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28일 화요일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마태오 8,23-27)
"Lord, save us! We are perishing!"
"Why are you terrified, O you of little faith?"
말씀의 초대
인간의 온갖 타락과 교만이 최고에 이른 소돔과 고모라에 하느님의 징벌이 닥친다. 그러나 젊은이로 나타난 주님의 천사들을 매우 잘 대접한 롯과 그 가족은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재앙을 모면할 수 있었다(제1독서). 호수에 큰 풍랑이 일고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자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신다. 풍랑에 시달리는 배는 교회를 상징하기도 한다. 초대 교회 공동체가 당할 온갖 위협과 어려움을 예고하시면서 주님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지도록 제자들을 단련시키시는 장면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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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나라 첫 번째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님께서 부제 때 잠시 귀국했다가, 조선에 페레올 주교님을 모셔 오시려고 중국 상하이로 다시 떠나실 때입니다. 신자들과 함께 작은 배 한 척을 사서 항해하다가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납니다. 일행은 배가 뒤집힐 듯 흔들리고 방향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험한 바다 한가운데서 밤낮으로 사흘을 시달립니다. 나중에는 방향키까지 부러져 돛대를 키 대신 사용했지만 이마저 부러지고 맙니다. 그 절망과 공포의 순간에 김대건 신부님께서 성모 마리아의 상본을 내보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겁내지 마십시오. 성모 마리아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이 말씀에 그들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풍랑에 시달리던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운명을 하느님과 성모님께 맡겼습니다. 다음 날부터 바람이 잦아들고 비가 멈추었습니다. 그날 이후 김대건 신부님 일행은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아무 탈 없이 상하이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지요.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0-11). 하느님께서 김대건 신부님을 부르셨는데 당신의 사명을 이루시기 전에 그냥 바다가 삼켜 버리게 하실 리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공중에서 내린 비와 눈도 그 목적이 있듯, 우리도 주님께서 쓰실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삶에서 만난 풍랑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풍랑보다 더 큰 문제는 믿음이 없는 우리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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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풍랑이 두려웠습니다. 호수에서 고기잡이하던 그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사 풍랑이 아님을 직감합니다. ‘저 정도라면 반드시 피해야 한다.’ 그들은 초조했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누군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예수님을 흔듭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진심이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가라앉는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생각입니다. 바람을 다스리는 분과 함께 있음을 잊은 것입니다. 기적의 주님을 모셨으면서도 생각해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모르기에’ 두려워합니다. ‘모르기에’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매일 듣는 ‘어두운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매일 만나는 ‘불안한 소식’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 역시 초조해하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께서도 매일 아침 ‘모든 정보’를 듣고 계십니다.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깨닫는다면 믿음은 행복으로 바뀝니다.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1975년에 작고한 시인 김현승의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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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배를 할퀴던 파도가 금세 잠잠해집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람 역시 조용해집니다. 놀란 제자들은 스승님의 권능 앞에서 할 말을 잊습니다. ‘주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주무시고 계십니까? 빨리 일어나십시오.’ 조금 전의 호들갑이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제자들은 삶과 죽음의 주인 앞에서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을 때늦게 후회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매일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떠밀리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 역시 죽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은 아닌지요? 유익하고 편안한 소식에는 안도감을 느낍니다. 감사드리기도 합니다. 기도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좌우하신다.’는 신앙의 기본 역시 인정합니다. 그러나 역경과 시련을 만나면 기도하는 마음부터 잃어버립니다. 때로는 믿음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이게 뭐야?’ 하는 유혹입니다. 그러고는 세상 판단에 편승하려 듭니다. 물질적 가치관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셨던 분이십니다. 진정한 믿음으로 다가가면 어떠한 바람도 잠재워 주실 분이십니다. 건강한 신앙인은 시련 속에서도 감사드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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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는 가운데에서도 주무시는 주님의 태평스러움은 가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믿음이 약한 것을 탓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지난날의 상처를 곱씹거나, 닥치지도 않을 미래의 일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 98%나 된다고 합니다. 정작 우리가 직면해야 할 걱정은 2%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내일 걱정을 내일에 맡기고 우리의 모든 걱정을 하느님께 맡긴다면, 우리도 주님처럼 풍랑 속에서도 평화롭게 잠을 잘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날을 주님과 함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양 두 마리가 있었지요. 그래서 두 마리의 양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양들의 부탁이 너무나도 간절했기에 하느님은 그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 산길을 쭉 따라 가다 보면 맨 꼭대기에 사람이 되는 약을 숨겨 놓았네. 어서 가서 그것을 마시게.”
두 마리의 양은 얼른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지요. 두 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가 씩씩 거리면서 하느님께 달려와 항의를 합니다.
“하느님, 왜 좁은 길에 돌멩이 하나를 두셨습니까? 그 장애물 때문에 도저히 앞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전히 양입니다.”
하느님은 또 다른 한 마리의 양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양은 이미 신비의 약을 먹어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양은 화가 나서 물었지요.
“너는 어떻게 그 커다란 걸림돌을 넘어갔니?”
이 말에 이미 사람이 된 양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답니다.
“걸림돌이라니? 그곳에는 디딤돌밖에 없었는데?”
