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윤동주는 이상(李箱)과 더불어 '거울 보기'를 보여 주는 대표적 시인이다.
이상(李箱)이 지적인 태도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아의 분열된 상태를 비정(非情)한 응시(凝視)를 통해 시화(詩化)한 반면에 윤동주는 거울을 통해 내면의 자아를 응시하고 현상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의 간극(間隙)만큼 그 불일치(不一致)의 부끄러움을 느끼며 내면적 성숙을 위한 자아의 진정한 성찰을 보여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윤동주의 시는 진지한 내면적 고백의 어조가 차분하게 드러난다.
이 시도 '거울 보기'의 하나인 것이다. 먼저 이 시의 대칭적 구조를 살펴보자.
녹이 낀 구리거울 (A) --- 녹을 닦아 낸 거울 (B)
(A)에 비친 나 --- (B)에 비친 나
위의 구조에서 좌항은 변증법적 극복을 통해 우항으로 지향된다. 이 극복은 '거울 보기'로 실현된다. 이 거울 닦기는 밤이면 밤마다 지속되는 외롭고 고통스런 일이며, 전심 전력으로 임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극복의 도정인가? 그것은 A의 부정적 의미를 제거하는 일이며, 동시에 B를 위한 목표 때문이다.
이 시는 참회라는 자기 반성을 모티프로 한다. 망국의 식민지 지식인, 그것도 조국을 떠나 만주 땅에서 우리 민족의 모순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욕된 자아의 정체와 끊임없는 내적 성찰을 통해 갈등의 내외적인 자아가 통일을 이루는 화합의 장면을 보여 준다.
이 시는 서정적 자아가 '거울'이라는 매체를 통해 망국에 처한 자신의 모습을 조망하는 데서 출발한다. 푸른 녹이 낄 정도로 방치되고, 무관심했던 삶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며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이라는 자아의 삶의 기간에 대해 다소 처량한, 그러나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참회의 내용은 짧다. 그리고 이렇게 가다가는 미래의 내 모습도 결국 또 참회록을 쓸 상황이 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도 드러나 있다. 내일이나 모래의 '즐거운 날'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자세이면서 삶의 반전을 꾀하는 부분이다. 다시 또 이러한 다짐 속에 암담한 현실의 밤을 자신을 성찰하는 고백 노력으로 지새운다. 성찰의 매체가 된 거울을 닦음으로써 욕된 자아와 결별하고 도덕적인 자아를 만나려는 것이다. 손바닥 발바닥이 드러내듯 온몸으로 노력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슬픈 사람은 상황에서 비쳐진 모습이다. 그리고 그는 빛을 잃은 우주 공간의 운석 위에 있다. 자신의 내적 성찰을 통한 사람은 도덕적이다. 희망을 예비하는 일은 이렇게 도덕적이어야 한다. 거울 속의 나는 적극적 의지의 자아이며 내적 갈등이 해소된 모습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미래의 행위를 현재화하고 있다. 즉, 이 시는 현재의 삶의 의미에 대한 참회 의식과 미래의 즐거운 날에 현재를 또다시 참회해야 하는 복합적인 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3연 2행의 '써야 한다'와 마지막 행의 '나타나온다'라는 현재형은 '써야 할 것이다'와 '나타나올 것이다'로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시인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당위의 차원에서 표출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
한편, 이 작품에서 '슬픈 사람의 뒷모양'은 모호하다. 거울 속에는 앞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과학적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시인은 분명히 '뒷모양'이라고 했다. 이것은 현재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미래에서 현재를 생각한 것이다. 그러기에 미래의 영광스런 자아가 된 입장에서 현재의 자신을 생각하니까 현재의 실존은 '슬픈 사람'이고, 전도된 시간적 양상에서 앞모습이 아닌 '뒷모양'이 거울에 나타나는 것이다.
각 연을 나누어 정리하여 본다.
1연은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 망국민(亡國民)으로 무의미하게 생존해 있는 자신이 수치스럽고 욕되다는 것이다. '파란 녹이 낀 거울' 속의 나는 식민지 백성으로 욕된 삶을 살아가는 화자 자신이기도 하다.
2연은 망국민으로 살아온 자기의 삶을 참회하고 있다. 너무나 부끄러운 삶이었기에 길게 참회할 것도 없다고 한다. '만 이십 사 년 일 개월'은 지금까지 희망도 없이 무의미하게 살아온 생애를 뜻한다. 제1연과는 인과(因果) 관계에 있다.
3연은 앞으로 반드시 오고야 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참회를 하게 될 것이다. 즉, 젊었을 때 왜 암담한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자기 고백이나 하고 있었느냐고. '즐거운 날'은 우리 민족의 광복의 날을 뜻한다.
4연은 아픈 자기 성찰을 하자는 것이다. 무기력하게 실의에 빠져 있는 자신을 채찍질하고 지향점을 찾자는 것이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는 온몸으로 가능한 한 열심히 성찰하자는 것을 제유법(提喩法)을 써서 표현한 것이다. 자아 반성을 통한 결의를 보여 준다.
