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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 최남선이 말하기를 "세계의 인류를 세 부류로 나누고 황인으로 부르는 몽고계,백인으로 부르는 코카사계 흑인으로 부르는 아프리카계가 그것이라 했다. 그 가운데 특히 황인종인 몽고계는 지금부터 1만년전 까지 심장지대인 파미르 고원을 중심한중앙 아시아를 중심하여 그 사방의 계곡 혹은 냇가에 각각 무리지어 살았다고 한다."라고 했으며 "불함 문화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화일뿐 아니라 그 발달계통으로 볼 때에 가장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문화라는 것이다. 불함문화의 영역은 카스피해와 흑해부근인데 조선과 그 자매관계에 있는 일본 및 동부지나는 물론이요,면악을 위시하여 구바,고보우,구보우,등의 산악이 있는 유구를 남극으로 하여 장백산의 만주,몽고,중앙 아시아의 서쪽으로 그 연결은 명백하게 찾을수 있어서 적어도 발칸산의 발칸반도까지는 그 분포 범위로 상정할수 있다."라고 했으며,
"이 불함문화는 아득한 옛날부터 일관되게 전승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문화 계통임이 분명하다면서 그 분포 지역이 아시아 북방지대를 차지하여 세계 최대의 문화권을 이룩했다고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문화의 정통이요,또 전형적인 것은 실로 조선 문화라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현재까지 대륙조선사의 연구 성과는 현재의 중공 대륙을 넘어 중앙 아시아와 동부유럽,중동 일대까지 확대 되었습니다. 최남선은 대륙조선의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판단 됩니다. 이러한 연구성과 더불어 조선의 북쪽에 어떤한 역사가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농암집 제11권 서(書) 자익에게 답함
11일에 지난 24일과 28일날 보낸 두 통의 편지를 받고 부모님을 모시면서 한편으로는 또 여러 가지 공부를 한다는 소식을 모두 듣게 되어 어찌나 흐뭇하고 마음이 놓이며 가슴이 활짝 펴지는지 마치 직접 마주 대한 것 같았다네. 요즘 들어 비로소 가을 날씨로 접어들고 있는데, 부모님을 모시는 자네의 근황이 어떠한지 궁금해지네. 편지를 줄곧 받기는 했지만 이어지는 그리움은 그칠 때가 없다네.
나는 여러 진(鎭)을 두루 다니며 순찰하고 저 끄트머리에 있는 서수라(西水羅)에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 그곳 서수라는 우리나라의 영토가 끝나는 곳으로서 동쪽으로는 큰 바다와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사막을 바라보고 있다네. 천하에 이보다 더한 장관이 없을 것이니 박망후(博望侯 한(漢)나라 장건(張騫))가 저 용문(龍門)에 여행했던 것이 과연 이보다 나았을지 모르겠네. 다만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서 한두 시구로 실제 경관을 기록해 두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네. 가는 곳마다 경치를 시로 옮겨 놓았다는 소릉옹(少陵翁 두보(杜甫))이 매번 생각났다네.
시 짓기를 탐닉하던 자네의 버릇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 하니 이는 정말 좋은 소식이네. 나는 시에 소질이 없기 때문에 게을러져서 근래 몇 달 동안은 10여 수도 짓지 못했네. 경치 좋은 곳에 갈 때마다 애써 시를 짓느라 괴로움을 면치 못하면서도, 시 짓기를 떨쳐버리지 못하니 한탄스럽네. 여행의 피로가 마구 몰려와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네.
