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는 여습(汝習), 호는 계서(溪西), 본관은 창녕으로 부용당 안의(安義)의 아들이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문하에서 배우고 1616년에 생원을 거쳐 인조5년(1627)에 문과에 급제 주서(注書)를 시작으로 응교, 지제교, 통정대부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원종(인조의 생부(生父))의 추승(追崇)을 논하고 인성군 공(珙)의 아들이 모역을 범했을 때 용서하기를 주청하여 죽음을 면케 했다.
영호남어사(嶺湖南御使)로 네 번이나 암행하여 권선징악의 본을 모두 시행하였고 헌납으로 있을 때는 윤방, 심기원, 이민구 등의 불충함을 탄핵하였고 각 고을 수령으로 재직 시에는 청렴 정직하여 백성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이 빈번히 만나기를 청했으나 거절하고 김자점(金自點)이 여러 번 천거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숙종 임금께서 두차례 쌀과 콩을 내렸다. 부제학(副提學)에 증직되고 오천(梧川)서원에 배향 되었으며 저서에 계서집(溪西集)이 있다.
[스토리텔링 인물열전 .13] 이상국의 춘향전 이몽룡의 실존인물 - 봉화 성이성 스토리기사내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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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7 08:14:10
젊은날 이별했던 춘향은 자결하고 암행어사 되어 쓸쓸히 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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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번지에 위치한 계서당.
성이성이 자신이 태어난 자리에 건물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1984년 1월 10일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171호로 지정됐다.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한 곳에 이르니 호남 12읍 수령들이 큰 잔치를 베풀어 술판이 낭자하고 기생의 노래가 한창이었다. 어사가 걸인의 행색으로 들어가 종이와 붓을 달라고 했다. 좌중의 한 사람이 떠들썩하게 웃으며 말했다. “길손이 능히 시를 지을 줄 안다면 이 자리에 종일 있으면서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속히 돌아감만 못하리.” 어사는 대답 대신 다음과 같은 시를 써주었다.
金樽美酒千人血 (금준미주천인혈)
황금술잔의 맛있는 술은 천 사람의 피요,
玉盤佳肴萬性膏 (옥반가효만성고)
옥쟁반의 먹음직한 안주는 만 사람의 기름이니
燭淚落時民淚落 (촉루락시민루락)
촛불눈물 떨어질 때 백성눈물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 (가성고처원성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도 높구나
이어 서리가 어사 출도를 외치고 당일 파출 수령 여섯 명과 그 외 여섯이 서계(임무 보고서)를 올렸다. 모두 세도가의 자제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전’의 한 대목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의 4세손인 성섭이 쓴 ‘교와문고’에 나온다. 이 책에서 성섭은 저 어사가 바로 성이성이라고 말하면서, 춘향전에도 등장하는 저 시(詩) 또한 그의 작품이라고 밝혀놓았다.
3권으로 된 ‘교와문고’는 대구의 모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춘향전’에 나오는 춘향의 연인인 이몽룡의 실제인물은 성이성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스토리 전부가 그를 모델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 수 있지만, 사연의 골격은 성이성의 러브스토리로 볼 만한 상당한 근거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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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서당 내 사랑채 부분은 후대에 증개축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후방의 숲이 우거진 동산을 배경으로 건물을 남향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우선 이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자. 그는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현재 계서당이 있는 자리)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여습(汝習)이고 호는 계서(溪西)이다. 아버지는 창녕성씨로 승정원 승지와 군수를 지낸 성안의(成安義)이고, 어머니는 예안김씨로 호조참판에 추증된 김계선의 딸이다.
1607년 13세 소년 성이성이 쓴 글을 우연히 대구부사로 와 있던 정경세(鄭經世)가 보게 되었다. 정경세는 상주사람으로 ‘존애원(存愛院)’이라는 사설병원을 차려 백성들을 무료진료하기도 했던 언관(言官) 출신의 지식인인데, 그가 성이성의 시문(詩文)을 살펴보고는 크게 될 인물이라 평하였다. 조선시대 ‘기자’라 할 수 있는 그의 눈에, 타협하지 않는 성이성의 강골 기질이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1616년(광해군 8) 그는 사마양시에 합격했는데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다시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때의 난세에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인조 5)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4년(인조 12) 사간원 정언에 임명된 이후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부교리·지평·수찬·사간 등 주로 언관직을 역임하였다.
