나, 구원받지 못합니다(요17:9, 롬8:28-39, 요6:64,65, 10:26, 8:47, 요일2:19).”
이것이 오늘 본문 30절에서는 좀 더 간략하게 요약되고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미리 정하심입니다.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선택이 시간의 역사 속에서 부르심으로 나타납니다. 선택하신 자에 한해서 그 부르심은 효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효력 있는 부르심, 유효적 소명이라고 합니다. 이런 부르심은 유기자들에게는 결코 없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는 말씀에서 많은 사람이 청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모두가 응답하는가? 거기에 모두가 효력을 발휘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효력 있는 부르심이 있는가 하면, 효력 없는 부르심도 있습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은 누구에게만 나타나는가? 미리 정하신 자들, 영원 전부터 선택하신 자들에게서만 나타납니다.
이런 부르심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영화롭게 되는데, 신앙고백서 안에 있는 많은 내용이 빠져 있지만 소위 구원의 서정, 혹은 칼빈이 말하는 것처럼 긍휼의 순서라고 하는 이 과정을 다 겪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에 성화 부분이 빠져 있지만 영화롭게 하셨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거룩하게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결국 영화의 자리에 앉히고야 마는 것입니다.
결국 28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그 최종적인 자리는 영화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특히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모든 표현이 다 과거형입니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부르셨습니다. 믿음을 주시고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영화롭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죄와의 싸움을 싸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뭐라고 부르십니다. 성도라고 부르십니다. 거룩한 무리라는 것입니다. 거룩을 위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데, 거룩한 자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또한 본문은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도대체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셨다면, 그리고 그 선택으로 부르셨다면, 부르실 뿐만 아니라 믿음을 주셔서 의롭다 하셨다면, 영화롭게 하지 못한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에 있는 표현으로 하자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여기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다 그리스도를 주신 자들이고, 그리스도를 주신 자들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구원의 서정으로서 결국 영화의 자리에 앉히고자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정론입니다.
이런 예정론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무엇입니까? 앞서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자들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으로 시작하시고 이끄시고 또한 마친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안전하기 때문에 평안합니다. 확신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구원을 맡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바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는 한해서 인간에게 구원을 맡긴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 받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늘 사사기의 구조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죄를 지으면서 회개할 수 있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런 은혜가 아닌 내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면 결국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우리, 부족한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론 약속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말씀은 은혜언약을 골자로 합니다. 그러나 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하나님의 속성처럼 불변하다는 데 있습니다. 영원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면 결코 버린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선택이 영원 전이라면 영원 전에 선택하신 것이 시간의 역사 속에서 구원의 서정으로 나타난다고 할 때 우리는 선택이라는 것 때문에 구원의 서정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정론이 목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 그것은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시고 결국 영화의 자리에 앉히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지상의 삶의 과정을 무엇으로 채우시느냐?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는 데 채우십니다. 즉 지금 여러분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힘들게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할 목적으로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목적을 향해 가기 보다는 늘 원망과 불평입니다. 원망과 불평이기 때문에 광야 40년, 바벨론 70년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런 우리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를 이 방향으로 이끌어가시도록 계속해서 교훈하시는 겁니다. 순종하라고 명하시고, 불순종할 때는 책망과 징계도 하시는 겁니다. 즉 순종하라고 명하시는 것도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책망과 징계를 하시는 것도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 선지서를 보면 많은 부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징계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결국 선택하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요,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영화의 자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매 주일 공적 규례로 우리는 한 장소에 모여서 정한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의 목적도 다르지 않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요,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참된 교회라면 권징을 말하게 되는데, 교회 안에 권징이 있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단지 정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죄에 대하여 돌이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이라는 예정론 안에서 그리스도와 구원의 서정을 두신 목적을 분명하게 알고 우리를 그 방향으로만 몰고 가려고 해야 합니다. 내 기준, 내 아이디어,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가로 우리 자신을 살피셔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조명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방향으로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정론을 믿고 있다면, 하나님의 선택하신 그 은혜를 알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을 예정론의 목적,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인 이것을 위해 우리의 마음을 쏟고, 힘과 목숨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