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경사ㆍ보경사 계곡ㆍ덕실마을ㆍ양동마을 탐방후기
6월 16일 산행을 한 후 석달만에 이루어진 산행이었다. 7월에 계획했던 보경사 계곡산행은 장마철에 3일동안 계속된 기상청의 호우주의보 발령으로 산행을 취소했던 아쉬움을 간직한 채, 9월 산행은 보경사 계곡탐방과 보경사 답사를 이번에 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유서깊은 경주 양동의 전통마을과 이대통령(MB) 생가인 덕실 마을을 탐방하게되었다. 금년 산행의 후반기의 처음 실시하는 산행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성서 홈플러스 주차장에 나갔다. 거기에는 산행을 가기 위한 사람들로 꽤 붐볐으나 신종플루 때문인지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숫자는 전과 같지 않았다. 역시 하나 산악회 산행 참여회원도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21명의 참가자로 만족해야했다. 그 놈의 신종플루가 모임과 만남을 힘들게 하는 것 같다. 우리 회원을 태운 국민관광버스는 경부ㆍ대포고속도를 빠져나와 포항외곽도로를 따라 단숨에 흥해를 거쳐 보경사에 도착했다. 보경사는 1986년도에 동학년 선생님들과 와 보고 약25년이 지난 오늘 와보니 많이도 변했음을 실감한다. 그 당시 보경사 가람은 무척 컸다는 기억의 흔적을 간직하였는 데, 오늘 본 가람의 크기는 크다는 느낌이 들지않는 것은 나의 가늠 잣대의 기준이 변하였음을 실감한다. 보경사(寶鏡寺)를 소개하면 이 절은 경상북도 포항시의 내연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며,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또한 포항에서 가장 큰 사찰로 오어사와 함께 포항을 대표하는 절이다. 보경사(寶鏡寺)는 신라 진평왕 25년인 603년에 승려 지명(智明)이 세웠다고 전한다. 지명이 중국에서 유학할 때 동해안 명당에 보경을 묻으면 왜구를 막고 삼국을 통일하리라는 예언과 함께 팔면보경(八面寶鏡)을 전수받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보경을 묻은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은 보경사로 붙여졌다. 고려 고종 대에 원진국사 신승형이 보경사 주지를 맡아 크게 중창하는 등 여러 차례 중건하고 주변 암자도 중수하여 비로서 조선 시대에 대규모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이 절에는 대한민국의 보물을 세 점 보유하고 있다. 보물 제11-1호인 동종은 조선 숙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통도사 동종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보물 제252호인 원진국사비는 대웅전 맞은 편에 있는 신승형의 탑비이다. 승형이 사망한 뒤 고려 고종이 원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보물 제430호인 부도는 원진국사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다. 대웅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고, 적광전(寂光殿)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4호이다. 적광전 기둥 옆에는 목조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다.천왕문 입구 양 옆에 역시 목조 사자를 새겨두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3호인 오층석탑은 고려 현종 때 세운 것이다. 보경사를 나와 본격적으로 보경사 계곡탐방에 나섰다. 무엇보다도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있 어서 우리들을 더욱 편하게 했다. 탐방로 왼쪽에는 물이 제대로 흐르지 않는 계곡의 수마석 돌과 오랜 세월 동안 물의 침식작용에 표면이 매끄럽게 처리된 바위의 모습만 보아도 수량이 많았을 적의 계곡물의 흐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7월의 기상청의 거듭된 “호우주의보” 일기예보 발령이 빗나가서 정작 계획했던 7월 21일의 보경사 계곡여행이 아쉬움만 남는다. 그 날은 장마로 인해서 폭포의 장관을 볼 수 있었다고 한 안국환 대구 한빛회장 말이 자꾸 생각난다. 보경사 계곡의 폭포의 발원은 내연산이며, 이 내연산은 1983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내연산을 중심으로 10여km에 이르는 주계곡인 보경사계곡(내연골, 청하골)의 초안부인 보경사에서 학소대까지 약 2km 구간은 십이폭포골이라 불릴 만큼 폭포가 많고, 기암절벽 아래로 소(沼)와 담(潭)이 연이어지면서 절경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수림이 울창해 여름 피서철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보경사계곡 여행은 보경사를 지나면서 시작한다. 오른쪽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를 뿐 계곡이 어디 있나 싶다. 그러다 갈림지점을 지나면 숲이 걷히고 앞이 터지면서 숲이 울창하고 웅장한 골짜기가 펼쳐진다. 하나하나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골짜기 곳곳에 널려 있고, 옥빛 물줄기는 암반을 따라 조용히 흘러 내린다. 