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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아침 쌀쌀..낮부터는 평년 기온
하늘빛이 좋겠습니다.
전국이 대체로 맑겠습니다.
아침 추위가 이어지겠는데요.
낮 기온은 어제 비슷하겠습니다.
산불 발생 위험이 높아졌습니다.
차고 메마른 날씨가 이어지겠습니다.
오늘부터 종일 평년기온을 웃돌겠습니다.
금요일 중북부 지방에 비 소식 있습니다.
전국 대체로 맑은 뒤 밤부터 구름 많겠습니다.
바다 물결은 전해상에서 0.5~2.0m로 일겠습니다.
아침에 서리 내리거나 얼음 어는 곳도 있겠습니다.
아침 최저기온은 어제 비슷하거나 조금 낮겠습니다.
아침에 일부 내륙에는 안개가 끼는 곳이 있겠습니다.
당분간 낮과 밤의 기온 차가 10도 내외로 크겠습니다.
미세먼지 농도 역시, 어제처럼 전국이 정상 수준입니다.
중국 중부지방에서 동진하는 고기압의 영향을 받겠습니다.
강원동해안과 일부 경남북와 전남에 건조특보가 발효 중입니다.
낮부터는 평년 기온을 되찾으면서 반짝 추위가 누그러들겠습니다.
오늘(19일) 오전까지 동해안에는 너울에 의해 파도가 높겠습니다.
미세먼지(PM10) 예보에 강원영동은 좋음(일평균 0~30㎍/㎥)입니다.
아침 최저기온은 영하 5도~영상 5도, 낮 최고기온은 영상 10도~15도.
강원영동을 제외한 전 권역의 미세먼지는 보통(일평균 31~80㎍/㎥)입니다.
서해상에서 동진하는 고기압 영향을 받다가 점차 그 가장자리에 들겠습니다.
다음은 지역별 날씨 전망. [오전, 오후] (최저∼최고기온) <오전, 오후 강수확률>
▲ 제주 :[구름 조금, 구름 많음] (7∼ 14) <10, 20>
▲ 수원 :[맑음, 구름 많음] (-1∼ 12) <0, 20>
▲ 춘천 :[맑음, 구름 많음] (-3∼ 10) <0, 20>
▲ 세종 :[맑음, 구름 많음] (-3∼ 13) <0, 20>
▲ 전주 :[맑음, 구름 많음] (-1∼ 13) <0, 20>
▲ 서울 : [맑음, 구름 많음] (0 ∼ 11) <0, 20>
▲ 인천 :[맑음, 구름 많음] (3 ∼ 10) <0, 20>
▲ 강릉 :[맑음, 구름 많음] (2 ∼ 14) <0, 20>
▲ 청주 :[맑음, 구름 조금] (0 ∼ 13) <0, 10>
▲ 대전 :[맑음, 구름 많음] (0 ∼ 13) <0, 20>
▲ 광주 :[맑음, 구름 조금] (2∼ 13) <0, 10>
▲ 대구 :[맑음, 구름 조금] (1∼14) <0, 10>
▲ 부산 :[맑음, 구름 조금] (5∼15) <0, 10>
▲ 울산 :[맑음, 구름 조금] (1∼15) <0, 10>
▲ 창원 :[맑음, 구름조금] (5∼14) <0, 10>
<제주도 날씨 개황> 아침기온 뚝↓ '쌀쌀'
일교차가 크겠습니다.
빨래지수 80 빨래 잘 말라요.
자외선지수 60 오후엔 주의하세요
나들이 지수 80 나들이 즐길만 해요
세차지수 90 세차할 좋은 기회입니다.
불쾌지수 65 즐거운 하루 계획 하세요.
아침에는 기온이 더 내려가면서 춥겠습니다.
제주도와 이어도의 날씨는 대체로 맑겠습니다.
낮에는 일사효과에 의해 기온이 조금 오르겠습니다.
아침 최저기온은 6도~9도, 낮 최고기온 14도~17도.