한 마리 양에게는 목적지에 가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었지만, 다른 양에게는 목적지에 갈 수 있게 하는 디딤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우리의 일생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한 사건에 대해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 사건을 자신을 성장하는 또 하나의 기회로써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할까요? 당연히 좌절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아닌, 어렵고 힘든 일을 하나의 기회로써 받아들여서 극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겠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난리법석을 치룹니다. 사실 제자들의 대부분은 어부 출신이었지요. 따라서 스스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두려움에 떨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이 정도 크기의 풍랑이면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상태에서도 그들은 예수님께 믿음을 구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과 함께 라면 안전하다는 믿음을 갖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깨우고 예수님께 구해달라는 청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렇게 부족한 믿음을 구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함께 계심 자체만으로도 자신감을 갖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의 고통과 시련이 있을 때마다 좌절하고 포기하는 우리였습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어렵고 힘들다고 겁을 내지 마십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또 좌절도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고통과 시련을 모두 잠재울 수 있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의 문제 해결 비법은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말하는 것은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듣는 것에만 통달하면 된다. (타카하시 류우타)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양승국신부-
<하느님은 나를 지키시는 분>
제대로 된 풍랑을 한번 만나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기치 않았던 파도에 휩쓸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린 시절부터 워낙 물을 좋아했던 저인지라, 또 짧게나마 경험했던 직장생활도 바다가 지척인 곳에서 했기에 저는 자주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돌변하는 바다, 정말 무섭습니다. 성난 바다, 정말 감당하기 힘듭니다. 순식간에 닥쳐온 돌발 상황 앞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친구 아버지가 운행하시던 작은 어선을 타고 큰 바다로 나갔다가 갑작스럽게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주기적으로 큰 너울파도가 들이닥쳤는데, 파도가 얼마나 높던지 파도의 정점에 머무르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때 마다, 철렁 가슴이 내려앉던 그 섬뜩함이 아직도 기억에 선합니다.
항구가 코앞인 데도 워낙 파도가 높다보니 통제가 안 되더군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제 머릿속에서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생명보험이라도 하나 들어놓는 것인데, 내 통장이랑 도장, 너무 깊숙이 숨겨놔서 아무도 못 찾을 텐데 어떡하나? 죽을 고생 다하며 승진시험 잘 준비했었는데, 이러다 시험도 못 보는 것은 아닌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 역시 갑작스럽게 맞이한 큰 풍랑 앞에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생명의 위협 앞에 제자들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간 받아온 특별 제자교육도, 예수님을 향한 신뢰도, 위신도,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주무시던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외칩니다.
“주님, 구해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느님,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 참 삶의 길잡이이신 스승님과 한배에 타고 있었던 제자들이었지만, 살짝 들이 닥친 위기 상황 앞에 갈팡질팡하며 심하게 흔들립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등 뒤에서, 내 오른편에서, 내 왼편에서 나를 꽉 붙잡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의 손길 안에 푹 잠겨있으면서도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며 부르짖습니다. 하느님의 충만한 위로와 사랑을 시시각각으로 전달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목말라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인생의 풍랑 앞에 설 때 마다, 하느님의 침묵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들 때 마다, 예수님께서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여겨질 때 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신다는 마음이 들 때 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에 항상 동행하는 분이십니다. 잠시라도 우리와 떨어지면 불안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보시며 우리를 드넓고 푸른 초원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이다.
믿음의 길
- 정명숙 수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풍랑이 이는 바람과 호수를 잠잠케 하시자 두려움과 경탄에 찬 외침을 품어냅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마저 그분과 함께 동고동락하지만 여전히 주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계속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배워갑니다. 그들 역시 예수님께 대한 체험이 매번 새롭습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 ‘신앙의 길’은 살면서 배웁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그 사람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한꺼번에 안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일상의 삶에서 찾고 찾아 만난 주님 앞에선 언제나 놀라움과 기쁨에 찬 경탄이 터집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 이 경탄이야말로 우리를 참된 기쁨의 근원에로 이끕니다.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기쁨의 근원이시고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게 합니다. 이 믿음의 길은 “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가 데리고 가는 데로 가듯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에 내어맡기는”(K. 라너) 것입니다.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시편 23,4).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 김현정-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거센 풍랑 속에서 제자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두려움에 휩싸인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과 다르지 않다. 얼마 전 본당 주일미사 중 세례식이 있었다. 주님 안에서 평화를 꿈꾸며 주님께 의탁한 신자분들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본당 신부님이 강론 중에 하신 말씀도 마음에 남았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고난을 다 없애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주님이 약속하시는 평화는 여러분이 세상의 고난 속에 있어도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는 은혜를 말합니다.”
어려서부터 할머니는 “시험 준비하고 있을 때, 일이 잘 안 풀릴 때, 가족이 아플 때, 그럴 때마다 성모님께 기도드리면 다 들어주신다.” 하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씀하셨다. 지금도 전화 드릴 때마다 너희 잘되라고 당신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지 아느냐고 하신다. 어린 마음에 난 그 말이 참 싫었다. 너무나 이기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할머니에게 ‘그런 이기적인 기도는 좀 그만 하시라.’ 고 버릇없이 굴기까지 했다. 내가 아쉬운 게 있으니 그 아쉬움을 해결해 달라고 성모님께 떼쓰는 것처럼 느껴져서 부끄러웠다. 나보다 낮은 곳에서 나보다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에게 부끄러운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을 듣고 묵상하면서 꼭 그렇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기도는 시험에서 1등 하게 해 달라고, 아픈 곳이 싹 낫게 해 달라며 주님께 매달리고, 안 들어주시면 배신감 느끼고 원망하게 되는 그런 기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의 고난이 나를, 가족을, 이웃을 흔들어 힘들게 해도 주님 은혜로 내 마음을 굳게 붙잡아 달라고, 어떤 고난에서도 티끌만한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 잃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였을것이다. 그럼 이제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도해도 되겠다. 주님, 평화를 주세요. 아멘.
인생은 미완성
-전삼용신부-
한 중년 남자가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네는 어쩌다가 지금까지 결혼을 못 했나?”
“난 완벽한 여자를 찾으려 했지. 완벽한 여자를 찾아서 온 세상을 헤매 다녔네.”
