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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금. 복날은 갔다
드디어 말복이 지났다. 복날이 갔다. 얼마 전 ‘복날은 간다’는 글을 쓰며 보신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오늘은 삼계탕과 닭에 대해 이야기하고, 생명권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삼계탕
복날이 되자 늙은 어머니는 경동시장에서 계란 한 판 값 하는 닭 한 마리를 사다가 복달임으로 삼계탕을 끓이셨다. 대추와 인삼을 넣고 여름한철 잘 견디라고. 늙은 아버지와 식탁에 앉은 늙은 아들이 잠시 폐닭의 비극적 삶을 생각하고 폐닭의 명복을 빌며 삼계탕을 먹었다. 부드럽고 푸근한 살과 걸쭉한 국물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골수에 스밀 것을 믿으며.
그날 밤이었다. 검은 창에 목 없이 알 벗은 닭이 나타났다. 닭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 돼 있었다. 내가 말하는지 닭이 말하는지 터널에 울리는 바퀴소리처럼 구슬픈 말소리가 들렸다.
“너는 잠이 오느냐. 나는 잠들 수 없다. 잠을 자본 적이 없다. 그저 눈알에 핏줄이 서도록 모이를 먹고 물을 먹고 똥을 싸고 알을 낳고 구구구구구구 울어댔을 뿐이다. 몸조차 돌릴 수 없는 철망 안에서 살이 간지러우면 피가 나도록 털을 뽑아가며 미친 채로 살충제를 뒤집어쓴 채 구구구구구구 울기만 했다. 알을 낳자 마자 알들은 또르르 굴러갔다. 알을 품어본 적도, 병아리를 본 적도 없다. 살아서 유령이었으니 죽어서도 유령이 되었다. 2년의 생지옥이었다. 차라리 알기계의 삶을 마치고 죽는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막상 죽어도 가야할 곳을 알지 못하겠다. 억울하다. 내 비록 폐닭이 되어 네 뱃속에 들어갔으니 이제 너 또한 나와 같은 셈이다. 부디 내 한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말을 마친 닭은 미친 듯 목 놓아 회를 쳤다. 꼬고곡꼭 꼭고! 소리가 꼭! 꼭! 꼭! 꼭! 소리로 들렸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깨어났다. 식은땀이 흘렀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었다. 복날이 갔다.
살충제 달걀
며칠 전 뉴스가 기억난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달걀에 살충제 성분이 엄청 들어있다는 기사다. 진드기 같은 해충을 죽이기 위해 맹독성 살충제를 닭의 몸에 수차례 직접 살포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흡수된 살충제가 계란으로 나온다는 이야기다. 하기야 살충제뿐이겠는가 각종 호르몬제와 항생제와 사료에 축적된 농약 성분 등을 생각하면 달걀 먹기가 두려울 지경이다.
고기를 따로 사먹지 않는 나로서는 가끔 달걀을 사먹곤 하는데 이제는 달걀도 다시 완전히 끊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예전 성미산학교 중등아이들과 농활 갔던 순천의 달나무농장 김계수 선생님 생각이 났다. 유기농 양계장을 하고 계셨는데 닭장도 넓었지만, 닭장 밖에 닭이 뛰어놀 풀밭도 넓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며칠 머물면서 닭장에서 알을 꺼내기도 했다. 선생님은 손수 순천의 소비자 가정을 방문하며 달걀을 정기적으로 배달까지 손수 하였다.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신념이 아니라면 어려운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닭고기와 달걀을 덜 먹더라도 우리나라의 닭들이 이렇게 길러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와 살면서 교통도 불편하고 유기농 매장 자체가 없다보니 나는 곧 일반 마트나 장터를 자연스럽게 이용하게 되었다. 예천에서 살 때는 텃밭을 가꾸며 기본적인 푸성귀를 재배했던 탓에 식재료 살 일이 별로 없었는데, 천성산으로 내려와서는 머무는 곳이 도시변두리 같은 곳이라 텃밭도 가꿀 수 없게 되었다. 그래 마트와 장터를 이용하다보니 점차 싼 식재료와 달걀을 사먹게 되었다. 하지만 살충제 달걀 얘기를 듣자 달걀 먹을 마음이 싹 사라졌다.
닭의 삶
달걀도 달걀이지만, 닭의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다. 원래 닭의 수명은 평균 15년으로 길게는 30년까지 산다고 한다. 우리나라 초기 현대소설에는 농촌이 자주 등장하는데 당연히 닭도 흔하게 등장했다. 아마 대부분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김유정의 『동백꽃』은 알 것이다. 닭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늙은 닭에게 고추장을 먹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장닭이라면 하도 근육이 질겨 이가 아플 지경이다. 어릴 적 기억으로도 시골 닭들은 거침없이 뛰어다니고 퍼드득 날면 지붕까지 올라갔다. 부지런히 흙을 파헤치는 닭의 장단지는 얼마나 단단했던가? 고기 근육이 질기고 탄력이 말이 아니었다. 닭을 길러도 놓아기른 탓에 아침에 닭장을 열어주고 저녁이면 닭을 불러 모으는 게 일이었다. 방학 때 시골에 가면 장대를 들고 닭을 쫓기도 했다. 닭들이 닭장이 아닌 뒷곁 노적가리에 몰래 알을 낳아놓는 탓에 노적가리에 숨겨둔 따뜻한 알을 찾아오기도 했다. 물론 그런 달걀을 형과 함께 날로 먹기도 했다. 나는 닭에게 줄 고단백질 먹이를 위해 한낮을 형과 개구리 잡기로 보내곤 했다. 개구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방동사니 따위로 주욱 개구리를 꿰어 와 닭들에게 하나씩 뽑아 주곤 하였다. 닭은 손님의 와 잡혀 죽기 전까지 나름의 자유와 본능에 충실하며 자기들의 삶을 누렸다.
