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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불교 재가모임 대표 우희종 교수를 만나다
취재/전현자(미주현대불교 한국 주재기자)
기자: 교수님 매우 바쁘시다는 걸 아는데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교수: 아니요, 무슨 말씀을, 오히려 영광입니다.
기자: 바른 불교란 무엇입니까?
우교수: 제가 하고 있는 바른 불교 재가모임의 바른불교라기보다는 일반론으로 말해드릴까요?
기자: 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교수: 제가 모임을 할 때의 토대는 일단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삼법인(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과 연기실상에 대한 철저한 체화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변과 함께하는 것이구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해 주신 우리들의 원래 모습을 일단 자각하고 그것에 의거해서 주변에 회향하는 것 까지가 제대로 된 불교적인 삶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자: 왜 재가불교입니까?
우교수: 재가불교요? 네. 저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출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의 말씀이 승속을 떠나서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면에서 전문적으로 출가할 수 있는 분들에 비해서 삶의 현장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일반인들에게 과연 어떠한 불교적인 삶이 필요할 것인가의 고민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일단 재가불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승가나 재가가 분리된 게 아니라 함께 진행되어야 될 사부대중의 구성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자: 예. 그러시군요.
우교수: 말이 되나 모르겠습니다.
기자: 좀 까칠한 질문일 수 있는데요, 부처님께서는 삼보를 공경하라 하셨지만 또한 부처님 당시에도 승려로서 바른 곳이 아닌, 즉,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승려나 또 승단이나 재가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승려에게는 탁발 시에 공양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따를 필요도 물론 없고 심지어 절에서 떠날 것을 재가자가 요구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례가 앙굿따라 니까야 한국어 번역본(대림스님역) 5권에 나옵니다, 이런 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우교수: 예, 저는 그걸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께서는 그 사람의 존귀함은 그 사람의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지 어떤 형상이나 세속 지위로 바라봐선 안 된다는 가르침을 늘 하시고 있거든요. 그런 면에서 외형으로 승가다, 재가다라고 구분 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불제자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가가 판단기준이어야 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 오히려 저는 재가자보다도 승가에게 더 엄격하게 그런 부분이 적용되어야 된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분들은 수행자라는 것을 통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함을 내세운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모습이라는 것은 결국 위선이거든요. 악에 대해서는 우리가 바로 잡기를 원하고 그런 이를 도와서 선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되지만, 일단 위선은 파사현정의 대상이라고 봅니다. 위선으로 포장한다는 것은 이미 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승가의 부적절한 행위나 모습은 위선이기에 재가자들이 보다 분명하게 지적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기자: 그 부분을 현대 특히 대한불교조계종에 적용하고 있다고 압니다. 저는 현재 종계종 신도로 등록되어 있습니다만, 교수님께서는 어떠신지요?
우교수: 저도 조계종 신도입니다.
기자: 조계종 신도로서 현재 한국불교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우교수: 예 한국불교의 모습을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스님들을 통해 주로 보게 되고 그러다보니까 총무원이나 혹은 본사 주지스님들과 같이 사판에 계신 스님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스님들이 대부분 청정비구로서 계율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모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너무나 이권과 관련된 권력지향적인 면이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계파를 형성하고 서로 부정부패를 가려주는 그런 이해 집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아픈 입장입니다.
