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서양 미술의 전통
서양 미술의 전통 속에 여성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현재 유럽과 미국을 주축으로 발전해온 서양 미술의 원류라 할 수 있는
그리스 시대의 미술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비교적 우리에게 익숙한 예를 통해 간단하게 살펴보자. 그리스 미술에 전혀 문외한인 사람도
[밀로의 비너스](그림 1)는 알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연필에서 화장지,미장원,속옷,미술학원 광고 등 에 이르기까지 수백 가지 광고를
통해 마치 미(美)의 형을 상징하는 것처럼 우리의 심상 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1820년 이 작품이 발굴되었을 때 사람들은 기원전 5세기 즉 그리스 미술의 최전성기의 원작으로서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여인 입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1893년 독일의 고고학자 푸르트뱅글러는
이 작품이 고전기가 아니라 기원전 2세기 후반 즉 헬레니즘 기의 것임을 밝혀냈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고전기의 걸작중 하나인 프락시텔레스의 [크니도스의
비너스] (그림 2)에서 포즈와 얼굴 모습을 그리고 <카푸아의 비너스> 에서 하반신을 옷으로 가린 형태를 모방해서 만든 작품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미의 전형으로 알고 있는 밀로의 비너스 는 실제 모방작에 불과한 것으로 그 모체는 프락시텔레스의 비너스에 있다는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이러한 고전의 모방이 다반사였으며 밀로의 비너스는 그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밀로의 비너스가 고전기의 비너스에서 그토록 모방하고 싶어 했던 것은 무엇까?
프락시텔레스가[전나(全裸)의 비너스](그림 2)를 제작했을 당시 그리스 사회는 여성 누드에 대한 금기가 있었다. 때문에 그의 비너스는 경건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되어 비너스가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던 소아시아 남해안의 외딴 섬
크니도스로 보내지게 된다.
그러나 막상 크니도스섬으로 이 여신을 보러온 사람들은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이제 막 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들어가 려는 이 미의 여신 앞에서 마치
살아있는 여자를 본 것처럼 열광했으며 심지어 그녀를 얼싸안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눈에 비친 이 비너스는 육체적 욕망의 화신이었 던 것이다.그렇다면 여성의 누드가 금기시되었던 당시 사회 속에서 이 비너스는 어떻게 지고의
예술품이라는 명예를 얻을 수 있 었을까?
프락시텔레스는 어떻게 이후 모든 비너스의 모범으로써 유럽 미술의 목표가 된 것중 하나 즉 육체적 욕망이라는 비 이성적인 본능을 저속하지 않게 아니 고귀하게 여인의 몸을 통해 표현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그리스인들이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인 체에 수학적,기하학적
원리를 적용시킴으로써 실제 인간의 살덩이를 초월한 영원한 미의 체계를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프락시텔레스는 원래 남성상을 위해 고안된 콘트라포스토 즉 체중을 오른편 다리에 싣고 왼쪽 다리는 마치 움직이려는 듯이 살짝 구부려 S자를 좌우로 뒤집어놓은 것같은 리듬을 줌으로써 자연스러운 균형과 조화를 창조함과 동시에 엉덩
이를 살짝 흔드는 것같은 생생한 관능성을 얻어내었다.
그리고 여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국부를 다소곳이 가림으 로써 전체적으로 고요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동물적 본능을 신과
공유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도록 했다.
결국 이 여신은 실제의 한 여인이 아니라 플라톤이 말하 는 이데아 즉 그리스인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미의 전형 을 인간의 육체와 결합시킨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인간과는 다른 절대 적 존재가 아니라 사랑,질투,분노,슬픔등 인간의 모든 감정을 가지고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신들로 묘사되고있는 것과 같 은 맥락이다.