하지만 요즘 닭의 삶은 어디 닭인가? 나는 예전 농촌문화가 높은 수준의 문명 같고 요즘 산업농이 오히려 야만적이라고 생각한다. 닭은 달걀 낳는 기계, 닭고기를 위해 살찌는 기계일 뿐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삼계탕이나 치킨용 닭들은 30~40일 만에 자라 식탁에 오른다고 한다. 요즘은 농촌도 모두 산업농이 지배적이라 가축들이 예전처럼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됐다. 우리가 닭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다. 상품인 닭고기와 알만 중요하다. 그러다보니 열이 많아 열심히 먹고 뛰어다녀야할 닭이 운동은커녕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었다. 20×25㎝의 닭장에서 닭은 몸이 미어지도록 먹고 싸기를 반복하며 살찌고 알 낳기를 반복한다. 알을 자주 낳게 하기 위해 밤에도 형광등을 켜놓는다고 한다. 그래 알을 낳는 알닭의 경우 2~3년 알을 낳으면 폐닭이 된다고 한다. 물론 폐닭은 저렴하게 만원에 세 마리 네 마리 하는 식으로 판매된다. 과연 한 달 살고 팔리는 치킨닭의 삶이 나을까? 알 낳는 기계로 밑이 빠지며 2년을 살고 팔리는 알닭의 삶이 나을까? 둘 다 비참할 뿐이다. 삶이 아니다. 아우슈비츠와 같은 형벌일 뿐이다.
이렇게 생산된 닭을 2014년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 사람 1인당 평균 12.6킬로그램, 한 사람이 매년 15마리의 닭을 먹는다고 한다. 더구나 복날 전후 닭 소비가 연간 닭 소비의 30~40%를 차지한다고 하니, 이것을 계산해보면 복날 전후 한국에서 2억 마리의 닭을 소비한다는 말이 된다. 고위공직자의 부패와 청탁 등의 비리를 방지하기 위한 김영란법을 실행하려고 하니, 농축산물 판매가 저하되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수언론이 선동하고 농수산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데모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복날을 없앤다면 전국 양계장 농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다. 그 정도로 우리는 복날을 핑계로 닭을 과소비하고 있다. 과거 생일날 혹은 제삿날을 제외하면 고기구경을 하기 조차 힘든 시절의 복날은 미풍양속의 추억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영양과잉 과소비시대에 복날은 더 이상 보신탕이나 삼계탕 먹는 날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요즘엔 복날 삼계탕 뿐 아니라 치킨과 맥주라는 환상의 조합을 만들어 1년 365일 치킨을 과자처럼 소비하고 있다. 복날은 갔다. 정말 몸보신하는 복날은 가야 한다.
동물권
각종 호르몬, 항생제, 살충제, 농약으로 오염된 달걀과 닭고기에 대해서 더 강조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건강을 위해서 엄밀히 따져야 할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돼지와 소 등의 가축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얘기를 하나같이 충격적이고 끔직하여 야만적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다만 복날을 계기로 닭을 가지고 라고 충분히 깊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서도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생명을 잡아먹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거기에 딸려오는 고통의 문제에 대한 성찰을 피해가지 않기를 바란다. 인류의 선조들이 그랬듯이 닭도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닭의 삶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주길 바란다.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모든 것이 전도되었다. 농업과 어업도 농수산물이라는 상품을 생각하는 농수산업이 되었다. 기계식 공장생산이 생명을 다루는 거의 모든 사업을 장악하고 있다. 산업의 생리는 너무나 명료하다. 최소투자와 최대생산의 효율성이다. 이기에 인권이니 생명의 존엄성 따위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오직 환금 가능 상품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그 외 모든 것을 수단화하고 대상화해 버린다. 무엇이? 생명이! 수 많은 것들이 도외시되고 수많은 것들이 은폐되곤 한다. 공산업이 아닌 농수산업의 경우 생명을 상대하는 탓에 공산업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는 점을 무시한다.
