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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조 시집 <해설>
큰 그림, 해학으로 그려낸 달관의 세계
박윤배(시인)
1.
곽태조 시인의 시를 전통적 서정시의 한 갈래로 읽는 것은, 화자의 감정이 자연물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소월을 이어 영랑·목월을 거쳐 오늘날 전통적 서정시의 맥을 가장 잘 잇고 있는 시인을 꼽으라면 문태준 시인이라 할 수 있는데, 곽태조 시인 또한 그 연조로 볼 때 그 전통의 맥을 잇는 하나의 징검돌로서 서정시 발전에 나름의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곽태조 시인은 요즘 문단의 커다란 화제인 이후以後 문학인으로, 교직에서 정년 이후 활발한 창작활동을 보여줌으로써 한국문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문인의 한 사람이다.
현대시가 시인의 기분이나 심리를 지나친 상상력을 반영한 낯선 문장으로 끌고 가면서 일반 독자와의 틈이 존재하는 지금, 이해가 쉬운 전통 서정시는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창의를 앞세운 최근 시가 과한 정신적 내면의 진술로 독자들에게 외면당하는 것에 비해, 이번 시집에 수록된 곽태조 시인의 시편들은 읽는 순간, 감흥이 바로 전해지도록 시인이 전달성을 염두에 두고 썼음을 알 수 있다. 주제에 따른 의미 전개에 있어, 이중의 알레고리로 표현되면서 독창성에 커다란 의미를 두려는 미래파 이후의 시 경향과는 반대편에 서서 이렇게 써도 시가 될 수 있다는, 나름 자연염료를 풀어 일상의 삶을 순순하게 그려낸 것이 이번 시집이다. 마치 조선 시대 풍속도의 대표적인 화가 긍재 김득신(1754~1822)의, 단순한 기록이 아닌 해학과 풍자로 풍부한 스토리를 담은 듯, 시를 쓰는 바탕이 밑칠 되지 않은 흰색 비단이나 한지로 그 위에 엷은 먹빛의 필법으로 그려낸 시인의 언어는 다분히 동양화의 기풍을 닮아있다. 읽는 이로 하여금 마치 화선지에 떨어뜨린 먹물이 잔잔히 번지는 듯한 그런 느낌의 시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비유를 사용하면서도 날카로운 성찰로 사물에 얽힌 의미를 투사하는바, 그 방법에 있어 에둘러 메시지를 전달하는가 하면 넉살스레 혹은 달관한 듯한 어투로 독자에게 내용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넌지시 직관을 제시하는 화법의 시편들로 한 권의 시집 속에 알찬 살림을 꾸려놓고 있다. 시인의 해학과 유머를 따라가다 보면 그 재미가 쏠쏠하다. 쉽게, 재미있게 눈으로 읽히면서도 읽고 나서 눈을 감으면, 마음속에 한 폭의 그림이 그려지는 그런 시집이다.
칼국수 집에 갔다, 기계로 뺀 국수다
건더기를 먹어도 칼의 맛 아니다
밀가루 콩가루 섞어 반죽하는 어머니 얼굴이
우묵한 국수 그릇에 일렁거린다
홍두깨로 맴돌리던 암반 위 반죽에
밀가루에 콩가루가 보태는 살에
김 오르는 만월이 덤벙 담기던 그릇