十一日。得見去念四念八兩書。具悉侍奉外爲學凡百。欣慰披豁。無異面款。比來始有秋氣。未委侍況復如何。得書非不源源。而一味馳係。無時可已也。俺歷徧列鎭。直窮西水羅而歸。此是華夷地盡頭也。東臨大海。北睨沙漠。天下之觀。無以加此。不知博望龍門之游。果何如耳。獨恨詩情甚薄。未有一二語記得實境。令人每憶少陵翁矣。聞於此道。癖好漸輕。誠是好消息。此亦以不能之故。因生懶怠。來此數月。不作十許首詩。每到勝處。輒不免吟哦之苦。殊不能脫然放下。可歎。路憊方作。不能盡所欲言。
서계집 제1권 시(詩)○북정록(北征錄) 병오년(1666, 현종7) 겨울부터 정미년(1667) 봄까지 ○ 북도 병마평사(北道兵馬評事)로 부임할 때 지은 것이다. 서수라(西水羅)
마른풀만 가득한 모래벌판 지나서 / 來經白草黃沙地
이 세상 끄트머리 바닷가에 당도했네 / 行到天窮海盡頭
변방이 고생이라 예사롭게 말하지만 / 摠說尋常邊塞苦
직접 보고 시름겨운 것 말보다 더하다네 / 不如身見始堪愁
본인은 조선의 역사에 관한 글을 쓰면서 조선의 북쪽에 사막(沙漠)이 있다고 고증했습니다. 연행기사 같은 수 많은 문집류 등을 통해서 보면 조선은 압록강을 넘어 산해관까지 사막일대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의 농암집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함경도에 속한 서수라(西水羅)의 북쪽 지역이 사막일대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위의 서계집의 기록을 보면 함경도에 속한 서수라 일대가 마른풀만 가득한 황사지(黃沙地) 즉 누런 사막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역사에서 보면 있을수 없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함경도 북쪽에 뭔? 사막이 있기나 합니까? 이 또한 한반도 조선론의 심각한 오류를 입증하는 기록 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매우 놀라운 사실이 드러 납니다.
명종 7년 임자(1552,가정 31) 10월13일 (임술)
순변사 이준경(李浚慶)이 복명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이응거도(伊應巨島) 일의 대체적인 상황은 이미 아뢰었습니다. 그 형세를 보면 내지(內地)에 살던 호인(胡仁)중에 건너편으로 옮겨와 산 자가 혹 50여 가구(家口)라고도 하고 혹 15∼16 가구라고도 하는데, 구신포(仇信浦)에 사는 호인 6∼7 가구와 휴류암(鵂鶹巖)에 사는 호인 15∼16 가구가 일시에 내쫓겨 처자(妻子)가 서로 붙들고 통곡하면서 떠났다고 합니다. 이로 본다면 분을 내어 변을 일으킨 것은 반드시 그 일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경원(慶源)에 사는 김석(金石)은 나이 14세에 남눌(南訥)【부락(部落) 이름이다.】의 포로가 되었다가 금년에야 비로소 돌아왔는데 이미 30세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거기 있을 때의 일을 물었더니 ‘심처 호인(深處胡人) 골간추장(骨幹酋長) 일부(一夫)가 그때 「조선이 이미 두만강(豆滿江)을 경계로 해놓고 무단히 호지(胡地)에다 진을 설치한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서수라(西水羅)가 허술하다 하니 시험삼아 인물(人物)을 노획해다가 요구해 보자.」 했다.’ 하였는데 이튿날 과연 적변이 있었습니다. 또 서수라에서 사로잡혔던 김가달(金加達)이 와서 ‘골간 등이 「너희 나라가 이처럼 심하게 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변이 있겠는가?」 하였다.’ 하였으니, 서수라의 변은 반드시 이응거도의 일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온성(穩城)의 호인 만석(萬石)이란 자가 후라도(厚羅島)에서 사로잡혀 간 인물을 쇄환(刷還)해 가지고 왔는데, 만석에게 ‘네가 만일 서수라 인물을 다 쇄환해 오면 마땅히 중한 상(賞)이 있을 것이다.’ 했더니, 만석이 ‘저 일부(一夫)가 「당초 사람들의 말을 곧이듣고 경흥 부사(慶興府使)와 병사(兵使)를 죽이려고 침구하였는데 이제 들으니 부사와 병사가 모두 죄를 입었다 하므로 나 역시 후회스럽다. 대국(大國)에서 만일 옛날처럼 잘 대해 준다면 내가 마땅히 인물을 쇄환하여 귀순하겠다.」 했다.’ 하였다 합니다. 간사한 오랑캐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 정세를 보건대 각진(各鎭)의 제장(諸將)이 마음을 다해 조치한다면 쇄환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서수라에서 잡혀간 성인우(成仁佑)의 언서(諺書)를 보건대 잡혀간 사람들을 아직 심처(深處)로 전매(轉賣)하지 않았다고 하니, 쇄환하겠다는 약속의 한 징험이 될 듯합니다. 또 저들의 해채(海採)의 이익이 그곳보다 나은 곳이 없기 때문에 골간 등은 이응거도에 돌아와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지금 비록 신성(新城)을 혁파하더라도 돌아와 사는 것을 가벼이 허락하지 않고 그들의 정성이 매우 간절하고 애걸이 간곡하기를 기다려 그런 다음 허락한다면 감복(感服)될 것입니다.”
