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수 7장 2-12절
설교제목 : 아간의 땅
신이 된 시장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감기에 걸려 약과 함께 한 주를 보냈습니다. 다행히도 심하게 앓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입동이 지나가기가 무섭게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감기와 코로나에 건강하시길 빕니다. 대학 수능시험을 앞둔 학생들에게도 그동안 수고의 땀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버드 신학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쳤던 하비 콕스Harvey cox는 《신이 된 시상The Market as God》에서 2013년 11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이라는 문서에서 영감을 받아 신격화된 신에 관심을 두며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종교가 아무리 서로 다르다 해도 ‘시장’의 종교가 모든 종교에서 가장 무서운 경쟁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시장’ 신학에서는 인간 생명의 가치가 얼마 일까? ‘시장’이 지배하는 가운데 모든 것이 판매되는데, 이제 예언자와 점쟁이는 투자 은행의 금융컨설턴트와 최고경영자라 할 수 있습니다. 시장이 인간의 사상과 개인과 사회의 트렌드와 미래까지 결정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시장신과 더불어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 봉착해 있습니다. 시장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중요해진 세상입니다. 그런데 하비 콕스는 말합니다. “시장이 직면한 문제는 무엇보다 중요한 내면적 차원을 창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시장신을 그리스 신 가운데 가장 힘이 세고 뛰어난 제우스에 비유했다. 하지만 그리스인의 상상 속에는 제우스보다 훨씬 강력하고 신성한 힘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모이라, 즉 운명이다.”[p331] 또한 시장은 약자와 고통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의무를 종교가 행했듯이 행해야 하고, 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 지위를 포기하고 그냥 시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시장 신을 신봉하지 않되, 이해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가치를 실현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편 15편에 시편기자는 노래합니다.
“주님, 누가 주님의 장막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혀를 놀려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 친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경멸하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맹세한 것은 해가 되더라도 깨뜨리지 않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높은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으며, 무죄한 사람을 해칠세라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불확실함이 가중되는 시장 한복판에서도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이유를 모르는 패전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낙공불락의 요새, 여리고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그 명성은 온 땅에 퍼졌습니다. 이스라엘 앞에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여리고에서 베델 동쪽 벳아웬 곁에 있는 아이성을 향합니다.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보냈고, 그 정탐꾼들은 돌아와서 자신만만하게 보고 합니다. “성 안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아서, 모든 백성이 다 올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보고 받은 대로 삼천명의 군사를 보내어 전투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전투의 결과는 패배였습니다. 아이성 사람들에게 패하여 도망치듯 쫓겨와 후퇴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백성들은 실망하고 낙담하였습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수아와 옷을 찢고 주님의 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로 엎드려 저녁까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왜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기어 멸망시키시려 합니까? 전쟁에 패하여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며, 이 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주변 가나안 부족들이 이 땅에서 우리를 없애려할텐데, 주님의 명성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느냐고 아룁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마치 이스라엘을 도와주지 않아서 패배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패배의 책임이 이스라엘에게 있음을 적시합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다. 나와 맺은 언약, 지키라고 명령한 그 언약을 그들이 어겼고, 전멸시켜서 나 주에게 바쳐야 할 물건을 도둑질하여 가져갔으며, 또한 거짓말을 하면서 그 물을 자기들의 재산을 만들었다(11).”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전리품을 개인적으로 취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희생제물로 바쳐야할 전리품에 대하 욕심의 결과 전투에서 패전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죄, 탐심으로 인하여 공동체 전체가 위기에 빠진 것입니다.