“그렇다면 완벽한 여자를 못 만난게군.”
“한 명 만나기는 했었지... 근데 그 여자는 완벽한 남자를 찾고 있더군.”
“ ... ”
만약 완벽한 사람을 찾고 있다면 그 사람은 죽기까지 결혼은 못 할 것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례가 신앙의 완성이 아니라 완전한 믿음을 향한 출발인 것처럼, 결혼은 완전히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서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 둘이 만나서 서로 완전으로 향하는 출발점입니다.
나이가 마흔이 다 되어가면서도 성소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한 분을 만났습니다. 이야기 하던 중, 그 분은 요즘 경제가 어려워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려고 하는데 자신은 그런 사람은 되기 싫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완전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전에 수원교구 교구장님이었던 김남수 주교님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분이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은 어렸을 때 자신의 집에 오신 신부님께 부모님이 흰 쌀밥과 계란을 대접해 드리는 것을 보고서였다고 하십니다. 그 분은 단지 계란과 쌀밥이 먹고 싶어서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셨던 것인데 결국 주교님까지 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 성소의 계기는 온전하지 못하였지만 살면서 그 동기가 정화되었고 진정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목자가 되셨습니다. 처음부터 완전하게 출발하려고 해서는 출발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유다도 비록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는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뽑아주셨으니 성소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을 뽑지 않습니다. 완전하기를 원하는 사람을 뽑으시고 또 뽑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성소를 완성시켜가는 것입니다. 적어도 성소의 길로 들어가 나의 영혼을 잃게 되지만 않는다면 도전해 볼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부탁에 의해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믿음을 한 번 보십시오. 그들은 서로서로 이렇게 묻습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바람과 호수가 복종하는 이유는 그 분이 바람과 호수를 만드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직접적으로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 40년가량이 되어서도 여전히 ‘하느님의 아들’로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 70년가량이 흘러서야 비로소 요한복음에 의해 예수님은 하느님이셨다는 직접적인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하느님임을, 즉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까지도 사실은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주 부족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과 호수가 예수님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신기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수많은 기적과 말씀을 듣고도 이렇게 불완전했는데 우리들은 어째서 완전한 응답을 먼저 바라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본성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음에도 그 분을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처음부터 완전한 믿음과 확신을 지닐 수 없습니다. 인생도 미완성이고 신앙도 미완성이고 그 분을 아는 것도 미완성이고 성소도 언제나 미완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리도 우리 각자의 예수님,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온전한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는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나올 때 자신들을 이끌어 내신 하느님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하느님이 곧, 금송아지였습니다. 당시 소는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니 가장 힘이 세다고 생각하는 송아지를 만들고 하느님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도 우리 안에 하느님을 그리고 살지만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이란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하느님과 최대한 근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세례나 견진 교리 때 배운 하느님의 모습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배워나가고 정화해 나가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도정(道程)에 있는 것이지 누구도 완전에 도달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양승국신부-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병자방문을 다니다보면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다가온 병고란 현실을 도저히 수용하지 못합니다. "불평불만형", "하느님도 무심하시지형",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형"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이토록 비참해지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라고 속상해합니다.
자신에게 벌어진 억울한 상황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소연합니다. "말로만 사랑의 하느님이지, 정말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하면서 현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시간이 경과하면서 조금씩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현실을 인정하는 단계를 밟아나가기도 하지만, 어떤 분들은 끝까지 상황을 수용하지 못하고, 끝까지 억울해하고, 끝까지 탄식과 절망 속에서 분노의 나날을 보냅니다.
그런 마음으로 투병생활에 임하다보면 기(氣)도 잘 통하지 않은데다 소화능력은 물론 면역력도 떨어집니다. 자연스럽게 약발도 받지 않게 되고 병세는 점점 위중하게되지요.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병고를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합니다. "이왕 벌어진 일 어쩌겠어?", "지금부터가 중요하겠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하느님께서 치유시켜 주실거야", "설사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지금까지 살만큼 살았잖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을 숱하게 받았으니, 그분께서 주시는 고통도 기쁘게 받아들여야지!"
이런 낙관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으로 투병생활에 임하다보니 그 아무리 위중한 병이라 할지라도 의외로 빨리, 그리고 쉽게 회복됩니다. 때로 이런 사람들에게서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지요.
죽음이 임박한 마지막 순간조차도 후학들에게 온몸을 바쳐 마지막 큰 가르침을 안겨주고 떠나가신 스승이 한 분 계십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십니다.
그분은 사람이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온 몸으로 보여주신 분입니다.
후학들이 그분이 입원하고 있는 병상을 찾아갔을 때, 초췌한 몸으로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촬영실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사를 드리자 그분은 손을 꽉 잡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괜한 짓들을 하는구먼! 암도 내 몸인데 잘 모시고 가야지."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작은 실패나 고통 앞에서 너무도 쉽게 하느님을 원망했었고,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해왔기에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작은 실패나 병고 여부에 따라 계시다가 사라지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어야할 하느님은 우리 한 개인의 병고나 소멸에 상관없이 태초부터 존재하시는 영원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사소한 일상사조차도 좌지우지하시는 작은 하느님이 아니라 온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이토록 크고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억해주시고, 우리를 그토록 애지중지 여기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니 결국 우리가 취할 태도는 한가지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입니다. 건강과 성공은 물론 실패와 좌절, 병고와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 드리는 일,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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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들에게 여름은 그렇게 좋은 계절이 아닙니다. 무더운 날씨에 긴 수단은 정말로 커다란 짐이 아닐 수 없거든요. 물론 여름 수단이라고 얇은 수단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수단이 반팔도 아니고 또한 짧은 치마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보다 더운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하루 중에 수단을 입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더위로 인해 생기는 땀으로 여름 수단은 금세 더러워지고 땀 냄새도 배이게 됩니다. 그래서 자주 세탁을 해야 하는데, 저는 그 세탁을 자주 하지 않았지요. 왜 그랬을까요? 제가 좀 지저분해서? 물론 지저분한 것이 맞기는 하지만, 옷을 갈아입지 않을 정도로 지저분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것. 여름 수단이 딱 한 벌 뿐이라서 그렇습니다. 세탁을 맞기면 세탁되는 동안은 입을 수단이 없기 때문에, 최대한 아껴서 그리고 깨끗하게 입으려고 노력하지요.
