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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에 대하여 원문보기 글쓴이: 雨原
어제 밤의 폭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오전 근무를 마치고, 약속대로 부리나케 서울 친구들의 숙소인 경주보문관광단지 KT연수원으로 갔다. 모두들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시작했다. KT 직원 복지를 위한 시설이니 만큼 1끼에 2,000원이라고 했다. 에라! 누가 계산하는 지 모르지만 일단 먹자. 어제 마신 술이 낮 12시가 되어 깼으니 일단은 끼니를 채워야지. 먹어야 산에 가지.
어제 밤 늦게 어릴 적 친구들인 서울 무학동 친구들이 왔다. 원래 문성호가 오기로 했었는데 더불어 같이들 내려온 것이다. 그들이 온다길래 일주일 내내 기다렸다. 만나 보면 그렇고 그런 면면들이지만 만나기 전에 기다릴 때에는 왜 그리도 보고싶은지.......그게 옛친구인 모양이다. 그리고 어제 밤 10시경에 친구들이 도착했다. 나의 산 친구 전종성, 영원한 어린이회장 장병선, 어릴 때 부모님이 봉사로 알았다는 쎈넘 반영환, 우리의 호프 문성호, 왈가닥 김순영, 새로운 친구이자 나의 대학 동기이기도 한 김형철.......6명이 왔다. 만나자 마자 일잔은 물론이다. 경주 시내에서 마시고 2차로 보문관광단지 호수가 라이브무대 주점에 가서 또 마셨다. 나는 집으로 왔지만 그네들은 숙소에서 밤 4시까지 마셨단다. 그리고 하루를 보낸 뒤 오늘이다.
KT연수원에서의 점심 식사. 이 점심 식사 뒤에 우리는 경주남산을 등반할 것이다.
경주남산으로 가는 중에 들런 황룡사지. 익산 미륵사지와 함께 삼국시대에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던 대찰이다. 특히 장병선이가 역사에 조예가 깊어 꼭히 들러본 곳이다. 멀리 보이는 전통식 대문과 숲이 바로 유명한 분황사이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대사상가였던 원효가 계시던 곳이다. 내가 근무하는 경주고등학교도 저 근방에 있는데, 그 옛날 원효가 수많은 중생들을 대상으로 설법하던 알천교 옆 큰 들판에 학교가 서 있다. 경북의 명문인 경주고등학교 학생들이 옛날로 말하면 바로 화랑도들인 것이다.
사적 16호인 황룡사지는 553년(신라 진흥왕)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566년에 주요 전당들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모든 건물이 완공된 것은 아닌 듯하다. 금당(金堂)은 584년(진평왕)에 비로소 완성되었고,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 9층목탑은 643년(선덕여왕)에 착공되어 그 다음해에 완공된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절은 신라 왕성인 월성(月城) 동쪽에 있었는데, 그 창건 기록에는 진흥왕이 신궁을 월성 동쪽 낮은 지대에 건립하려 했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왕이 신궁 조영을 중지하고 절로 만들게 하여 황룡사라는 사명(寺名)을 내렸다고 한다. 국가적인 사찰이었기 때문에 역대 국왕의 거동이 잦았고 신라 국찰 중 제일의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신라 멸망 후에도 황룡사는 고려 왕조에 이어져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으며 9층목탑의 보수를 위해 목재까지 제공받았다. 그러나 1238년(고종) 몽골군의 침입으로 탑은 물론 일체의 건물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장병선이가 깊은 관심을 보인 황룡사지 9층목탑 자리. 한 가운데 큰 바위가 그 거대한 목탑의 주임을 받치던 중심대인 듯하다.
이 9층목탑은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643년(선덕여왕)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장율사의 요청으로 건조되었다 한다. 그러나 645년(선덕여왕) 처음 건축을 시작하여 그해 4월 8일에 찰주를 세우고 이듬해 완공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는 황룡사 구층탑지 심초석(心礎石) 안에서 도굴된 신라황룡사찰주본기(新羅皇龍寺刹柱本記)에서 비롯한 것이다.
