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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26 - 공항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일본의 양심 오에 겐자부로를 생각하다!
11월 8일 도쿄의 도쿄역 동쪽에 자리한 도요코인 야에스 기타구치 호텔 에서 아침을
먹는데, 보통은 1층 로비에다가 식탁 이 차려지고 쌀밥에 미소시루와 몇가지
반찬이 나오지만... 도쿄 물가가 워낙 비싼 탓인지 빵에다가 미소시루국 으로 때웁니다?
그러고는 호텔을 나와 1603년 에도 막부가 세워지고 도카이도(동해도) 등 다섯 방향 도로
가 출발하는 강변에 세워졌다는 니혼바시(日本橋 일본교) 다리를 찾았는데
현재 다리는 20번째 건축된 다리라 오래된 일본 전통양식의 고풍스러운 다리는 아닙니다.
일본교를 뒤로 하고 호텔로 돌아와서는 체크아웃을 하고 배낭을 메고 나와 걸어서 사쿠라 도리
(さくら通り) 를 지나 도쿄역 으로 가는데 공항 가는 방법은 크게 다섯가지가 있으니.....
국철 나리타 익스프레스, 국철 JR 기차, 사철 스카이 라이너, 리무진 버스 에 1,300엔 버스 입니다.
나리타 공항에서 도쿄로 들어올 때나 반대로 나갈 때는 주로 기차를 이용했는데... JR 패스가 있다면 나리타
익스프레스 가 빠르고 편하니 신주쿠역에서 시부야역을 거쳐 도쿄역에서 나리타공항에 가는데, 패스가
없다면 요금이 비싼게 흠이니 도쿄역에서 3,070엔 하는데, 왕복으로 끊으면 할인 이 되어 4,000엔대 입니다.
국철 JR 나리타선 은 많은 역에서 탈수 있고 환승하기도 좋으며 요금이 1,342엔으로 저렴하기는
하지만 수많은 역에 서는지라 시간이 1시간 반 가량으로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습니다.
숙소가 도쿄 북부지역이라면 사철인 케이세이(경성) 전철 에서 운행하는 스카이라이너 SKYLINER 의 경우는
우에노역 을 출발해 닛포리역 을 거치는데 배차간격도 20분 단위로 40분만에 가며 요금은 2,300엔 정도 합니다.
공항 리무진 버스 는 도쿄역과 신주쿠, 긴자, 아카사카, 시부여, 아사쿠사 등 주요 역에서 출발하며 한국 처럼
일반 버스 보다는 프리미엄 느낌의 버스이고 심지어 버스 내부에 화장실 도 있어서 긴 장거리
시간에도 부담없이 버스 탑승이 가능한데 요금은 3000엔으로 좀 비싼편이고 시간도 한시간 이상 걸립니다.
1300엔 버스 의 경우 예전에 천엔버스로 저렴한 가격에 이용이 가능해서 유명했던 이동수단이며 공항 리무진
버스 보다 배차 시간이 많다는 장점이 있으나 좌석은 모두 자유석이며 시간이 오래 걸리는게 단점 입니다.
그간 주로 기차 를 탔지만 오늘은 숙소가 도쿄역 북구이니 도쿄역 중앙구 바로 옆에 있는 남구 까지 걸어서
공항 리무진 버스 를 타기로 하는데 7번 정류소 에 나리타 공항 버스가 정차해 있기로 바로 올라탑니다.
리무진 버스 는 도쿄역 남구를 출발해서는 도쿄 시가지를 빠져 나가 강을 건너서 동쪽으로
달리니 창가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 보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일본의 양심 오에 겐자부로 잠들다” 라는 동아일보 횡설수설란에 올린 장택동씨의 글 입니다.
