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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출판사 제공 책소개(알리딘 서평에서 옮겨옴)
21세기 진경산수화로 다시 빛나는 아름다운 자연과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이 땅의 아름다움에 감복하여 깊이 고개 숙이는 화가가 있다. 이 땅에 뿌리내리고 오랜 세월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온 모든 것들에 두 손 모으는 화가가 있다. 하찮은 풀벌레부터 수령 삼사백 년은 거뜬한 신목(神木)에 이르기까지, 졸졸 흐르는 작은 실개천부터 굽이쳐 흐르며 땅의 허기를 달래는 큰 강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들에 기대어 대대손손 삶을 일구어나간 다양한 사람들에게까지, 화가의 눈길과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화가는 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먹을 간다.
한국화가 이호신은 진경산수(眞景山水) 기법을 계승한다. 실재(實在)하는 경관을 사생(寫生)하는 진경산수는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이 우리나라 산천(山川)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으면서 발전시킨 기법이다. 마주한 자연경관이나 대상에서 느낀 인상을 빠른 필치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고, 또 그러한 것들을 관념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기에, 진경산수는 산세, 지세, 물의 흐름은 물론 풀 한 포기, 나뭇잎 하나까지 샅샅이 살피는 관찰의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 제 발로 찾아다니고 제 눈으로 확인하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기본으로 갖추어야 하는 일이며, 이를 오랜 시간 지속해오기 위해서는 끈기와 집념이 함께해야 하는 일이다. 피상적 관찰에 머무르지 않고, 그 본질에 가닿도록 자신을 낮추어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동안 화가는 이 땅 위의 것들과 교감하고 감응한다. 그들에 감탄하며 머리 조아리는 마음이 붓끝으로 모여 하얀 종이에 번지고 한 폭의 그림이 되어간다.
이호신이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 한결같이 지난한 작업에 매진한 결과가 두 권의 책으로 정리되었다. 그 하나는 이 땅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옛 현인(賢人)들의 지혜와 안목이 집약된 사찰들을 그린 『가람진경』이고, 다른 하나는 이 땅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역사와 문화, 삶의 터전이 되어준 어머니 산을 그린 『지리산진경』이다. 이 ‘진경산수’ 시리즈는 특정 전시를 위해 그림들을 모아놓은 전시 도록이나 화보집이 아니다. 이야기를 갖추고 짜임새 있게 구성하여 완결된 단행본이다. 이 시리즈는 화가의 품속에 늘 함께하며 밑그림과 습작을 담아낸 수천 권의 화첩에서 배양되었으며, 책에 수록된 290여 점의 그림은 사찰과 지리산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아름답고 장엄한 자연과 문화의 정수(精髓)요, 오늘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역사와 삶의 현장이다. 또 시대 변화와 발전의 기치를 앞세우기 이전에 살피고 지켜나가야 할 가치들의 기록이다.
더불어 특별히 정성을 기울인 책의 장정은 가장 한국적인 것을 가장 한국적인 기법과 정서로 그려낸 한 점 한 점 작품들의 의미와 가치,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오랜 시간을 들여 대부분 수작업으로 진행된 책의 장정은 불필요한 장식 서체나 이미지를 배제한 단정한 표지에 제목을 세로쓰기하고, 책등을 덮어 가리는 부분을 없애 실로 맨 부분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전통 서책의 느낌을 자아낸다. 나아가 이러한 형태의 제본은 기존의 양장제본 방식과 달리 책등이 완전히 꺾이며 책의 양쪽 면이 180도로 활짝 펼쳐질 수 있어 그 폭이 최대 4미터에 이르는 장대한 작품들까지 온전히 감상할 수 있게 해준다.
‘대관소찰 소중현대(大觀小察 小中顯大)’, 즉 크게 보되 작게 살피고, 작은 것 속에 큰 의미가 담겨 있음을 늘 되새기며 작업하는 화가 이호신의 진경산수 그림들은 천년 고찰(古刹)의 안마당으로, 우뚝한 지리산의 봉우리들로 보는 이들을 인도한다. 우리는 화가와 더불어 매의 눈을 달고 창공을 날아오르는가 하면 다소곳이 합장하며 가람들을 둘러볼 수 있다. 그러면 적막한 가운데 어딘가에서 풍경과 목탁의 청음이 들려오리라. 또 우리는 배낭을 메고 타박타박 둘레길을 걷고 숨이 턱까지 차오를 즈음 천왕봉에 올라 발밑으로 펼쳐지는 산맥의 물결과 조우할 수 있다. 그러면 산 기운 가득한 맑은 바람이 머리칼을 흩트리리라. 봄, 여름, 가을, 겨울, 저마다의 특색을 뚜렷이 드러내는 이 땅의 아름다움이 펼쳐지는 중에, 우리는 천년을 거스르는 시간 여행을, 지리산 구석구석으로의 공간 여행을 떠날 수 있다. 그것은 현재의 여행인 동시에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는 여행이기도 하다. 더불어 우리는 곁에 있기 때문에 더 소홀히 했던 것들을, 당연한 듯 누리기만 하고 감사의 마음은 잊은 것들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화가 자신의 성찰과 구도의 과정이 담긴 화폭은 보는 이에게도 깨달음과 반성의 시간을 열어준다.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것들에 대해서.