서양 미술이 인간중심적이고 이상적 미를 현실을 통해 재현 하는 사실주의 전통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말해지는 것 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밀로의 비너스는 이상미의 추상적 체계를 여성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그리스 인의 마지막 흔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밀로의 비너스는 어떤 과정을 거쳐 비너스 스타 킹의 모델이 되었을까?
b. 나체와 누드
케네드 클락은 나체(naked)와 누드(nude)를 구별함으로써 미술 의 역사 속에
수없이 등장하는 전나의 여인들을 예술이란 이름 으로 구제했다.
그에 의하면 나체는 단순히 옷을 벗은 상태 즉 수치심을 느끼는 알몸의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반해 누드는 재구성된 육체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말로써 이는
원래 18세기 초기의 비평가들이 예술적 교양이 없는 섬나라 사람들에게 알몸이
예술의 중심주제가 된다는 것을 설득시키기 위해 영어 어휘 속에 억지로 집어넣은 말이라고 하고 있다.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인들이 수학적 질서를 인간의 형태 에 부여함으로써 이상적 미를 만들어 낸 이래로 누드는 살아있는 여성의 몸이 아니라 하나의 디자인으로, 예술가의 개성에 따라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하나의 표현 형식으로서 지속적으로 쓰 여왔다.
따라서 서양 미술에서 누드는 인간중심주의 정신으로 나타나며 이 정신은 유럽의 개인주의 전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그림 속의 여성을
볼 때 그것이 저속한 것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생각하도록 교육 받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는 심각한 오류가 내재해있다. 다시 말해 인간중심주의의
표현이라고 할 때 그 인간은 남성이지 여성은 아니 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화가,
후원자, 소유자인 남성의 세계의 표현으로서 그 행위의 대상이 되는 여성은 하나의 사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그리스 시대의 비너스는
금욕적인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땅에 파묻혔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가서야 다시
빛을 보게 된다. 당시에 전나의 여성을 화가들이 그리고 싶을
때 자주 사용한 주제가 바로 '거울을 보고 있는 여자'그림이다.
벨라스케스의 [거울 앞의 비너스](1650년)도 이런 류의 그림중 하나이다.
여인은 우리의 눈앞에 번듯이 뒤돌아 누운 채 큐피드가 들고 있는 거울을 바라보고있다. 여기서 그녀의 얼굴이 비치는 거울은 여성의 허영을 상징한다.
이러한 그림들은 육체적 욕망에 탐닉하는 사람을 훈계하기 위한 도덕적 위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도덕적 교훈은 일종의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것은 여인의 육체를 그리고 싶어했던 남성 화가들과 그 육체를 감상하고 싶어했던 남성 관객을 위한 안전장치에 불과하다.
여기서 여성은 보는 이에게 자신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신이 객관적 대상, 일종의
볼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묵인하고있다. 이렇게 서양 누드화에서 화가 와 감상자,그리고 그림의 소유자는 거의 남성이었고 그 대상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이 관계는 오늘날의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상품광고 같은 대중매 체에서 이러한 관계는 여전히 강세를 이루고있다.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여성, 미의
대상으로서 의 여성, 화장을 하고 속옷을 골라 입고 스타킹을 신고 외모를 가꿈으로서 보이지 않는 남성의 시선을 의식하고 사는 현대의 여성은 동일한 맥락이다.
밀로의 비너스는 비너스 스타킹을 신고 아름다와지기위해 노력해야 하는 여성의 원조가 된 것이다. 여성 작가 실비아 슬레잇 (Sylvia Sleigh)의 <누워있는 필립 골럽(Philip Golub Reclining)>(1972)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패러디함으로서 이러 한 관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일례라 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바뀌어져 있다. 즉 전나의 상태로 누워 거 울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은 남자이며 그 거울 뒤편으로 비치는
화가는 옷을 입은 여자이다. 이 그림이 나왔을 때 많은 비평가들은 '너무 조잡하다', '어색하다','원근법이 서툴고 구성이 명확하지 않다' 등의 비난을 퍼부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작가가 의도한 바가 바로 그러한 것 즉 과연 무엇이 자연스 러운 것이며 무엇이 정확한 것이지 ,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은 무엇이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또 무엇인지를 묻고자 한 것이라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