물가 여기저기 자갈밭이나 암반을 이루고 있어 그곳에 짐 풀어놓고 발 담그고 있노라면 더위가 웬 말이냐 싶을 정도로 시원하게 느껴지는 곳임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계곡여행에서 볼 수 있었던 폭포는 수량은 적지만 처음 우리를 맞이한 것은 쌍생폭였다. 쌍생폭포는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쌍둥이 폭포인데 오늘은 수량이 적어서 왼쪽의 폭포만 물이 흐르고 오른쪽은 전에 물이 흘렀던 흔적만이 바위 낭떠러지에 나타나 있다. 폭포아래 큰 소(沼)는 수량이 부족지만, 지금 보아도 수심이 깊어 보이고 그 주변의 계란형의 자갈들이 이 소의 연륜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소 아래 넓은 자갈밭은 등산인들이 쉼터로 이용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보경사에서 불과 30분 거리인데도 심산유곡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조금 올라가니 보현 폭포가 조그맣게 물을 흘리고 있다. 한 참을 올라가니 관음폭포가 연산구름다리와 기암절벽과 어울려 생동하는 동양화의 한폭의 그림을 연출하고 있다. 이곳의 경관이 보경사 계곡 탐방의 최고의 조화미를 보여주는 것 같다. 총연장 26m인 연산구름다리에 올라가니 다리가 좌우로 흔들린다. 앞에 가고 있는 짓궂은 친구는 다리 난간의 로프를 잡고 흔들어대니 속까지 울렁거려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지만, 스릴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연산구름다리를 지나니 보경사 12폭포 중 제일 크고 웅장한 연산폭포가 높은 바위위에서 미끄러져 내리고 있다. 수량이 풍부하다면 정말 장관일 것 같다. 지금은 폭포의 가냘픈 모습만 보이고 있어 아쉬움만 남는다. 연산폭포 위에서 점심을 먹고 올라간 계곡을 역으로 내려와 경주 양동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이대통령(MB)이 청소년 시절을 보낸 흥해읍 덕성리 덕실 마을을 답사했다. 덕실마을은 전형적인 민촌의 모습이었다. 마을에 고기와집 한 채 보이지않는 평범한 조그마한 마을에 대통령을 배출했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을 찾을 것 같기도 하다.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생가를 풍수지리학적으로 길한 곳이라고 한다. 역대 대통령의 집터의 공통점은 모두 산의 능선의 끝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즉 산능선의 기세가 중요하다하여 산능선이 다하는 곳(山盡處)인 이곳이 이대통령의 생가라고 한다. 지금 어느 시대인데 지금부터 수백년전의 풍수지리학설로 큰 인물이 배출된다는 것은 단지 풍수지리학을 하는 사람들의 비과학적인 견해일 따름이다. 이 곳에 와서 느낀 것은 이 대통령이 유소년기의 뼈에 사무친 가난이 대통령을 낳게 했다는 믿음이 든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 어머니의 국화빵 장사를 돕기도 하고, 시장통에서 여러 가지 행상이며 여름철에는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면서기 학업에 정진한 이명박, 때로는 과일장수로 주경야독으로 포항동지 상고 야간부를 다니면서 주야간 전교 2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향학열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또래 여학생이 많은 포항여자고등학교 앞에서 부끄러움과 자존심을 숨겨가며 한 겨울에도 밀짚모자를 푹 눌러쓰고 뻥튀기를 한 바로 그 소년 이명박! 불굴의 의지로 가난과 역경을 헤쳐 오늘에 이르기까지에는 알려지지 않은 숱한 사연이 많을 것이다. 대학생 시절에는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서 군고구마 장사를 하면서도 가난한 삶에 굴하지 않고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어 지금의 자리에 이른 이명박 대통령의 모습은 배우는 학생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위한 도전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은 아들딸의 손을 잡고 이곳을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산 교육장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갈 길을 재촉하는 석양의 그림자를 감상하며 경주 양동마을에 도착했다. 포항가는 기차안에서 양동마을을 눈요기로 스쳐지나간 경험뿐인 나에게는 전통마을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실사를 지난 9월 10일 했다하니 양동마을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먼저 관광포스트에서 안내 팜플렛을 대충보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문화재가 많기도 하거니와 탐방코스도 여섯 개나 된다. 즉 하촌코스, 물봉골코스, 수졸당코스, 내곡코스, 두곡코스, 향단코스이다. 이 코스를 모두 탐방하는 데 하루가 모자란다고 한다. 그리고 인물로 보면 손씨, 이씨 합쳐서 문과26명, 무과14명, 사마(司馬) 76명으로 과거(科擧)급제자가 총116명이나 되고 음직(蔭職)은 부지기수였을 정도로 많은 인물이 배출됨으로써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양반마을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한정된 시간 관계로 관가정(觀稼亭)과 향단(香壇) 그리고 무첨당(無忝堂)만 둘러보게 되었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관가정(觀稼亭, 보물 442호)에 대한 해설을 들었다. 