아홉 개의 층은 모두 신라 변방의 나라들을 가리켰고 탑을 세움으로써 이웃의 침해를 누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탑은 건립된 후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벼락을 맞아 불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어 그 웅장한 모습을 유지해왔으나 1238년(고려 고종) 몽골의 침입때 가람 전체가 불타버려 그후로는 중수되지 못하였다.
우리는 바로 경주남산으로 왔다. 뭐니뭐니해도 친구들이 경주까지 온 것은 한국 100명산에 속하는 경주남산 등반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경주남산 삼릉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경주남산으로 오른다.
경주남산은 2개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고위산(494m)과 금오산(468m)이 그것이다. 경주남산은 남북 8㎞, 동서 4㎞의 크기이며 완만한 동남산과 골이 깊고 가파른 서남산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우리는 서남산으로 올라 동남산으로 내려올 것이다. 남산에는 40여 계곡이 있으며 동쪽의 토함산 줄기가 동해를 막는 성벽 구실을 하고 있어, 남산은 옛 서라벌을 지키는 요새로서 훌륭한 역할을 하였다.
경주 남산은 신라시대의 불교유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불교가 신라에 전파되면서 숭산신앙, 암석신앙과 연관된 불교문화는 남산에 집중,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절터 112군데(암자터 포함), 석불 80체, 석탑 61기, 석등 22기 등의 유물, 유적이 발굴되었다. 남산은 또한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나정(蘿井:사적 245호), 신라 최초의 궁궐터인 창림사(昌林寺) 유적, 서쪽 기슭의 포석정지(鮑石亭址:사적 1호),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화랑 김유신의 효와 충절을 엿볼 수 있는 천관사지(天官寺址:사적 340호)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 개국 이래 줄곧 신라인과 호흡을 같이하며 신성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중요한 유물·유적으로는 청동기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민무늬토기, 간돌도끼, 간돌칼, 홈자기, 방적차, 등과 함께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또 진평왕 때에 쌓은 남산신성(南山新城)과, 진덕여왕 때 쌓은 것을 문무왕 때 보수한 남산성(南山城:사적 22호), 김시습이 기거하면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집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썼다는 용장사(茸長寺)가 있다. 그 외에도 마애불(磨崖佛), 왕릉 등이 많이 남아 있다. 금오산, 고위산, 도당산, 양산 일대 즉 경주시 인왕동을 비롯한 4개 동과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등의 지역이 1985년 사적 311호 경주남산일원으로 지정되었다.
한마디로 경주남산은 흔히들 말해지는대로 노천박물관 그 자체이다.
자 이제 경주남산으로 들어간다. 처음 들어가는 남산 들머리에서 보게 되는 소나무숲. 태풍이 올 때마다 많이 훼손되지만 삼릉 송림은 여전히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경주 남산을 오르는 곳은 여러 군데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삼릉을 통해 남산을 오른다. 삼릉을 통해 남산을 오르다 보면 많은 불상을 접할 수 있고, 50분쯤 산을 오르면 상선암 마애대불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서울친구들에게 경주남산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오늘 이 코스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산행 들머리 초입에 나타나는 삼릉이다. 삼릉은 신라의 박씨왕들인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왕릉이다.
삼릉에서 개울을 따라 계곡으로 약 300m쯤 오르면 길 옆 바위 위에 머리 없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앉아 있다. 현재 높이가 1.6m되고 무릎 너비가 1.56m되는 큰 좌불이다. 근년까지도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지금 장소에 앉혀 놓은 것이기 때문에 마멸이 없고 옷주름들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다만 머리가 없어지고 두 무릎이 파괴되어 손 모양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편안히 앉은 자세며 기백이 넘치는 가슴이며 넓은 어깨는 8세기 중엽 신라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불상이다.
특히 왼쪽 어깨에서 가사 끈을 매듭지어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영총(纓總)수실은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우리 나라의 특색 있는 장식품인 매듭은 먼 신라 때부터 전해 왔다는 것을 이 가사 끈이 말해 주고 있다. 부처님의 아래옷(裙衣)을 동여맨 끈도 예쁜 매듭으로 매어져 있다. 이 불상은 용장사(茸長寺)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처럼 가사 끈이 있기 때문에 존명을 정하기 어려우나 여래상으로 볼 수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1호인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은 남산에서는 보기 드물게 선각으로 된 여섯 분의 불상이 두개의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속칭 마애선각육존불이라 불리고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두 좌의 삼존불이다. 암벽은 앞뒤 두개로 나뉘어 있는데 앞쪽 바위에는 여래입상삼존불이, 뒷쪽바위에는 여래좌상삼존불이 각각 선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 선각 불상들은 그 조각 기법이 정교하고 우수하여 우리나라 선각마애불 중에서 으뜸가는 작품이라고 한다.