1960년대 일본 문학계에서는 ‘엄청난 재능을 지닌 작가 가 나타나서 작가 지망생들이 붓을 꺾었다 ’ 는
말이 돌았다. 그 주인공이 1994년 노벨 문학상 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 다. 1950년대 후반 등단해
‘만연원년 (万延元年·1860년) 의 풋볼’ 등 세계적 명작들을 남긴 그가 타계했다고 일본 언론이
13일 전했다. 오에를 추모하는 이들은 대문호로서 명성 못지않게 ‘일본의 양심’ 으로 그를 기억한다.
“일왕이 사람의 목소리 로 말한다는 것에 놀랐고 실망했다.” 오에는 1945년 8월 15일 라디오로 일왕의 항복
선언 연설을 들었던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1935년 태어나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던 그는 어릴 적
“일왕은 신비한 하얀 새 와 비슷할 것” 이라 상상했다. 그런데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왕도 사람임을 깨달은
것이다. 당시 느꼈던 충격 과 미 군정 체제에서 경험한 민주주의가 오에의 세계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58년 소설 ‘사육’ 으로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을 최연소로 수상하며
필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63년 아들이 중증 장애 를 안고 태어나면서
그의 삶은 크게 바뀐다. 낙담한 오에는 생후 한달 된 아들을 병원에 놔둔 채 히로시마로 떠났다.
하지만 원폭 피해자 들을 돌보던 의사에게서 ‘아픈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뭔가를 해야만 한다’ 는 말을 듣고
서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고 미국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도쿄로 돌아와 아들을
돌보며 쓴 소설 ‘개인적 체험’ 등은 그의 대표작이 됐다. 그는 “아들과 공동 집필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오에 겐자부로의 말 중에 “그래, 지옥에는 내가 간다” 라는 말이 있으니....탁구공만한 혹을 뇌에 달고
태어났던 아들 히카리 를 그는 40년간 매일 밤 마다 아들의 담요 를 덮어주는 일로 하루를 마감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자기 담요하나 제대로 못 덮어 겨울이면 감기에 걸리는 아들 때문에 고생했습니다.
오에는 평소 조용하고 배려심이 깊은 인물이었다. 한국인들이 자택으로 찾아온다고 하면 문패 위에
한글로 이름 을 써서 붙여놨을 정도였다고 윤상인 전 서울대 교수는 전했다. 하지만 폭력, 특히
국가의 폭력에는 강하게 반대 했다. 그는 에세이에서 “권력이 쌓아올리는 사실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적으로 저항하는 목소리 를 계속 내는 길밖에 없다”고 썼다. 그리고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오에는 “일본은 아무리 사죄 해도 충분하지 않을 만큼 엄청난 범죄를 한국에 저질렀다”
며 지속적으로 일본 정부에 사과를 요구 했다. 그는 신사참배에 반대 하고, 일왕이
주는 문화훈장을 거부했다는 이유 등으로 극우 세력에게서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다.
협박 전화 가 너무 많이 와서 지인들과는 전화 대신 팩스 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한다. 그런데도
그는 노년 까지 집회에 참여해 “평화헌법을 지켜야 한다” 고 호소했다.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 일본의 지식인이 또 한 명 귀천 했다는 소식이 안타깝다.
미시마 유키오 는 다니자키의 시대가 가고 오에의 시대 가 올 것이다. 내가 상을 받은 다음에 노벨문학상을 받을
사람은 오에 뿐이다 라고 말했는데 일본의 소설가이자 사회운동가. 일본 내 진보주의, 평화주의의 상징으로
'전후 민주주의 세대의 거성', '전후 민주주의의 기수' 라 불렸으며, 일본의 두번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입니다.
1958년 당시 '사육(飼育)' 이라는 작품으로 23세 5개월의 나이로 아쿠타가와상 수상 이라는 상당한
경력이 있으니 당시에는 최연소 수상자였고, 이 기록은 2003년까지 유지되다가 2003년 하반기
아쿠타카와상을 당시 19세이던 와타야 리사 가 수상하며 이 기록은 깨지게 된다. 엄밓히는 1999년
수상자 히라노 게이치로가 생년월일차로 앞서 깨졌으나 여전히 23세였기에 기록 자체는 유지되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에 이어 일본인으로는 2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 수상 직후 아키히토
덴노가 문화훈장과 공로상 을 수여하려고 했으나, 본인이 거부 하였다. 이유는 전후 민주주의자
로서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권위와 가치 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니 좌파 성향이 강해
사회운동도 하고, 특히 원폭과 원전 전반에 대한 비판을 많이 남겼다. 반전 운동에도 앞장선 인물이다.