『가람진경』 - 수묵화로 피어난 가람의 향기
4세기 무렵 이 땅에 전래된 불교는 수세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의식, 문화, 역사 속에 깊이 침투해 있으며, 아름다운 산천 곳곳에 수행과 경배의 도량을 건설해놓았다. 속세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련 정진해야 하는 종교의 특성상 가람들은 높은 산 깊은 숲속, 산수가 조화를 이룬 곳에 자리 잡았다. 산수의 흐름과 지형을 살펴 터를 마련한 옛 선인들의 지혜와 안목은 그 도량의 건축물, 불상, 탑, 석등은 물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까지 두루 미쳤다. 따라서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룬 가람은 수행과 경배가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공간일 뿐 아니라, 역사와 전통 문화를 되새길 수 있는 곳이요, 그곳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마음의 안식과 평안함을 주는 쉼터 역할을 하는 곳이다.
중견 한국화가 이호신이 “우리 산천 곳곳에 꽃처럼 피어난 가람의 향기”를 찾아 화첩을 끼고 이 땅 여기저기를 다니며 그림을 그린 지 어느덧 스무 해가 넘어가고 있다. 그러는 동안 백발이 희끗희끗한 초로의 모습이 된 화가는 오늘도 인연 닿는 절로 떠나 천년 고찰과 현대 사찰을 가리지 않고 오늘날의 우리 가람의 모습을 화첩에 담는다.
산천이라는 둥지에 알처럼 파묻힌 가람은 어느 한 곳에서 조망하여 사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가람 주위의 산을 수차례 오르내리며 산세와 계곡물의 흐름, 지형을 살피고 가람 속의 건축물, 조형물, 조경, 원림 등을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각 건물의 실측도를 사생하고 여러 시점에서 본 가람 배치도를 그려본 후에야 이들을 화면에서 재구성할 수 있다. 마침내 화면에서는 대담한 필묵법으로 자연 경관이 표현되고 섬세한 필치로 사찰의 당우와 조형물 등이 묘사되어 조화미와 균형미가 가득하며 웅장함과 세밀함이 교차한다.
이렇게 발로 뛰고 몸으로 체득하며 오랜 시간 공들여 나온 작품 중 이 책에는 83개 사찰 130여 점을 수록했다. 이들 작품은 1992년부터 2012년에 제작된 것으로, 한국화의 멋, 특히 전통 진경산수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넘실거리는 산맥과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들 사이에 오롯이 드러난 가람들은 말 그대로 산과 계곡 속에 꽃처럼 피어난 듯하다. 가람을 품고 있는 주위 산세, 물의 흐름과 더불어 당우의 배치가 한눈에 드러나는 가운데, 탑과 불상 같은 조형물, 가람과 역사를 함께한 신목(神木)은 물론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들, 경배하는 사람들, 산사에서 한가로움과 느긋함을 즐기는 이들까지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땅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문화유산이, 박물관에 놓인 박제된 유물이 아닌 이 시대 사람들과 함께하며 살아 있는 문화유산의 진면목이 눈앞에 펼쳐진다.
여기서 화가는 한국화의 전통 기법을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탁본기법이나 목판기법을 응용하며 현대적인 색채와 기법을 가미하였다. 이는 화가 이호신이 늘 되새기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자세요, 천년 사찰을 오늘날의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한편 이들 작품은 한국 진경산수화로서의 작품성에 더해, 역사 상황에 따라 부침을 겪거나 화재, 대작불사(大作佛事) 등으로 훼손되고 변형되는 사찰들의 이전 모습의 기록으로서의 가치 또한 지닌다. 그래서 각 사찰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 창건의지(創建意志), 관련 설화들을 수록하여 각 사찰의 문화, 역사적 의미를 함께 살피도록 배려했다.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 역사를 가장 한국적인 색채와 필치로 드러낸 이호신의 사찰 그림 순례집 『가람진경』의 의미와 의의는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의 평으로 잘 요약된다.
