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기고문으로 페북에서 화제가 된(주로 비판을 많이 받은) 김훈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가 나 또한 비판(비난)을 많이 받았다. 내가 주장한 바는, 자기 글의 강력한 예시로 조국을 문제 삼은 김훈을 비판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었다. 비판하든 욕을 하든 바로 그 대목만 하자는 얘기였다. 내가 주제넘게도, 2022년 이후 처음으로 SNS에 글을 올린 이유는 김훈의 소설과 인생 자체가 난도질을 당했기 때문이다. 난도질 당할 만하다면야, 굳이 페이스북 글쓰기를 하지 않는 내가 나설 이유가 없다. 난도질의 근거가 된 것들이 오해 받기 딱 좋은 내용이었고, 그 내용을 비교적 잘 기억하는 나라도 그것을 바로잡고 싶었다. 내가 글을 쓴다고 대세에 영향을 미칠 것도 아니지만 온라인 한 켠에 공개된 몇줄 기록으로나마 남기고 싶었다.
나는 김훈과 지금 말고 예전 시사저널에서 10년 가까이 한솥밥을 먹었다(예전 시사저널 명맥은 시사IN으로 이어졌다). 한국일보에서 문학담당으로 유명한 기자였으나, 우리 회사에서는 주로 사회부 데스크와 국장으로 일을 했었다. 듣자하니, 오히려 사회부 기자를 더 잘 했었다고 했다. 줄곧 문화부에만 있던 나로서는 김훈과 함께 일한 시간이 없었다. 운전을 하지 않었던 그는 내가 편했는지 어쨌는지 내 자동차를 많이 이용했다. 나는 그를 태우고 북한산에도 가고 계룡산에도 가고, 청와대에도 가고 인사동에도 가고 그랬다. 사실 나는 그를 조금 어려워했다. 그는 늘 문화부 기사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기사를 리뷰하는 자리에서는 문화예술 기사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는 투였다. 지면이 부족해 기사를 뺄 일이 생기면 그는 늘 문화면에서 빼자고 했다. "이건 세상이 다 아는 거고, 중요하지도 않다"고 그가 단정할 때, 그 오만함에 할 말을 잊을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그가 문화면을 지켜본다는 느낌을 가졌다. 지나가는 듯 툭툭 한 마디씩 던지는 것이 보약이 되고 기사가 되었다. 그에게 배운 것이라면 '작품성'이라고 하지 말고 '예술성'이라는 표현을 쓰라, 문화면 기사도 기사로서의 토대부터 단단하게 다져야 한다, 말랑말랑이 아니라 건조하게 쓰라 정도였다.
김훈은 사회부장이고 편집국장 시절이고 간에 사표를 자꾸 냈다. 내 기억에만 해도 세번 이상이었다. 편집국 수뇌부가 경영진과 붙어먹는 꼴을 못 봐주겠다, 후배들 보기 부끄럽다, 이런 내용을 사표에 적었다. 그런 모습 때문에 젊은 기자들 중에 그를 좋아하는 이들이 당연히 많았다. 심지어 그가 사표를 내고 집에 들어앉았을 때, 술을 먹다가 김훈 보고 싶다며 술김에 그의 불광동 집에 밤늦게 찾아가서 자고 온 적도 있었다. 나를 포함해 4명이 그랬다. 여러모로 김훈은 내 기억에 길지 않은 기간에 숱한 이야기거리를 남겼다.
그 가운데, 최근 김훈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사안인 전두환찬양기사 건도 있다. 사회부 기자가 기획기사 안건으로 5공시절 전두환 부역 언론에 대한 것을 올렸다.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김훈은 해당 기자를 불러 "한국일보에서 1980년에 기사를 쓴 사람은 나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경위를 설명하고 사죄를 했다. 기자한테 내부적으로 한 사죄가 아니라, 기사에 그렇게 나가도록 했다는 얘기다. 그런 태도가 나 같은 사람의 눈에는 신선해 보였다. 1980년 안기부 직원이 편집국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상황에서, 편집국장을 비롯한 선배들은 그냥 괴롭다며 술 마시러 나가고, 남아 있는 기자들 중에는 5년차인 김훈이 최고참. 김훈도 나 몰라라 하고 후배들에게 떠넘기고 나가버리면 후배 중의 누군가에게 그게 강요될 건 뻔한 일. 혹자는 붓을 꺾으면 되지 않느냐 하고 쉽게 말하지만 사표를 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래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니 사죄한다고 했다.
김훈이 전두환찬양기사를 쓴 대표 기자로 지목되어 비난을 받고 있는데, 찬양 기사 작성자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이렇게 그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다.
지금까지도 다른 언론사의 어느 누구도 김훈 정도로 입을 열지 않았고, 우리 기자가 찾아가면 도망다니기에 바빴고, 그래서 김훈만 기록으로 남아 욕을 먹는다. 5공 보도지침을 폭로해 징역까지 살았던 김주언 기자를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던 분위기가 살아 있던 즈음, 나 같은 젊은 기자들이 김훈을 5공 부역 기자라며 물러가라고 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사연 때문이었다. 선명성을 추구하고 과격하기로는 1990년대의 30대 젊은 기자들이, 2023년 페부커들 못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던 기자들이 김훈더러 함께 일 못하겠다, 물러가라 마라 하지는 않았다. 기사를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본인이 먼저 고백하고, 경위를 이야기하고, 잘못을 했다고 사죄를 하는데, 우리가 당신의 죄를 묻는다 어쩐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80년 전두환찬양기사를 쓰고도 자기 입으로 그런 더러운 일을 했다고 이야기하는 기자는 오로지 김훈 한 명이었다. 그래서 김훈만 기록에 남아, 마치 대표선수인 것처럼 툭하면 공격거리가 되고 있다. 그것이 알려진 전후사정은 쏙 빼고 딱 하나 "썼다"는 사실 하나만 남아 그를 공격하는 비수로 남았다.
그런 건 또 있다. 조선일보 문장이 좋다 어쩐다 하는 거. 이 또한 이야기가 길다. 힘이 빠져서 쓰는 건 다음에.
#김훈 #전두환찬양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