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판
시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부산시조문학회’를 만들고 동인지 ‘볍씨’를 발간했다. 50년 전 1974년의 일이다. 처음은 남녀 문인이었다가 여류가 따로 모임을 하면서 유별하게 됐다. 이어 ‘부산시조시인협회’가 생기면서 우뚝한 세 단체가 가족처럼 지냈다. 그 외 다른 시조 단체도 나타나면서 부산 시조 문학은 활발하게 발전해 나갔다.
고대 가요가 짧게 불리다가 향가로 나타난다. 우리말 발음을 더듬더듬 한자로 기록한 향찰이다. 고려에서도 항간에 불리던 우리말 노래가 죽 이어 내려갔다. 조선 초에 훈민정음 한글이 나오면서 전해 내려오는 가요들을 하나하나 기록으로 세상에 남겼다. 거기에 고려 중기 시조와 비슷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거듭되다가 말경에 정작 나타났으니 7백 년 남짓한 역사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널리 쓰였다. 온통 시조 세상이다. 세종의 한글 창제로 우리말을 우리 글로 적어나갔다. 남녀노소 귀천 없이 짓고 노래했다. 임금에서 기녀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쓰고 읊조렸다. 조선 말까지 그 수가 자그마치 수만 편에 이르니 놀라운 일이다. 한 수 45자 내외로 또박또박 정형을 이뤘다. 연시조로 나타나고 사설로도 발전했다.
여러 가지 변형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정형을 잃지 않았다. 조선 말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때 신시가 나타나면서 잠시 멈칫하다가 잘 이어 내려가고 있다. 오래도록 내려오다가 사라진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시조만치나 많은 수의 가사(歌辭)도 시조가 넓혀진 모양이다. 시조로 시작해서 시조로 끝나는 종장이다.
직사각형 세 줄로 짧은 것이 시조 형태다. 누구나 짓고 불리던 전통의 문학 시조는 종장의 결론이 멋지다. 어쩌면 다를 수도 있을 텐데 변함없다. 엄격하리만치 정형이다. 약속이나 한 듯이 고정불변이다. 시조와 사설, 양장, 가사가 모두 3.5.4.3으로 끝난다.
“우리도 이같이 얽혀 한평생을 누리리”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고려말 이방원과 정몽주가 주고받은 글로 구김살이 없다. 글자 수를 맞추려 애쓰다가 보면 생경하게 쓰일 텐데 천연덕스럽다.
“그래도 하 애도래라 가는 뜻을 닐러라”
“보내고 그리난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치마끈 드시려 하자 눈물 벌써 굴러라”
조선 초 성종의 시조와 중기 명종 무렵 황진이 글이다. 일제 치하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떠나면서 정인보와 어머니가 주고받은 내용이다. 어쩜 이다지도 자연스러울까. 허심탄회한 내용이 사람의 가슴을 후벼판다.
부산 지역에 널리 시조 시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경남에도 진주와 마산, 함안, 울산 등 동인이 활발하게 움직인다. 전국에서 가장 많이 짓고 발표하는 것 같다. ‘볍씨’를 연간으로 발행한다. 계절이 바뀔 때 잊지 않고 모여 발표한 것을 타블로이드판으로 인쇄해 전국 각처 시조 시인들에게 우송했다.
봄에는 ‘전국시조백일장’을 열어 초등과 중등, 대학일반부로 나뉘어 시제에 따라 짓게 한다. 벼슬길에 오르기 위한 과거 시험장 모습이다. 장원과 차상, 차하 급제를 만들어 발표한다. 상장과 부상으로 상금, 상품을 시상하며 시조 시인으로 등단하는 길을 열어놨다. 시조 시인이 되려면 두 번에 걸쳐 작품 심사를 거쳐야 한다. 서울 원로 시조 시인을 찾아가 작품을 뵈온 뒤 천료를 받게 되는 순서이다.
등단하는 대학일반부 장원이 쉽나. 처음은 이리 시조 시인 되는 길이 까다롭고 어려웠다. 백일장 장소도 부산 시내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대청공원에서 하다가 교통이 편리한 시청 후원에서, 회원이 근무하는 학교, 성지곡수원지, 대신공원 등 시내 곳곳에서 열렸다. 그늘나무 아래 가족까지 옹기종기 모여 앉아 글 짓는 모습은 오월 늦봄 볕이 따사로웠다.
화창하고 선선한 시월 가을엔 부산일보 대강당에서 ‘성파시조문학상’을 시상했다. ‘전국시조백일장’과 함께 모두 시조에 관심을 기울이는 통도사 성파 종정이 베푸는 행사이다. 통도사와 가까운 서운암 주지에서 방장, 이어 불교계 큰 어른 종정에 이른 분이다. 부산 경남의 시조 시인을 뽑아 한두 명 시상하다 전국으로 확대해서 서넛으로 늘렸다.
