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제주에 가실 수 있겠어요?"
아들 요한이의 말을 들으며
아니, 무슨 제주도?
그러나 순간, 가자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가자, 힘들고 어려워도 아들이 제안하는데 가야지,
그렇게 해서 제주에 다녀왔습니다.
참 감사하게도 요한이는 미리미리 모든 준비를 했습니다.
어디를 가고 싶으냐고 묻기도 하고 맛있는 거 뭐를 먹고 싶으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요즘 참 험한 일들이 많이도 일어나고 있는 세상인데
잘해 주지도 못한 엄마를 위해 좋은 일을 해주었습니다.
이박 삼일을 참 알차게도 여러 곳을 다녀왔습니다.
이중섭거리에 있는 기념관 옥상에서 내려다 보이던 성당처럼 보이던 건물.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보니, 성당이 맞았습니다.
가보겠느냐고 묻더니 가던 길을 돌이켜 성당 마당으로 들어가 주었습니다.
마당에 서 계신 성모님 모습.
성모님의 머리 부분에 비가리개를 해 놓아서
다른 곳에 계신 어떤 성모님처럼 하얀 성모님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되시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나 요한이를 위한 기도를 부탁해야 했던 시간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요한이가 준비한 제주여행을 하게 되었음을 감사 드렸습니다.
누나를 먼저 시집 보내고 자신은 그 후에 가겠다고 했었는데
누나는 혼인할 마음이 없다고 합니다.
누가 가든 둘 중에 하나라도 출가를 해야 식구가 늘고 그늘이 생기는거라고
오랜만에 긴 통화를 하던 친구가 강조를 합니다.
주님께 맡겨 드릴 뿐인데요.
친구는 그러더군요.
엄마도 재촉을 해야 한다구요.
글쎄요, 안나는 결혼 얘기를 하면 집에도 오지 않겠다고 했거든요.
회사생활을 하느라 나가 있는데 말입니다.
비자림은 참으로 마음을 가라 앉혀 주는 좋은 숲길이었습니다.
새천년 나무가 있는데 얼마나 큰지 천년을 지나 다시 천년을 바라 본답니다.
비자나무는 키가 15미터, 나무둘레가 6미터 이상 자라는 늘 푸른 나무라네요.
500년 이상 된 비자나무가 이천 팔백 여 본이 자생하고 있는 원시림에 가까운 천연림으로
천연기념물 제 374호.
천지연폭포의 물줄기는 풍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천연기념물 제 27호.
폭포 위로 일 킬로키터 올라가면 솜반천이 있는데 이곳에서 솟는 물이 천지연폭포가 되고,
이 하천은 천연기념물 제27호인 무태장어 서식지로 보호되고 있답니다.
너무나 유명한 성산일출봉.
두 번째날, 마침 숙소가 근처여서 해녀 식당에서 전복죽을 먹고 올라가려고 입장권을 샀는데
오래 아픈 후여서 올려다 보이는 가파른 길을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쉽게도 돌아서 내려 오는데 주변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온통 중국말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메르스로 여행을 미루었다가 온 모양으로 보였습니다.
해발 180미터라고 해서 그래도 다녀 와야지 했는데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하는 것이 나았습니다.
요한이도 그러더군요, '엄마 힘들면 가지 마세요'라면서 올라가는 길을 카메라로 찍었습니다.
소리내어 웃으면서 엄마가 포기한 길이니까 찍어 두어야지요 라고 해서 함께 웃었습니다.
성산일출봉은 경치가 아름답고 학술가치가 탁월하여 2007년에 세계자연유산, 2010년에
세계지질공원 지정 등, 이른바 유네스코 3관왕을 이룩하였답니다.
2011년 세계 7대 자연경관에 선정되었구요.
섭지코지도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둘이 함께 사진을 찍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멀리 보이는 경치를 카메라에 담는 구도를 잡더니
사진 찍히고 있던 청년에게 이러저러하게 찍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렇게 나온 사진을 쇠소깍 앞의 어느 가게에서 나무액자에 새겼는데 자연스럽게 잘 나왔습니다.
주상절리의 멋진 모습, 용두암, 문주란 자생지인 토끼섬은 해변에서 그리 멀지 않아 보였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4.3 평화공원과 제주 박물관에 갔습니다.
다랑쉬 특별전시관은 1948년 11명의 민간인이 토벌대에 의해 질식사한 동굴 현장을 발굴하여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현해 놓았는데, 얼마나 현장감이 뛰어나던지 숨이 막히고 무서워서
들어가기가 저어되기도 했습니다.
무섭지만 그래도 들어갔는데 그 슬픈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슬펐습니다.
유해봉안관에는 4.3 당시에 희생된 희생자의 신위, 일만 사천 여 위가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억울한 넋을 위로할 수 있도록 분향관이 있어서 요한이와 함께 분향을 했습니다.
당시의 마을별로 성명, 성별, 당시의 연령, 사망 일시와 장소등을 간결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죽음의 사실에 대한 기록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봉안관 앞길은 추모승화 광장인데, 드넓은 잔디밭이 있고 반원형 부채꼴의 대형 제단이 있었습니다.
유난히 까마귀들이 계속 울었고 봉안소를 향해 앞서 걸어가는 아들을 바라 보게 되었는데
슬픈 역사의 현장을 잊지 않고 방문하게 해 주어서 참 고마웠습니다.
이어서 강정마을에도 들렀는데 구럼비 바위는 공사장 안쪽이어서 볼 수 없었고
올레길이 이어지는지 무더운 햇빛 아래인데도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올레객들이 있었습니다.