어머니 땀방울이 면발에 먼저 녹아들고
그 위에 애호박과 함께 썰려지던 고명
지금 내 입에 드는 것은 불면의 맛
어디를 가도 먹을 수 없는가, 그때의 맛
이건 아니라고 투정하면 꼰대 소리나 듣겠지
젓가락 위에 들어 올려진 국수를 두고
한참을 들여다보는 거였다
나 그 옛날 그리워하던 버드나무집
셋째 딸 능수의 미소를 이제야 후루룩 삼킨다
- 「능수 칼국수」 전문
능수 버드나무라는 말은 알겠는데, 능수 칼국수라니! 궁금함이 슬그머니 밀려온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젓가락으로 들어 올린 칼국수가 축축 가지를 떨구고 있는 능수 버드나무를 닮아서인가. 대중가요의 한 토막에서 노래로 불리는 <천안삼거리>에서 보던 그런 능수버들을 연상한 것이, T. S. 엘리엇이 말한 객관적 상관성을 절묘하게 찾아내어 언어적 유희까지 양념 즉 고명으로 얹었으니, 참 맛있는 칼국수가 아닌가! 칼국수의 칼맛이 그러하고 어머니 손에서 반죽 되던 반죽 덩이가 만월로, 만월이 퍼지면서 결국 세상을 비추는 칼국수가 되니 예사로운 칼국수가 아니다. 시인의 눈에 들어와서 재해석되는 칼국수는 지금 내 입에 드는 불면의 맛으로, 어디를 가도 먹을 수 없는 그때의 맛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심경을 절절히 보여주다가 다시 자신의 독백으로 “이건 아니라고 투정하면 꼰대 소리나 듣겠지”라는 감정의 양가성을 보여준다. 마치 셰익스피어 극 중의 갈등을 드러내는 독백 형식과 유사한 구조를 시의 틀 혹은 거푸집으로 인용하고 있다. 거기에 그 옛날 그리워하던 버드나무집 셋째 딸 이름도 능수라고 이름 지어 부르면서 그 소녀의 미소를 만나고 있으니 현재 칼국숫집(식당)에서 칼국수를 앞에 두고 나름 자신의 존재를 위로하고 위로받는 위무의 시인 것이다. 그녀의 머리칼과 고명 같은 얼굴과 국수가 서로 겹쳐 투영되며 여러 이미지의 동일성을 찾아 감정의 바닥을 뭉뚱그리는 해학의 또 다른 절정으로 읽히는 시이다.
2.
위의 시 「능수 칼국수」가 보여주는 세계가 그러하듯 곽태조 시인의 시는 모두 긍정의 세계다. 시인의 나이 구순을 넘겨서 드디어 얻은 깨달음은 다름 아닌 자신의 자세를 낮춤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어내는 기막힌 자기제어이다. 시를 읽는 것인지, 잔잔한 물결을 읽는 것인지, 아무튼 “이건 아니라고 투정하면 꼰대 소리나 듣겠지”의 독백이 보여주는 달관의 경지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닌 깊은 연륜의 또 다른 결과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시집의 표제작 「몽당연필」 또한 그런 시인의 자화상이다.
한밤중 이리저리 뒤척이는 몸
그래 참 잘 살았다고
시린 서랍의 뼈마디를 만져주고 있다
서랍 모퉁이에 쉬고 있는 연필
너무 짧아, 쥘 수 없어 끼워진 깍지
어디서 본 듯 낯익다
시키는 대로 앞만 보고 사느라
고달픈 나날 뼈를 깎던 아픔도
아낌없이 내어준 살과 뼈로
가난의 담을 넘어, 움이 되고, 꽃이 되고
점점 몸이 닳고 눈앞은 흐려도
몽당연필 그가 써 내려간 문장들이
서랍 속 부활을 기다리는가?