사실 작년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맞추러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름에 맞추면 가을이 되어서나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름 다 지나서 여름 수단이 나오면 뭐합니까? 그래서 맞추지 않았습니다. 대신 올 봄에 여름 수단을 새롭게 맞추겠다는 결심을 한 채…….
그러나 이것저것 신경 쓰면서 살다보니 또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한 벌 뿐인 수단을 아껴서 깨끗하게 입으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며칠 전에 알게 되었네요.
봄, 가을, 겨울에 입는 검은 수단은 드라이클리닝을 맡기면 시간이 걸리지만, 여름 수단은 물세탁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아침 미사 후에 물세탁을 하고 다림질 하면 다음 날 입을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은 조금 깨끗하게 살고 있습니다. 여름 수단도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는 줄 알고 더럽게 지냈는데, 세탁이 간단하기에 이제는 깨끗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이지요. 알려고만 했으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전혀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생활했네요.
하긴 이러한 모습은 우리들의 일상 안에서도 종종 드러나지요. 즉, 내 생각만 옳다는 어리석은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은 정작 누려야 할 것도 제대로 못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곤 하지요.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도에 주님께서는 “왜 겁을 먹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고 말씀하시면서 굳건한 믿음 안에 답이 있음을 이야기해주십니다. ‘나’라는 틀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닌, ‘주님’이라는 틀에 갇혀 사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내 생각만 옳다는 어리석은 모습을 하나씩 버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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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어디 꽃뿐이더냐!
-송동림 신부-
언젠가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서울의 한 도심을 지나다가 이런 글귀를 본적이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어디 꽃뿐이더냐! 꽃은 바람에 흔들리면서 피어난다.’ 제게 그 글귀는 당시 시대 상황과 어우러져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현수막 내용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꽃뿐이 아닌 듯합니다. 신앙인들도 고통 앞에서, 죽음 앞에서, 유혹 앞에서 흔들릴 수 있습니다. 삶이 흔들리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상치 못한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는 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제자들을 보게 됩니다. 겁에 질린 제자들은 풍랑 속에서도 곤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간청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가오는 사실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어도 폭풍이 닥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갑자기 예고 없이 몰아칠 수 있다는 겁니다. 나아가 우리의 한계 상황, 위기 상황에서도 주님은 주무시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무서운 폭풍이 휘몰아쳐 하느님께 매달렸지만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부족했기에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잠재우기 전에 먼저 믿음이 없는 제자들부터 꾸짖으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바람이나 호수나 풍랑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과 그들 삶의 중심에 믿음이 없음을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배와 물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배는 물 위에 떠 있습니다. 그런데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물이 들어오면 배는 가라앉게 됩니다. 신앙인의 마음에도 믿음이 아닌 의심이 그 중심을 차지하거나 세상의 그릇된 풍조가 물밀 듯이 밀려들면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맙니다. 반면 아무리 험한 세상 한가운데서도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의 정도가 깊을수록 세상 풍파를 잘 견뎌내고 덜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다의 풍랑이나 세상의 폭풍과 같은 외적 환경이 아니라 영적으로 깊게 뿌리내리지 못해 쉬이 흔들리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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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 앞에서
-장경선 수사-
자연의 큰 힘 앞에서 특히 생명을 위협받는 순간에는 그 누구도 두려움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비단 자연현상에서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여러 가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이 원치 않는 크고 작은 삶의 고통으로 풍랑이 일어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같은 풍랑을 앞에 두고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한쪽은 극한 두려움에 싸여 어쩔 줄 모르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아주 평온했습니다. 제자들이 허둥대면서 살려달라는 아우성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 자세(그분이 지적한 믿음)로 폭풍을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담담히 받아들였다면 그 폭풍조차 일상사처럼 그냥 지나갔을 것입니다. 후일 십자가 사건은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폭풍으로 예수님께 다가왔지만 그분은 그 길을 피하지 않으시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순간순간 우리에게 두렵고 피하고 싶은 풍랑의 순간들이 오고 갑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믿음을 사는 자세란 그 어떤 두려운 순간이 닥친다 해도 떨지 말고, 그 상황을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두렵게 여겨졌던 폭풍이 한낱 미풍에 지나지 않았다고 여길 때가 올 것입니다. 만일 내가 연약하여 제자들처럼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 곁에서 동행하시는 주님께 나를 맡겨드립시다. 그것이 바로 평화로 가는 신앙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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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짓 것 -김찬선신부-
겁에 대한 표현들이 여럿입니다. 겁을 주다. 겁을 먹다. 겁을 내다. 겁이 많다. 겁이 없다.