명종 9년 갑인(1554,가정 33) 2월9일 (경진) 조강에 나아가 정사에 관해 의논하다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영경연사 심연원(沈連源)이 아뢰기를,
“근자에 골간(骨幹)들이 심처 호인(深處胡人)들에게 군사를 청해 서수라(西水羅)로 쳐들어온 것은 국가의 큰 수치이며 신민(臣民)들이 통분하게 여기는 바이므로 마땅히 대군(大軍)을 일으켜 본거지를 도륙해야 할 것이었으나 군사는 약하고 흉년까지 든 것을 감안하여 감히 못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리고 초관(草串)의 싸움은 변장들이 공을 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조정의 계획에 의해 적호(賊胡)를 토벌하여 조금이나마 국치(國恥)를 설욕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께서는 논상(論賞)을 안마(鞍馬)에 그쳤으니, 신은 포상(褒賞)이 가볍지 않나 싶습니다.”
하였다.
○庚辰/上御朝講。 領經筵事沈連源曰: “近者骨幹, 請兵於深處胡人, 來賊西水羅, 國家大恥, 臣民之所痛憤也, 所當大擧搗穴, 而兵弱年凶, 顧有所未敢耳。 草串之役, 非邊將要功也。 以朝廷成算, 往討賊胡, 少雪國恥。 自上論賞, 止於鞍馬, 臣恐褒賞之輕也
명종 9년 갑인(1554,가정 33) 8월19일 (정해) 우윤 이몽필이 북방의 일에 관해 아뢰다
우윤 이몽필(李夢弼)이 아뢰기를,
“신이 앞서 북쪽 지방에 있을 적에 회령(會寧) 등지에 가서 그곳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고 그곳 변방의 실정을 살펴보니, 변환(邊患)이 생긴 것은 이응거도(伊應巨島)에 진을 설치한 데서 비롯되어 초관(草串)의 적호(賊胡)들을 섬멸한 데서 형성되었습니다. 방어하는 계책을 진실로 시급하게 서둘렀어야 하는데 또 군기(軍機)마저 잃어 드디어 적호들이 재차 변진(邊鎭)을 침범하게 하였으니, 이처럼 사의(事宜)를 그르친 데 대해 누군들 통분해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들으니 역대의 제왕들이 이적을 대할 때는 회유(懷柔)를 먼저하고 용병(用兵)은 다음으로 여겼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변장들로 하여금 되도록 군사의 위용(威容)을 엄숙하게 정돈하여 대적할 듯이 하고서 날마다 엄중히 경계하며 조용히 진압시켜 무사하기를 기하게 하여 변방이 영원히 든든해지게 한다면 매우 다행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번에 다시 서수라 권관(西水羅權管)을 두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이곳을 지킨다면 골간(骨幹)의 적호들이 감히 독기를 부리 못할 것입니다. 지금 베[布]를 가지고 곡식을 사들여 군량을 보태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땅이 좁고 주민이 적어 땅에서 나는 것이 반드시 한정된 수량이 있을 것이므로 만일 지나친 수량을 독촉해서 사들여 고을로 모두 실어 온다면 주민들이 반드시 먹을 것이 곤란하게 될 것이니, 짐작해서 사들이도록 하여 공사(公私)가 편하게 한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국조보감 제22권 명종조 1 9년(갑인, 1554)
○ 1월. 초관(草串)의 야인(野人)인 골간족(骨幹族) 불등(不等)이 북도에 침입하여 노략질하였는데, 병마사 이사증(李思曾)이 군대를 보내어 쳐서 물리치고 59급(級)을 참획(斬獲)하였다. 일이 보고되자 차등 있게 논상하였고,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매장하고 제사를 지내주게 하였다.