국책사업은 아무리 반대가 있어도 결국은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공사 반대미사 중에 많은 일들이 생겼었고 문정현 신부님은
방파제 아래로 떨어져 다리를 다치기도 했었습니다.
수녀님과 수사님들이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었구요.
제주 박물관에서는 조선 선비 최 부의 '뜻밖의 중국 견문'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1488년 최(崔) 부(溥) 일행 43명이 제주 앞바다에서 표류, 중국 남쪽 해안에 표착하였다가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기록인 '표해록'을 따라
한국과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는 전시로 210 여 건의 전시품을 선보이고 있었습니다.
한`중 관광의 해를 기념하여 제주와 항저우에서 순회전시를 갖는 상호 교류 전시였습니다.
맛있는 먹거리와 편한 잠자리와 유익한 볼거리들이 가득했던
이박 삼일을 허락해 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누나에게 미리 전화를 해서 함께 가자고 했지만
회사가 바쁘다고 하더라며 아쉬워하던 요한이.
그다지 잘하지도, 좋은 조건을 주지도 못했던 에미를 챙겨 주는 아들과 딸을 위하여
정릉동산에 갈때마다 기도를 부탁 드렸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지도 수녀님께서는 그렇게 적은 기도쪽지를 수련수녀님들과 본원 수녀님들이
함께 기도를 해 주신다고 하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며, 저희들에게도 가족이 늘어나는 시간이 주어질런지
아니,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루어지리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항상 사람의 생각보다 더 좋은 것으로 안겨 주시는 천지의 창조주 주님께
찬미와 찬송을 드립니다.
영원한 도움이신 성모님의 전구하심이 항상 계심을 감사 드립니다.
첫댓글 아름다운님 제주도 여햄 다녀오셨군요
제주도는 참 언제가도 장관이죠
아들덕에 호강 하셨네요
축하 주님의 사랑 안에서
건강과 축복 함께 하소서♥
안개꽃 형님, 좋은 마음으로 엄마를 위한 여행준비를 할 마음을 주신 분도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혼란스럽던 시간들을 지나가네요.
김포신도시, 장기동으로 이사를 온 후에 겪었던 많은 일들로 인해 더더욱 길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주일미사를 오랜만에 교적이 있는 청수성당으로 갔더니 홀가분하고 기쁘네요.
형님의 아름다운 연주를 들으러 다음달에는 영원반에 꼭 가야겠습니다.^^
그래요
모든것이 다 주님의 안배 하심이지요
푸슈킨의 모든것은 일순간에 지나간다 라는 문귀가 떠오르네요
월 모임때 반갑게 만나요
주님 안에 있으면 되는 것을요, 홀로 눈물 짓구요.
성모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곳은 보지 않고 슬퍼 하구요.
이제라도 다시 혼자가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다짐합니다.
주님, 저에게 믿음을 주소서. 흔들리지 않는 굳센 믿음을.
첫서약 하던 날 화관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요. 화장대 위에서 언제나 저를 바라보고 있네요.^^*
그렇군요
저도 감사드려요
깨닳음의 은혜로 찾아주신 성령님
감사합니다 느ㅡ을 아름단님과 함께하소서
그리고
친정아버님 고향 김포 장기리 여서
6ᆞ25 때 피난을 그곳 용화사라는
절로 갔었는데ᆢ
절 앞이 강이 여서 세염도치고ᆢ
지금도 그절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강건너가 강화도라고 하더라구요
형님,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동네가 바로 '김포신도시'라고 부르는 장기지구, 장기동이랍니다.
'용화사' 라고 차를 타고 가면서 표지판에서 본적이 있어요.
말씀처럼 지금 사는 곳에서 강화도 쪽으로 계속 가면 염하강이라고 불리던 곳,
바다인데 강의 하류보다 더 좁다란 손돌목을 건너는 다리가 있지요.
다리 건너면 바로 갑곶성지구요.
예전에 피난을 가시던 임금님의 배를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그 곳의 물살이 세니 다른 곳으로 건너시라고
했다지요.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고 목을 벴다던가요. 그런데 과연 그 곳의 물살은 정말 셌더랍니다.
죽은 뱃사공을 언덕에 고이 장사 지냈다는데 정말 둔덕을 오르면 손돌의 묘가 있더군요.^^
녜 감사함다
7살에 피난갔던 곳이라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지요
그곳 은 부처님이 입상 인데 휜색 부처넘 3분이 법당에 서계셨어요
나중에 가는 차편을 자세히 알려주시면 고맙겠슴다
편안 한 밤 되세요 감사함다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기억은 생생하시군요.
제 친정아버지는 평양이 고향이셨는데 1.4 후퇴 때 잠시 피난 왔다가 삼팔선에 가로 막혀 73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그리운 고향을 잊지 못하셨어요. 제가 살아 있는 동안 통일이 된다면 묘토라도 평양으로 옮겨 드리고 싶답니다. 제가 차가 있다면 모실텐데요. 나중에 이쪽으로 오는 길을 자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편한 밤 되십시오.^^*
녜 제가 말씀드린차편은
대중교통 버스 이용법을 부탁드린거예요
고맙슴다
가을이 가기전에 꼭 한번 가보고싶군요
제가 살고 있는 장기동 옆이 운양동인데 그곳에 절이 있답니다.
대중교통 알아보니 멀지 않은 곳이더군요. 지금까지 '용화사'에 대한 글을 찾아 보고 있었어요.^^
맞아요
운양이도 들어본 이름이네요
정말 반갑니ㅣ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