선각육존불 앞에서 서성이는 친구들. 이처럼 경주남산은 유적산행지이다. 산 전체에 유적이 깔려 있어 이른바 노천박물관이다. 하지만 하루의 산행으로 이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다. 내가 궁리하여 하루에 가능한 많이 볼 수 있는 코스를 택한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하루에 이 만큼 볼 수 없을 만큼 말이다.
다시 남산을 오르는 친구들.
선각육존불에서 조금 오르다보면 나타나는 보물 666호인 경주 삼릉계 석불좌상. 이 불상은 경주 남산 삼릉계곡의 왼쪽 능선 중턱에 위치한 석불좌상으로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들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나발)을 붙였고 정수리부분에는 상투(육계)가 있다. 얼굴은 풍만한 모습으로 둥글며 두 귀는 짧게 표현되었다. 한쪽 어깨에 옷을 걸쳤으며 원래 불신과 불상 받침과 불상 뒤의 원광인 광배를 모두 갖추고 있었으나 최근 얼굴이 크게 손상되었던 것을 다시 복원한 상태이다. 석불이 앉아있는 연화대좌에 새겨진 연꽃무늬와 창 모양의 안상을 비롯한 전체적으로 당당하고 안정된 불상의 모습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 작품으로 보인다.
경주남산 냉골을 계속 오르는 친구들.
이제 상선암 직전이다. 맨 마지막 문성호가 열심히 올라온다. 참, 성호는 대단하다. 그렇게 술을 마셔대고 산은 여전하다.
드디어 상선암. 조그만 암자지만 경주남산에서 가장 유명한 산행코스인 냉골코스 8부능선에 있어 유명해진 암자이다. 말이 암자지 산행객들이 많아 늘 시끄러워 도량이 되기는 틀렸다.
상선암에서 뒤로 바위 오름길을 150m 정도 오르면 나오는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예술미의 정도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가 알기로는 남산에서 가장 유명한 석불이다. 등산의 클래식코스에 그것도 가장 중심이 되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적인 면에서는 다소 떨어지는 모양인지 경북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어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높이 7m, 너비 5m 되는 거대한 자연 바위벽에 후대에 새겨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육계는 낮고 머리는 소발로 되어 있으며 얼굴은 살이 많은 편이다. 눈은 가늘고 눈썹은 초생달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으로 되어 있고 수인(手印)은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있다. 자연 암벽에 불상을 조각한 것인데 조각 수법에 있어서도 얼굴 부분은 환조로되어 있고 그 아래로는 부분적인 환조가 나타나지만 선각으로 처리하였다.
통일신라 전성기의 불상과 같은 세련됨은 없지만 차분한 느낌과 종교적인 경건함은 느낄 수 있다.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주변에서 서성대는 친구들. 타인들이 신을 신고 부처 앞에 서자, 신을 벗으라고 일일이 잔소리하는 쎈놈. 역시 영환이는 쎄다.
이제 금오산 주능선이 보인다. 저 능선을 따라 가면 금오산 정상이 나온다.
주능선에 올라 상사바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마애석가여래좌상. 남산을 소개할 때 자주 나오는 장면이다.
상사바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상선암.
좀 더 멀어져서 바라다 본 마애석가여래좌상.
이제 드디어 금오산 정상.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경주남산은 두개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오산과 고위산이다. 금오산은 유적이 많은 반면 자연경관은 고위산이 한 수 위다. 금오산 이름 중 중간의 鰲자가 궁금하지 않은가? 鰲, 자라오 자이다. 자라가 뭐냐고? 민물거북을 말한다. 남생이와 비슷한 것이다. 왜, 남성 정력에 좋다는 것 말이다. 이를테면 금 자라 형상의 산이란 말이다. 이 근처에서 매월당 김시습이 처음으로 썼다는 한문소설의 제목이 금오신화가 아닌가!