명종 7년 임자(1552,가정 31) 8월16일 (병인)
당초 진을 설치하는 일에 대해 시비가 각각 달라서 옳다고 하는 자는 ‘경흥 땅은 수몰(水沒)이 되어 경작할 만한 전답이 없는데 이 섬의 전답에서는 풍부한 이익을 취할 수 있다. 비록 저들 땅이라 하지만 진을 설치하여 그들의 침입을 막고 군대를 주둔시켜 요새를 지키면 끝내 다른 걱정이 없다. 경작할 만한 땅을 버려둔 채 한 고을의 백성을 굶주리게 하는 것은 땅을 개척하여 나라를 부하게 하는 방책이 아니다.’ 하였고, 그르다고 하는 자는 ‘우리 국경은 두만강이 한계이고 조종조부터 경흥을 경계로 하였으니 이러한 천험(天險)은 인력으로 옮기기 어렵다. 조종조에서 버린 것은 깊은 뜻이 있는 것이며, 더군다나 방해(傍海)의 골간(骨幹)은 해염(海鹽)을 업으로 삼고 있고 심처 야인(深處野人)은 이를 파는 것에 의존하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골간을 내몰아 쫓아서 생활하는 길을 끊는다면 그들은 분함을 품고 반드시 땅을 다투게 될 것이다.
명종 8년 계축(1553,가정 32) 3월4일 (경진)
윤춘년(尹春年)은 아뢰기를,
“전년에 이응거도(伊應巨島)에 진(鎭)을 설치한 일은 식자(識者)들이 당초에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상께서 건의한 사람들의 말을 이기지 못하여 진의 설치를 명하였더니 진을 설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골간족(骨幹族)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재상들은 문죄하는 군사를 일으켜야 한다고 잘못된 의논을 하고 있습니다. 야인이 아무리 완악하다 할지라도 어찌 잘잘못을 모르겠습니까. 만약 군사를 일으켰다가 이기지 못한다면 이는 모욕을 두 번 받는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골간(骨幹)이라는 민족은 어느 민족을 말하는 것일까요? 한국 고전 번역원의 주석에서는 여진족(女眞族)이라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여진족이 될수가 없습니다. 고전 번역원의 주석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사관에 의한 주석일 뿐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골간(骨幹)이라는 민족의 정체는 "한(漢)나라 때의 견곤(堅昆) 부족과 정령(丁令) 부족이었고, 당(唐)나라 때의 힐알사(黠戛斯) 부족 또는 골리간(骨利幹) 부족이었으며, 원(元)나라 때의 아라사(阿羅思) 및 길리길사(吉利吉斯) 였던 러시아 입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고려사절요 제1권을 보면,
"대상 유금필(庾黔弼)과 원윤 관무(官茂)ㆍ관헌(官憲) 등이 흑수(黑水)ㆍ달고(達姑)ㆍ철륵(鐵勒) 등 제번(諸蕃)의 강한 기병 9천 5백 명을 거느리며, 우천군 대장군(佑天軍大將軍) 원윤 정순(貞順)과 정조 애진(哀珍) 등이 보군(步軍) 1천 명을 거느
리고, 천무군 대장군(天武軍大將軍) 원윤 종희(宗熙)와 정조 견훤(見萱) 등이 보군 1천 명을 거느리며, 간천군 대장군(杆天軍大將軍) 김극종(金克宗)과 원보 조간(助杆) 등이 보군 1천 명을 거느려서 중군(中軍)이 되었다."