중국 중부지방에서 동진하는 고기압 영향을 받겠습니다.
미세먼지(PM10) 예보에 제주권 보통(일평균 31~80㎍/㎥)입니다.
제주도전해상과 남해서부먼바다의 물결은 0.5~2.0m로 일겠습니다.
오늘의 코디...
<여성>주홍빛의 롱 스타일의 티셔츠에 토끼털이 복실복실한 데님 조끼에 카키색의크롭 팬츠를 코디해 보세요~주말의 발랄하고 기분좋은 분위기를 한껏 누리실 수 있답니다.
<남성>블랙의 더블버튼의 벨트장식 패딩 코트에 워싱된 데님 팬츠를 코디해보세요~
멋스러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소사 11월 19일 음력: 윤 9월 27일
<출생>
1600년 영국 왕 찰스1세 출생
1831년 미국의 제 20대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
1833년 독일의 철학자 빌헬름 딜타이.
1875년 러시아 혁명가 미하일 칼리닌.
1900년 러시아 과학자 미하일 라프렌티예프.
1917년 인도수상 인디라 간디 출생
1905년 한국의 연극인, 극작가 유치진.
1916년 대한민국의 비전향장기수 강동근.
1925년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1934년 러시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발렌틴 이바노프.
1938년 미국의 언론 재벌 테드 터너.
1965년 프랑스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로랑 블랑.
1972년 대한민국 배우 윤해영.
1976년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권용관.
1981년 대한민국 가수 DJ 투컷.
1984년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안영명 출생.
<사망>
1577년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 마쓰나가 히사히데 사망
1598년 이순신 장군 노량서 전사
1665년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 사망
1828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 사망
1947년 독립운동가 전명운 사망
1963년 몬트리올서 캐나다여객기 추락 117명 사망
1970년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 안드레이 예료멘코.
1977년 인도에 해일 발생. 2만여명 실종
1980년 KAL기 김포공항서 착륙중 화재 15명 사망
1984년 멕시코시티 가스공장서 대규모 폭발사고 544명 사망
1987년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사망
2006년 대한민국의 군인 조창호.
2008년 행남자기 김준형 창업주 별세
2009년 패션모델 김다울 프랑스 자택에서 사망
1598년 이순신 장군 노량서 전사. 이순신(李舜臣, 1545년 인종 원년 3월 8일~1598년 선조 31년)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관이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요 지휘관 중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한성출신이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만포첨사, 진도군수, 전라좌도수군절도사 등을 거쳐 관직은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본인 스스로에게 엄격한 생활을 행하고 효심을 가진 선비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장수로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잘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고려 왕조 때 중랑장(中郞將)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며, 조선 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변(李邊)의 후손이다.
서녀 중 1명을 통해 남인 재상 이원익, 허목, 윤휴 등과 사돈관계를 맺었다.
1973년부터 1993년까지 사용된 대한민국의 지폐 5백원권의 도안인물이기도 하다. 보통 그의 이름을 부를 때는 '성웅' 또는 '장군'의 존칭을 붙이거나, 시호인'충무공', '이충무공' 등으로 높여서 부른다.
<사건>
2009년 첫 EU 대통령 선출
2004년 광주, 수능 ‘휴대전화 부정’ 사건
2002년 7만7000여t 중유 실은 유조선 스페인해안 침몰. 해양오염 심각
1999년 중국, 러-미에 이어 세 번째로 무인우주선 발사
1995년 크바스니에프스키 폴란드 대통령에 당선
1984년 멕시코시티 가스공장서 대규모 폭발사고 544명 사망. 주민35만명 대피
1984년 중단되었던 남북적십자회담 예비접촉 열려
1982년 미국, 퍼싱II 미사일 발사 성공
1981년 여-야, 야간통금해제를 정부에 건의
1980년 KAL기 김포공항서 착륙중 화재 15명 사망, 15명 부상
1979년 이란, 미국 인질중 여자등 13명 석방
1979년 계엄 당국의 휴교 조처 해제로 대학교 전면 개교
1978년 북경에 모택동비판 대자보 등장
1977년 인도에 해일 발생. 2만여명 실종
1977년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아랍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메나헴 베긴 총리와 면담하다.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이날 밤 30년동안 적대해온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아랍국가에서 국가원수가 이스라엘을 방문한 것은 이스라엘 건국이래 처음이었다.