5연은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모습을 형상화한 연이다. 어두운 밤하늘에 사라지는 별을 보면서 외롭게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 속에 보인다는 것이다. '운석(隕石)'의 원뜻은 별똥별이다. 이 말은 별이 하나 지면 누군가가 죽는다는 죽음의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밤'이라는 시어와 함께 암흑의 시대적 상황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며, 한편 서정적 자아가 처한 상황이며, 슬픈 사람의 이러한 상황의 자아인 것이다. 여기서 바로 끊임없이 자아 성찰을 위한 노력을 거듭할 때 도덕적 자아와 화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슬픈 사람의 뒷모양'은 세상을 단절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자아가 되기도 하며,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바라본 참회의 자아. 또는 자신의 운명에 따르는 시적 자아의 지향(시대적 상황에 의해 표면에서 사라져 가는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시는 윤동주가 일본에 건너가기 직전에 쓴 것인데, 이 시를 쓸 당시에 이미 스스로 앞날의 운명을 예견했다는 점에서 퍽 감동적이라고 하겠다. 특히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의 뒷모양'은 마치 자신의 생애를 미리 그린 것 같은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어쨌든 윤동주는 짙은 자기 성찰의 진지함을 시화한 면에서 식민지 시대의 한 지식인의 눈물을 보여 주었다.
(핵심 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반성적. 고백적. 참여적
*심상 : 상징적
*표현 : 역사 의식의 표출. 내면적 자아와 대응. 자기 고백적 자세. 우주적 상상력
*구성 :
1연 망국의 욕된 자아(자기 확인)
2연 참회의 자세(현재의 삶)
3연 참회의 자세(미래의 삶)
4연 성찰을 위한 노력(자기 정체)
5연 자아의 확인(내면과 일치)
제재 : 녹이 낀 구리거울. 자아의 생활
주제 : 자기 성찰을 통한 순결성 추구. 역사 속에서의 자아 성찰과 고난 극복 의지
출전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요약)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북간도(北間島)
*주요저서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주요작품 : 《서시(序詩)》,《또 다른 고향》,《별 헤는 밤》
(본문)
북간도(北間島) 출생.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도일,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 사상범으로일경에 피체, 1944년 6월 2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연길(延吉)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고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시를 묶은 자선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남긴 것이 그의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된 윤동주는 일약 일제강점기 말의 저항시인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씌어진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 어느 한 편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울분과자책, 그리고 봄(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연세대학교 캠퍼스와간도 용정중학 교정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며, 1995년에는 일본의 도시샤대학에도 대표작 《서시》를 친필과 함께 일본어로 번역, 기록한 시비가 세워졌다.
(연보)
1917년 (1세)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이 파평인 부친 윤영석과, 독립운동가,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 선생의 누이 김용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다. 윤동주가 태어난 명동촌은 외삼촌 김약연 선생이 일찍이 이 지방에 이주해 들어와 개척한 지역으로 교육과 종교, 독립운동이 다른 어느 곳보다 활발했던 곳이다. 1910년에는 조부 윤하현이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 윤동주가 태어날 무렵에는 장로직을 맡게 되는데, 윤동주는 태어나자 유아 세례를 받는다. 윤동주는 본명이며 어릴 때 불리던 이름은 해환이다. 윤동주의 형제로는 누이 윤혜원, 동생 윤일주(성균관대 교수), 윤광주가 있다.
1925년 (9세) :4월 4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에 있는 명동 소학교에 입학. 명동 소학교는 외삼촌 김약연이 설립한 규암서숙을 명동 소학교와 명동 중학교를 발전시킨 것으로, 윤동주가 재학할 당시는 중학교는 폐교된 상태였다. 당시의 급우로는 함께 옥사한 고종 사촌 송몽규, 문익환, 외사촌 길정우 등이 있다.
1927년 (11세) : 12월, 동생 一柱 태어남.
1929년 (13세) :송몽규 등의 급우와 함께 벽보 비슷한 '세명동'이라는 등사판 문예지를 간행. 이 무렵 썼던 동요, 동시 등의 작품을 발표.
1931년 (15세) :3월 25일, 명동 소학교를 졸업. 송몽규, 김정우와 명동에서 30리 남쪽에 있는 중국인 도시 대랍자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
1932년 (16세) :4월,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미션계 은진중학교에 입학. 재학중 급우들과 함께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 선수로도 활약.
1934년 (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 한 대', '내일은 없다' 세편의 시 작품을 쓰다. 이날 이후 모든 자작품에 시를 쓴 날자 명기.
1935년 (19세) ;은진중학교에서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 숭실중학 시절 '남쪽 하늘', '창공', '거리에서', '조개껍질' 등의 시를 씀.
1936년 (20세) :숭실중학교 폐교,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 간도 연길지방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지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 발표.
1935년 (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연희전문 문과에 송몽규와 함께 입학.
1941년 (25세) :연희전문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을 발표. 12월 27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 19편으로 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미간. 이 무렵 윤동주의 집에서는 일제의 탄압에 못이기고, 또한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함.
1942년 (26세)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 가을(10월 1일)에는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편입.
1943년 (27세) :7월, 첫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교토대학에 재학중인 송몽규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교토 키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됨(7월 14일).
1944년 (28세) :2월 22일 기소되고, 3월 31일, 일제 당국의 재판 결과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형(3년 구형)언도받아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1945년 (29세) :"2월 16일, 윤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라는 전보가 윤동주의 옥사 사실을 알려옴.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일춘이 일본으로 건너감. 송몽규도 윤동주가 죽은 뒤 23일 만인 3월 10일 옥사. 3월 초, 용정 동산에 안장.
1947년 2월 16정지용, 안병욱, 이양하, 김삼불, 정병욱 등 30여명이 모여 소공동 플로워 회관에서 윤동주 2주기 추도 모임을 갖다.
1948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
1955년 2월 10주기 기념으로 유고를 보완,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다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음사에서 간행.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 학생회 및 문단, 친지 등이 모금한 돈으로 연희전문 시절에 지내던 기숙사 앞에 시비 건립.
첫댓글 윤동주시인 하면 저는 별이 생각납니다. 요즘은 겨울이라서 그런지 도시의 밤하늘에서도 선명한 별빛을 볼수가 있답니다. 피아골님! 알찬 내용의 글 잘 공부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