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일 : 2024년 11월 23일
밤 늦은 시간 성당 문이 잠겨 순례도장만 찍고 돌아와야만 헀던 종로 성당 성지를,
이번엔 미사도 드리고 이곳저곳 돌아보고 왔다.
"한국 천주교 최대의 신앙 증거 터이자 순교 터"
종로 성당(포도청 순례지 성당)
[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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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 우 포도청은? 조선 중종 때인 16세기 초 서울과 인근 지역의 포도와 순라를 담당하도록 설치한 기관으로, 임금 거동시의 호위를 맡거나 유언비어 유포, 위조 엽전 제조, 도박, 밀주 행위 등을 단속하였다. 포도청은 이후 350여 년간 존속되다가 갑오개혁 때인 1894년 7월에 폐지되었으며, 이후 경무청으로 개편되었다.
서울 파자교(把字橋) 동북쪽(현 종로구 묘동 56번지) 즉 옛 단성사 자리에 있던 좌포도청에서는 서울의 동부 · 중부 · 남부 지역과 경기좌도 일대의 순라를 담당하였다. 우포도청은 혜정교(惠政橋) 남쪽(현 종로 1가 89번지) 즉 광화문우체국과 일민미술관(옛 동아일보사) 사이에 있었고, 서울의 서부 · 북부 지역과 경기우도 일대의 순라를 담당하였다.
경기좌도는 지금의 강화 · 인천 · 수원 · 양평 · 광주의 이남 지역을 말하며, 경기우도는 지금의 고양 · 파주 · 양주 · 가평 이북 지역을 말한다. 이중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좌포도청의 관할 구역인 경기좌도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우포도청보다는 좌포도청에서 훨씬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천주교 신자 색출에 앞장선 포도청 1784년 겨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6년)의 집에서 있은 첫 세례식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후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해 내는 일은 좌 · 우 포도청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 체포된 신자들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때로는 매질 아래 목숨을 던지고, 목에 오라를 걸고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일각을 지체하지 말고 천주학쟁이들을 색출하라!” 조정의 추상같은 명이 있을 때마다 좌 · 우 포도대장들은 포교와 포졸들을 닦달하였다.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국한되어 있던 포도청의 영역은 박해가 계속될수록 충청도 지역까지 확대되었고, 포졸들의 육모 방망이와 홍사(붉은 오랏줄)는 이리저리 쫓기는 신자들을 겨냥하여 춤을 추곤 하였다.
죽음의 곤장 아래서 십자가의 영광을 증언하다 1795년(을묘년) 5월, ‘북산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정에서 좌포도대장 조규진에게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1752-1801년) 신부를 체포하라고 명했으나 신자들의 기지로 실패한 사건이었다.
대신 포교들은 밀사 윤유일(바오로, 1760-1795년)과 지황(사바, 1767-1795년), 신부댁 주인 최인길(마티아, 1765-1795년) 등 3명을 체포하여 좌포도청으로 압송하였고, 그들은 조정의 명에 따라 혹독한 매질 아래 목숨을 바쳐야만 하였다.
‘비밀리에 때려 죽여 입막음을 하라’는 명이 내려졌던 것이니, 이를 을묘박해라고 부른다. 순교 직전에 우리의 용감한 순교자들은 이렇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저 십자 형틀에 묶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가 대신 죄를 지고 가셨으니, 어찌 자식이 되어서 저 큰 부모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저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천만 번 죽을지언정 그분을 모독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을 증거하려면 시뻘건 숯덩이를 삼켜라!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열세 살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소년 유대철(베드로, 1826-1839년) 성인은 유진길(아우구스티노, 1791-1839년) 성인의 맏아들로 집안의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순교자와 증거자들의 꿋꿋한 용기를 보면서 순교의 원의가 불타오른 소년 유대철은 스스로 포도청을 찾았다.
이어지는 혹독한 형벌로 너덜거리는 살점과 사방으로 튀는 핏방울 속에서도 박해자들은 결코 은총의 힘을 얻은 어린 소년을 다스릴 수 없었다.
포졸이 구리 대통으로 허벅지 살점을 떼어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단호하였다.
“어떠한 형벌로 다스린다 해도 천주교를 믿는 제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믿음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포졸이 시뻘건 숯덩이를 집게로 꺼내 성인의 입에 갖다 대며 말하였다. “네가 천주교를 끝까지 믿는다면 입을 벌려라.” 그러자 소년 유대철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요. 그 숯덩이를 제 입에 넣어보세요. 제 마음이 변할 줄 아세요.”라고 답하였다.
작은 천사의 용기는 흉악한 박해자들의 손길을 뛰어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 이 어린 천사를 형장으로 끌고 가지 못하고 포도청의 옥에서 교살하고 말았으니, 때는 1839년 10월 31일(음력 9월 25일)이었다. 이때 유대철 베드로의 나이는 겨우 13살이었다.
춤추는 곤장, 난무하는 남형 포도청에서의 형벌은 법으로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법 이외의 형, 즉 남형(濫刑)이 자주 적용되곤 하였다. 곤장은 기본이었고, 도적들에게 사용하던 치도곤, 주장질, 팔 다리를 부러뜨리는 주리질(주뢰질)도 행해졌다. 톱질로 살점을 떼어내고, 장대에 거꾸로 잡아맨 뒤 등나무 줄기로 때리는 학춤도 자행되었다.
한국교회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1821-1861년) 신부의 부친인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년) 성인은 주리질과 주장질에 이어 치도곤 110대, 주장과 태장 합 340대를 맞고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형리들조차 놀라 소리쳤다. “저놈의 몸은 육신이 아니라 목석이다.” 그렇게 성인은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포도청의 옥에서 장독으로 순교하였다. 이때 성인의 나이는 35세였다.
순례지 성당 지정 서울대교구는 2013년 2월 28일 서울 좌 · 우 포도청을 관할구역에 둔 종로 성당을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하고, 본당의 수호성인 또한 ‘포도청 순교 성인들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로 변경해달라는 청원을 승인하였다. 이로써 100년에 가까운 박해 기간 중 가장 많은 순교자가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던 서울 좌 · 우 포도청 순교지가 새롭게 떠오르게 되었다.
서울시에서 설치한 좌포도청 표석은 현재 서울시 종로구 묘동 56번지(옛 단성사 자리) 종로 3가역 9번 출구 앞에, 우포도청 기념 표석은 종로구 종로 1가 89 일민미술관 앞 화단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 마련 한편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된 종로 성당은 구내에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을 마련하여 2013년 9월 2일 염수정 대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으며, 성당 외벽에 포도청 순교성인들을 기념하여 설치한 청동부조 ‘수난과 영광’(김일영 교수 작) 제막식도 가졌다. 아울러 종로 성당에서 시작하여 좌우 포도청 터 등을 거쳐 명동 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에 이르는 2개의 도보순례길 코스를 제시하였다. [출처 : 종로 성당 포도청 순례 리플렛,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2월 19일)]
천정에 "오병", 제대양벽에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