해설사는 먼저 양동의 풍수지리적인 면을 설명하는 데, 우리나라의 옛 취락(聚落)의 입지조건인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전저후고(前低後高) 그리고 전착후관(前窄後寬)의 세가지 요건을 갖춘 이곳이 바로 양동마을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길지이기 때문에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입지조건 세가지를 살펴본다. 첫째로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의하여 건물 뒤로 산을 업고 건물 앞으로 물을 품어야 한다. 만약 이와 반대의 경우이면 터 자체가 역성(逆性)을 띠어 좋지 않다. 이 방법은 한국의 전통 건축의 가장 대표적인 방법으로 궁궐과 사찰은 물론 소규모 주택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건물이 이 법칙에 의해 건축되었다. 또한 배산임수’란 말 그대로 산을 등지고 물이 있는 쪽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즉 지면에서 약간이라도 높은 부분에 건물을 짓고, 지대가 낮은 쪽에 마당을 설치함으로써 내려다보도록 하는 배치, 다시 말해 등고선에 의한 배치를 말한다. 또한 지면의 고저가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거나 강이나 바다 등이 직접 보이지 않는 지세에서는 빗물이 흘러 내려가는 방향을 낮은 쪽으로 하여 마당을 설치함으로써, 건물에서 빗물이 내려가는 쪽을 바라보도록 배치한다. 둘째로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지세는 건물이 전면의 지세보다 낮으면 불길하므로 인패나 재패와 같은 불운이 내습한다. 전저후고 형상은 뒷부분의 유기부분이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는 형상으로 기반이 튼튼한 형상으로 거주자에게 길한 형상이다. 세째로 전착후관(前窄後寬)의 건물은 그 터는 물론 구조도 앞이 좁고 뒤가 넓은 형태이어야 좋다. 지세가 제대로 갖추어진 터라면 그 자연적 형태는 전착후관의 모습인 반면에 그렇지 않은 곳은 청룡과 백호가 벌어져 터를 응기하지 못하고 각각 역성을 띠어 결국 터의 지기는 설기(洩氣)되고 만다. 우리가 해설사를 모시고 첫 번째 탐방한 관가정(觀稼亭)은 우재 손중돈(愚齊 孫仲暾)선생이 손소 공으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이다.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지은 우수한 주택건축이며 한 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 안는 경관이 일품이다.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라고 한다. 두 번째 탐방한 향단(香壇)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선생이 모친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중종임금이 배려하여 경상관찰사로 재임할 때인 1543년에 지은 집이다. 당시에는 흥(興)자 모양의 99칸이었으나 허물어져 1976년 보수하면서 56칸으로 줄었다고 한다. 세 번째로 무첨당(無忝堂)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인 이번(李番)공이 살던 집으로 1460경에 지은 여강(驪江) 이씨(李氏)의 종가집인데, 별당의 기능을 중요시한 간결하고 세련된 솜씨의 주택이다. 무첨당에는 대원군이 죽필로 직접 쓴 좌해금서(左海琴書)편액이 유명하다. 시간의 촉박으로 양동마을을 모두 탐방하지 못한 것이 숙제로 남게 되었다. 언젠가는 다시 찾아와서 골짜기 골짜기 들어있고 수목으로 가리어져 있는 고택을 양동의 물(勿)자 형의 마을 줄기를 따라 하나하나 답사해야 겠다. 이번의 산행은 역사 문화유적 탐방 위주로 이루어져 유익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
첫댓글 상세한 글을 읽으니 해설사의 해설을 듣는 것보다 더 상세하게 안내해주어서 고맙네
후기를 너무나 자상히 기록해 주셔서 본 듯, 들은 듯 읽었네. 영상 자료에서 보경사 계곡 중 연산 폭포 아래에서 여유 자작한 벗들의 모습 너무나 보기 좋고 부러웠다네!!! 건강들....
우리가 마지막 볼려다 못본 書百堂은 손소가 25세때 지은곳으로 손중돈과 이언적선생이 태어난곳으로 '三賢先生之地'라고 한다면 아직 한사람의 현인이 더 태어나야 되는곳이다.참을 忍자를 백번 쓰면 안되는것이 없다는 뜻이라하던가?
초남이 추천한 "서백당'은 반드시 답사해야, 양동마을의 전통 고택을 보았노라고 할 수 있는데 말아야! 아쉬움이 너무나 많네. 시간의 촉박으로 반쪽의 답사가 숙제를 남겨두는 듯하네. 다시 한번 답사 기회를 잡아야 할 텐데...
답사후기를 쓰는 김기현은 수필가로서 한학자로서의 조예가 깊은 우리동기 친구들의 보배임에 틀림없고 사진촬영 솜씨에 영어,일어능통까지 참으로 안동사범의 寶鏡임을 알겠구려....
소은이 과찬의 말일세! 그저 심심풀이 소일로 후기를 정리했을 따름이네. 고맙네.
양동마을은 나도 남달리 생각하고 있다네. 십여년전 탐방을 하였지만 기억이 아슴프레한데 김기현형이 자세히 알려주었네. 언제 한가하면 종일 양동의 골목을 거닐면서 옛 현자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봄이 바램이네. 대구에 기현이가 있어 동기 모두들이 서서히 선비가 되고 행동하는 양반이 되고 있음을 나는 잘 알고있다네. 부디 건강하시게. 그래야 안동의 맥을 이어받을 큰 선비가되지않겠는가. 에브노말의 해박한 지식과 희생 봉사에 다시금 찬탄을 금하지 못하겠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