오랜 기간 부산에서 행사하다가 서운암 ‘팔만대장경각’ 법당에서 갖는다. 시조 문학상을 단체마다 벌려놓아 주다가 반짝하곤 중간에 그만둔 일이 여러 곳이다. 자리만 바뀌었을 뿐 단 한 번 빠짐없이 수십 년간 이어온 고마운 상이다. 처음과는 달리 이 상에 대한 무게가 치솟아 우러러보게 되었다.
긴 세월 동안 수많은 비용을 들여 시조 문학을 위한 뒷받침이 대단하다. 그러기 위해 불전 헌금 외에 따로 된장과 고추장, 간장을 만들어 전국에 내다 팔고 단감밭을 일궈 땀 흘린 것으로 볍씨 시조 문단을 뒷바라지한 모습은 잊을 수 없다. 서운암 법당 앞 주위 마당엔 커다란 장 단지 수백 개가 가지런하다. 한국 전통문학을 스스럼없이 도와주는 이런 사찰은 전국에서 여기뿐이지 않겠나 쉽다.
시조 시인들의 그에 대한 보답은 미약하다. 부산 세 단체와 경남 대표들이 명절 때 찾아간다. 진달래 피는 3월 말 서운암 산기슭에 올라 꽃잎을 찹쌀떡에 붙여 지짐을 하는 ‘화전시회’를 할 때 또 올라간다. 이때 스님과 함께 품평회와 시조 낭송으로 하루를 보낸다. 성파스님이 슬그머니 요사에 내려갔다 오면서 장삼에 감싸 안고 온 것이 있다.
꿀단지와 술을 갖고 온 것이다. 팍팍한 떡을 달짝지근하게 찍어 먹어야 하고 남자들은 얼큰한 술 한잔이 제격이라 느낀 모양이다. 일 년 내내 숲속에서 지난 그 짧은 시간이 두고두고 아롱아롱 여울져 생각난다. 초기의 화전놀이 하던 시인들은 모두 스님과 함께 팔순을 넘겼다. 세상을 떠난 시인이 여럿이다. 볍씨 창간 때 시인은 몇 분밖에 안 남았다.
중간중간에 서너, 너덧씩 예닐곱이 들어오고 근간에 젊은 시인 열 분 가까이 가입했다. 회장단도 젊어져서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반세기를 맞아 용트림하며 기지갤 편다. 시와 시조, 수필, 소설, 아동문학, 평론과 함께 1천여 명의 부산 문인들이 문단에서 어깨를 나란히 해 걷고 있다. 부산과 경남의 1백여 명씩 시조 시인들 활동이 뛰어나다.
오다가다 만난 볍씨 문인들인데 박사가 대여섯이고 거기다 교장을 역임한 분이 여럿이나 된다. 찾아 모아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 단체에 견주어봐도 부족함이 없어라. 임원 선출 때 허튼일이 하나 없었다. 고분고분 위에서 보는 눈치대로 작작 알아서 이끌어감이 넓고 시원해 좋다.
봄철 화전시회와 전국시조백일장 두 행사에 이어서 가을 성파시조문학상을 ‘부산시조문학회’에서 이끌었다. 적극 여류시조문학회가 뒷바라지해 줘서 이뤄진 일이다. 뒤에 발족한 부산시조시인협회의 임원을 자주 맡아 세 단체가 하나 되는데 볍씨 문인들이 앞장서 왔다. 주름진 초창기 시인들이 점점 뒤로 물러나고 신진이 앞으로 나온다. 아름다운 세대교체가 이뤄짐을 본다.
‘볍씨’는 생명을 이어가는 쌀 생산의 중요한 먹거리 씨앗이다. 이른 봄날 못자릴 만들어 소복이 쏟아부어 싹을 틔운다. 듬성듬성 심어 가을 황금벌판을 이루는 나락으로 영글어간다. 어떤 여류가 이왕이면 ‘모판’으로 할 것이지 한 말이 떠오른다.
첫댓글 문학 이론 같은 글 감사합니다
부산 시조 문학의 역사 이제
신진에게 바톤을 넘기는 세대교체...
볍씨 모판 정겨운 말 수고하셨습니다
모판 피를 골라내는데 붉은 끝을 찾아 한나절 엎드렸습니다.
무논에 발이 짓 무르고 얼굴에 피가 몰려 어지러웠습니다.
부산은 문학의 도시인 것 같습니다.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도시안에서 풍겨나는 비릿내가 어울려진 때문일까요?
독일에도 정통시를 배우고 쓰는 분들이 계십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면 제가 유식해지는 것 같습니다. ㅎㅎㅎ
건강 잘 챙기십시오.^^
어서 오세요 반가워요.
글까지 읽어주시니 고맙습니다.
50주년 특집에 낼 글입니다.
먼 곳에서도 비행기 타고 자주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