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 7월에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이억기·원균과 합세해서 조선수군을 지휘하여 일본수군을 크게 무찌른 한산도대첩과, 그해 10월에 진주목사 김시민과 의병장 곽재우가 활약하여 일본군을 무찌른 진주전투,
그리고 이듬해 2월 권율이 이끌던 조선군이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행주대첩을 가리킨다.
1. 閑山島大捷(한산도대첩)
한산도대첩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초기 옥포·적진포·당포·당항포·율포 등의 해전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일본군을 대파했다.
일본군은 당초에 부산에서 한반도의 서남 해안을 돌아
육해병진(陸海竝進) 작전을 펴려다가 실패했다.
이에 일본군은 육상으로 전라도를 공격하여
조선 수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한편
수군의 총역량을 전라도에 집결시켜 반격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그리하여 웅천 방면에 있던 와키사카[脇坂安治]가
73척을 이끌고 출동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특명을 받은 구키[九鬼嘉降]가 42척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이러한 일본 수군의 동향을 탐지한 조선 수군은
1592년 7월 6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이끌어 노량에 이르렀고,
경상우수사 원균이 7척의 배를 이끌고 합류했다.
7월 7일
적함대 70여 척이 견내량에 머무르고 있다는 정보를 받은 이순신은
7월 8일 아침 견내량으로 진공했다.
그런데 견내량의 지세는 포구가 좁고 암초들이 많아서
함대로 판옥선(板屋船)을 많이 가졌던 조선에게 불리했으며,
일본군에게는 위급하면 육지로 도망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따라서 이순신은
견내량으로부터 일본군을 유인하여
한산도 앞바다로 이끌어낼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먼저 판옥선 약간으로 일본의 함대를 유인하여
한산도 앞바다로 이끌어내고는,
급히 뱃머리를 돌려 학익진(鶴翼陣)을 치고
각종 총통을 발사해 적선 2~3척을 쳐부수었다.
이에 당황하여 도망가는 일본군을 맹렬히 공격하여,
47척을 쳐부수고
12척을 나포했으며
무수한 적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 장수 와키사카는
남은 전선 14척을 이끌고 도망가고,
한산도로 도주한 왜병 400여 명이 간신히 탈출했다.
조선 수군은
이 싸움으로 일본 수군의 주력을 크게 대파하여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남해안의 제해권을 잃은 일본 수군은
해로를 통한 수륙병진 계획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육군에게 식량도 공급하지 못하게 되어
일본 육군의 활동에도 커다란 타격을 주게 되었다.
2. 幸州大捷(행주대첩)
1592년(선조 25) 7월 권율은
금산군(錦山郡) 이치(梨峙:배재)에서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일본부대를 무찌르고
그 공으로 전라도순찰사가 되었다.
그뒤 명나라의 군대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북상하다가
수원 독왕산성(禿旺山城)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그리고 조방장 조경(趙儆)을 시켜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진지를 물색하도록 하여,
1593년 2월에는
서울 서쪽 20리에 있는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겼다.
이곳에는 권율의 부대 외에
승장 처영(處英)의 의승군(義僧軍)이 집결하여
병력은 모두 1만여 명이었다.
이들은 활·칼·창 외에
화차(火車)·수차석포(水車石砲) 등 특수무기를 만드는 한편,
조총에 대비하여 토제(土堤)를 쌓고
재(灰)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서 적의 침공에 대비했다.
또한 조도사(調度使) 변이중(邊以中)은
행주산성과 금천의 중간에서 서울의 적을 견제하며
권율의 부대를 돕고 있었다.
한편 일본군은
평양싸움에서 크게 패한 후 총퇴각하여
서울에 집결해서 총대장 우키타[宇喜多秀家]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병력을 정비하고 반격을 기도했다.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3만여 명의 대군을 7개 부대로 나누어
고시니[小西行長]·이시다[石田三成]·구로다[黑田長政]·요시가와[吉川廣家] 등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여, 성을 포위·공격했다.
성 안의 관군과 의승군은
화차·수차석포·진천뢰(震天雷)·총통(銃筒) 등을 쏘아대며 용감히 맞섰고,
권율은 직접 물을 떠서 나누어주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차고 있던 재를 뿌리고
돌을 던지며 싸웠고,
관과 민, 남과 여를 가리지 않고 모두 참여했다.
부녀자들도 긴 치마를 잘라서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나르는 등 투석전을 벌이는 군사들을 도왔다.
마침 경기수사(京畿水使) 이빈(李蘋)이
화살을 가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일본군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이자,
이미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사방의 시체를 불태우면서 도망하기 시작했다.
관군은 도망하는 적들을 추적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고
우키타·이시다·요시가와 등 일본군 장수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갑옷·창·칼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했다.
권율은 이 공로로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었고,
이후 일본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철수를 서둘렀다.
3. 晉州大捷(진주대첩)
1592년(선조 25) 8월에
진주목사로 취임한 김시민(金時敏)은
9월 고성과 창원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내쫓았다.
그러자 김해성에 있던 일본 장수인 가토[加藤光泰]·하세가와[長谷川秀一] 등은
9월 24일
2만여 명의 대병력을 거느리고
경상우도의 조선주력군이 있는 진주성으로 향했다.
일본군의 진격소식을 들은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은
김시민을 독려하고,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과 진주판관 성수경(成守慶), 전만호(前萬戶)
최덕량(崔德良) 등과 협력하여 일본군에 맞섰다.
김시민과 이광악은
3,800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방어작전을 세웠다.
10월 6일
일본대군 3개 종대가 진을 치자
이날 저녁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는
심대승(沈大升)으로 하여금
의병 200여 명을 거느리고 향교 뒷산에서 호각을 불며 불을 지피게 하여
대군의 구원병이 온 것처럼 꾸몄다.
8일 일본군이 대나무다리를 기어오르며
3층의 산대(山臺)에 바퀴를 달아 공격해오자,
김시민은 현자포(玄字砲)를 쏘아 산대를 파괴하고
화약불을 성 밖으로 던져 소나무 언덕을 불지르며
올라오는 적을 쳐서 떨어뜨렸다.
이날 진주 복병장(伏兵將) 정유경(鄭惟敬) 휘하의 구원병 500명이 왔고,
9일 김준민(金俊民)·정기룡(鄭起龍)·조경형(曺慶亨)이 2,000여 명의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또한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와 임계영(任啓英)도
구원병 2,000명을 거느리고 왔다.
이튿날 새벽에 일본군이 동문과 북문으로 쳐들어와
김시민이 이마에 적의 총탄을 맞아 의식을 잃자,
대신 이광악이 전투를 지휘하여 적을 막아냈다.
적진의 영막에서 불길이 일어나서 일본군은 퇴각했다.
이 싸움은
소수의 병력으로 일본군의 대병력을 물리친 대승이었다.
그러나 부상당한 김시민은 곧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