이렇게 쓰이는 겁이란 어떤 것일까요? 두려움이나 무서움과 비슷한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무서움이 존재를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나 사물에 대한 꺼리는 감정 또는 마음이고, 비교적 인격적 대상에 대한 거부감이라면 두려움은 맞닥뜨리기 싫은 것에 대한 꺼리는 감정 또는 마음이고 비교적 비인격적 대상에 대한 거부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겁이란 무서움보다는 두려움 쪽에 가까운 마음이라 할 것이며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싫어하는 것, 죽음, 실패, 고통 등을 초래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겁을 주는 것은 풍랑입니다. 높은 파도가 배를 덮치면 모두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똑 같은 상황에서 제자들은 겁을 먹는데 주님께서는 주무실 정도로 태평하시고 풍랑 때문에 버들버들 떠는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고 나무라십니다. 주님의 눈에는 그것이 호들갑으로만 보였을 것입니다.
오래된 저의 처세술이 있습니다. 그 까짓것입니다. 큰 일이 닥치더라도 그 까짓것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일이라도 작게 여기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심호흡 크게 한 번 하고 올 테면 와 보라고 뱃장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런 뱃장이 어디서 나올까요? 죽기 살기로 덤비는 사람, 죽기를 각오하는 사람에게서 나올 것이고 주님께 큰 믿음을 두는 사람에게서 나올 것입니다.
다윗을 생각해봅니다. 어리고 가녀린 다윗 앞에 엄청난 거인 골리앗이 서 있습니다. 어른들도 골리앗의 그 거대함에 겁을 먹고 부들부들 떱니다. 겁을 먹으니 골리앗이 더 거대합니다. 그래서 골리앗에게 다 나가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의 거대함과 허풍을 비웃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비웃습니다. 골리앗이라는 작자는 자기보다는 크지만 하느님보다는 작은 존재이고 자기보다는 힘세지만 하느님보다는 힘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 한 번 호령하시면 이런 것들은 찍소리 못하고 잠잠할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크시고 전능하시다는 믿음은 관념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엄청난 위협들, 암 실직 파산 실패 . . . 이런 것들 앞에서 두려움이 없을 때 이런 것들을 하느님 때문에 겁내지 않을 때 우리는 크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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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양승국신부-
<네 마음을 잘 지키는 문지기가 되어>
입원한 환자들을 방문하기 위해 병원에 다녀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저까지 컨디션이 안 좋아지고, 어딘가 아픈 것 같고, 불안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병원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겠지요.
다들 직면한 최대과제(투병과 쾌유)와 싸우느라 힘겹습니다. 환자나 그 가족들의 고통이야 두말할 것이 없겠지요. 병원종사자들의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습니다.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집니다. 감정의 기복도 심해집니다. 걱정도 대단합니다. 안절부절 못합니다. 다들 정말 고생들이 많으십니다.
그런 와중에도 정말 특별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 환자를 만났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현재 상황이 꽤 비관적이고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얼마나 의연한지 모릅니다. 자신의 현재 상황을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저 같았으면 불안해서 죽을 지경인 그 순간에 마치 소풍 나온 얼굴로 그렇게 지냅니다. 모든 것을 초탈한 신선 같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습니다. 오히려 찾아간 저를 걱정하고 격려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그토록 거센 풍랑 앞에서 평온함을 유지하는 비결이 과연 무엇인가?
아마도 그분이 하느님과 맺고 있는 굳은 결속력 때문이겠지요. 그분이 온전히 하느님의 품안에 머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 영원한 안식처가 있음을 잘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그분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시기에, 그런 모진 고통도 기꺼이 참아내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다시 한 번 미성숙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지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과 한 배에 타고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도 바닥 수준인 제자들의 믿음 앞에 무척 속상해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 같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매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안에 주님이 항상 현존해 계신데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주님이 어디 계신가?’ 하고 외칩니다. 그분께서 늘 우리 안에 머물고 계시기에, 그 어떤 풍랑이 다가와도 안전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걱정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이 시대, 우리를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걱정거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걱정 때문에 조급히 서두르지만 그럴수록 더욱 공허해집니다. 그 공허함은 또 우리를 분주함으로 내몹니다.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이지만, 바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신이 무슨 특별한 일이라고 하고 있는 듯이 여기지만 사실은 큰 의미 없는 우스꽝스런 것들에 빠져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쿠르트 투골스키라는 학자는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으로 현대인을 묘사합니다.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으면서 언제나 초조해하고 안달하며 몸부림치는 존재”
하루 온종일 산적한 걱정거리들과 두려움 속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한 구도자가 이런 편지를 쓰셨네요.
“네 마음을 잘 지키는 문지기가 되어 어떤 생각도 미리 물어보는 일 없이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라. 들어오려는 생각에게 이렇게 물어보아라. <너는 우리 편에 속하느냐, 아니면 반대편에 속하느냐?> 네 마음 안으로 들어오려는 생각이 네 편이라면 그것은 너에게 평화를 가득히 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반대편이라면 그 생각은 너를 분노케 할 것이고 네 마음 안에 온갖 종류의 탐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안셀름 그륀, ‘다시 찾은 마음의 평안’ 성 바오로 참조).
새벽을 열며
요즘 성지에서 일하는 사람이 더 늘었습니다. 그것도 건장한 청년 3명이 늘었지요. 성지가 갑자기 부자가 되어, 일꾼 3명이 더 고용한 것일까요? 물론 아니겠지요? 그들은 이번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노동체험을 나온 신학생 3명입니다. 그런데 이 신학생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건장한 청년이, 그것도 못하는 것 없는 청년들이 왜 결혼도 하지 않고 저렇게 혼자 살려고 할까?’
