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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828 산정무한 원문보기 글쓴이: 임병기
성주군 선남면 도성리 산 83 . 선남면 소재지 직전 우측 도로변에 위치한 효자정려비각이다. 기대에 한 치 오차도 없이 비각은 닫혀 있어 까치발로 바라보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정려비는 조선전기 동천東川 박구朴矩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으로 박구(?~1425)는 개성부윤을 지낸 원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세종 연간에 강원도병마도절제사, 경상도수군도안무처치사, 좌군총제 등을 역임하였다.
비는 처음에 묘소 남쪽 백천가에 있었으나 홍수로 인하여 침몰된 것을 광녕산 기슭으로 이건하였다가 또다시 풍우로 퇴락한 것을 1818년 현재의 장소에 비각을 건립하여 안치한 것이다라 한다. 비각은 정면 1칸·측면 1칸의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정려비는 화강암 재질로 높이 110㎝, 폭 49㎝, 두께 14㎝의 크기이며, 정면에 효자가정총제박구지려孝子嘉靖總制朴矩之閭”라 새겨져 있고, 좌측에 숭정기원후삼임진4월일崇禎紀元後三壬辰四月日이라 음기되어 있다. 비각의 전면 윗부분에는 삼년거려일부도가三年居廬一不到家라는 사액문賜額文을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성주군청 홈페이지에 등재된 박구의 효행을 가져왔다.
고려말 오도마을(선남면 오도리)에 박구라는 사람이 살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몹시 가난한 가운데 늙으신 어머니와 같이 그날그날 끼니를 겨우 잇고 살았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렸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가난한 살림이나마 온갖 정성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봉양하였으나, 병환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가기만 하였다.
후일 이러한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중종 30년(1535)에 정려(旌閭)를 내리고 자헌대부 예조판서를 추증하였다. 2013.10. |
첫댓글 한달에 서너번씩보는 정려각~ 내부 글씨는 병기 덕분에 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