당겨낸 서랍 드르륵 굴러와서
나 아직은 살아있다고
잠 덜 깬 나방의 꿈을 쿡쿡 찌르고 있다
- 「몽당연필」
위 시에 등장하는 중심 소재는 몽땅한 연필이다. 일명 몽당연필이라 부른다. 처음부터 몽땅했던 것은 아니다. 검은 속심 닳아가며 글씨를 쓰고, 밑줄을 치며 바쁘게 살다 보니, 점점 키가 작아졌을 것이다. 사람도 이처럼 몸과 정신을 오래 쓰다 보면 몽땅해지기 마련이다. 몽당이라는 접두사를 명사 앞에 두면 왠지 앙증스럽기도 하면서 정감 같은 것이 물씬 느껴진다. 몽당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 또한 그렇다. 이렇듯 작아서 손안에 쏙 들어오는 연필은 버려지거나, 잘하면 깍지를 끼워 쓰기도 한다. 물론 깍지를 끼웠다고 해서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 시에서는 그런 연필을 넣어둔 곳이 서랍으로 보이는데 결국 서랍에 연필이 갇힌 것인지, 연필이 서랍을 찾아 들어간 건지는 알 수는 없지만, 연필이 서랍을 위로한다. 서랍의 뼈마디까지 만져주고 있다. 작은 연필이 자신을 보관해주던 서랍 즉 아내쯤인 서랍에 보여주는 동작은 얼마나 애틋한가. 어디서 본듯하다는 그 연필이 바로 자신의 모습임을 에둘러 이야기하는 것도 다름없다. “시키는 대로 앞만 보고 사느라/ 고달픈 나날 뼈를 깎던 아픔도/ 아낌없이 내어준 살과 뼈로/ 가난의 담을 넘어, 움이 되고, 꽃이 되고”는 연필이 몽땅해지기까지 자신이 살아온 행적이다. 점점 몸이 닳고 눈앞은 흐릿하지만, 연필로 써 내려간 창조적인 생각들 즉, 시 수필 같은 문학예술의 결과물들은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연필은 물론 연필을 돌봐주던 서랍까지도 새로운 부활의 대상임을 시는 암시하고 있다. 특히나 마지막 연에서 몽당연필이 하는 행위-서랍에 잘못 들어와 고치를 지어놓은 벌레(나방)의 후생이 화들짝 깨어나도록 연필심 끝으로 쿡! 찌르는 짓궂고 심술궂은 동작-을 통해 노심老心과 동심童心을 동시에 불러내고 있다. “그래 참 잘 살았다고”, “나 아직은 살아있다고” 두 직관 사이에 끼워 넣은 정황과 이미지와 진술이 곧 이 시의 척추 또는 골격의 중심임을 아는 순간, 시인의 시가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하게 된다. 어두웠던 심안心眼이 번쩍 뜨인다.
3.
한 생을 티끌 없이 잘 살아낸, 한 사람으로서의 연조를 무시할 수 없는 게, 구순을 넘긴 시인이 2021년에 이어 어떻게 이런 시들을 쓴 것인지 깜짝 놀랄 일이다. 곽태조 시인의 시가 세상에 나가, 수많은 창작시와 어깨를 견줄 때, 어쩌면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문득 해 본다. 돌아보면 시인이 살아온 세월은 평탄하지 않았다. 가난과 전쟁과 산업화를 거쳐 급변하는 IT산업의 발전으로 인공지능(AI)이 시를 쓰는 이 시대에 사람 냄새 나는 시집을 상재한 곽태조 시인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이 쓴 시 속에는 인공지능이 절대 이해 못 할 인간만의 몸짓이나 감정들이 시편마다 산재 되어 있다. 그것은 핏속에 흐르는 인간만의 고유한 가치이므로 인간의 사고를 모방한 차세대의 인공지능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의 영역이다. 단순한 경험과 체험의 기록을 넘어, 시 속 중심 소재를 엉뚱한 이름으로 바꿔 부르는 등, 새로운 의미와 생명을 부여하는 신선한 충격과 마주치는 등, 발상의 전환이 이번 곽태조 시인의 시에서 자주 보인다.
나이테에 박힌 옹이를
밤새 내린 함박눈이 덮고 있다
옹이는 거무스레한 나무의 귀
지난날 바람결 향기 따라 춤추던
벌 나비를 가만히 떠올린다
어두운 하늘로 날아가며
매미가 남긴 단말마를 데려와
썩어드는 귀를 헹군다
수없이 석양을 삼킨 나무는
사그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구멍 깊숙이 차곡차곡 쌓아둔
운명의 별자리 잠시 보관하다
사랑 떠나보낸 쓸쓸함이 그러하듯
솜이불인 양 함박눈을 끌어 덮는다
해마다 움푹해지는 눈
점점 더 그리움은 깊어지고
- 「옹이」 전문
꽃줄기 어디론가 사라지자
누군가 볼품없다고 쓰레기더미에 내다 버린
