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 방 지 : 옻골마을(경주최씨종가)
*소 재 지 : 대구광역시 동구 옻골로 195-5(둔산동)
*주요유적 : 화전고택/금전고택/백불암고택/수구당/동계정
##옻골마을
옻골마을은 마을이 자리잡고있는 곳의 지형이 남쪽을 제외한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주변 산과 들에
옻나무가 많아서 옻골이라고 불리었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으며 조선 광해군8년(1616) 학자인 대암 최동집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경주최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마을로 향하는 길에서 제일 먼저 보게되는 것은 400여년 수령의 느티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고 마을터가
주변보다 높아 금호강 지류가 훤히 보이므로 나쁜 기운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위해 마을앞에 숲을 조성
했다고 하며 연못과 그늘아래 꾸며진 쉼터를 지나면 존격적으로 마을이 시작됩니다^^
마을어귀에 들어서면 역시 400여년 수령의 거대한 회화나무 2그루가 방문객을 맞이하는데,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심었다고 하며 높이가 무려 12m에 이릅니다.
경주최씨종가인 백불암고택은 마을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입향조인 최동집이 1630년에 지은 고택
으로 대구지역 가옥중 가장 오래된 주택 건물로서 조선 영.정조때 학자인 최흥원의 호입니다^^
이 고택은 현재 국가민속문화재 제26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가 튼 ㅁ자로 세워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보본당이 서 있는데, 보본당은 입향조 대암선생의 제사를 위해 1753년에 지어진 건물로 사당과 재실, 음식을 장만하기 위한 포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본당은 한국전쟁 당시 임시학교로 사용되었고 백불암
선생이 반계수록을 최초로 교정한 장소이며 또 토담길을 따라 가다보면 정려각이 있는데 백불암 선생의 효심을
기려 1789년 정조의 명으로 세워졌다고 하며 정려각안에는 정조가 하사한 홍패가 걸려 있습니다.
옻골마을은 약 2.5km에 이르는 토담길과 돌담이 남아있는 아름다운 마을로 백불암고택 숭모각에는 정조가 백불암선생의 업적을 칭송해 하사한 문서를 비롯하여 종가에 전해 내려오는 고서와 호패, 퇴계선생의 성학십도로
만든 성학십도 병풍, 제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옻골마을 옛담장(대구광역시 등록문화재 재266호)
옻골마을 형성시기에 만든 옛담장은 흙다짐에 돌을 박은 형식인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며 마을안길의 돌담길이
대부분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어 질서정연한 느낌을 주는 점이 특징으로, 전통가옥들과 어우러져 자연스러운 동선을 만들어내는 돌담길은 전형적인 반촌분위기를 자아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다채로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잘 연출하고 있는데 마을주민들이 스스로 세대를 이어가며 만들고 덧붙인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문화유산입니다^^
1.옻골마을 입구에 있는 다양한 시설들
1)옻골마을 표지석과 안내도
2)생귀암(生龜岩) 투명안내판
3)최동집(崔東集)나무(수령 400여년 회화나무)
경주최씨 대암공파의 파조이자 지역사회 문풍진작에 크게 기여한 최동집(1588~1661)선생을 기리기 위한 나무
4)보호수(수령 400여년 회화나무로 1982.10.30 지정)
경주최씨들이 이주하여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심은 나무
5)카페 "회낭"
6)힐링체험실
7)전통음식점 "돌담집"
8)게스트하우스 "여백"
2.옻골마을 전망대(마을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나옴)
1)오솔길 초입에 있는 연자방아
2)전망대로 올라가는 오솔길
3)옻골마을 전망대
4)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옻골마을 전경
3.화전고택(華田古宅)
최인영 선생(崔仁永:1896~1951)의 생가이며 자는 덕용, 호는 화전으로 옻골 입향조 대암 최동집 선생의 12대손
이고 대학자 백불암 최흥원 선생의 7대손으로 국채보상운동에 선도적 역할을 하신 철호 최시교 선생의 손자임.
천성이 순후하며 희생정신이 강하여 주위의 어려운 사정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항상 구휼에 앞장서신 도덕
군자로, 가난한 마을사람들의 길흉대사에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도와주었고 매년 물이 부족하여 농사를 짓지 못하는 농민들을 위해 사비를 들여 거대한 농업용수지인 가산못공사를 완성시켜 이 지역의 주민들이 걱정없이 농사를 짓게 한 바, 이러한 선생의 덕행에 대하여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화전고택은 당초 팔작지붕 형태로 정침5칸,아래채3칸,사랑채5칸으로 건축하였으나 6.25이후 사랑채는 소실되고
2014년 정침과 아래채를 현재의 모습으로 개보수하여 장손인 최윤돈이 관리하고 있음.