금오산에서 잠깐 내려서면 경주남산 순환도로가 나오고 그 어느 지점에서 북쪽 포석골 방면으로 내려다보면 늠비봉 석탑이 보인다.
예전에 이 늠비봉 위에 석탑(石塔)이 있었지만, 그 뒤에 파괴되어 탑재들만 흩어져 있었으나 최근에 그 탑재들을 모아다가 부족한 부분은 보충하여 탑을 복원시켜 장하던 옛 모습을 되살렸다. 산 꼭대기에 솟아 있는 바위 윗면을 깎아 내고 몇 개의 가공석을 보태어 자연스러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대충 다듬은 석재로 탑을 쌓아 올렸던 것이다. 판단컨대 옥개석의 낙수면이 넓은 백제계열의 오층석탑이었다고 추측된다. 4개의 석재를 조립하여 한 개의 옥개를 이루었는데, 만일 옥개받침까지 조립식이었다면 하나의 옥개에 여덟 개의 석재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 개의 옥개석을 여러 개의 석재로 조립하여 만든 예는 통일신라 초기의 감은사(感恩寺)나 고선사(高仙寺)의 탑에서도 볼 수 있는 예이지만 이 탑의 특이한 점은 옥개의 낙수면 모서리에 귀마루가 높게 새겨져 있는 점이다.
또 이 탑의 위대함은 산봉우리를 기단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삼각산 위에 솟아있는 자연바위를 잘라 버리고, 모자라는 부분에는 다듬지 않은 석재를 보충하여 자연 반, 인공 반인 기단을 만들어 놓았다. 얼금얼금 깨뜨린 석재들은 인공적인 탑신에 어울리고 우툴두툴한 자연 석재들은 자연적인 바위산에 조화되어 삼각산은 하늘에 닿은 탑으로 승화되었다.
자연과 인공을 연결시켜 놓은 위대한 착상이라든가 석재를 얼금얼금 다듬은 구수한 수법은 우리 예술이 지닌 가장 고상한 장점이라 하겠다. 크고 작은 기묘한 바위로 얽혀 두 줄기의 계곡물 사이에 솟은 삼각산 위에 탑이 섰으니 산이 바로 하나의 탑이 된 것이다. 포석골(부흥계곡)은 이 탑 하나로 불국토의 영기(靈氣)로 차 있는 것이니 자연과 인공이 이렇게 조화된 예는 드물다고 한다.
이제 경주남산 순환도로에서 용장사지로 내려선다. 내려서다가 아래를 내려다 보면 보이는 경주남산 최대의 계곡, 용장골이 보인다. 뱀이 많기로 유명하다. 소설가 이문구는 자신의 작품 <매월당 김시습>을 쓰다가 현장 고증을 위하여 경주남산을 방문하여 용장골의 샛골인 은적골로 들었다가 뱀이 너무 많아 결국 답사를 포기했다고 하니.........나도 이 골짜기에 갈 때마다 뱀을 만난다.
이제 저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고위산. 우리는 용장골로 내려서고 다시 저 고위봉을 올라 저 산넘어 동남산으로 내려갈 것이다. 몇 친구는 어이쿠! 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이왕 온 것, 남산을 제대로 봐야지. 그래봐야 북한산 밖에 더 되겠어? ㅋㅋㅋ
그리고 바로 나오는 용장사지 삼층석탑. 모양새가 어떤가? 감동적이지 않은가? 절벽에 세워진 아름다운 석탑, 경주남산에서는 보물같은 석탑이다. 특히 아래기단이 자연 바위를 깎아서 바로 기단을 만들었으니 저 탑은 천년이 아니라 만년을 갈 것이다. 현재 보물 제186호로 지정되어 있고, 높이 4.42m, 기단의 너비 2.13m이다.
경주남산 용장사곡에는 여러 곳에 절터가 있고, 석축·석불·석등이 있어 승려들이 불도를 닦던 곳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석탑은 경주남산의 정상 부근에 있다. 이 탑은 하층기단(基壇)을 생략하고 직접 암석에 높이 약 6cm의 굄 1단으로 상층기단 중석을 받쳤다. 중석 가운데 1면은 1석(一石), 나머지 3면은 2석씩 모두 7장의 판석(板石)으로 구성하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1개씩을 새겼다.