카틀레야
말라 죽어가는 너를 데려와
새벽마다 눈빛을 모아 건네주니
성긴 부석 앉힌 방에서
보랏빛 두 송이로 빙그레 웃는다
넉 달 넘어도 어제 같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도 전에
너는 벌써 오래전부터 나를 사랑했던가
청초한 몸이 피운 꽃이어서
네가 머문 허공은 오랜 기지개다
긴 세월 흘러도
엊그제 온 것처럼 청초한 그 자태
놀라운 군자 기질만큼은
카틀레야, 그 찬사에 있어서는
동서양 경계가 없다
- 「카틀레야」 전문
전통적 서정시를 떠올리면서 곽태조 시인의 시를 연관 지어 살펴보다 보면 대략 1200년 전 죽은 누이의 제를 올리며 삶과 죽음의 순간을 선명하게 그린, 월명사가 지은 신라의 <제망매가>가 떠오른다. 또, 임에 대한 그리움에서 촉발된 감정을 노래한 황진이의 시도 떠오른다. 두 형식의 시가 뒤엉키면서 근대를 100년 가까이 살아온 시인의 주마등 같은 체험들이 그 옛 서정의 맛과 함께 양념으로 버무려져 현재로 이어지고 있음에 전통의 맛, 멋에 한 번 더 찬사를 보낸다. 위의 시 「옹이」에서 나무의 가지가 썩어 빠져나간 상흔의 자리이지만 그런 옹이를 달래주는 건 흰 눈이고, 옹이에서 흐르던 진물의 시간에는 벌도 나비도 아픔을 수유하고 간 것이라는 진술이 애절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울음으로 짝을 찾고 교미를 끝내고 마지막 탄성을 지르고 죽는 매미의 단말마 소리에 귀를 헹군다니, 결국 “옹이=귀”라는 낯설게 하기의 절정을 시인은 시 「옹이」를 통해 포착하고 있다. “수없이 석양을 삼킨 나무는/ 사그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마다 움푹해지는 눈/ 점점 더 그리움은 깊어지고”의 직관으로 사랑마저도 잠시 보관하다 떠나보낸다는 쓸쓸함은 그의 옹이 속에서 달관의 한 경지로 그려지고 있다.
또 다른 시 「카틀레야」는 누군가 버린 난초를 쓰레기 더미에서 주워와서 성긴 부석 앉힌 방에서 새벽마다 눈빛을 모아 건네주니, 기어이 꽃이 피더라는 일종의 경험의 산물인 시인데, 꽃이 지닌 군자의 기품을 흠모하는 마음을 솔직 과감하게 진술하고 있는 그런 시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도 전에/ 너는 벌써 오래전부터 나를 사랑했던가/ 청초한 몸이 피운 꽃이어서/ 네가 머문 허공은 오랜 기지개다”라며 꽃이 기지개로 일찍이 당연히 올 것이 오고야 만 그런 사랑의 상징이 되어가면서 카틀레야는 꽃만은 아닌, 꽃의 이름도 아닌, 부석사 부석 위에 앉은 의상대사를 따라온 선묘의 또 다른 시적 모멘토로 그려지는 것이다.
누워서 흔들면
눈이 감겨지고
꺼져가는 아궁이에 닿으면
솟아나는 불씨
펼친 부채는 마술사다
꽃부채 펼쳐 든 옆 좌석 아줌마
무더위가 겁을 먹는
향수 내음을
내게로 천천히 건너오게 하는
그 부채
어두운 구석에서
옆으로 돌아눕다 조르륵 겹치니
암행어사 출두인 듯
초목도 떨지 않을 수 있으랴
사랑 낳는, 부채인가
누가 볼까, 눈도 가리는
그녀의 부채
두 입술 파르르
갚아야 할
부채로 떨고 있다
- 「쥘부채 펼쳐 들고」 전문
경험을 진정성이게 노래한 시 「카틀레야」에 비해 시 「쥘부채 펼쳐 들고」는 아름다운 소품인 부채를 마치 찬양하듯이, 리듬감 있게 노래하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바람을 부치는 부채가 아닌 갚아야 할 부채負債로 슬며시 탈바꿈하는 반전을 보여주고 있다. 부채라는 사물이 아궁이에 불 지필 때 바람을 불어내는 정도의 기본용도가 바뀌면서 바람이라는 본질 너머 ”집착“ 혹은 ”권위“의 또 다른 상징이 되기도 한다는 재미와 재치의 유머러스한 시편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성급할 까닭조차 없는 천진한 어떤 상태에 이르는 그런 경지쯤이 아닐는지. 해설에 인용되지 않은 여러 시편을 보면 시인이 겪어낸 세상 풍파의 그늘은 그 깊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다 지나간 일이고 현재 시인의 정서는 그저 잔잔한 수면에 가끔 튀어 오르는 물고기 지느러미 같은 그리움의 순간들이거나 지긋이 눈감고 입가에 잔잔히 흘리는 문수보살의 넉넉한 미소쯤으로 보인다.