아간의 땅
전쟁에서 전멸시켜야할 물건을 없애기 전까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문제의 뿌리를 찾고자 지파별로 사람을 소집하여 제비뽑기를 하였습니다. 제비뽑기가 원시적인 수단이기는 하지만, 이 우연의 법칙을 통하여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습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사실대로 네가 무엇을 하였고, 숨겼는지 말하라고 추궁합니다. 아간은 순순히 자신이 행했던 일을 고백합니다. 전리품 가운데 시날에서 만든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세겔과 오십세겔이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이 나서 가져갔고, 그 물건들을 자신의 장막 땅속에 감추어두었다고 합니다.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를 거둔 아간이 이 많은 전리품을 보고 탐심이 생긴 것입니다. 이 아까운 물건들을 다 불태워야 한다니 견물생심이라고, 아까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엄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것인데, 인간이 스스로 승리한 것인냥 그 전리품을 챙기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힘을 사유하고, 스스로 과대해지는 위험성을 촉발됩니다. 전리품을 통한 경계는 철저하게 인간이 취해서는 안되는 한계를 설정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한계를 설정하지 않고, 마치 하나님의 것을 마치 자신의 것인냥 전유할 때 일어납니다. 이것은 정신의 법칙에도 유효합니다. 한계 그 이상의 리비도를 사용하거나 그것을 점유하려는 순간 엄청난 팽창이 일어납니다. 일종의 마나의 힘을 소유하는 순간, 무의식의 손아귀에 자신을 망가뜨리게 합니다. 한도를 넘는 팽창은 주변에 정서적 영향을 행사합니다. 결국 탐심은 자신 뿐 아니라 공동체까지 위태롭게 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아간이 살고 있는 땅은 우리의 내면임과 동시에 사회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장과 소비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신격화된 세상에서 자연스럽게 그 시장은 아간들의 땅이 되고 맙니다. 시장은 탐심을 가장 적절하게 분출하고 소비되는 곳입니다. 자신의 탐심을 채우기 위해 공동체 전체의 위기는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탐심으로 콘크리트 철근을 속여 부실한 아파트를 만들면 많은 이들의 생명은 위협받습니다. 재개발 이익을 위한 비자금이 정치인이나 조장하는 세력들에게로 가면 고스란히 피해는 이후에 거주할 사람들입니다. 탐심으로 재화를 소비하게 되면 결국 자연은 피눈물을 흐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던 하비 콕스는 말합니다.
“어떤 이들을 움직이는 동기는 단순한 탐욕이다. 그들은 탐욕의 전염병에 감염되었고 탐욕은 어떤 치료법도 알려지지 않은 질병이다. 아무리 많은 부도 결코 충분하지 않다.”[위의 책, p373]
이미 현대문명 세계는 아간의 땅에서 전염병처럼 감염된 탐심을 다루며 살아야 하는 문제 앞에 서 있습니다. 아간의 땅에서 비록 살아가고 있지만, 나의 한계를 설정하고, 신격화된 시장에서도 성찰된 소유와 소비를 통하여 주신 것으로 오히려 나누며 섬길 수 있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나안의 싸움
아간의 이런 죄는 아주 강력하게 처벌받습니다. 아간의 모든 전리품을 빼앗고 그를 돌로 쳐서 죽이고 모든 재산과 가족까지도 불살라 죽입니다. 너무 잔인한 처벌입니다. 오늘날 윤리규범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원시 사회에서 사회를 정화하기 위한 강력한 처방이었습니다. 어쩌면 자정능력을 잃은 오늘날 우리의 정치와 종교보다 나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습방지법을 만들고 수년이 지난 세습방지법에 다시 면죄부를 주어 다시 그 법안을 없애려한다는 움직임은 권력과 돈 앞에서 정화장치를 잃어버린 종교의 민낯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불살라지고 그 위에 큰 돌무더기를 쌓고 그곳 이름을 ‘아골 골짜기’라고 명명합니다. 고통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에 입장한 후 뼈아픈 고통과 패배의 아픔을 기억하는 장소가 바로 아골 골짜기입니다. 이 처절한 실패와 아픔의 장소가 바로 새로운 가나안의 출발지점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결핍과의 싸움이라면, 이제 가나안에서의 싸움은 풍요, 탐심과의 싸움입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서에서 탐심은 우상숭배라고까지 합니다. 탐심은 곧 자본의 신에 대한 사로잡힘이기에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사회가 탐심으로 전염되면 그 사회는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가 탐심으로 본질을 잃게 되면 종교는 타락하고 결국 쇠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탐심으로 전염되면, 우리의 영혼은 자아 거대증에 사로잡혀 강박적이고 폭력적이고 공격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탐심과의 싸움 한복판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아골 골짜기의 돌무더기를 다시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한도 초과하지 않고, 설정된 한계 안에서 겸손히 누군가와 손을 잡고, 섬기며 사랑할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