기자: 그런 스님들의 영향으로 인해서 부처님께 더욱 다가가려고 하는 재가자에게 당연히 불이익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부분에서, 예를 들면 태국에서는 스님들께서 어떤 부적절한 계를 파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보게 될 경우에 재가자가 ‘스님 이러시면 안됩니다.’라고 청하며 만류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조계종 신도님들이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나 마음가짐이나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우교수: 예 대만에서도 지금 말씀해주시는 그런 재가자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저는 그런 면에서 한국의 많은 일반적인 재가자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스님의 모습을 봤을 때 오히려 그것을 덮어주고 가리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됐습니다. 저는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국의 일반 재가신도들이 그러한 승가의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을 지적해서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고 왜 거론하지 않는가 생각해보니 그 이면에는 제 식대로 표현하자면 '굴종의 신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은 스님들이나 불교를 가르치는 현장에 가보아도 무조건 스님에 대해서는 결코 판단하지 않는, 옳고 그름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인 양 얘기하는 그런 굴종의 자세를 강요하는 모습도 보구요.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시시비비를 따지기 이전에 바른 가르침의 실행이라는 점에서 승속을 떠나서 얘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주체적인 신앙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자: 조금 더 확장하여 질문을 드리자면, 최근 한국의 국가 경쟁력이 OECD 국가 중에 26위로 몇 년 전보다 하락한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수출이나 경제적인 경쟁력 등에서는 어떤 부분에는 5위고 6위랍니다. 그러나 국가신용도라거나 또 남녀평등 기타 전반적인 국가경쟁력에서 떨어집니다. 금융권의 신용도도 포함되고요.개인의 삶이나 국가적 입장에서도 중요하게 실천되어야 할 신뢰성부분들은 전반적으로 쉬이 넘어가는 한국적인 문제도 있을 수가 있겠구요. 한국 일반적 문화나 관습을 포함해서 불자라 하더라도 5계를 지키지 않는,예를 들면 불음주를 해석할 때 술에 취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하는 태도를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이런 면에 대해서 우리 불자들의 5계를 실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보조국사께서 정혜결사를 하실 때 스님들께서만 하신 게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탁드립니다.
우교수: 물론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 집단으로서의 불자들도 분명히 사회에 어떤 청정함에 기여할 필요는 있다고봅니다. 그리고 우리들과 같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앞서서 해야 된다고 보구요. 그런데 이 계율의 문제에서 저는 오히려 너무 엄격한 계율을 유지하기보다는, 그것이 특정 기간 중에 우리에게 필요한 수행이나 특정 형태로 펼쳐질 필요는 있지만, 이 계율에서 좀 자유롭자는 입장입니다. 왜냐면 신도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중의 다른 비신도들이 계율이 굴레가 돼서 오히려 신심이 떨어지는 경우를 저는 종종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계율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조금은 여유있는 폭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죠. 어떤 입장에선 해석하기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서 저는 그런 입장은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일단 계율 자체보다는 계율의 정신이 무엇일까를 항상 끊임없이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것을 기억한다면 스스로가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이기에 계율을 진짜 명확하게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는 논의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진다고 봅니다. 다양한 특정 상황 속에서 계율이 말하는 정신을 지키고 있는가라고 끊임없이 자기 성찰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한 자세로 살아간다면 진정 우리들의 바른 모습을 위한 계율이 오히려 진정으로 살아나지 않을까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계율이 굴레가 돼서 그것이 오히려 제대로 된 불교 정신을 표출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보기 때문에 저는 개인적으로는 계율의 정신을 잊지 말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자: 감사합니다. 혹시 수행을 하고 계시다면 어떤 수행을 위주로 하였는지요?
우교수: 저는 90년대 중반에 간화선에 집중했었습니다. 그래서 무자 화두로 2년 집중적으로 수행했구요. 그 간화선 체험 이후로는 이렇게 말하면 좀 건방진 것 같기도 합니다만 일상의 생활 자체가 그대로 수행이자 간화선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자: 그렇게 수행하시는 교수님께서 수행 못지않게 나눔을 많이 하신다고 들었는데 조금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교수: 뭐 특별한 나눔을 하는 건 아니구요. 어쨌든 제가 부처님의 말씀 그리고 최소한 간화선이라는 수행을 통해서 얻은 것은 분명히 저 자신에 대한 자유로움입니다. 그리고 평안함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체험을 바탕으로 봤을 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주변과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나눈다고 했을 때 특정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고 결국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조금씩 실천하면서 함께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는 가장 소중한 것은 시간의 나눔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한정된 시간이 허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소년원이라든지 혹은 마음공부모임이라든지 이런 데에 개인 시간을 할애해서 쓰는 편입니다.
기자: 하버드 대학 계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교수: 예 거기선 연구강사를 했습니다.
기자: 아 강사를 하셨습니까? 미국생활을 하셨네요.
