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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느껴요 코카 콜라
출처: http://xa1a.blog.me/220677504257
87-88년대 방영된 코카 콜라 CF. 캡춰 사진은 한국과 일본이 섞여 있다.
일본은 이 CF의 인기가 좋아 최근 따로 DVD로 발매되어 판매될 정도다.
그래서 좀 주의깊게 일본 편을 봤는데, 그 역동적이고 과감한 샷이 30년 전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세련됐다.
한국편의 수준이 일본과 비교할 바 못되지만, 당대 한국 CF으로서는 최고였던
걸로 기억한다.
두 나라의 CF가 유사해 논란거리가 될 수도 있다.
미국 본사의 동아시아 정책이 어떻고 저떻고 떠나서 두 나라의 CF를 보면
어느 쪽이 다른 쪽을 인용 혹은 모방한 걸 부인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국편은 여성 캐릭터를 과감히 활용한 액션이 포인트며 그래서 약간 거친 느낌을
준다.
한편 일본편은 camera 자체가 무척 역동적이인데 샷들이 무척 과감하다.
부드러운 여성 이미지와 활력있는 남성을 역동적으로 담는 장면들이 꽤 조화로운데
이런 자신감이 청량음료치고는 감미로운 음악으로 연결된 듯 싶다.
그리고 일본편은 theme도 무척 다양하다.
한국편은 여성들이 과감하여 활력있고 재미는 있는데 짧은 시간이지만
내러티브가 단순하고 직선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음악 또한 아주 강렬하다.
또한 camera의 움직임과 더불어 model의 움직임이 종종 끊긴다는 인상을 주는데,
편집이 신선한 camera의 움직임을 미처 못 따라오는 느낌이다.
이런 부조화는 물론 자신의 내공 이상을 표현할 때 나온다.
심혜진은 cf 퀸으로서 자리매김했고, 일본의 마츠모토 타카미도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도저히 30여년 전 작품이라는게 믿기지가 않으니 시대를 앞서간 CF가 아닌가 싶다.
자본주의 정점의 다국적대기업이 제시하는 이 달콤하고 매력적인 판타지를 보라.
코카콜라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든 이유가 담겨있으며
우리가 어떤 종류의 유혹에 쉽게 마음을 뺏기고 무력하게 되는지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최고의 명작 CF 'I Feel Coke.1987'. 명암이 공존했던 서울의 '난 느껴요.
코카콜라.1988'
출처: http://blog.naver.com/loverpoet/220538127193
I feel Coke
(난 느껴요, 코카-콜라)...
初めてじゃないのさ(この気分)I feel Coke
처음이 아니야(이 기분)
いつでも一緒ならば(君のそばで)I feel Coke
언제라도 함께라면(당신의 곁에)
いま何か感じてる Coca-Cola
지금 뭔가 느끼고 있어 Coca-Cola
さわやかTasty, I feel Coke
상쾌한 Tasty, I feel Coke
もう一度確かめて(あの気分)I feel Coke
다시 한 번 확인해봐(이 기분)
触れあう このFeeling(君のそばで)I feel Coke
맞닿은 이 기분(당신의 곁에)
I feel Coke, I feel Coca-Cola
I feel Coke, I feel Coca-Cola
I feel Coke / コカ・コーラ(Coca-Cola). 1987
井上大輔(이노우에 다이스케)
1987년 일본 광고 대상을 수상했던 이노우에 다이스케의 I feel coke는 가히 역사상 최고의 명작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밝고 아름다우며 그 어떤 유행가보다도 귓가에 오래도록 남아 흐른다.
물론 개인적으로 인본 역사상 최고의 명작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이 CF는,
일본 역사상 가장 풍성하고 밝고 아름다웠던 버블경제시기
일본인의 행복한 모습을 그대로 담아 수십년이 지난 지금보아도 너무나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리고 이듬해 88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우리나라에서 그 명작을 그대로 카피하여
송출했던 '난 느껴요.코카콜라'
심혜진을 깜짝 스타로, 무명의 이종원을 CF계의 총아로 만들었던 역시나 아름다웠던
CF.
1988년 당시 홍익대학교 부속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이 광고가 아침부터 밤까지 온종일 흘러 나오던 그 시기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드리워진 한국을 몸소 겪고 있었다.
민주화 운동 막바지의 격렬했던 대학생들의 시위덕에,
나는 국민학교 1~4학년때 까지는 거의 매일을 대기중에 남아 있는
최류탄 분말 때문에 물에적신 손수건을 마스크처럼 쓰고 울면서 등교를 했었고..
하교길에는 홍대정문앞 놀이터(시위때마다 전경측의 야전 HQ 지점으로 사용되었던)에서 시위대와 공권력의 충돌을 지켜봐 왔었다.
물론 동시에, 서울의 아파트 한채가 2천 만원 하던 그 시절,
대기업 & 중소기업의 월급 및 복지혜택의 차이가 거의 없이 대동소이하던,
그 누구나 열심히만 하면 중산층이 될 수 있던 그 시절의 어른들의 밝고 뭔가 활기로 가득했던 세상의 기운도 느낄 수 있었다.
당시엔 그랬다, 식자들은 땡전뉴스라 비꼬았던 9시 뉴스에서 매일매일 부각하던
각하의 치적과는 별개로, 실제로 한국의 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하고 있었고,
일례로 건설현장의 잡부로 일해서 집사고 자식들 키우고 대학 보내고 시집장가를 보낼 수 있던 그런 시기였다.
(80년대 당시 노가다 잡부 일당이 5만원 이었지..)
당연히 원활한 국민들의 소비생활에 따라서 내수 경제도 역시 활황이었고,
집집마다 아빠들이 차를사기 시작하고 피아노를 들여놓던 그런 시절이었다.
같은시기, 고등교육을 받은 대학생들은 크게 잘못되어 돌아가는 한국의 정치,사회
시스템을
바른곳으로 놓기 위해 앞장서서 싸워 왔었고,
결국 넥타이 부대들의 시청광장 침묵시위를 결정타로 노태우의 6.29 선언이 이루어
지던...
정말 다이나믹 했던 그 때의 대한민국.
그 시절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