베긴 이스라엘 수상은 철저한 경계가 진행되는 가운데 벤 구리온 공항에 도착한 사다트 대통령을 영접했다. 온건파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은 사다트 대통령이 11월 9일 '필요하다면 이스라엘 국회도 가겠다'고 발언하자 베긴 수상이 이에 응답해 11월 15일 초청장을 보낸 것이 계기가 됐다. 방문 이틀후인 20일 사다트는 이스라엘 국회에서 연설했다. 연설에서 사다트는 중동의 지속적인 평화를 호소하면서 이스라엘 점령지역의 철수와 팔레스타인 국가수립을 주장했다.
이집트로 귀국한 사다트는 환호하는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아랍 강경파는 그를 비난하고 리비아는 이집트와 단교했다. 다마스커스 베이루트 바그다드 등에서 이집트 정부 관계자가 피습받기도 했다. 사다트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78년 9월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수상과 13일간에 걸친 장시간 회담을 열어 마침내 9월 17일 중동평화협정 합의 문서에 조인했다.
1975년 한-이란 각료공동회의. 한국의 대(對)이란 기술자 파견, 건설참여 등 10개항 조인
1975년 유엔총회, 한국문제의 서방-공산측 두 결의안 동시채택
1968년 한국-스와질란드 국교 수립
1965년 바티칸 공의회, 신앙의 자유 선언안을 승인
1964년 프랑스의 시사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첫 발간.
1963년 몬트리올서 캐나다여객기 추락 117명 사망
1961년 네루-나세르-티토, 나세르에서 중립국 수뇌회의
1960년 북한, 남북연방제 제안
1957년 유엔총회, 군축위 확대안을 채택(25개국 구성)
1946년 유네스코, 파리에서 제1차 총회
1946년 대일(對日) 우편물 정식인가
1946년 스웨덴, 아이슬란드, 아프가니스탄, 국제연합에 가입하다.
1942년 대종교 주요간부 21명 구속
1942년 소련군, 스탈린그라드서 독일군에 대반격 개시
1924년 신사상연구회 화요회로 개칭
1922년 오스만 제국 최후의 황제 압둘 메지드 2세가 퇴위하여 제국이 해체되다.
1908년 자위단원호회가 세워졌다.
1863년 남북 전쟁: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이 게티즈버그 연설을 하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게티즈버그는 남북전쟁 최대의 격전지였다. 북군과 남군 합쳐 16만 명 이상이 참전해 5만여 명이 전사했다. 전투 현장에 지어진 국립묘지에서 링컨은 개관기념 연설을 했다. 그러나 링컨은 주 연설자가 아니었다. 당대의 명연설가 에드워드 에버렛 국무장관이 주 연설자였다. 에버렛은 링컨에 앞서 2시간이 넘게 연설했다. 에버렛은 나중에 편지를 보내 “대통령께서 2분 동안 한 것처럼 저도 2시간 동안 개관 행사를 빛나게 할 훌륭한 연설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라고 고백했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세계 역사의 고비 때마다 다시 등장했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는 1963년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에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을 한다. 이 연설의 첫 머리 “백 년 전, 한 위대한 미국인이…”는 100년 전 게티즈버그에서 연설한 링컨을 지칭한다.
