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 거주하는 인생
창 21:14-21
이스마엘과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들의 파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도 한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13절) 이들이 언약의 가정으로부터 분리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계속해서 돌보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 믿는 사람들, 하나님 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이 세상의 불신자들은 아무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내려주시는 은총을 일반은총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에게도 햇빛을 비춰주시고 비를 내려주십니다. 이러한 일반은총 가운데는 하나님의 손길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겸손하게 하나님을 인정하며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도 이런 은혜가 함께 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의기양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지 않으면 결국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집에서 내쫓긴 하갈은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다가 물이 다 떨어져 기진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는 간단히 기록되어 있지만, 그 상황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절박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기진하여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하갈은 죽어가는 아들로부터 활의 사정거리, 약 250-300m 쯤 떨어진 곳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고 떨어져 나온 이 모자는 이제 죽음 앞에서 신음하며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음과 통곡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17-18절)
아브라함이 이렇게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보낸 것은 무책임하고 몰인정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아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을 이러한 각도에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들을 내보내면 그들이 광야에서 죽게 될 것을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그토록 고민하며 깊이 근심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했을 때,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내보낸 이스마엘과 하갈을 돌보아주셨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순종이 이들을 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순종하면 망할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는 대안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결국 이스마엘과 하갈을 살렸습니다.
첫째 : 부르짖으면 도움의 길을 주신다.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16,17절)
하갈과 이스마엘이 브엘세바 들에서 아무 희망도 없이 방황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의 묘사는 머물 곳도 갈 곳도 없이 헤매고 있는 절망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물마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들이라고 번역된 광야는 물이 떨어지면 곧 죽음을 뜻하는 장소였습니다.
하갈은 물이 떨어지자 아들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는 큰 나무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광야에서 큰 나무를 발견하기란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의 고통을 겪고 있는 아들을 떨기 나무 그늘에 쉬게 해 잠시라도 뜨거운 햇볕을 피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떨기나무는 허리 높이에 미치는 것도 별로 없고 그저 무릎 정도가 대부분인 관목의 일종이었습니다.
그러니 작디작은 그 가시 덤불이 얼마나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하갈은 화살이 날아가 떨어질 거리만큼 가서 아들을 마주 보고 앉았습니다. 화살이 날아갈 거리라면 꽤 먼 거리입니다.
어미로서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갈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마음으로 멀리 가시 덤불 아래 있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방성대곡 하며 눈물을 쏟아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17)
그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하갈은 과거 하나님으로부터 큰 구원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임신한 채로 사라의 핍박을 피해 광야로 무작정 도망쳐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나타나 그녀와 그녀의 태중의 아이를 돌보아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하갈은 하나님께서 보잘것없는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실 뿐만 아니라 돌보아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감격해 '엘 로이', 즉 '살피시는 하나님'(창16:13)이라 이름을 지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감격적이고도 은혜로운 체험이었습니다. 그 체험이 있은 후 하갈이 하나님의 돌보심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면 지금처럼 그렇게 쉽게 낙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살피시는 하나님' 즉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그 고백을 믿고 살아왔다면 어려운 상황이 닥쳐올지라도 지금 하갈의 모습처럼 쉽게 절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갈은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에 품고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앙고백도 잊고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이 떨어지자 아들의 죽는 꼴을 못 보겠다고 방성대곡 울음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둘째 : 기도하면 눈을 열어주신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19절)
우리 인간은 우둔해서 보고도 못 보는 소경과 같습니다. 같이 산에 가도 산삼을 보고 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아서 캐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야에 열리지 않으면 보고도 모르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주시면 우리 영혼은 아무 설명 없어도 다 본능적으로 알아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눈을 밝히사 샘물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그 샘은 없었던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 때 새로 만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있던 샘을 발견하게 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게 되었고,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장성하여 활 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갈이 발견한 샘물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이미 주셨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부족한 것이 많아서 고생하며 힘들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우리 가운데 풍성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낙심하고 슬퍼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하갈을 기억해주셨을까요? 왜 하나님의 사자가 이들을 구하러 오셨을까요? 그들이 아직 언약으로부터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언약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기억하시고 돌보신 것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 밖에 있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언약 밖에 있던 자들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광야에서 하갈은 가까이에 있는 샘을 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녀의 눈을 밝히시자 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 육체가 연약해도 귀히 쓰신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18절)
20절에도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아들 이삭에게만이 아니라 서자인 이스마엘에게도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복음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 얄궂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사랑해 주시고 복 주셨을까?
그러기에 우리 육체도 희망이 있습니다. (렘32: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이 그 험한 광야에서 강해져서 활 쏘는 자가 되었듯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도 우리 육신에 주신 은사로 세상을 이길 능력을 갖게 하시고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게 하시고 또 복음 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우리 육신도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그의 아내는 애굽 여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영혼은 하늘에 속했지만 우리 육체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이 세상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도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육신이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육신도 잘 관리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약해지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육체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의 영원한 새 집이 우리에게 입혀지기까지 우리의 시원치 못한 육신이라도 잘 관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