어떤 사람들은 이 신학생들을 보면서 ‘참 아깝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똑똑하지요. 일처리 빠르지요. 또 놀기도 엄청 잘 놀지요. 그러다보니 본당의 청년들도 이 신학생들과 함께 있기를 그렇게 좋아하는가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들이 타고 난 신학생들의 능력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교에서의 규칙적인 생활을 통해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주님을 통해서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좋게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그리고 주님의 품 안에서 살려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세요. 분명히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통해서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 봤을 때 정말로 형편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그들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이었는지를 다시금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로 갈릴래아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생활했던 갈릴래아 호수를 잘 알고 있었고,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잘 적응할 능력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배 안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자 자신들처럼 어부출신이 아닌 목수출신 예수님을 깨워서 말하지요.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원래 일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래서 너무나도 부족하고 한심한 제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믿음을 키워나갑니다. 그리고 점점 영적인 성장과 함께, 주님을 가장 멋지게 증거하는 제자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통해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 자신이 못한다고 포기하는 것들도 자신 있게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맞습니다. 겁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분명히 내가 원하는 것들을 모두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심으로써 고요하게 만드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겁을 낼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못한다고 겁내지 마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신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이정희 수녀-
◆나는 동해를 좋아한다. 여름 휴가로 종종 속초에 가는데, 물이 맑은 동해와 가까이에 설악산이 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놀다가 지루하면 등산을 하면서 시원한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다. 또 동해는 깊어 바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되고 파도타기가 아주 좋다. 파도를 타면서 몇 가지 원칙을 터득하게 되었는데, 몸의 긴장을 풀고 파도의 움직임에 몸을 맡겨야 물에 잘 뜬다는 것이다. 곧 물에 내 몸을 맡기는 것이다. 나는 파도타기를 하면서 바다를 하느님의 품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져 파도타기가 재미있게 되었다. 내면 안에 일렁이는 풍랑과 씨름을 하는 때가 있었다. 그때에도 풍랑을 잠재우려 애쓰기보다는 그 풍랑과 더불어 리듬을 타다 보면(마치 파도타기처럼) 두려움이나 긴장 또는 갈등보다는 내면의 자유를 맛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함께 배에 올랐지만 시선이 풍랑에 맞추어져 있었기에 죽겠다고 소란을 피운 것이 아닐까? 예수께서 배 안에 함께 계신데도 말이다. 파도타기를 할 때도 산더미같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면 너무 무서워서 피해버리게 된다. 멀리에서 밀려오는 파도의 리듬에 몸을 맡기려면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풍랑에 시달리면서 그 풍랑의 리듬을 읽을 때까지 여러 어려움을 겪게 마련인 것 같다. 예수께서 풍랑 한가운데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풍랑을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여정 안에서 이런 풍랑을 맞을 때, 그때가 바로 예수께서 아주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은혜를 구하자.
무릎 꿇고 있는 나무 -이기양 신부 -
로키산맥 해발 3000m 높이에 수목한계선이 있는데 이 지대 나무들은 거센 바람으로 곧게 자라지 못하고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있는 형태로 서 있다고 합니다. 그런 자세에서만이 살아남을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이 무릎 꿇고 있는 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열악한 환경이 강인하고 탄탄한 나무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련은 우리를 성장시키기도 하고 또 쓰러뜨리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시련이 좋은 성장의 계기가 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한 순간에 무너져내리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요.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련을 겪게 마련입니다. 시련을 잘 받아들이고 성숙의 계기로 삼아야함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오늘 복음에는 믿음 앞에서 시련과 유혹을 맞는 제자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일어난 일이지요. 갈릴래아 호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생명의 호수입니다. 당시 갈릴래아 호수에는 염분이 흘러 들어갔기 때문에 오늘 복음처럼 ??바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지금은 염분을 따로 다 빼내기 때문에 호수라는 말이 적합하지요. 갈릴래아 호수, 티베리아 호수 또 겐네사렛 호수는 다 같은 이름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상도 크기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인 이스라엘에 있는 갈릴래아 호수는 길이21km, 너비 11~2km, 둘레 52km정도에 수심이 49m정도인 아주 큰 호수입니다. 골란고원 아래 자리잡고 있지요. 골란고원 뒤쪽은 지중해인데 지중해보다도 212m 더 낮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골란고원 쪽으로 비가 오면 물은 대부분 갈릴래아 호수로 들어가고 요르단강을 건너 사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사해는 더 아래 있지요. 해저보다 훨씬 더 밑에 있는 셈입니다. 지금은 비가 와도 물을 이용하므로 요르단강으로 흘러 보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우리의 산정호수 같은 곳이지요. 산은 원래 변화무쌍한 곳입니다. 맑은 날씨였다가도 금방 바람이 불고 또 비가 내리기도 하지요.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물이 출렁이기도 하고 풍랑이 불기도 하는 대단히 변덕스러운 곳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배경인 갈릴래아 호수의 상태입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이곳을 건너는데 갑자기 풍랑이 몰아치지요. 아무리 노를 저어도 역풍을 만나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작년에 이스라엘에 갔을 때 바람 부는 것을 보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였습니다. 거센 바람에 나무들이 밤새 휘청거리는 것을 보았지요.