사가시집 제21권 시류(詩類) 또 길성 김 태수의 시에 답하다 2수
북으로 변방을 바라보니 길은 멀기도 한데 / 北望關河道路賖
가을바람에 기러기만 남으로 날아오누나 / 秋風獨有鴈南多
청삼의 관리 된 것을 그대는 괴이타 마소 / 靑衫作吏君休怪
백발로 어사된 나는 스스로 탄식한다오 / 白首爲臺我自嗟
철령은 머나멀리 흑룡강과 연접해 있고 / 鐵嶺迢迢連黑水
옥문관은 아스라이 사막과 닿아 있기에 / 玉關渺渺接黃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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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卷154
回紇,其先匈奴也,元魏時號高車部,或曰敕勒,訛為鐵勒
(회흘의 조상은 흉노이다.원위때는 고차부라 불렸으며 혹 칙륵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철륵으로 와전되었다.
신당서(新唐書) 券217上 회골상(回鶻上)
回紇,其先匈奴也,俗多乘高輪車,元魏時亦號高車部,或曰敕勒,訛為鐵勒。其部落曰袁紇、薛延陀、契羽、都播、骨利幹、多覽葛、仆骨、拔野古、同羅、渾、思結、斛薛、奚結、阿跌、白霫,凡十有五種,皆散處磧北。
(회흘의 그 선조는 흉노이다. 풍속에 고륜차를 많이탄다고 하여 원위때에 고차부로 불리었다. 혹 칙륵이라 하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철륵이 되었다. 그 부락은 원흘,설연타,계우,도파,골리간,다람갈,복골,발야고,동라,혼,사결,곡설,해결,아질,백습등의 무릇 15종의 종족으로
모두다가 적북 지역에 흩어져 산다.)
위의 사가시집에서 조선의 철령이 흑룡강과 연접해 있고 또 그 주변에 옥문관과 사막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 기록은 위에서 본인이 언급한 농암집과 서계집과 일맥상통한 기록 입니다.
즉 조선의 함경도 북쪽에 사막이 있으며 또 조선의 북쪽 변경이 백야 현상이 일어나는 흑룡강일대로 러시아 민족이 살고 있었던 지역 입니다. 지금의 한반도 상황과 절대로 다른 상황 입니다.
또 위의 고려사 절요의 기록을 보면 고려가 철륵(鐵勒)의 병력을 징발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의 대학연의보의 기록을 보면 철륵의 그 실체는 회흘(回紇) 입니다. 그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은
오늘날의 터키와 터키주변의 러시아의 강역 일대 입니다. 그 회흘의 15종 민족 중에 골리간(骨利幹)이 있습니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에서 고려가 징발한 철륵(鐵勒)=회흘(回紇) 민족은 오늘날의 터키와 터키주변의 러시아의 강역 일대에
있었으며 고려 또한 이 지역에 그 경계를 접하고 있었기에 철륵 민족을 병력으로 징발했던 것입니다. 고려를 이은 조선 또한 이 지역에 있었기에 철륵의 일파인 골리간(骨利幹)=골간(骨幹)이 조선 초기에 조선의 북쪽 국경을 노략질 한 것입니다.
고려,조선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현재의 터키 인근 강역에서 한반도 까지 왔다는 것은 하나의 환타지 소설에 불과 합니다. 또한 위의 고려조,조선 초기는 현재의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시베리아,극동지역의 강역을 차지하기 훨씬 그 이전 입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또 보면,
학봉집 제1권 시(詩) 제승정(制勝亭)에 걸려 있는 시의 운을 차운하다.