프랑스 헌법(1958년 제정)은 프랑스공화국의 설립 원칙으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규정했다. 버락 오바마는 지난해 11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뒤 “우리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구상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272개 단어로 이루어진 짤막한 문장 속에 민주주의 이념을 압축했다. 국민의 민주정부 수호 의무와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헌신 의지를 담았다. 남북전쟁은 국가 통합을 위한 싸움이자 자유의 재탄생 과정으로 규정된 이를 위해 링컨은 연설을 게티즈버그라는 싸움터에서 시작하는 대신 미국이란 나라의 탄생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만큼이나 혹독했던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미국을 탄생시킨 독립선언서의 자유와 만인 평등이라는 원칙의 소중함을 일깨운 것이다.
링컨은 미국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정적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내각에 끌어들였다.
그래야 흑인 노예 제도를 놓고 갈라진 미국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링컨의 내각을 ‘라이벌 팀’이라고 할 정도였다. 링컨의 리더십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미 독립 이후 뜨거운 감자였던 노예문제를 해결했다.
[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전문]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we can not consecrate—we
can not hallow—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한글번역>
지금으로부터 87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서 자유 속에 잉태되고 만인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봉헌된 한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켰습니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고 우리 선조들이 세운 나라가, 아니 그렇
게 잉태되고 그렇게 봉헌된 어떤 나라가, 과연 이 지상에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이 자리는 남군과 북군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마지막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그 싸움터의 땅 한 뙈기를 헌납하고자 여기 왔습니다.
우리의 이 행위는 너무도 마땅하고 적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이 땅을 봉헌하고 축성하며 신성하게 하는 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여기 목숨
바쳐 싸웠던 그 용감한 사람들, 전사자 혹은 생존자들이, 이미 이곳을 신성한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거기 더 보태고 뺄 것이 없습니다.
세계는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 무슨 말을 했는가를 별로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
하지도 않겠지만 그 용감한 사람들이 여기서 수행한 일이 어떤 것이었던가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싸워서 그토록 고결하게 전진시킨, 그러나 미완으로 남긴 일을 수행하는
데 헌납되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들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앞에
남겨진 그 미완의 큰 과업을 다 하기 위해 지금 여기 이곳에 바쳐져야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는 그 명예롭게 죽어간 이들로부터 더 큰 헌신의 힘을 얻어 그들이 마지막
신명을 다 바쳐 지키고자 한 대의에 우리 자신을 봉헌하고, 그들이 헛되이 죽어
가지 않았다는 것을 굳게 굳게 다짐합니다.
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며, 국민의, 국민
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 연설의 배경 ]
미국 남북전쟁(1861~65)이 진행되고 있던 1863년 11월19일, 링컨은 전쟁의
전환점이 된 혈전지 게티스버그(펜실베이니아 주)를 방문하고 전몰자 국립묘지
봉헌식에 참석한다. 그 식전에서 그는 불과 2분간의 짧은 연설을 행하는데, 그
것이 이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이다. 원문으로 총 266 단어의 이 연설문은
다음날 게티스버그 신문에 실리고 미국사의 기념비적 텍스트의 하나로 전해지게
된다.
이 연설문은 많은 일화를 갖고 있다. 링컨에 앞서 두 시간 연설했던 웅변가 에드
워드 에버렛(Edward Everett)이 『나는 두 시간 연설했고 당신은 2분 간 연설했
습니다. 그러나 나의 두 시간 연설이 묘지 봉헌식의 의미를 당신의 2분 연설
처럼 그렇게 잘 포착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라고 탄식했다는
것도 그런 일화의 하나이다.
링컨이 게티스버그로 가는 열차 안에서 편지 봉투 겉면에 서둘러 쓴 것이 이
연설문이라는 이야기도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화이기보다는 만들
어진 전설이다. 링컨이 신임했던 기자 노아 브룩스(Noah Brooks)에 따르면 봉
헌식 며칠 전 백악관 집무실에서 대통령이 『연설문을 초안했으나 아직 완성하
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한다.
링컨의 성격, 연설문이 지닌 고도의 짜임새, 어휘 선택과 수사적 구도 등을
보면 이 연설문은 한 순간의 영감 어린 작품이기보다는 링컨이 상당한 시간을
바쳐 조심스레 작성한 문건이라는 판단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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