일본인 노벨 문학상 수상자 3명 중에 2번째로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는 대표적인 친한파 명사이니 실제로
노령임에도 한국에 자주 방문 했다. 현재는 절필을 선언하며 작품 활동은 하지 않는다. 대신
사회 운동 을 택했다고. 2023년 3월 3일 향년 88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별세 했음이 3월 13일 공고되었다.
대표작인 만엔원년의 풋볼 (万延元年のフットボール) 은 '만엔원년' 이란 제목 때문에
막부 말기의 일본을 다룬 소설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다. 오에의
대표소설이자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수상작이다. 1967년작이고 영제는 'The Silent Cry'.
안보 투쟁 에 참가했다가 진압대에게 영 좋지 않은 곳을 맞아 미쳐 버린 뒤 기괴한 몰골로 자살한
친구를 부러워하며 폐인 처럼 지내던 주인공 네도코로 미쓰사부로 는 안보투쟁에 참가했다가
전향한 인물의 대표로 미국에서 참회극 공연을 하던 동생 다카시 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다카시와 만난 미쓰사부로는 막부 말기인 만엔원년에 농민 봉기를 일으킨 증조부 동생 과 그를
진압한 증조부 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고향으로 떠나니 그곳에서 다카시는 자신을 증조부
동생과 동일시 하며, 시골의 경제를 장악한 조선인, '슈퍼마켓 천황' 이 소유한 슈퍼마켓
을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마을 청년들을 모아 풋볼 연습을 빙자한 훈련을 시키기 시작하는데…
제목 처럼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얽혀 들어가는 전개가 일품이다. 재일동포 문제 도
다룬다. 주인공 친구 부터 시작해서 알콜중독자인 주인공 아내, 근친상감 이야기,
처참하게 죽은 마을 처자와 관련 묘사 등등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이 여럿 나온다.
이야기의 흐름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등장인물과 사건 자체의 의미를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결말부의 충격적인 반전 이 인상적이다. 이렇게 폭풍 처럼 휘몰아치는 전개 방식으로
일본이라는 국가의 폭력성과 그에 대한 수치심 을 오롯이 시사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치료탑(治療塔) 은 사람을 치료할수 있는 치료탑이 있는 혹성을 둘러싼 이야기로 장남인 히카리가
자폐를 안고 태어나서, 힘들게 살았던 저자의 개인적인 고뇌가 표출 되었다고 하며.... 체인지링
(チェンジリング) 은 중년의 시점에서 자신의 친구 겸 처남과 작가 본인의 청소년기 시절을 회상하고
고뇌하는 소설. 역시 저자인 오에 겐자부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으로 2000년작 이다.
'나의 나무' 아래서 (「自分の木」の下で) 는 오에 겐자부로의 사상과 한계를 엿볼 수 있는 에세이집. 2001년에
발간되었다. 책 제목은 "사람마다 자신의 나무가 있으며, '나의 나무' 아래에서는 노인이 된 자신을 만날
수 있다" 는 고향의 전설에서 따 왔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의외로 '비교적' 쉽게 쓰여 있다. 그래도 꽤 어렵다.
개인적인 체험 (個人的な体験) 은 한때 유망한 대학원생이었으나 술에 의지해 현실도피한 끝에 입시학원 강사로
전락한 주인공이, 막 태어난 자신의 아들이 머리에 기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 아이를 기를
것인지 아니면 '안락사' 시킬 것인지에 대한 선택에 놓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이야기. 1964년작 이다.