그런데 거센 풍랑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뒤덮이는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겁에 질려서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매달리지요.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8,25)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8,26)고 말씀하시며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마태8,26)습니다. 사람들이 놀라 수군거렸지요.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8,27)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시련, 어려움을 알고 계셨습니다. 잔잔했다가도 갑자기 바람이 몰아치는 것이 우리 인생살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시련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지요. 오늘 복음은 그러한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임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줍니다. 누구나 제자들처럼 당황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중에도 하느님께 의지하고 구하고 믿으면 그 시련은 성장의 계기가 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시련의 시기가 성장의 시기로 이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타깝게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서두에서 말씀드렸는데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어려움이 닥치면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냉담이나 엉뚱한 길로 빠지는 계기가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려운 시련의 시기에 하느님을 알게 되지요. 은총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시련이 오히려 하느님을 떠나서 혼자 세상을 방황하다가 참담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불신의 계기다 되기도 하지요. 신앙의 빈털터리가 되는 경우입니다. 어려움이 닥치고 위험이 몰아치는 내 인생의 위기에 잊지 말아야 할 해결책을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지요.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나를 믿어라!?“
삶의 과정 속에서 겪게 되는 많은 어려움들이 성숙의 계기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유산은 하느님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에 하느님 안에서 은총을 구하고 지혜를 찾는 삶을 살게 해 주는 것이지요. 대입 시험을 앞둔 시기, 군대 가는 시기, 입사하는 시기, 결혼하는 시기 등 아주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들은 대단히 중요한 인생의 고비들입니다. 이런 때에 특히 하느님 안에서 지혜를 구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들이 하느님을 아는 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 인생의 고비 때마다 부모가 오히려 앞장서서 냉담의 계기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 주위에는 그런 부모들이 꽤 있습니다. 어리석지요. 부모들은 자녀에게 하느님 안에서 은총을 구하고 지혜를 찾으며 참으로 하느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심을 깨닫는 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 중요한 시기를 오히려 엉뚱한 곳에서 방황하게 만드는 그런 부모라면 지혜로운 부모라고 말할 수 없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의 야단을 피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8,26)
인생의 어려운 시기에 오히려 하느님을 알고 인생이 성숙되는 계기가 되도록 먼저 모범을 보이고 삶으로 전해주는 지혜로운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모두를 상대화 한다" -이수철 신부 -
믿음이 모든 것을 상대화합니다. 믿음이 좋으면 웬만한 십자가의 짐도 너끈히 지고 갈 수 있지만, 믿음이 약하면 가벼운 십자가의 짐도 무겁습니다. 믿음이 좋으면 마음에 탄력이 좋아 웬만한 언행에도 상처받지 않지만, 믿음이 약하면 마음의 탄력이 안 좋아 가벼운 언행에도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믿음이 좋으면 웬만한 시련이나 고통에도 마음의 평정 깨지지 않지만, 믿음이 약하면 사소한 어려움에도 마음이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계속되는 시련과 어려움입니다. 정도나 양상의 차이일 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안팎으로의 시련과 어려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크고 작은 시련의 풍랑들을 계속 헤쳐가야 하는 우리의 인생 항해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믿음의 좋은 모범입니다. 호수에 큰 풍랑이 일고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을 때에도 편히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의 그 믿음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믿음도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믿음과 제자들의 믿음이 똑같을 리 없습니다. 약한 믿음으로 갈팡질팡하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따끔한 일침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됩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렇습니다. 믿음이 모두를 상대화 합니다. 삶의 풍랑을 탓할 게 아니라, 우리의 믿음 약함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힘을 키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시련의 풍랑 중심에 믿음의 원천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이 주님께 부족한 믿음을 도와 달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웬만한 풍랑의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요, 시련의 풍랑들을 고요케 하는 믿음의 위력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1독서의 아모스 예언자의 호소, 결국은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회개의 촉구가 아닙니까? 끊임없는 회개로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믿음은 더욱 순수해지고 굳세어집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풍랑을 고요케 하시고, 오늘 하루의 순례 여정을 위해 우리 모두에게 좋은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잊지 맙시다! -홍성만 신부 -
내가 믿는 주님이 내 생명의 근원이시고 자연 만물을 관장하시는 분이심을...... 제자들과 예수님이 탄 베는 지금 거센 풍랑으로 물결에 휩싸여 뒤집혀질 지경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곁에 가서 예수님을 깨우며 부르짖습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의가 죽게 되었습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예수님의 귀에 무척이나 거슬립니다. 곤한 잠을 깨워서가 아니라 당신을 향한 제자들의 불신에 대한 속상한 마음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속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아직도 너희들은 모르느냐? 내가 누구이고, 나의 아버지가 누구이신 지를...... 그리고 내가 늘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나의 생활에서 주님을 향한 신뢰의 부족으로 버둥거리는 나 자신을 보면, 제자들의 행동이 이해가 갑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그들에게 "외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고 힐책하시며, 일어나시어 바람과 바다를 꾸짖습니다.
사방은 이내 고요해 집니다.
사실 나를 포함하여 우리들은 너무나도 자주 주님을 잊습니다.
나와 함께 계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내가 믿는 주님이 내 생명의 근원이시고 자연 만물을 관장하는 분이심을, 너무 쉽게 잊곤 합니다.
그런 나머지 인생의 작은 풍랑에서도 어쩔 줄 몰라합니다.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잊지 맙시다! 내가 믿는 주님이, 내 생명의 근원이시고 자연 만물을 관장하는 분이심을 말입니다.
믿음이 필요한 배(boat)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의 테마는 예수께서 마치 바다와도 같은 갈릴래아 호수의 거센 풍랑을 가라앉힌 자연기적사화이다. 복음서가 보도하는 예수님의 기적사화는 크게 사람을 상대로 구제(救濟)하는 <구제기적사화>, 또는 <치유-구마기적사화>와 자연을 상대로 능력을 드러내는 <자연기적사화>로 대별된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께서 거센 풍랑을 대면하여 죽을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救濟)하였다는 의미에서 이를 구제기적사화라고 할 수도 있다.
갈릴래아 호수는 둘레가 53Km, 깊이는 약 50m의 호수로서 호면(湖面)이 해면(海面)보다 212m 낮아 거센 풍랑이 잦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갈릴래아 호수는 이스라엘의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 헤르몬산(2,814m, 안티레바논산맥의 남단으로 시리아의 남서부에 위치)을 수원지(水源池)로 형성된 요르단강이 흘러 들어와 이루어진 호수이다. 호수에서 다시 시작하는 요르단강은 남쪽으로 흘러 호면이 해면보다 394m 낮은 사해(死海)로 들어간다.
