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과 을미사변
김기수, 38세. 김도수, 38세. 김재풍, 35세.
갑오개혁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정은 내정개혁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일본은,
조선 조정의 내정개혁에 간섭하며, 그들의 침략에 이용하려했다.
동학 농민운동이 진압되자,
갑오년인 1894년 ~1896년까지 진행되었던 개혁운동으로,
갑오경장이라 고도 하며, 청과 일본의 대립속에서
일본의 지지를 받은 개화파가 벌인 개혁운동이다.
조선은 도원 김홍집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는데,
이를 갑오개혁이라한다.
갑오개혁에서 홍범 14조에 그 정신이 나타 있듯이,
정부의 조직을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었다.
새로운 관리 임용법과 사법제도 도 고치고,
신분제도와 도량형도 통일하는 등 근대화의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간섭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을미사변
이렇게 일본의 세력이 우리나라에서 급격히 커지자,
러시아는 일본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프랑스와 독일을 끄려 들여 3국이 공동으로 요동반도를
청(淸)에 반환하도록 일본에 압력을 가하니, 이를 3국 간섭이라 한다.
일본이 3국의 간섭에 굴복하자,
조선에서는 명성황후의 민비를 중심으로 일본의 세력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접근하려 움직였다.
고종 32년(1895)에 일본은 다시 그들의 세력을 만회 하기위해,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고로의 지휘로 일본군대와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 민씨를 살해 한 사건이다.
이를 을미사변이라 한다.
국모가 시해당하는 불행한 사건을 계기로, 지방의 유생들이 일어나
일본에 항거하는 의병전쟁이 일어났다.
먼져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시작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로 확산되었다.
김기수(冀洙, 38세)가
연산지구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과 수차 교전하여 적을 괴롭혔다.
그해 12월에 가야곡면 풍덕마을 전투에서
진두 지휘하다가 장열히 전사하였다. 15세의 젊은 나이었다.
김도수(道洙, 38세)는
봉화 삼계서원에서 대향회를 개최하여
원근 경향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았다.
권세연을 의병대장으로 삼고,
그 휘하에서 의병장교로 출정하여 군공을세웠다.
김재풍(在豊, 35세)은
시해 주동세력에 의해 구성된 내각을 살해 함으로
국모의 복수를 하고자 모의하였다.
그의 숙부 필동장신이라 부리우는 어영대장인
우정 김기석 휘하의 군관들을 설득하여
혈명을 지키기로 하고, 쿠테타를 일으키려 하였다.
미리 내통해 두었던
시위대장 이진호의 변심으로 대궐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역공격을 가해와 쿠테타는 실패로 끝나고
김재풍은 무기형의 유배를 당했다.
아관 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유배지에서 풀려나왔다.
김재풍은 친러파 세력에 의해 허덕이는 국권을 회복코자
다시 정변을 시도했으나 성사를 이루지 못하였다.
광산김씨약사. 2024년, 7월. 편집,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