이 작품 역시 작가의 경험 을 토대로 쓰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겐자부로의 아들인 유명한 음악가
오에 히카리는 뇌 헤르니아 장애로 뇌수술 끝에 무사히 태어나나 일생동안 지체장애 를 안고
살게 되는데 특유의 절대음감으로 음악에 재능 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가족들의 격려로 음악가의 길을 걷게된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臈たしアナベル・リイ総毛立ちつ身まかりつ) 는
나이가 70이 넘은 겐산로는 지적 장애인 히카리를 돌보며 늙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겐산로의 지인이자 영화 제작자 고모리가 30년 만에 그의 앞에 나타난다.
겐산로와 고모리는 과거 8mm 영화 <애너벨 리> 의 여주인공이었던 아역 배우 출신
사쿠라와 함께 30년 전 독일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 을 일본 시코쿠지역 농민봉기로 각색 하여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불미의 사고로 영화 제작 프로젝트는 무산되어 고모리는 미국으로 도피 했고, 사쿠라는 영화 출연의
꿈을 포기하게 되었으며, 겐산로는 점점 글쓰기와 멀어지게 되어 각자 마음의 상처 를 지니고 있었다.
30년뒤, 겐산로는 고모리와 오랜만에 회동하고, 한국의 시인 김지하 석방을 위한 단식 농성장 에 찾아온
사쿠라 를 마주하게 되며 이 셋은 자신들에게 트라우마와도 같던 영화 제작 프로젝트를 재개하기로 하는데.....
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예술가로서의 열정을 표현 함으로써 지난 과거의 상처를 극복 하는 노인들의 성장
소설이다. 또한 오에 자신의 자전적인 내용도 들어있어 픽션과 논픽션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하마에게 물리다 (河馬に嚙まれる) 는 1985년 출판된 연작 단편소설. 이 작품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 수상. 일본 연합 적군파의 아사마 산장 사건 과 산악 베이스 사건의 생존자를 주인공으로 채용한 소설.
정치 성향은 반전체주의, 반군국주의, 반덴노주의, 반권위주의 에 민주주의 정치 성향으로 좌파이자 진보적
성향을 띠며, 덴노제 폐지를 주장 하고 아키히토 덴노의 훈장 수여를 거부 하는등 적개심이 강하다.
2003년 이라크 전쟁때 자위대 파병에 대해 “이라크에는 순수한 인도적 원조만 하면 될 것" 이라고
밝힌 바 있으며, 2004년 헌법 9조(평화헌법) 를 지키기 위한 '9조의 회(모임)' 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또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를 '일본과 일본의 젊은 세대의 장래를 최대한으로
해치는 것' 이라고 말한 적도 있으며, 2012년 영토 문제의 악순환을 막자며 독도와 센카쿠 열도
(중국명 댜오위다오) 에 대해서는 과거에 일본이 침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힌
적도 있다. 또한, 난징대학살 에서 일본군의 잘못을 인정하는 등 일본의 우익세력이 이를 갈만한 성향이다.
2014년 김영호 경북대 명예교수와의 대담을 가짐으로써 20년만에 한국 언론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때는 아베 신조의 행보를 조목조목 비판 하기도 했다.
'아시아의 평화' 가 개별 국가의 번영 보다 우선 하는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했다.
루쉰 을 20세기 가장 위대한 아시아 작가라고 평했으며 나이를 먹은 뒤로는 에세이 를 많이 쓰는 편이다.
일본 유명 음악가로 활동하는 장남인 히카리가 자폐증 환자니 그런 고통을 소설 '치료탑' 과
'치료탑혹성' 으로 표출하였으며 이후 개인적 체험을 통해 아들과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이 아들인
히카리는 절대 음감을 통해 유명 음악가 가 된다. 고토쿠 슈스이도 이 사람과 비교해 볼만한 학자이다.