가까이 와서 본 용장사지 삼층석탑.
이 탑은 무너졌던 것을 1922년 재건하였고, 당시의 조사 기록에 의하면 2층 옥신 윗부분에 사각형 사리공(舍利孔)이 있었으나 사리장치는 없었다고 한다. 각 부의 조화가 아름답고 경쾌한 수법을 보이며 자연과의 융화를 이루고 있다.
용장사지 삼층석탑에서 바위를 타고 내려오면.............
바로 두개의 불상이 나오는데 하나는 마애여래좌상이고, 또 하나는 석불좌상이다. 둘다 보물일 정도로 귀한 작품들이다.
위의 마애여래좌상은 보물 제913호로 높이 5.5m, 너비 3.6m되는 평평한 바위가 남쪽을 향해 있는 바위면에 새겨져 있는데,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항마촉지인을 표시한 여래상으로, 비교적 섬세하게 돋을 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지상에서 높지 않은 바위면에 조각되어 있으며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었다. 대좌의 연화문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높이는 1.62m다.불상의 머리 모양은 나발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육계는 분명하지 않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어 손끝을 아래로 하여 지상을 가리키고 있으며, 왼손은 다리위에 얹은 항마촉지인상을 하고 있다. 앉은 자세는 결가부좌로 오른쪽 발만 보이는 길상좌를 취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매우 얇게 처리된 의습인데 옷주름 선들을 일정하게 평행시킨 평행밀집의 옷주름이다. 이런 형태는 9세기 후반의 불상에 흔히 등장하고 있지만 9세기의 도식적인 의문과는 달리 매우 세련되고 유려하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각각 두줄의 음각선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외광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불상은 8세기 중엽의 사실주의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얼굴이나 체구 그리고 의문 등에서 인도 굽타기(Gupta)의 마투라 불상들과 친연성이 강하여 당시 국제 미술의 한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바로 옆에 있는 용장사지 석불좌상. 보물 제187호로 전체 높이 4.56m, 불상 높이 1.41m, 재료는 화강석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대현(大賢)과 관련이 있어, 《삼국유사》 권4 현유가조(賢瑜珈條의 자씨석장육상(慈氏石丈六像)이 이 불상이라는 설도 있다. 자연석 기단 위에 3층으로 된 높은 대신(臺身)과 대좌(臺座)가 있고, 그 위에 사각형의 좌대(座臺)를 같은 돌로 만들었다.
현재 머리는 유실되었고, 손과 몸체 일부만 남아 있다. 불상 자체는 그리 크지 않으나 대좌가 높아 전체 높이가 매우 높은 편이다. 원형의 대좌에는 맨 위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좌에 비하여 불상이 유난히 작고 빈약해 보이나, 매끈한 조각솜씨와 맵시 있는 세부 처리 등으로 작품의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조성 연대는 8세기 중엽으로 짐작된다. 전문가가 아닌 우리 눈으로 보면 기단의 모양이 매우 특이하게 보인다.
이거, 남산산행기가 완전히 유적 설명문이 되는 것 같다.
자! 이제 climbing down!
바위지대를 내려오는 장병선.
이제 다 내려와 용장골에 이른다. 극심한 가뭄으로 계곡이 이 지경이다.
용장골 위에 설치된 설잠교. 설잠은 매월당 김시습의 법호이다.
이 정도에서 힘들어하는 김순영이를 용장골로 내려보내고 나머지 5인은 다시 고위산으로 오른다. 이제는 금오산과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시간도 촉박하다. 우리가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음식 준비하고 우리를 픽업하러 오는 단미, 먼저 내려간 순영이, 부산에서 올라온다는 김명옥이 등이 우리를 기다리기 때문에 발길을 서두르는 것이다. 자! 이제 뛰자.
계속 달리며 오르고 있는데 뒤에서 반영환 왈, "야! 맑은 물에 좀 씻고 가면 안돼?"...........왜 안돼? 씻으면 돼지. 자! 맑은 물이 저 아래 보인다. 내려가서 씻어라! 영환, 형철, 성호가 내려가서 탄성을 지른다. "어이쿠! 시원해!"