성 위 망루 두만강을 굽어보고 있는데 / 城上譙樓壓滿江
두껀 얼음 지는 해에 찬 빛을 내쏘누나 / 層冰落日動寒光
청구의 땅 경계는 궁발과 이웃했고 / 靑丘地界鄰窮髮
흑수의 강역은 대황까지 들어갔네 / 黑水疆場入大荒
움집 팠던 터에서는 구름 피어 오르고 / 陶穴有基雲藹藹
동강난 비 글자 닳아 풀만이 무성하네 / 斷碑無字草茫茫
변방 땅엔 예로부터 시름 생각 많았는데 / 龍沙自古多愁思
어느 누가 젓대를 긴긴 밤에 불어대나 / 誰遣胡歌吹夜長
위의 학봉집의 기록을 보면 청구 즉 조선의 강역이 궁발(窮髮)과 이웃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궁발(窮髮)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위의 기록에서 궁발(窮髮)이 있는 그 지역의 정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궁발(窮髮)이 있는 지역에 흑수(黑水) 즉 흑룡강이 있고, 또 "변방 땅엔 예로부터 시름 생각 많았는데 / 龍沙自古多愁思"에서
용사(龍沙)는 백룡퇴(白龍堆)를 말하는 것이며 백룡퇴(白龍堆)에 대해 한국 고전 번역원의 주석에 의하면 총령(蔥嶺) 인근의 사막을 말하므로 곧 백룡퇴가 있는 지역은 감숙성 지역 입니다.
역사를 연구하면서 본인은 조선의 서북방은 감숙성과 관련된 역사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또 역사의 진정한 총령은 코카사스 산맥을 의미하며 이와 관련된 감숙성의 흑룡강에서 오늘날의 흑룡강은 감숙성 지역에 없으므로
흑룡강이 될수 없으며 또 감숙성 흑룡강 지역에서 과거 러시아 민족인 골리간(骨利幹)이 살았으며 그 지역에서 지역적인 특성인 백야현상이 일어나는데 오늘날의 감숙성 지역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과 관련이 없으므로
진정한 감숙성 지역은 오늘날의 코카사스 산맥을 기점으로 한 지역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窮髮之北有冥海者"(궁발의 북쪽에 명해가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식산집(息山集) 행장(行狀)의 기록을 보면 "會寧窮髮之北而接野人界"(회령은 궁발의 북쪽 야인의 경계에 접해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또 연재집(淵齋集)의 기록을 보면 "骨利窮髮之外渺茫海窟冰火暗奧"(골리간(骨利幹),궁발의 밖은 아득히 넓고 먼 바다와 깊은 어두움과 빙화가 있다.)***빙화(氷火):드넓은 곳에 오직 눈과 얼음만이 가득하여 그 눈과 얼음에
반사된 빛을 의미 함.***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또 보면,
성호사설 제9권 인사문(人事門) 삼락(三樂)
영계기(榮啓期)의 삼락(三樂)은 스스로 생각을 너그럽게 가진 것이니, 진실로 너그럽게 뜻을 갖는다면 갈(褐)을 입건 새끼로 허리띠를 하건 어디 가도 즐겁지 않는 것이 없으리니, 군자(君子)의 낙이 어찌 다함이 있으랴.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밖에 또 삼락이 있으니, 인생의 큰 근심은 난리가 일어나서 마구 죽이고 죽곤 하여 애잔한 목숨이 현ㆍ우(賢愚)를 막론하고 구학(丘壑)에 메워지는 것보다 더함이 없는데, 다행히 소강(小康)의 시대를 만나서 바깥 도둑이 침범하지 아니하여 전야(田野)에서 한평생을 마치게 된 것이 첫째요, 대륙(大陸)의 남ㆍ북이 춥고 더움이 너무도 달라서 적도(赤道)의 아래는 화기가 맹렬하여 물(物)을 태울 지경이요, 궁발(窮髮)의 밖에는 얼음이 얼어 녹을 사이가 없는데, 나는 적도의 북쪽인 북극(北極)의 남쪽에 나서 따습고 서늘함이 알맞은 것이 둘째이다. 무릇 천하의 백성이 농상(農商)ㆍ잡례(雜隸)를 막론하고 모든 부세(賦稅)가 갈수록 많아져서, 1년 내내 부지런히 움직여도 입에 풀칠하기 부족한데 다행히 명조상[名祖]의 음덕에 힘입어 편하게 지내면서 굶주림을 면하고 있는 것이 셋째이다.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외집권58 필기류,난실담총(筆記類,蘭室譚叢)
淸國徵我兵。助攻車漢賊。車漢者羅禪也。按羅禪卽鄂羅斯地。在極北。秦漢之間。服屬㐫奴。在漢爲堅昆,丁零。在唐爲點戛斯.......骨利幹等國。元時阿羅思及吉利吉思.......淸順治初。其衆曰羅刹。竊據黑龍江雅克薩之地。築城居之。......."