우교수: 만 5년 있었죠.
기자: 미국에 사실 때의 불교 신행 활동을 좀더 설명해주시지요?
우교수: 제가 미국에서 87년부터 92년까지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제가 펜실베니아 대학이 있는 필라델피아와 하버드 대학이 있는 보스턴에 있었는데요. 당시 시내에는 선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불교 활동이 그렇게 활발하지도 않았구요. 그래서 그때는 절에 가진 않았구요. 오히려 그때 종교 활동으로는 교회에 다녔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성경이나 우리 불교의 경전 모두 진리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기자: 예 그렇다면 미국 교포 불자님들의 어려움 같은 거를 잘 알지 못하겠네요.
우교수: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왜냐면 요즘 제가 바른불교재가모임이란 것을 시작했는데요. 우리 활동을 보고 미주의 동부와 서부 등 여러 곳에 우리 얘기가 전달되고 연락이 옵니다. 우리도 그곳 상황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서 아직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는 것은 판단할 수 없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고, 그 어려움의 바탕에는 결국 한국 조계종단의 부정적인 모습이 미국에 있는 한국 사찰 쪽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기자: 그럴 수 있겠습니다. 그곳에서 계를 받은 분들보다는 주로 조계종 스님들께서 주로 활동하시니까요. 미국에서 불교인으로 특히 한국불자로 신행활동을 한다는 것은 어려움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교수: 예 그 뜻을 알겠습니다.
기자; 미국 교포불자들분들께 따뜻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교수: 따뜻한 말 이전에 방금 질문에 이어서 제가 좀 더 답을 드린다면, 저는 미국에서 불자생활을 하는 분들의 어떤 고충을 들으면서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한국 조계종 문화가 그대로 미국에 이식되면서 생겨나는 정말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라고 느끼면서, 그것이 사실은 한국 사회와 똑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국 사회에서 아시겠지만, 주류는 기독교인들입니다. 최소한 서울대학교만 해도 지금 뭐 이천 명 가까이 많은 교수 중에 불자는 극히 소수입니다. 더욱이 불자라고 자기가 당당하게 저처럼 내세워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사실 서울대뿐만 아니라 어디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주류집단 내에서 소수로 전락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당당하게 불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부처님 말씀에 대한 자기 체험이 있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암묵적인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불자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 대해서 한국 승가에서는 너무 당연하게 쉽게 생각한다든지 혹은 신도니깐 스님을 무조건 공경해야 된다는 식의 태도를 보면서 정도의 차이일지는 모르나 한국과 미국의 재가자가 느끼는 게 참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좀 많이 해봅니다.
기자: 기독교가 진리인 면에서는 불교와 같다고 하시지만 미국에서 형태적으로 교회를 다니셨는데 다시 절에 나가시게 즉 불교수행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지요?
우교수: 저는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불교반 활동을 했었구요. 그때 지금은 돌아가신 무진장 스님이 저희 고등학교 지도법사셨습니다. 그리고 대원정사라고 남산에 있는 절을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경전으로만 이해하려다 보니깐 내면의 어떤 간절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제가 찾지 못했던 거구요. 그런 면에서 마침 유학을 가게 되고 여러 상황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기독교 공부를 하게 된 것뿐입니다. 그러나 사실 거기서도 저는 답을 얻지는 못했던 거구요. 그리고 귀국하면서 제가 집안 개인 사정 때문에 가치관에 혼란이 생기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때까지도 그냥 평범하게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왔는데 드라마 같은 일이 생기고, 내면의 트라우마가 생기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그동안 배워온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가 아닐 수도 있다 는 생각을 했고, 과연 그렇다면 그 중심에 서있는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아주 심각하게 던졌고요. 그런 면에서 나를 찾는 데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참선이란 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비로소 아주 절실하게 참선에 임했던 것 같습니다
기자: 수의과 교수님으로써 애완동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교수: 요즘에는 반려동물이라고 하지요.
기자: 동물을 생명체로서 존중하고 살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경우엔 학대하거나 버려진 경우를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우교수: 제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생명에 대한 생각 말인가요?