고위산 근방에 오면 나오는 산정호수. 우리 경주사람들은 귀머거리못이라고 하는데, 이유는............예전에 귀머거리 처녀가 이 근방을 늘 배회하다가 이 호수에 빠져 죽었단다. 그 뒤로 귀머거리못이라고 한다.
반영환이 뱀을 잡으려는지 아래로 내려가 물가를 탐색하고 있다.
힘들게 선 고위산 정상. 고위산의 높이가 494m이고 금오산이 468m이니 사실상 경주남산의 정상은 이 고위산으로 보는 것이 맞다. 금오산보다 자연경관이 더 수려해 공룡능선이라든지 바람재, 새갓골, 천룡사지 라든지 하는 유명한 명소들이 있다. 최근에 대형 불상이 발견된 곳이 이 근방이다. 그리고 천연 송이버섯이 이 근방에서 산 전체에 걸쳐 재배되기도 한다.
아무리 바빠도 정상에서 물 한모금은 해야지. 형철과 종성. 형철은 평소의 웨이트를 늘 하고 있어 체력이 제법이다. 물론 종성은 최근에 산 근처에서 서성이는 사람이기에 기본은 갖추고 있다.
서남산에서 동남산으로 능선을 넘어서면 나오는 바위능선인 바람능선. <산에 대하여>에서 병선이 닉네임이 바람이라고 했던가?
동남산 아래에 펼쳐진 남산동. 유명한 통일전과 서출지, 화랑교육원이 있는 곳이다. 우리는 이리로 내려가면서 칠불암을 지나 하산을 시도할 것이다.
칠불암 바로 위 아슬아슬한 절벽 위 바위면에 새겨진 경주남산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이다. 보물 199호인데 남산을 아는 많은 이들이 남산의 석불 중 이 석불이 가장 아름답다고들 한다.
곧바로 선 절벽 면에 있어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이 보이는데 머리에 삼면보관을 쓰고 있어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팔각형으로 보이는 대좌 아래로 옷이 흘러내리고, 오른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놓은 자세이다. 발은 연꽃 위에 있으며, 이처럼 유희좌를 표현하는 것은 드문 예이다. 그 아래로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이 조각되어져 있다. 불상 높이는 1.4m이며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 작품으로 보인다.
마애보살반가상에서 밑을 내려다 보면 칠불암이 저렇게 보인다. 절벽 위에 새겨진 반가상이라 주변의 운치가 매우 좋다.
반가상 주변에서 담소하는 친구들.
반가상을 보고는 칠불암으로 내려오기 위해서 이런 절벽 길을 지나와야 한다.
드디어 동남산 칠불암에 다다르다. 칠불암 이름은 예상과 마찬가지로 암자의 마당에 위치하고 있는 7기의 보살상에서 연유된 듯하다. 칠불암의 부처들은 보물 200호로 본존상(本尊像) 높이 2.66m, 오른쪽 협시보살(脇侍菩薩) 높이 2.11m, 왼쪽 협시보살 높이 2.11m, 동면상(東面像) 1.18m, 서면상 1.13m, 남면상 1m, 북면상 72cm로 모두 7구이다. 한 변의 너비 8.5m의 사각형 축대를 높이 쌓았고, 그 서쪽에는 큰 암석이 튀어나와 있으며, 중심부에는 직사각형의 돌기둥이 솟아 있다. 서쪽 암석의 동편 면에 삼존불(三尊佛)을 새겼고, 돌기둥의 각 면에 불상을 조각하여 배치하였다. 이와 같은 배치는 중국의 석굴사원과 같다고 한다.
이 암석에는 가구(架構)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곳곳에 기왓조각들이 산재해 있어서 사각형 축대 위에 법당다운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 가운데 본존의 자세는 당당하고 풍만하며, 소발(素髮)에 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눈과 코는 모두 크고 높아 중량감을 느끼게 한다. 양 협시보살도당당한 체구에 중량감이 있고 소탈한 웃음까지 머금어 본존과 흡사하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오른손에 보병(寶甁)을 들었고, 왼쪽 협시보살은 왼손에 연꽃을 어깨까지 들어올리고 있다. 이 불상은 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굴불사지석불상과 석굴암의 본존에 관련되는 것임이 분명하다고 판단된다.