“이는 단순한 이 시대 명찰의 진경화보가 아니라 자연과 역사, 건축과 조각, 회화가 한데 어우러져 숨 쉬는 이 시대 문화의 총화(總和)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진경화법 수련의 교본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지리산진경』 - 지리산 하늘 아래에서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중심 산줄기 백두대간의 끝자락에 놓인 지리산은 그 둘레가 320킬로미터에 이르며 세 개 도(경상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의 한 개 시(남원)와 네 개 군(하동, 구례, 함양, 산청)을 거느린, 넉넉한 산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은 아버지 산으로, 가장 너른 품을 지닌 지리산은 어머니 산으로 불려왔다. 한없이 깊고 넓은 지리산은 해발고도 1천5백 미터 이상인 봉우리 20여 개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긴 능선 사이 큰 계곡들이 웅장하면서도 유현(幽玄)하게 흘러내린다. 이 아늑하며 풍요로운 산세는 지역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 그들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함께했고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담는 그릇이 되었다. 천연기념물, 희귀동물을 비롯한 5천여 종에 달하는 동식물들의 보금자리이자 살아 있는 생태박물관인 지리산은 1967년 한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세계 자연 보존 연맹으로부터 국제적으로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 국립공원으로 선정되었다.
지리산(智異山)이라는 이름을 글자 그대로 풀면 ‘지혜로운 이인(異人)의 산’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이름에 걸맞게 어머니 지리산의 젖줄을 타고 난 훌륭한 학자, 문인, 예술가들이 많으며 또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지리산으로 모여드는 이들이 많다. 한국화가 이호신 역시 어머니 산의 부르심을 받은 듯 지리산 자락을 두루 다녔다. 동해 바닷가 출신의 화가가 지리산의 우뚝한 봉우리와 심원한 계곡을 샅샅이 밟으며 산의 속살을 파고든지 이십여 년이 될 무렵, 화가는 아예 본거지를 옮겨와 어머니 산의 품에 자리를 잡았다. 한국 수묵화의 진경산수 기법을 계승하고 현대적인 필치와 색감을 거침없이 응용하는 그의 붓은 산자락을 오르내리는 두 발과 더불어 쉴 새 없이 움직여 수십 권의 화첩을 채우고 이를 바탕으로 수백 점의 작품을 그려나갔다.
이호신의 지리산 화폭에는 지리하고 유장하게 출렁이는 산맥, 영기(靈氣)로 충만한 봉우리들, 기운차게 쏟아지는 폭포, 너른 옥토를 적시며 흘러가는 강이 있다. 수행과 경배의 도량 천년 고찰과 역사의 무대가 되어 피와 눈물을 쏟은 가슴 아린 현장, 위대한 문학 작품과 구성진 전통 가락을 뽑아낸 터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령 삼사백 년은 거뜬한 신목(神木)이 보호하는 크고 작은 마을들이 있다. 금방이라도 밥 짓는 고소한 연기가 피어오를 것만 같은 살가운 마을들이 산골 구석구석에 살아 있다. 넉넉한 산에 안겨 웃고 울며 살아가는 사람들, 말씨마저 서로 다르게 이질적이고 다양한 삶을 일구어가는 이들이 있는 지리산은 생동의 빛과 숨결로 가득하다. 화업(畵業)을 시작한 이래 이 땅의 자연경관과 생태, 문화유산은 물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현장 답사한 그림과 글을 꾸준히 발표해온 화가의 지리산에 대한 깊은 애정과 오랜 사모의 마음이 화폭에서 진동한다. 이제 그의 그림은 옛날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에서 더 나아간 오늘날의 진경산수요,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 이 시대의 풍속화요, 작가의 표현대로 ‘생활산수’이다.
이호신의 그림은 지리산의 하루이다. 동이 터오는 맑은 첫새벽의 기운부터 하얀 달이 떠오른 밤의 정취까지 모두 담겨 있다. 이호신의 그림은 지리산의 사계이다. 노란 산수유와 눈부신 벚꽃이 만발한 봄부터 흰 눈에 덮이고 꽁꽁 얼어붙은 겨울까지 모두 담겨 있다. 즉 단 한순간도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지리산 그 자체이다. 그러한 그림들 중 이 책에는 지리산 자락에서 피어난 다섯 개 시, 군의 다채롭고 독특한 빛깔과 이야기를 전하는 그림 160여 점을 선별하여 수록했다. 물론 화가는 여기서 선보이는 작품들에 그치지 않고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이는 지리산을 향해 오늘도, 내일도 붓길을 이어간다.
두루두루 살필 것이 많아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는가. 이호신의 그림에는 지리산이 품고 있는 역사와 문화가, 옛것과 새것이, 자연과 인공이, 시골과 도시가, 풍류와 낭만이 한데 어우러진다. 화가의 발자취를 따라 지리산 하늘 아래를 둘러보는 것이 바로 지리산 순례요, 둘레길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