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
대설/ 김일연
그 모습은 태산준령 그 마음은 깊은 골
덮을 대로 다 덮고 메울 대로 메우며
와서는 어찌하려나 녹아 눈물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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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남승열
온기를 잃어버린 싸늘한 찻잔 너머
몇 시간째 눈비가 어긋지게 내리고 있다
지구의 기울기만큼 고개 돌린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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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 이우걸
내 살아온 날들이 그려낸 발자국들
비 오는 날 연서를 읽듯 방명록을 읽는다
어쩌다 돌아선 이도 자꾸 눈에 밟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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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호>
그런 뜻이었군요/ 손증호
그날 밤 어머니께서 조곤조곤 이른 말씀
곰곰이 생각하니 그런 뜻이었군요
별안간 깨닫고 나서 눈물 왈칵 쏟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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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때란 없다/ 김영주
뭔가를 하려 하면 위기가 들이닥치고
위기를 넘기고 나면 기력이 다 빠진다
그렇게 쌓아온 하루가 오늘이고 어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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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세/ 옥영숙
덩굴장미 울타리에 척후병 숨어들듯
찔레꽃 하얀 꽃잎 덧니처럼 자리 잡고
혁명을 일으킬 거야, 허점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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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공영해
노루귀가 찾아와서 눈이 녹은 골짜기
눈이야 녹든 말든 노루귀 피든 지든
나하곤 상관없는 일 그게 무슨 대순가
대수도 큰 대수, 아주 상관이 있어요
눈 녹고 꽃 피는데 혼자서만 살아서야
나와서 겨울을 씻고 함께 피는 꽃을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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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호>
어긋나기/ 박명숙
끝없는 어긋나기로
긴 하늘 밀어 올리며
홀로 선 잎새들은
마주보지 않는다
아슬한
눈금 사이로
외로움을 가로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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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알 포도송이 포도주/ 서연정
포도송이처럼 서로 붙어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 순간이 으깨져 향기로 화하는 때
'외 다수', '한 사람 건너'라는 말 달콤하고 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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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 가기/ 김영재
선암사 가시려거든
동전 한 닢 준비하세요
작은 종 달아놓고
동전 던져 종을 치면
종 아래 동전이 모여
극락 여비 된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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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 윤종영
발에 차여가며
살아갈 생(生)이라서
땅으로 곤두박질
헛발질이 두려우니
이왕에
날 차려거든
하늘 높이 띄워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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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는 시대가 선택한 미학 질서이자 가치이다.이를 부정하겠다면 다른 선택을 하면 그만이다. 불편부당한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다고 처방전의 양식을 탓하는 일은 과거 선인들이 이룬 시조의 성과를 부정하고 미래세대의 가치를 착취하는 일일 뿐이다. 국권 강점기 민족문화 말살로 망하게 된 시조를 살려낸 것은 일부 건강한 정신의 힘 덕분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담아내기 힘겹다고 그릇을 깨트려서 새롭다고 우기는 시조단, 비평다운 비평이 사라진 시조단, 상이 넘쳐나 모든 시조인의 갈증만 증폭시키는 시조단, 시멘트를 섞어서 만든 그릇으로 백자라고 우기는 시조단, 개별적 야망을 위하여 집단을 악용하는 시조단, 구매자 없이 자비 광고용 시조집을 양산하는 시조단, 아직도 잡초를 양산하는 시조단.... 시조는 지금 자살 모의에 내둘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민병도(시조21 발행인) 가을호 권두칼럼 <시조의 자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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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
근심탑/ 정용국
쓴 말은 팽개치고 빈말만 쌓았구나
초 치고 날을 세워 제 잘나게 올린 공덕
굄돌도 마음이 궁해 허둥대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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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는 어디에/ 윤은주
단체로 대엿새쯤 여행을 가보면 안다
뭉치자고 말은 해도 여러 갈래 마음자리
그 안에 끼리끼리 문화, 단합은 모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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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 낌새 3/ 문무학
들고 날던 밥상 앞에
식탁이 딱 버텨 서자
숟가락 부딪치며
정을 듬뿍 찍어 먹던
식구는 밥상을 들고
이민을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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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 신필영
발목이 가느다란 초식동물 눈빛 같다
상류 쪽 맑은 물에 은어 떼로 튀는 햇살
길 나선 외나무다리 혼자 내를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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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낚시터/ 이두의
입질하던 물고기
떡밥을 덥석 문다
열 때와 닫을 때를
모르는 사람들도
한순간
월척이 된다
불퇴전도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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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정지윤
달보다 먼 타인을 느끼는 한강의 밤
깊은 생각에 빠져 죽을 수도 있을까
이방인 청년의 눈은 꿈을 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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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강현덕/ 노벨문학상 수상국에서의 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