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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암(玉泉庵)은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의 한성의 북대문인 홍지문(弘智門) 부근에 있는 사찰로 1868년에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법사(淨觀法師)가 관음전(觀音殿)을 건립하여 천일기도를
올렸다.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건립하였으며
1932년에는 대방 6칸과 요사채 3칸을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중수하고
보타전(寶陀殿)을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관음전·삼성각(三聖閣)·요사채가 있으며
높이 10m의 바위 남쪽 면에 새겨진 관음보살상이 유명하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17호인 마애불은 오래 전부터 흰 칠을 하였고 지붕을 씌워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라 칭하였는데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 마애불은 예로부터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들이 와서 기도하고 영험을 얻었다고 하며
대한국 태조 고황제가 기도한 일이 있고 흥선대원군의 부인이 아들인 고조 광무제를 위해서 자주 찾아와 기도하였다고 한다.
보도각 백불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인데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며,
그 부처가 백불이 된 것은 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아들(고종)을 위해 치성을 드릴 때
흰 칠을 했다고 한다.
홍지문-유형문화재 제33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으로, 조선 숙종 41년(1715)에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해 세웠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21년 홍수로 오간대 수문과 같이 허물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한북문이라고도 부른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홍지문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홍지문은 숙종 41년(1715)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성문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년간 방치되어 왔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 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석축 윗 부분 둘레는 여장(女牆)이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로 우진각 지붕이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여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왜란과 호란 속에서 서울이 함락되며 갖은 고초를 겪은 조선왕조는 전쟁이 끝난 후 국방은
물론 유사시에는 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효종(1649∼1659 재위),
현종(1659∼1674 재위)을 거쳐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방위에 더욱 치중하였다.
숙종은 재위 30년(1704) 3월부터 도성 수축공사를 시작하였고
이 공사는 6년 후인 숙종 36년(1710)까지 계속되었다.
도성 수축공사를 끝낸 숙종은 왕 37년(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이 탕춘대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이미 숙종 28년(1702)에 신완(申琬)이
제의하였다. 그후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윤8월 26일부터 축성하기 시작하여 10월 6일
까지 40일간 성 전체의 약 반을 축성하고 일단 중지하였다가
다음해 2월부터 다시 축성하여 약 40일 후에 완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였음도 알 수 있다.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탕춘대성은 축성을 담당했던 관아나 또는 축성역, 축성 방법, 축성 경비 등에 관해서는
일체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다른 성의 축조와
마찬가지로 군문(軍門)에서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주 성벽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 서울시 문화재 33호
홍지문 북쪽으로 홍제천(모래내, 사천)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 26. 72m, 폭 6.8m, 높이 5.23m, 수구 폭 3.76m,
수구 높이 2.78m의 5간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다.
홍제천은 우리 여성 선조들의 애환이 드러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묘, 병자호란(인조)때 공녀로 청나라에 잡혀갔던 여자들이 돌아왔으나
어디에서도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피해자인 그녀들은 오히려 '환향녀'라고 손가락질을 받았을 뿐이다.
나라에서는 궁여지책으로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된다는 명을 내렸다.
공녀들이 나라의 명을 받아 홍제천에서 몸을 씻지만, 결국은 도성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이곳 주변에 눌러 앉아 살게 된 경우들이 많았다고 한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 탕춘대성의 옛날 모습이다.
'석파랑'이라는 한옥 음식점이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 높은 언덕 위에 대원군별장이었던 '석파정' 별당 집 한 채가 놓여
있다. 이 별당은 서예가 손재형씨가 이곳에 집을 지으면서 뒤뜰 바위 위에 옮겨다 놓은
것이란다. 대원군 별장 말고도 석파랑은 덕수궁, 운현궁, 선희궁, 칠궁 등에서 헐린 목재,
기와, 돌 등을 사용하여 지었다고 한다.
손재형 선생은 추사 이래의 명필로 추앙받을 정도로
우리나라 서예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대가이다.
손재형 선생이 타계한 후, 석파랑은 1989년 김주원 씨에 의해 매입돼
1994년부터 전통 한식당으로 운영되어 오고 있다.
만세문
1898년 대한제국 선포와 고종의 황제 즉위를 기념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세워졌던 것이다.
암,수 학 두마리가 불로초를 입에 물고 있는 형상이 새겨져 있다.
이 문을 지나면 만사형통과 무병장수한다고 한다.
석파랑 별당-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3호. 19세기 중엽 건립, 1958년 이전.
이 집은 19세기 중엽에 건축된 것으로 창의문(북소문) 밖에 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석파정(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3호)의 별당이다.
1958년에 서예가 소천 손재형(1903~1981)이 이곳에 자신의 집을 지으면서
이 별당을 뒤뜰에 옮겨 지었다.