칠불암 마애석불들의 측면
칠불암 전경. 오늘 산행의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는 유적지이다.
언뜻 경내에서 서양인 미모의 스님이 지나갔는데 모두들 혹하는 눈치였다. 머나먼 서양에서 어떤 계기로 이 불교사상에 심취하여 이 극동의 산중까지 왔을까? 하긴 불교사상은 기독교나 모슬렘과는 다르게 일종의 철학이 아니던가? 무조건 믿으라는 절대유일신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느냐?가 화두인 철학이기에.........서양의 비감성적이고 이성적인 분들에게는 attach가 잘 되었을 법도 하다. 하긴 나만 해도 얼마나 종교를 믿기가 어려운 성격이었던가? 결국에는 법륜스님의 반야심경이나 금강경 이야기를 읽고 나서 삶의 궁극적인 문제들을 어렴풋이 짐작하지 않았던가?
칠불암을 내려서면 바로 산대나무(신을대) 터널 길로 들어선다. 전종성 왈, "무협지의 소굴로 들어온 것 같다. 우리가 영웅문이냐? "
그러자 모두들 폼을 잡고 선다. 모두들 이 어둠 속에서 왠 라이방이냐? 그리고 왠 Matrix 폼이냐?
칠불암 계곡을 내려와 우리를 픽업하러 온 단미를 만난다. 그녀는 집에서 식사 준비하랴, 우리 모셔다주고 데려오랴, 원중이 학교에서 데려오랴, 혼자서 정신 못 차린다. 그래도 그 와중에 포항 죽도시장가서 횟감을 준비해 왔단다.
삼릉으로 차를 가지러 가면서 본 석양. 달리는 차 안에서도 그럭저럭 찍혔네. ㅋㅋ
아름다운 서출지에서 하산의 즐거움과 함께 시원한 캔맥주 한캔씩 쫙! 그런데 아름다운 서출지가 왜 안보이지? 반영환이가 열심히 찍은 사진을 몇장 빌려야 겠다.
내 사진이 어두워 반영환이한테 빌린 사진 속의 서출지 전경. 왕과 불륜의 왕비의 죽음에 대한 신라 왕실의 비극의 전설이 서린 장소이다. 계절이 다르지만 때만 맞았다면 좌우의 물에 잠긴 백일홍 나무에 붉은 꽃들이 만개하고 못에는 연꽃이 만발한 서출지의 경치는 그저 그만인데 아쉽다.
드디어 우리집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김명옥이도 왔네. 누추하지만 친구들이 즐겨 찾아줘서 고맙다. 이래도 나에게는 편안한 집이다. 건축가에게 의뢰하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내가 직접 지은 집이기에............
드디어 라스팅 시작. 서서히 얘기가 꽃을 피우고........역시 예상대로 얘기는 순영이가 거의 주도한다.
광어, 우륵, 도다리가 들어왔는데 광어는 자연산이라나? 누가 알았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고래고기도 나왔다. 서울 친구들은 고래고기를 잘 모를 것이다. 먹어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리고 내가 자주 가는 동천동 비타민 노래룸. 이래뵈도 가격이 제법 나오는 집이다. 경주를 찾는 친구들은 거의 모두 이곳을 구경하고 간다.
부부족한 원중이와 너무도 잘 어울려주는 문성호. 성호는 천성이 아이같이 착한 것 같다. 아니고서야 꼴통 원중이하고 어찌 저렇게 잘 어울릴까?
역시 시작은 순영이. 패티김의 가을에 떠나간 사랑................이다. 손가락의 주인공은 반영환.
하산 중 다리를 접질러 편하게 앉아있는 장병선. 내일 내연산 산행은 현재로서는 미지수이다.
부산의 김명옥. 예전 왕십리 유리공장 앞에 있던 샘표간장 집 딸이다. 유복하게 자란 티가 난다. 그 뒤 샘표간장은 전국구가 되었지? 아마.........노래 솜씨는 가수 이상이다. 정확하고 신나게 불러댄다.
단미의 노래에 같이 나가 춤을 추는 문성호와 원중이.
드디어, Oh! Yes!..............Pick it up!
미녀 삼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