언론인으로 있으면서 바른 소리를 많이 하여 주위의 견제를 받아 관직은 높이 오르지 못하였으나,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637년 호서(湖西) 지방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왔다. 그해 성이성은 사간원 헌납이 되어 공신이며 서인의 권신(權臣)인 윤방(尹昉)·김류(金)·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을 탄핵하여 왕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며 오국불충(誤國不忠, 나라를 오도하고 임금에게 충성스럽지 못함)의 죄를 논하기도 했다.
1639년(인조 17) 호남(湖南)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5년간 호남 지역을 순찰하고 1644년(인조 22) 되돌아왔다. 그 뒤 1647년(인조 25) 다시 호남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호남에서 암행을 하고 다니다가 1647년 11월25일 순천에서 실수로 신분을 드러내고 이후에는 한양으로 돌아온다.
외직으로는 진주부사·강계부사 등 네 고을을 다스렸는데, 진주부사로 재직할 때는 암행어사 민정중(閔鼎重)이 그의 선치(善治)를 보고하여 왕에게서 표리(表裏, 옷감의 겉감과 안감)를 받았고(진주에는 그의 선정비가 남아있다), 강계부사 땐 여진족의 약탈과 흉년으로 신음하는 부민들에게 인삼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백성들은 그를 ‘활불(活佛)’이라며 칭송하였다.
그의 벼슬살이를 들여다보면 원칙에 철저하여 타협하지 않았던 소신파 정치인의 모습과, 백성에게는 그지 없이 따뜻하고 세심한 배려를 하는 리더의 모습이 겹쳐진다. 참 멋진 삶을 살았다. 지위고하는 굳이 따질 필요도 없이, 정경세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 과거 급제 후 인조는 그에게 직접 어사화를 하사했다. 과거에 급제한다 하여 모두 어사화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성이성의 후손들은 이 어사화를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바로 춘향의 연인이었다는 정황이 여러 곳에서 잡힌다. 우선 춘향을 만나게 되는 광한루 미팅을 들여다보자.
성이성의 아버지는 1606년(선조40)에서 1611년까지 남원부사를 지냈다. 광한루에는 이곳을 방문한 유력 인사들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나중에 이것들을 한군데로 모아두었다고 한다. 거기에 성안의의 비석도 있었다. 이때 성이성도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와서 살았다. 13세에 와서 17세에 떠났다. 지학(志學)의 나이로 과거를 준비하고 있던 그는 단옷날 화창한 기운을 못이겨 광한루로 나간다. 이 누각은 조선초 방촌 황희가 이곳에 유배를 왔을 때 조촐하게 지었던 광통루를 정인지가 화려하게 개축하면서 광한루로 바꿨다.
연지(蓮池) 앞 능수버들에 큰 그네가 매어져 있었는데, 성이성은 그쪽을 보지 않는다 하면서도 자꾸 눈길이 갔다. 제비같이 하늘로 차오르는 여인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는 궁금증이 일어 함께 갔던 방자(방자는 이름이 아니라, 시종(侍從)을 가리키는 말이다)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방자가 줄레줄레 그쪽으로 달려가서 뭔가 물어보고는 돌아왔다.
“아씨가 누구라 하더냐?”
“광한루 곁에 사는 기생 여진의 여식이라 하옵니다.”
“여진이라면 퇴기가 아니냐?”
“그 여인에게 딸이 하나 있었던 모양이오.”
“언제 한번 얼굴을 보며 얘기라도 할 수 있게 말을 넣었더냐?”
“내일 저녁에 광한루 앞에 나오면 볼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만…”
“합니다만은 무엇이냐?”
“부사 나으리께서 야반금족(夜半禁足)을 명하신지라…”
“허어, 잠깐이면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두 사람은 춘향전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코스를 밟으며 사랑에 푹 빠진다. 그리고 성이성이 남원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장면 또한 그가 춘향전의 모델임을 은근히 풍긴다. 암행어사임이 탄로난 그때 그는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원에 들렀다. 1647년 53세때의 기록이다.
