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금관의 기원을 밝힌다
신라는 금관 왕국이라고 할 만큼 일정한 양식의 금관이 경주 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데도,
금관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베리아의 철제 무관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여기 신라의 수도 경주에 있는 금관의 정체와 원형이 시베리아 초원지역 샤먼의 모자에 있다고
탄탄히 믿는 까닭이다. 그 결과 신라 김씨 왕실의 시조를 알타이족에서 찾는가 하면, 아예 신라 왕들을 무당 왕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5세기 신라 금관의 기원을 19세기 민속품인 시베리아 무관에서 찾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모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연대기적 연구에 이력이 난 사학자들이 금관의 기원에 관한 한 연대기의 선후조차 무시한 채 후기 자료를 근거로
기원을 주장하는 당착에 빠져 있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 하나 이 결정적인 모순을 지적하지 않는다.
시베리아 샤먼의 모자는 금관도 왕관도 아니다. 철제 모자이자 무당의 관모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금관의 기원설로 한계가 있다. 그런 한계를 의식한 탓인지 시베리아 기원설에 대한 아무런 성찰도 없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카자흐스탄, 또는
흑해 주변의 금관에서 원류를 찾는 연구들이 이어진다. 틸리아 테페 금관이나 이씩 금관, 사르마트 금관이 신라 금관의 원류라며 새 전래설을 제기한
것이다.
이 금관들 또한 재질의 동질성을 지닐 뿐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전파론을 입증할 만한 논거를 마련하기 어려운 것이다.
관모의 양식부터 신라 금관과 다른 데다가 역사적으로 400년 이상 차이가 날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이 지역과 경주 지역은 유라시아 대륙의 두 끝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에네트족 무당모자 카자흐스탄 이씩고분 출토
모자
시베리아 샤머니즘 관련 유물들
유라시아 대륙의 두 극단에 있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금관을 두고 지리적 공백을 이어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전파론을 펴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다. 전파론의 기본적인 준거인 계속의
준거조차 충족시킬 수 없는 까닭이다.
신라 금관의 고유한 양식은 한반도
안에서도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일정한 분포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신라는 금관 왕국이며 경주는 금관의 수도로 규정해도 지나치지
않다. 더군다나 신라 금관은 고구려와 백제의 금관 양식과 다른 독창성을 지녔다.
고구려와 백제 금관도 독창적이다. 세
나라 금관의 독창성 때문에 한반도 내의 관모들도 특정 금관을 원형으로 설정하고 전파과정을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다. 실제로 그런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도 않았다.
중앙아시아 세 나라의 금관들 또한
어느 것이 원형인지 또는 어디서 전파되었는지 밝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같은 지역 같은 문화권에 있는 금관들조차 무엇이 원형인지 어디로
전파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떨어져 있는 지역의 금관을 두고 영향을 받은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라 금관의 중앙아시아 원류설은 최소한의 논거조차 갖추지 못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두 지역 금관들을 비교
분석해 보면 관모의 구조나 세움장식의 양식이 영향관계를 인정할 만한 동질성을 찾을 수 없다.
신라금관의 이중 구조-외관과
내관
신라 금관은 세움장식을 갖춘 겉관과
절풍 양식인 속관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세움장식이 계림의 신성한 숲을 상징하는 나무 모양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고 세움장식의
역사적 발전과정이 논리적 체계를 이루며 일목요연하게 포착되고 있다. 게다가 절풍 양식의 속관은 고조선 이래 우리 관모사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세움장식의 겉관은 신라 초기 김알지 신화의 계림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 금관의 모든 세움장식은 계림을
상징하는 신수를 양식화하여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김알지 신화의 세계관을 근거로 창출된
금관의 양식은 역사적 발전단계를 체계적으로 잘 보여준다.
계림의 신수를 나타내는 세움장식의
양식이 그 열쇠이다. 세움장식은 흔히 나뭇가지라고 하는 1) ‘곧은 줄기 곧은 가지’에서, 출자 모양 또는 직각수지형이라고 하는 2) ‘곧은
줄기 굽은 가지’, 사슴뿔 모양이라고 하는 3) ‘굽은 줄기 곧은 가지’ 양식으로 발전되어 왔다. 다시 말하면 1)의 기본형에서 2)의 가지
변이형, 3)의 줄기 변이형으로 변화 발전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세움장식의 가지 끝마다 나무의 자람점과 생명력을 상징하는 ‘움’이 봉긋하게
돋아 있고 신수에는 나뭇잎과 태아를 상징하는 달개와 곡옥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계림의 금궤도
그런데 금관의 기원을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찾는 학자들은 ‘굽은 줄기 곧은 가지’ 모양 세움장식을 사슴뿔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사슴뿔 한 쌍을 모자의 정수리에 부착해 놓은
시베리아 샤먼의 무관에서 신라 금관이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사슴뿔에 왜 새 순을 상징하는 ‘움’과 나뭇잎, 그리고 태아 모양이 달려 있을까.
기막힐 노릇이 아닌가.
더 기막힌 일은 줄기 변이형
세움장식이 사슴뿔이 아닌 것은 물론, 3)의 유형인 굽은 줄기 곧은 가지 양식은 신라 금관의 가장 후기에 나타난 양식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후기에 만들어진 세움장식을 근거로 금관의 기원을 말하는 모순된 주장이 거듭되어도 학계에서 아무런 문제 제기가 없다.