이 집은 중앙에 대청이 있고 양 옆에 방이 있는 ㄱ자형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석파랑은 6·25전쟁 직후 석파정이 ‘코롬바 고아원(아마도 골롬바 어린이집)’으로
이용될 당시 멸실 위기에 처했던 석파정의 사랑채를 서예가 손재형 선생이
지금의 홍지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당시 손 선생은 석파정 사랑채와 순종왕후 윤씨의 생가, 조선후기 기생 나합의 집 등
서울 시내에 흩어져 있던 조선후기 건축물들을 옮겨와 새집을 지었고,
이후 1974년 석파랑 사랑채에 해당하는 부분이 '대원군 별장'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23호로 지정됐다.
흥선대원군이 앞쪽으로 돌출된 큰방을 사용하였고,
난초를 그릴 때에만 대청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손님을 대접할 때는 건넌방을 사용했고.
지붕이 끝나는 측변에는 붉은 벽돌로 벽을 세웠고, 벽 중앙에 원형과 반원형의 창을
내었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중국풍 건축의 특징이다.
정면의 툇마루에 설치된 난간은 상류사회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훙륭한 기술을 지닌 장인들이 고급자재를 사용해 지은
조선 후기 상류사회의 대표적인 별장 건축물이다..
세검정-서울시 기념물 제4호.
종로구 신영동 168-6 에 있는 세검정터 (洗劍亭 터) 전경.
세검정은 조선(朝鮮) 제19대 숙종(肅宗) 때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築城)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 전하며, 그후 영조(英祖) 24년(1748)에 중수(重修)하였다.
T자형 3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록에 의하면 세검정은 1747년(영조 23)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원래의 정자는 1941년에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1977년에 복원된 것이다.
명칭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모의하고, 거사 후 이곳의 맑은 물로 칼을 씻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현재 북악산 남쪽 기슭 백운대에서 이어지는 사천계곡(沙川溪谷)을 중심으로 한
세검정 주변 일대는 경관이 아름다운 풍치지구로 유명하다.
세검정은 1944년 부근에 있던 종이공장의 화재로 소실되어 주초석 하나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5월에 복원하였다. 복원은 정선의 <세검정도>를 참고하였다고 한다.
복원 당시 도시계획선에 저촉되어 원위치에서 홍제천 상류로 약 40m 이전 복원키로
하였으나 원위치에서 주초 자리가 드러나게 되어 도시계획선을 변경하고
원위치에 복원하게 되었다. 현 '洗劍亭'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겸재 정선(鄭敾)의 <洗劍亭圖>에는
누(樓) 아래로 기둥이 높직하게 서있는 누각 형식의 건물로 도로쪽을 향하는 면에는
낮으막한 담을 돌렸고, 입구에는 일각문을 두었으며, 정자의 측면으로는 편문을 두어
개울로 내려갈 수 있도록 그려져 있으나 현재 이 시설물은 없다.
탕춘대 터(蕩春臺 터)
종로구 신영동 136번지에 있던 돈대로서, 연산군 11년(1505) 이곳에 탕춘대를 마련하고
앞 냇가에 수각을 짓고 미희들과 놀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
영조 27년(1751) 가을에 영조는 탕춘대에 거둥하여 활쏘기로 무사를 뽑고,
29년(1753)에 탕춘중성(蕩春中城)을 새로 쌓고, 30년(1754)에 탕춘대를 고쳐
'연융대(鍊戎臺)'라 하고 홍상서(洪尙書)를 시켜 신영동 172번지 세검정 위 길가 바위에
'鍊戎臺'라고 새겼으나 세검정길 확장때 사라졌다. 탕춘대 터 에는 고급빌라 가 들어 서 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탕춘대 는 숙종이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도 한다.
조지서(造紙署)
조선시대 궁중과 중앙정부기관에서 사용하는 종이와 중국에 공물로 보내는 종이 등을
생산하던 관설 제지소.1415년(태종 15) 조지소(造紙所)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1465년(세조 11) 조지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울 근교의 물이 좋고 넓은 바위가 있어 한지(韓紙) 제조에 적당한 자하문(紫霞門) 밖
탕춘대(蕩春臺)에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제지 기술자인 지장(紙匠)이 81명,
보조역이라 할 수 있는 차비노(差備奴)가 90명이 있던 수공업장이었다.
지장은 조선의 '부역동원제'에 의해 3교대로 동원되었다.
이들은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제지기술자들이었고, 따라서 조지서에서 생산되는 종이는
국내에서 최고 품질의 종이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천하무비(天下無比)로 알려졌었다.
조지서에 소속된 지장들은 이미 조선의 전기부터 조지서 근처에 하나의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생산에 종사할 만큼 전업수공업자화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한때
조지서가 큰 타격을 받기도 했는데, 1626년(인조 4)의 기록에 의하면 전쟁 후에 조지서에는
겨우 5명의 지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승려지장을 동원했다고 전한다.