기자: 예. 한 말씀 부탁합니다.
우교수: 결국 지구상에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우주와 지구가 담고 있는 긴 시간과 함께 하는 생명의 흐름을 모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어떻게 보면 최소한 지구의 나이가 45억년이고 또 지구가 있는 우주가 137억년의 나이를 가지고 있다고들 하는데, 그 긴 우주의 시간 속에 있는 생명의 역사가 다 담겨져 있는 게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각각의 생명체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제 앞에 있는 이런 꽃 하나를 만나는 것도 137억년의 긴 시간의 축적 속에서 지금 만난다는 생각을 한다면 저는 이 생명에 대해서 정말 경건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생면존중의 이런 말이 무조건 죽이면 안 돼 라는 경직된 이분법적인 얘기로 들려서는 곤란합니다. 왜냐면 모든 존재 자체가 다른 생명에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거든요. 그 이야기는 죽음을 피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한 불살생이 아니라, 우리 선조의 무수히 많은 죽음이 지금의 아름다운 생태계의 근간이 된 것처럼 나의 죽음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 세대의 건강한 터전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항상 바라봐야 된다는 거구요. 단순히 안 죽여야 된다는 것으로 불교의 불살생을 오해하지만, 한 생명이 탄생을 바라봤을 때 137억년의 긴 시간을 담고 꽃 핀 하나의 우주고 또 죽는다는 것은 그 하나의 우주가 이제 사라져간다는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지, 죽고 사느냐에 매달리는 어떤 이분법적인 생명 존중은 일종의 생명집착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생명체를 볼 때 우리 반려동물 뿐만 아니라 누구도 대신할 수없는 이 세상의 각각의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엄함 그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그 말에도 잘 담겨져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반려동물의 형태건 혹은 내가 먹는 식물의 형태건 그런 마음가짐과 자세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기자: 네 법문 듣는 것 같습니다.
우교수: 하하 말을 좀 어렵게 했나요?
기자: 그럼 당신은 누구십니까?
우교수: 제가 답을 드릴 수 없겠죠. 그래도 가장 좋은 표현이 '알지 못한다(不識)'는 달마대사의 답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평소에 강조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예를 들어 숭산스님의 Don't know를 ‘모른다’고 번역한 것 같습니다. 저는 모른다와 알지 못한다는 건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모른다는 건 안다의 상대개념이지만 달마대사가 불식(不識)이라고 말한 것처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지극히 조금 아는 것을 제외한 드넓은 모든 것이거든요 종종 모른다고 표현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저는 제대로 표현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숭산스님의 표현을 모른다로 표현한 것 자체가 아직 참선의 체험을 못한 이가 한 번역으로봅니다.
기자: 바른불교제가모임에 대해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우교수: 청정한 승단을 염원하고 바른 수행공동체의 회복을 갈구하면서 재가불자 스스로 바른 불교를 성취하는 사부대중 공동체의 당당한 주체로 자각하고 능동적으로 나서는 모임입니다. 우리들이 총무원의 권력을 가진 스님들의 횡포에 대해서 지적을 하지만 그분들의 행위를 지적하는 것이지 그분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들 자체를 미워하는 분들을 재 할 때 마다 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행위를 바로잡을 때 그 권력을 행사하는 스님들도 바른 길을 갈 수 있게 하기 위한 우리들의 따뜻한 애정의 마음에 근간함을 강조합니다. 그럴 때 비록 위선적인 승려에 대하여 날 선 비판을 하지만, 결코 증오나 미움의 감정은 절대 아니고 분노를 해도 그 분노가 자신을 손상케 하지 않는 다는 점을 좀 더 성찰하도록 합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한 들 그 정의가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분노라면, 그것은 정의에 대한 집착은 아닌지 성괴로윰을 유발하는 것이라면 거기서부터 자유로와야 합니다. 결국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상황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지점에서 바라보는 데, 그러한 분노는 행위에 대한 분노로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나 고통 받는 사람이나 따뜻한 애정으로 대해야 하고, 또 그 지점에서 나의 마음이 결코 다치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를 종종 하지요
기자: 예, 긴 시간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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