인간의 이성의 동물이기도 하지만 공감의 동물이기도 하다. 우리 또한 생명의 기쁨과 고통을 느끼면서 어떻게 다른 생명을 함부로 할 수 있을까? 우리 앞에는 무너뜨려야 할 벽이 있다. 무감성의 벽, 은폐의 벽, 이윤의 벽이 나와 타자인 생명을 가로막고 있다. 생명은 상품이 아니다. 생명은 상품과 비교할 수 없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각자 개성이 있고 각자 희노애락의 삶이 있다. 하지만 공감을 위해서는 자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고통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다른 생명의 자유와 고통에 대한 무감각이야말로 이미 타인의 자유와 고통에 대한 무감각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자(타인과 생명)의 고통에 민감해질 때 우리의 삶과 문명도 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내가 한국의 개고기문화를 야만적이라고 비난하는 서양백인의 반려견문화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반려견문화를 절대화하고 이질적인 문화를 일방적으로 야만시하기 때문이다. 똑같이 한국 도시의 반려견문화를 기준으로 농촌의 가축과 개고기문화를 야만시하는 것도 지나친 자기중심주의라고 생각한다. 진정 야만과 문명의 의미를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 문명 자체가 이미 그 어떤 문화 문명보다 생명에 대해 야만적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 문명은 세계 그 어느 문명보다 생명에 대해 야만적인 문명이다. 개과 고양이는 반려동물이고 다른 동물들은 가축과 식품이라는 구분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굳이 반려견문화를 선두에 내세우고 개고기문화를 야만시할 게 아니다. 동물권의 폭 넓은 시야 속에서 도시와 농촌이 같이 고민하면서 우리 문명이 가진 생명 경시의 야만성을 더불어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야만은 생명을 상품화하는 우리의 문명(문화)에 있다. 반려견뿐 아니라 모든 생명에 책임이 따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생명권
동물권 이야기를 하자니 다시 한숨이 나온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아직 정당한 인권조차 보장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조차 살기 어려운데 어디서 동물권 타령을 하냐는 날카로운 반문이 날아올지 모른다.
하지만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이 반려동물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키우고, 그들의 개성과 삶을 이해하고, 고통에 대해 공감하기 때문에 개고기문화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래서 반려동물인 개와 고양이에 머물지 말고 우리의 공감과 사랑을 모든 동물 나아가 곤충이나 식물 등의 생명세계로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공감과 이해를 통해 우리는 조화는 물론 평화와 행복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권의 보장과 확대가 인류의 지속되는 과제인 것처럼, 동물권과 생명권도 또한 영원히 확대해 나가야 할 과제다. 그러므로 인권과 동물권, 생명권 문제는 선후와 위계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추구되어야 할 문명의 일반과제다. 인간 경시가 생명 경시로 이어지고 생명 경시가 인간 경시로 이어진다. 인간을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생명을 제대로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사랑과 공감을 유지할 때 우리의 미적 도덕적 판단이 최고의 수준을 유지하고 발휘할 수 있다. 이성 앞에 감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간에 대해서는 사랑하지만 동식물에 대해서는 혐오한다면 그것은 병든 이성이고 병든 감성이다. 인간과 동식물을 생명 하나로 보는 것이 옳다. 하위 단위로 구분해 차별하는 태도는 다시 인간 안에서 인간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태도로 반복된다. 때문에 나는 인간과 동물과 식물을 생명권의 이름으로 함께 존중하고 공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동물의 고기는 먹지만 사람의 고기를 먹지 않는 것처럼, 불가피한 차이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적 필요를 넘어서는 욕망과 사치는 분명 경계해야 한다.
생명이 생명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축복이다. 행복은 상품의 많은 소유가 아니라 생명과 교감하고 생명을 찬탄할 줄 아는 마음에 더 많이 의존한다. 보신탕 한 그릇, 삼계탕 한 그릇이 몸을 건강하게 해줄지는 몰라도 생명의 기쁨과 축복을 느끼게는 못하리라.
하지만 그럴 수 있더라도, 한발 더 나아가자. 인권에서 동물권으로, 다시 동물권에서 생명권으로, 그리고 더 생명권에서 존재권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미생명들이 산에 강에 하늘에 바다에 넘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바위에도 땅에도 공기에도 생명이 깃들어 살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생물이라고 부르는 것에도 엄밀히 보면 무생물만이 아니다. 생명이 산다. 산을 폭파하고, 도로를 함부로 놓고, 터널을 함부로 뚫고, 강물을 막고, 댐을 세우고, 바다를 메꾸고, 석유 등의 자원을 마음대로 캐고, 오염시키고, 버리고 하는 이 모든 일들이 생명을 파괴하는 일이다. 나는 필요는 인정하지만 욕망과 사치의 경계는 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삶에는 직관도 필요하지만 신중함도 필요하다. 세상 모든 것이 보이지 않지만 촘촘한 거미줄처럼 연관을 맺고 있고, 지구 전체가 하나의 생명권이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생명의 드넓은 시야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달도 해도, 우주도 절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해탈이 따로 없다. 이것을 알고 아는 대로 사는 것이 해탈이다.
우리가 자살하는 이유는 가난해서라기보다 고독해서다. 존재로부터 생명으로부터 동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우리 스스로가 소외되도록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권과 동물권과 생명권과 존재권의 회복을 주장하는 이유는 우선 나 자신의 소외를 치유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왜 존재가 사랑인가? 존재가 곧 하나로 연결되어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감사하고 축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