“십이월 초하루 아침 어스름길에 길을 나섰는데 십리가 채 안되어 남원땅이었다. 성현에서 유숙하고 눈을 부릅뜨고 (원천부내로) 들어갔다. 오후에는 눈바람이 크게 일어 지척이 분간되지 않았지만 마침내 광한루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늙은 기녀인 여진(女眞)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소동과 서리들과 더불어 광한루에 나와 앉았다. 흰 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었다. 거듭하여 소년시절 일을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춘향과의 추억이 없었다 하더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나,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이 마음에 닿는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에 왜 구태여 광한루로 갔을까. 안타깝게 헤어진 여인이 없었다면 말이다.
한편 남원지방에는 춘향이라는 여인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판소리 ‘춘향가’나 소설 ‘춘향전’에 나오는 이야기와는 조금 다르다. 떠나버린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품고 남원부사의 수청을 거절하던 여인 춘향은 결국 자결을 하고 만다. 이후 이 지방에 재앙이 잦아지자 구천을 떠도는 춘향의 한이 맺혀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은 사람들이 광한루에서 살풀이굿을 하기 시작한다. 굿이 끝나면 춘향이 눈물이라도 흘리는 듯 비가 쏟아지고, 한 동안 천재지변이 사라지곤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성이성이 17세에 떠나버린 뒤에 일어난 일일 가능성이 높다. 전설에 나오는 나쁜 남원부사는 춘향전에서는 변학도가 되었으리라. 소설에서야 사람들의 희망사항을 받아들여 남녀가 해후하여 해피엔딩하는 것으로 해놓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서럽게 이승을 떠나버린 여인이었기에, 성이성은 그날 광한루에서 늙은 기생을 만나 옛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폭설이 쏟아지는 연지를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을 쏟았으리라. 성이성은 암행어사를 3번이나 지냈지만, 남원으로 출두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니 현실의 남녀는 서로 빗나간 채 삶과 죽음으로 갈라선 셈이다.
한양으로 아버지를 따라 떠났던 그는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곧 고향으로 내려갔고 19세가 되는 1613년에 이웃 닭실마을의 부유한 집안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해에 혼수로 받은 유산으로 계서당을 짓는다. 그때 그곳에 서있던 큰 소나무 한 그루는 5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서 있다. 그 소나무에 의지하여 멀리 서남쪽의 남원을 쳐다보며, 가끔 어린 시절 헤어진 첫사랑 춘향에 대한 생각에 잠겼을까.
1664년(현종 15)에 70세로 눈을 감은 뒤 그는 부제학에 제수되고 청백리(淸白吏)로 녹천되었다. 깨끗한 생애에 깃든 애틋한 사랑은 소설보다 더 가슴을 아리게 한다.
#Story Memo
춘향전의 이몽룡을 단순히 성이성과 동일시하는 것은 어리석다. 민간설화를 비롯한 떠도는 이야기들이 그 속에 배어들어 있다고 보는 게 옳다. 성이성 암행어사는, 어사를 지낸 노진, 조식, 이시발, 박문수와 함께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스타급 어사였다. 미션을 받은 암행어사가 임지에 도달할 때까지의 생존율은 30% 미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실제 필요한 인원보다 많은 숫자의 암행어사를 선발하여 보냈고 또한 그 연령대도 20대 초반으로 체력이 뛰어난 사람들 위주로 선발하였다. 암행어사를 세 번이나 지냈던 성이성의 풍모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당시 전라도 지역에는 귀신이 자주 출몰한다는 곳이 있었다. 상인이나 과거시험을 보러가던 선비들이 여러번 변을 당했는데, 성이성이 귀신의 억울함을 달래주고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한다. 또 춘향전은 양반가 자제의 스캔들이라 하여 조정에서 판소리를 금하였으며, 사람들은 성몽룡 대신 이몽룡으로 바꿨다는 얘기도 있다.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있는 계서당(溪西堂)은 1613년 성이성이 짓고 기거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쓰던 곳이다.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71호로 지정되었다.
<스토리텔링 전문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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