4.정려각(旌閭閣)
조선후기 영남의 대학자이자 효를 위한 덕목을 정하고 부모의 병을 극진히 돌보는 등 효행으로 유명했던 백불암
최흥원선생을 기리기 위해 1789년에 조정의 명으로 세운 것으로, 최흥원은 대암 최동집의 5대손으로 1705년에
태어나 82세 사는 동안 평생 학문에 정진하면서 130여명의 많은 제자를 기르며 향약을 실시하는 등 백성의 생활안정을 도모하는데 평생을 보냈으며, 대산 이상정, 남야 박손경과 더불어 영남3로로 추앙을 받으며 당대 영남의
퇴계학맥을 이끌었고 1784년에는 정조의 첫째아들인 문효세자의 익위사익찬이 되어 스승이 되었습니다.
정려각은 단순한 구조로 벽면상부에 홍살문이 설치된 1칸의 비각을 중심으로 주위에 토석담장이 네모꼴로 둘러져 있어 규모는 작으나 18세기후반 건축양식을 이해할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5.금전고택(琴田古宅)
독립운동가 최종응(崔鍾應)선생(1873~1943)의 생가이며 자는 성문, 호는 금전이고 영남3로의 한분이신 백불암
최흥원의 6대손으로 국채보상운동 대구유림 대표이신 최시교의 조카로,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독립
운동 자금책인 경북선정사로 임명되어 고정일,윤철,이태훈 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조달을 위해 경상,충청,전라 등지를 순방하면서 동지를 규합, 군자금 모금을 위해 적극 노력하였고, 동년11월에는 조석환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 8백만원을 받아 임정 파견원인 고일치에게 전달하기도 했으며 1921년 2월 경북 칠곡군에 사는 윤병돈 등으로부터 군자금3백만원을 받아 임정요원 이태운에게 전달했는데 이일로 인하여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22년3월
30일 대구지방법원 에서 징역3년의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러 정부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6.수구당(數咎堂)
백불암 최흥원이 제자들과 강학하던 곳이었는데 후에 자손들의 살림집으로 개조되면서 사랑채와 안채 2동만
으로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건립당시 안채는 기와가 얹혀진 와가였던 반면 사랑채는 초가지붕을 갖추고
있었는데 1918년 두 건물을 고쳐지으면서 안채는 칸수를 늘리고 기둥을 높였으며 사랑채는 새로 기와를 올렸고
안채와 사랑채 모두 중앙에 개방된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다양한 공간이 구성되었는데, 안채는 2개의 방과
부엌이, 사랑채는 사랑방과 침방을 둔 바, 단순한 구조이지만 조선말기 대구지방의 양반집 살림채 형태를 이해
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이 가치가 있습니다.
7.백불암고택(百弗庵古宅)
옻골마을의 경주최씨종가 종택이며 조선 인조때의 학자 대암 최동집이 1616년 옻골에 정착하면서 그 이후에
지은 집으로 대구에 있는 조선시대 주택중 가장 오래 되었는데, 1630년에 지은 안채와 원래 최흥원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동산서원이 1868년 훼철되면서 그 자재를 사용하여 다시 지은 사랑채,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어진
보본당과 포사, 그리고 불천위 사당인 벌묘와 가묘가 있고 생활공간의 오른쪽에 있는 보본당은 1753년에 지었으며, 보본당의 동쪽담장 밖에 위치한 포사에서는 제사음식을 준비하였다고 하며, 보본당 뒤편에 있는 2동의 사당중 벌묘는 최동집의 위패를, 가묘는 조선 정조때의 학자인 최흥원의 위패와 종손의 4대 봉사위위패를 모시고
있고, 살림채,재실,사당 등 많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경주최씨 종택은 조선시대 양반주택과 생활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1)고택정문
2)백불고택
3)고택정문 옆에 있는 행랑채
4)반계수록 최초교정장소 안내판 및 옛터
5)고택의 안채(주민이 살고 있어서 내부촬영 못함)
6)보본당(報本堂)
8.동계정(東溪亭)
옻골마을 동쪽에 위치한 정자로 백불암 최흥원의 아들인 동계 최주진을 기리기 위해 1868년 훼철되었던 동산
서원의 자재를 사용하여 1910년에 세운 것으로 최주진의 호를 따라 동계정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정자의 용도는, 주로 후손들에게 학문을 가르칠때 사용했다고 전하며 옻골마을에 있는 수구당, 보본당과 달리
대청이 중심에 위치하지 않고 가장 왼쪽에 위치하여 독특한 구조를 갗추고 있는데, 이 건물은 건축양식이나 공간의 구성이 조선후기의 정자와 비교하여 부재의 크기가 작아지고 구조를 이루는 방법 등이 간결해져 근대기의
특성이 강한 편이지만 조선말기에서 근대기로 넘어가는 건축양식을 이해할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9.동계(東溪)
1)동계정에서 동계로 내려가는 계단
2)동계(물이 말라서 낙엽만 수북이 쌓여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