오늘 복음의 기적사화를 자연기적사화로 보든 구제기적사화로 보든,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측면에 매력을 느낀다면 마르코복음의 병행구절(4,35-41)을 읽어보는 것이 더 옳다. 이는 마태오의 의도는 마르코의 의도와 좀 다르다는 말이다. 마태오의 의도는 어제 복음의 테마였던 "예수를 따름"에 있다. 즉,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18절)는 예수님의 명령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제 복을 통하여 호수의 이쪽과 저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다. 호수의 이편과 건너편은 분명 서로 다른 곳이다. 그러나 호수의 이편과 저편을 서로 연결해 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배(boat)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먼저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따라 올랐다고 한다.(23절) 호수에는 여러 척의 배들이 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타고 있다.(27절 참조)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타고 계시는 배는 이제부터 넓은 의미의 "교회"를 뜻한다. 이것이 바로 마태오가 의도하는 바이다.
갈릴래아 호수에 여러 척의 배가 떠있다. 모든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나서 파선(破船)되기 직전에 놓였다. 그 중 한 배에 예수께서 타고 계시며, 그분은 태연히 잠에 빠져 계신다. 이는 교회 안에 주님이 계시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상태와도 같은 것이며, 교회 또한 세파(世波)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비가시적(非可視的)으로 계시는 주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평온함을 가꾸시는 분이시다. 다른 배를 탄 사람들도 주님의 놀라운 자비를 같은 비중으로 체험하지만,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하는가?"(27절) 하고 수군거리면서 놀라 눈이 휘둥그래질 뿐이다. 문제는 교회라는 배를 탄 사람들의 믿음이다. 물위에 떠있기 위해 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배는 사람을 태우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주는 수단이다. 저쪽으로 가는 데 필요한 과정은 그 배 안에 함께 타고 계시는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
오늘복음에서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랑이 거세게 달려들자 겁을 먹고 있습니다. 어부들이 겁을 먹을 정도였다면 얼마나 심한 풍랑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심한 풍랑, 즉 인생의 고난을 겪고있는 예수님의 배에 우리도 올라타서 함께 풍랑 속으로 묵상을 들어가 봅시다.
첫째, 어제복음에서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대로, 제자들도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함께도 따라 올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한 배가 거센 풍랑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에서 장차 예수님과 함께하는 제자의 길이 얼마나 험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실 주이신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갈릴레아 지방의 호수, 즉 정확히 표현하면 겐네사렛 호수는 길이가 20키로, 폭이 10키로로서 서북 혹은 남서풍이 여기로 불어오면 거센 풍랑이 일게됩니다. 풍랑에 익숙한 어부들이었지만 심한 풍랑 속에서 겁을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대자연의 혼란 중에서도 고요히 잠들어 계신 하느님의 아들과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이 가냘픈 제자들의 모습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주무시고 계신데 제자들은 겁을 먹고 있으니...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다에서는 제자들이 훨씬 더 능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의 자리가 바다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헤쳐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주님을 붙들고 매달립니다(우리 모습이고). 아니 헤쳐나갈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한계에 이르렀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제자들의 모습) 그런데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그 위기를 헤쳐나갈 유일한 방법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로 극한상황에서 "아, 예수님이 내곁에 계시지..."하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바다를 안방 드나들듯이 능숙한 사람들이 위기를 맞으니까, 자기들의 무능을 인정하고 바로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된 이후에 어떤 형태로든지 주님이 누구인지를 어느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상황을 바꿔 주시리라는 것을.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님!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이제 이렇게 우리 죽게 되는 것 같습니다...”라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제자들의 호듭갑에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하시고 나서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자 사방이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했다구요? 예수님의 첫번째 말씀은 부드러운 꾸지람이었습니다. 아마도 피곤한 눈을 비비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뭐가 걱정이여. 나도 너희들이랑 같이 있잖느냐? 내가 누구냐? 설마 내가 너희들 버리고 배신을 때리겠냐? 나, 아까... 니네들 병자 고치느라고 고생하는 것 봤지?...바다야..조용히 좀 하거라. 나 무지 피곤하다...”......아그야, 알간???(조폭 두목같은 목소리로...)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제자들이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작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작은 믿음만으로는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으로서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라는 말씀은 오늘 나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내 뜻대로만 해결하려고 하고, 예수님께는 청하지 않는 나. 혹시 그분이 안들어 주시면 어떻하지?하는 의구심보다는 “설마 그분이 들어주시려고...”하는 불신과 체념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는 나. 그런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나의 신앙을 키우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하튼 바람과 바다를 일갈에 잠재우시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하는가?" 하며 수군거리면서 매우 당황했습니다. 말씀 한마디에 풍랑이 잔잔한 호수로 바뀌었으니 말입니다. 어부들은 바다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다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잔잔한 호수로 바뀌니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여러분 만약에 내 삶 안에서 그런 경우는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성당 다니지 않겠다던 배우자가 갑자기 성당에 다니겠노라고 선언할 때,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부족한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청했는데 그분께서 들어주시면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그 당황 속에는 자신의 불신에 대한 죄스러움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예수님 앞에서 “내가 줄은 참 잘섰지..”하는 기쁨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앞으로는 굳게 믿을 것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복음에서와 같이 우리는 항상 어려움 속에서 일을 해결하려 할 때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마음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직도 나 혼자, 나 스스로 해보다가 안되면 포기하는 그런 자세는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인내를 가지고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제자들의 청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약하다고 크게 탓하지 않으시고 더 키우라고 행동으로 보여 주고 계십니다. 혹시 내 신앙이 커 가는데 있어서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습니까? 조만간 그런 체험이 있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아멘)...........◆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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