시베리아 샤먼 기원설을 따르면,
무관의 사슴뿔을 본받아 가장 발전된 양식의 세움장식을 먼저 만들고, 이어서 기본형이자 초기형인 나무 모양의 세움장식을 만들었다고 하는 억지를
인정해야 한다. 그 동안 이런 억지 주장이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정설처럼 통용되어 왔다는 점이 더 문제이다.
더 심각한 일은 신라 금관을 왕이
생전에 쓴 왕관이 아니라 부장품으로 조잡하게 만든 장례용 데드마스크라는 주장이 일반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왕이 쓰는 의전용 관모와
얼굴을 가리는 가면조차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학계의 수준이다.
잘못된 연구 탓에 경주박물관
홈페이지에서는 금관의 설명을 사슴뿔에서부터 시작하고, 천마총 안에서는 안내자들이 금관을 주검의 얼굴을 덮어 가리는 데드마스크로 설명하고 있다.
정말 금관은 머리에 쓰는 관모가 아니라 얼굴을 가리는 가면인가? 신라인들의 창조적 문화유산인 금제 왕관을 시베리아 샤먼의 모자에서 원류를 찾는
것조차 모자라서, 이제는 아예 왕관 취급을 하지 않고 조잡한 부장품용 가면으로 격하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연구사에서 더 뼈아프게
성찰해야 할 문제는 이러한 기막힌 해석들조차 어느 하나 우리 학계의 독창적인 연구성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일본학자들이 주장해 온 북방문화 전래설과 주검에 사용된 부장품이라는 해석을 고스란히 존중하며 더 풍부한 논거로 부연 설명하는 데 만족하고 있는
수준이다.
당시의 식민사학은 우리 문화와 민족의
정체성을 부정하느라 북방문화 전래설과 북방민족 도래설을 펴는 데 골몰했다. 따라서 일본학자들은 구석기 시대를 부정하는 동시에 고조선의 역사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신라 금관을 비롯한 고대문화를 한결같이 시베리아 기원설로 묶어 두었다. 선사시대 암각화에서 현재의 굿 문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학계는 그들의 주장을 답습하느라 시베리아 기원설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최근 연구는 시베리아
기원설에서 몽골기원설 또는 몽골경류설로 정교화 되거나 중앙아시아 기원설로 확대되고 있다. 고대문화는 어느 것이나 시베리아 샤머니즘과 유목문화가
문화적 원천인 것처럼 도래설과 전래설을 되풀이할 따름이다. 해외여행과 외국답사가 자유로워지자, 그 동안 제기되지 않았던 문화현상까지 몽골문화
기원설이나 바이칼 원류설을 새로 주창하는 경향까지 나타난다. 그러므로 21세기 한국학 일부는 여전히 식민시기 일본인들의 시베리아 기원설을 부처님
손바닥처럼 여기며 그 안에서 맴돌고 있는 셈이다.
자기 문화를 보고도 자기 문화인 줄
모르니, 일본이 역사왜곡을 하고 중국이 동북공정을 해도 학문적 대응 역량을 도무지 갖추지 못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와 문화는 물론 민족적
혈연까지 북방의 여러 민족들과 초원지역 유목문화에 가져다 받치는 연구를 거듭하고 있는 처지가 아닌가.
이제라도 눈을 바로 뜨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학문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 역사와 문화를 보는 눈길을 바로잡아야 한다. 일제 강점기 이후 통념화된 교과서적 지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식민사학의 패러다임을 무너뜨려야 우리 문화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임재해(林在海)교수 약력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안동대학교 국학부
및 대학원 민속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안동대학 박물관장, 한국학연구원장, 한국구비문학회장, 비교민속학회장, 한국민속학술단체연회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등을 역임하고, 현재 전통마을 BK21 팀장, 안동문화지킴이 등의 일을 함께 하고
있다.
저서로는
<민속문화론>(문학과지성사, 1986)
<설화작품의 현장론적 분석>(지식산업사,
1991)
<한국민속과 오늘의 문화>(지식산업사,
1994)
<민속마을 하회여행>(도서출판 밀알,
1994)
<한국민속학과 현실인식>(집문당,
1997).
<지역문화와
문화산업>(지식산업사, 2000).
<지역문화, 그 진단과 처방>(지식산업사,
2002).
<민속문화의
생태학적 인식>(도서출판 당대, 2002).
<민속문화를 읽는 열쇠말>(민속원,
2004).
<민족신화와
건국영웅들>(민속원, 2006).
<마을민속 조사연구 방법>(민속원,
2007).
<신라
금관의 기원을 찾는다>(지식산업사, 2008).
<안동문화의 전통과 창조력>(민속원, 2010)
등 28 책이 있다.
편저로는
<한국의 민속예술>(문학과지성사, 1988).
<한국민속연구사>(지식산업사,
1994).
<한국민속사입문>(지식산업사,
1996).
<국학의
세계화와 국제적 제휴>(집문당, 1999).
<국보 하회탈 그 한국인의 얼굴>(민속원,
2005).
<고대에도
한류가 있었다>(지식산업사, 2007) 등 26 책이 있으며, 모두 3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첫댓글 임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