(청나라에서 조선병력을 징발해서 차한공격을 돕게 했다. 차한이라는 것은 라선이다.살펴보건데,라선은 즉 악라사 땅이며 북극지역에 있다. 진나라 한나라 연간에 (차한은)흉노에 복속되었고,한나라때 견곤,정령이다. 당나라때 힐알사 이다.
골리간등의 나라가 있다. 원나라때 아라사,길리길사였다. 청나라 순치초에 그 무리들을 나찰이라 일컬었다. 흑룡강 아극살의 땅에서 성곽을 지어 노략질하며 살았다.)
위의 기록을 보면 러시아 민족이 살던 지역은 북극(北極) 지역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성호사설의 기록을 보면, 궁발의 지역의 밖은 "얼음이 얼어 녹을 사이가 없는" 즉 북극 지역임을 알수 있습니다. 성호사설의 또 다른 기록을 보면,
"故窮髮之外有恒寒之地(궁발의 밖은 항상 추운 지역이 있다.)" 이는 북극 지역이 아니고서는 늘상 추운 지역이 있을수 없습니다. 또 위의 식산집의 기록을 보면 함경도 회령 지역이 궁발지역임을 알수 있고
위의 연재집의 기록에서 궁발과 러시아 민족을 가리키는 골리간(骨利幹)의 밖이 어떠하다는 기록을 볼때 함경도와 골리간 즉 러시아의 밖은 완연한 북극지대 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은 골리간(骨利幹)=골간(骨幹)=러시아와 경계로 접해 있었으며 또한 조선과 러시아의 북쪽은 북극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과 경계로 있었던 골리간(骨利幹)=골간(骨幹)=러시아는 고려조때에는
고려의 제번(諸蕃) 즉 제후였으며 조선조때에도 위의 명종실록 7년 임자(1552,가정 31) 10월13일 (임술)의 기록처럼 조선을 대국(大國)으로 받드는 나라였습니다.
역사에서 골리간(骨利幹)=골간(骨幹)=러시아 민족의 역사는 다시금 수정되어야 마땅하다고 판단 됩니다. 조선조 명종때 러시아는 모스크바 공국 시대 입니다. 제국(帝國)이 아닙니다.
공국(公國) 입니다. 이는 공작(公爵)의 작위를 받은 작은 소국(小國)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작은 소국 모스크바 공국의 골리간(骨利幹)=골간(骨幹)=러시아 민족이 조선을 대국(大國)이라 불렀습니다.
또한 고려 초기때 이들은 키예프 공국(公國)을 세웁니다. 이 또한 공작(公爵)의 작위를 받은 작은 소국(小國) 입니다. 또한 이들은 고려때 고려에 의해 고려의 병력으로 병력을 징발 당합니다. 또한 고려는 이들을 고려의 제번(諸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이 공작(公爵)의 작위를 받은 작은 소국(小國)된 그 배경이 고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체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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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리가 있네요 러시아는 공국이라고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