총융청 터
1747년(영조23년).
조선의 5군영 중 총융청이 북한산성을 담당하게 되어 부대를 장의사 터로 옮겨 온다.
그래서 이 지역의 지명인 신영동(新營洞)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집니다.
고종 21년(1884) 총융청이 폐지되어 빈 터만 남았다가
현재 세검정초등학교가 자리잡게 되었다.
영(營)이라는 지명이 붙으면 군사시설과 관련이 있다. 육군이 머문 곳엔 병영(兵營),
수군이 머문 곳엔 수영(水營)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서울에도 숭례문(崇禮門) 밖엔 남영(南營)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창의문(彰義門) 밖에는 신영(新營)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을 통해 집권한 서인정권은 광해군과는 달리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표방했다. 따라서 정권안정과 후금(後金:뒤의 淸나라)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군사력의 강화에 힘썼다.
인조대에 창설된 어영청·수어청과 총융청은 모두 그러한 취지에서 설치되었다.
특히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반란군이 경기도의 방어선을 쉽게 뚫고
서울로 진격하여 국왕이 공주로 파천(播遷)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따라서 그해에 이괄의 난을 진압한 뒤 도성숙위를 담당할 어영군의 강화와 함께 수도
외곽의 방어를 강화할 목적으로 경기감사 이서(李曙)의 주관하에 경기군(京畿軍)을
정비했는데, 이때 총융청이 설치되었다.
담당임무는 수도 외곽 방비였는데, 1626년 수어청이 설치되자 경기도의 남부방위는
수어청에게 맡겨졌고 총융청은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수도의 북부를 방어하게 되었다.
총융군은 정군(正軍)·속오군(束伍軍)·별대마군(別隊馬軍)이 통합된 것이었으며,
수효는 약 2만여 명이었다. 그중에서 속오군이 가장 많았으며, 별대마군은 이괄의 난 때
정부군이 크게 밀린 이유가 반란군의 마군(馬軍)이었다는 점을 반영하여 설치한
병종으로 매사(每司)의 중초(中哨)를 이루었다.
서울 장의사지 당간지주(서울 莊義寺址 幢竿支柱)'-보물 제235호
장의사 터(서울 종로구 세검정로9길 1 (신영동) -현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장의사 는 백제와의 싸움으로 황산(지금의 논산으로 추정)에서 전사한 신라의 장수
장춘랑과 파랑(罷郞)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라 무열왕 6년(659)에 세웠다고 전한다.
2009년 11월 법보신문은 당간지주 설명이 '그냥 거기에 그런 것이 있다' 라는 투의
문화재청 자료에 '엉터리' 임을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도 기록돼 있는 이 절은 삼국통일과정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충신을 기린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정착되면서 고려는 물론 조선의 임금들까지 직접 다녀가기도 했다.
특히 조선 태조비인 신의왕후의 기신제가 이곳에서 봉행된 이후 왕실의 각별한 관심 속에 성종 때까지도 ‘법석(法席)’이 끊이질 않았던 유서 깊은 도량이다. 그러나 연산군 11년(1505) 돌연 “장의사를 없애고 그곳에 별궁을 짓고 화단을 쌓으라”는 명에 따라 하루아침에 폐사된 조선불교의 슬픈 운명을 여실히 보여주는 절터다.
그리고 이곳 당간지주는 1000년 장의사의 영욕을 보여주는 유일한 문화재다.
장의사 바로 아래, 술과 색과 놀음을 즐겼던 연산군의 탕춘대가 있었던 관계로 탑골공원의 원각사가 없어진 것과 같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질펀하게 같이 논 사대부, 유생들이 "전하, 중놈들 땜에 술맛 떨어집니다"고 했다면 끝나는 상황이다. 실제 조선때 유림들은 경치좋은 절을 유흥장으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바위에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절경이라고 소문난 백사실 계곡이다. 백석은 백악(북악산)을 말하는 것이라 하고
동천은 신선이 내려와 놀만큼 경치가 빼어난 곳을 말한다고 한다.
동천(洞天) 즉 하늘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산모퉁이 카페-
부암동은 2007년 방영된 MBC 미니시리즈 ‘커피프린스 1호점’의 주요 촬영지로 널리
알려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드라마가 끝난 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오히려 늘고 있다.
산모퉁이는 드라마가 끝난 직후 2007년 5월에 카페로 새롭게 단장해 오픈을 했다고 한다.
오전 11시부터 밤 10시까지 문을 연다.
얼마 전에는 KBS 2TV 예능 프로그램 ‘인간의 조건’에서 숙소를 부암동에 정하고 촬영을 하면서 다시금 조명을 받고 있다.
‘산모퉁이’라는 카페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북악산 산책로 일대에 카페가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북악산 자락 아래 운치 있는 주변경관을
배경으로 일명 ‘부암동 카페거리’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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