4.
서정시의 본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서정시는 원래 노래였다. 신라의 향가 <제망매가>가 그러하고,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에서 악기 반주에 맞춰 불렀던 가사를 그 뿌리로 간주한다. 수메르에서 기원한 현악기인 리라Lyra에 맞춰서 하는 노래(리리코스)가 서정시Lyric의 어원이다. 곽태조 시인의 이번 시집에 실린 시편들도 시인이 한 생을 살며 느끼고 마주친 순간들이 연금술적인 언어를 만나면서 노래로 기록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가을날 바람이 추는 춤에는 외딴집 빨랫줄이 들어 있다
잠에서 깬 고추잠자리가
발 디딜 곳 없어 서성이다가
신작로 코스모스를 징검돌인 듯 밟고 간다
솜털 날리며 새살림 떠나보내는 억새꽃 숙인 고개에 내려앉으니
억새가 잠자리에게 말하기를
그동안 키워준 뿌리에 큰절하는 중이라고 한다
어깨 위로 날아가는 참새 소리 듣지 못한 척,
잠자리 이번에는
논의 눈 부라린 허수아비에게 다가가
흙 묻은 소매를 털어준다
잠자리는 해거리에 궁색한 감나무 가지도 다독이더니
아래, 윗동네 사람들 한데 모여
꽹과리 앞세운 농자천하지대본 깃대 위에서
사는 동안 무거웠던 꼬리의 무게를
농무 속에 내려놓는다
- 「갈바람 축제」 전문
담배씨도, 깨알도 그믐밤 헤아렸다
샘 속의 두레박, 구름 위의 산봉우리에도
시력 좋은 눈이 달려있다
벌들의 아카시아 사랑
종다리 암수의 곤두박질
고추잠자리의 수줍음
빈 리어카에 오르는 씨돼지 사랑도
감은 눈으로 보면 다 보인다
우리 집 지키던 이백 살 넘은 등잔은
박물관에 걸리고
씻어도 닦아도 눈에 끼는 안개
가본 적도 없는 구만리 장천이
다 보이는 것은, 마음속 눈이
맑아졌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있어도 다가온 칼날
찌를지, 벨지 다 알고 있다
- 「고수의 눈」 천문
마지막에 실린 두 편의 시 「갈바람 축제」, 「고수의 눈」은 두고두고 읽어도 좋은 수작이다. “벌들의 아카시아 사랑/ 종다리 암수의 곤두박질/ 고추잠자리의 수줍음/ 빈 리어카에 오르는 씨돼지 사랑도/ 감은 눈으로 보면 다 보인다.”라고 노래하면서 뜬 눈이 아닌, 감은 눈으로도 삶이라는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이러한 경지는 시인이 이제는 절대 고수의 눈을 가졌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담배씨도, 깨알도 그믐밤 헤아렸다”라는 그가 눈감고도 구만리 장천을 헤아리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눈을 감고 있어도 다가온 칼날/ 찌를지, 벨지 다 알고 있다”라고 하니.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린 것이다.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과거의 반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가족에 대한 사랑을 담아내면서 둥글기 그지없는 시의 세계를 보여준다. 각이 선 것들은 그 각선 모서리를 지우고 있으며, 삶에 관한 탐구의 단계를 넘어서서 존재에 대해 던진 물음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달관의 세계를 그려낸 시인의 언어가 원만하다.
여느 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시집 속의 시편에 대한 독자들의 선호도는 각양각색일 것이다. 시인이 시집 원고를 보내주면서 이번 시집이 시를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널리 읽히는 시집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한 말이 귀에 쟁쟁하다. 널리 읽힐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펴 보아도 위로가 될 그런 특장을 지녔다고 본다, 읽을 때마다 새로워서 맑디맑은 생기를 주는 그런 시집이 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