“만년양식집” 은 ‘행동하는 양심’ 오에 겐지부로의 유작 으로 소설은 오에 작가의 분신과 같은
캐릭터인 ‘조코 코기토’ 를 주 화자로 진행된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무너진 서고에서
빈 노트를 발견한 코기토는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 ‘만년의 양식에 대해서
(On Late Style)’ 에서 착안해 만년양식집(晩年樣式集)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코기토는 지진 관련 TV 프로그램 을 보다가 ‘우우 소리를 내면서’ 운다. 소설은 여러 사람의
시선이 중첩되며 오에 작가의 인생과 작품세계를 형상화하는데 작가는 일본 사회가
2011년 ‘3·11’(동일본 대지진) 을 겪고 충격과 혼란에 휩싸인 가운데 2012∼2013년 문예지
에 이 소설을 연재했다. “원숙한 노작가로서가 아니라 파국에 내몰리는 심정으로 썼다” 고 했다.
소설 속 코기토는 노구를 이끌고 원전 반대 집회 에 나선다. 맨 앞줄에 섰다가 커다란 유세차 스피커 소리에
노출되는 통에 괴로워하지만 휘청거릴지언정 끝내 낙오하지는 않는다. 평생 반전과 반핵 운동 에
앞장섰던 저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오에 작가는 이 작품을 쓰고 10년이 지난 올 3월 88세로 별세했다.
“내가 열살이 될 때까지/온 나라가 다 같이 전쟁을 했다/…/나라님이/인간의 목소리로/전쟁에 졌다고
통고한 날/라디오 앞에서 교장이 서서 외쳤다./우리는 다시 살 수 없다!/…/
그 어떤 절망에도 동조하지 않는 일이다…/…/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책의 맨 뒤에 실린 시다. ‘노년의 곤경’ 에 처한 화자는 첫 손주에게서 자신과 닮은 모습을 보고
어린시절 어머니가 했던 수수께끼 같은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 상상력이 쓴 소설
따위가 어느 만큼의 영향이 있었나, 싶어” 괴로워 하다가 다시 “누군가에게 가
닿을 수가” 있다고 희망을 품는다. 작가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시” 라고 했다.
오에의 청년시절 이후의 작품들은 비비꼬인 복잡하고 난해한 문장 때문에 읽기 쉽지 않은
편이다. 오에 스스로도 자신의 문장을 '악문' 이라고 부를 정도다. 그래서 그가 일본
문학계의 거성이 되고 노벨 문학상까지 받고 난 후에도 '일본 사람들은 누구나 집에
오에 겐자부로의 책 을 한 권씩 사 두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적다' 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오에 겐자부로는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50년 뒤에 노벨 물리학상 을 타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노벨 문학상을 타고 어머니에게 노벨상을 타서 약속을 지켰다고
하자 어머니가 '아니.' '네가 약속한 건 물리학상 이었잖니.' 라며 받아쳤다고 한다?
하기사 일본인이 탄 노벨상 30명 중에서 무려 26개가 과학상 이니 압도적이기는 하지요!
일본의 애니메이션의 거장인 타카하타 이사오 와 같은 도쿄대학 불문과 동기 이지만 이후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서로 면식이 있는 사이는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조금의
접점이 있다고 하면 1955년 당시 도쿄대학의 학우회의 기관지에 오에는 자신의
첫 소설 작품이었던 '화산' 을 게재하였고 타카하타는 영화 연구회의 동인지를 기고했다고 한다.
소련의 아르카디 스트루카츠키 가 사망했을때, 현자가 우주로 갔다고 조의 를 남기기도 했다. 2005년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해 " 이 자리에는 노벨상을 이미 받았어야 하는데 못 받은 작가 한 사람과,
앞으로 받을 사람이 세사람이 있다" 했는데, '못 받은 한 사람' 은 르 클레지오 (2008년 수상) 였고,
'앞으로 받을 사람 세 사람' 은 오르한 파묵(2006년 수상) 과 모옌(2012년 수상) 그리고 황석영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