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타사(彌陀寺) /전통사찰
- 서울시 성북구 보문동
950년 혜거국사가 창건, 1047년 석탑을 세웠다.
조선시대 이곳을 탑골(탑동)으로 불렀고 보문사와 함께 탑골승방으로 불렀다.
옥수동 두뭇개 승방(미타사), 석관동 돌곳이 승방, 숭인동 새절 승방(청룡사) 등과 함께 성 밖 비구니 4대승방이 되었다.
1314년 혜감국사가 중건, 1457년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가 시주하여 중수. 이후 기록은 없다.
1801년 4차 중수를 하였으나 누가 주도하였는지 기록은 없다.
1836년 운척 당인(雲剔堂仁)이 5차 중수하였다.
현재 가람은 1969년 비구니 계주(季珠)가 고봉(古峰)의 도움으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미타암 아내문 정리, 안내문엔 '운처당인'이라 적혀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 아니 가깝게 1800년대로 간다면 보문사와 미타사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거다.
서울 시내에 있는 사찰, 지금까지 몇 곳 가 보지는 않았지만 내 느낌은 산만이다.
미타사는 보문사 한쪽에 있는 느낌, 공간이 좁다. 앞에는 높은 아파트가 서 있다.
미타사 입구
절 마당이라고 따로 없다.
ㄱ자 건물에 한쪽이 관음전이다.
대웅전, 전등 달고 있다.
아미타후불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감로도
동종
요사, 예전 혜화동 외당숙집에서 봤던 한옥이다.
단하각, 들어가 보진 않았다.
삼성각, 들어가 보진 않았다.
문화재로 여러 불화(佛畵)가 있다.
미타사 감로도(彌陀寺 甘露圖)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58호
전체 갈색이고 밝은 주홍색이 선명한 것은 질이 떨어지는 합성 안료의 영향이다.
명암법은 넓게 칠해진 독특한 요철법으로 조선말기 중국에서 서양화법이 전래될 때 그런 경향을 반영한 것이다.
같은 유형은 19세기 서울ㆍ경기지역에서 유행하던 감로왕도의 도상을 계승한 것이다.
서울지역인 청룡사(1868), 개운사(1883), 미타사(옥수동, 1887), 지장사(1893), 봉원사(1905) 감로도와 비교할만 하다.
미타사 백의관음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2호
광무 10년(1906)에 삼각산 미타사 향로전 불화인 백의관음도, 석옹 철유(石翁喆侑)가 혼자 그렸다.
석옹 철유(1851~1917)는 금강산 주위에서 활동한 화승이다.
미타사 지장시왕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9호
화기엔 그린 시기와 봉안 장소가 적혀있지 않지만 1873년에 그린 미타사 신중도와 같은 중명비구(포화당정수布和堂定修),
별좌비구(수산당부윤秀山堂冨潤)가 연화질(緣化秩)로 참여하였으며,
'신중도'와 양식, 화풍이 같은 것으로 보아 1873년 4월에 삼각산 미타사에서 신중도와 함께 그려 봉안한 것으로 여겨진다.
미타사 신중도(彌陀寺 神衆圖)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0호
1873년 4월에 삼각산 미타사에서 그리고 봉안한 신중도.
포화정수(布和定修)를 증명으로 하여 연선당 응석(慶船堂 應釋)이 출초(出草)하고,
용계당 서익(龍溪堂 瑞翊), 동화당(東化堂), 두흠(斗欽), 만파당 돈조*萬波堂 頓照), 봉흡(奉洽) 등이 함께 그렸다.
미타사 칠성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1호
강화 정수사 칠성도(1878년), 서울 봉은사 북극보전 칠성도(1886년), 의성 고운사 쌍수암 칠성도(1892년) 등과 같은 형식,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울/경기지역과 경상도지역에서 활동한 경선 응석, 용계 서익, 봉간(奉侃), 현조(現照)가 참여.
미타사 아미타후불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8호
1873년에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과 같이 한 조로 그린 상단 탱화이다.
신중도, 지장보살도와 일습으로 상단 탱화로 그려진 아미타후불도 가운데 평상에 앉은 사천왕상의 등장은
경북 예천군 서악사 석가모니후불탱(1770년)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그 예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미타사 산신도(彌陀寺 山神圖)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59호
독성도와 함께 1915년 초암 세복(草庵世復)과 금명 운재(錦溟運齊)가 그렸다.
미타사 독성도(彌陀寺 獨聖圖)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60호
보문사(普門寺) /전통사찰, 대한불교 보문종 총본산 사찰
- 서울시 성북구 보문동
1115년(고려 예종 10)에 담진(曇眞)국사가 비구니의 수련장으로 창건하였다. 탑골에 있어서 '탑골승방'이라 하였다.
(퇴경 권상로(1879~1965)가 1962년 지은 <퇴경전서 보문사일신건축기>에 기록되어 있다)
1692년(숙종 18)에 승려 묘첨이 대웅전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826년 수봉 법총(秀峯法聰)이 만세루.
1827년 정운(正雲)이 좌우 승당, 1842년 영전(永典)이 대웅전과 만세루(현재 보광전) 수리.
1872년 금훈(錦勳)이 좌우 승당(현재 묘승전과 심우당)을 수리.
1928년 보문종 초대 종정 설월당 긍탄(雪月堂亘坦)께서 크게 불사를 함.
해방 이후 보문종 초대 총무원장 보암당 은영(寶庵堂恩榮)이 주지로 와서 크게 불사하여 오늘에 이른다.
조계종 소속 사찰이었으나 1972년 독립하여 보문종을 창종, 보문종의 본산이 되었다.
(인터넷 찾아보기, 보문사 안내문 참조하여 정리함)
*예하(猊下/猊 사자 예 )...불교에서 쓰는 낱말, 어려운 낱말을 배운다.
- 고승을 높여 이르는 말
- 승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존경의 뜻으로 그 법명 아래에 적는 말
- 부처나 보살이 앉는 자리
미타사에서 나왔다. 미타사는 보문사가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다.
보문사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디가 절이고 어디가 주택인지 모르겠다. 큰 공사를 하고 있다.
종무소이며 어린이집인 건물이 먼저 반긴다.
은영은 여자 이름에 흔히 쓰인다. 여기서 은영은 초대 총무원장을 지낸 보암당 은영에서 가져온 것 같다.
만불전, 가지는 않았다.
절을 찾지 못하여 왼편 아파트 앞까지 갔다. 낙산공원 가는 길이 나온다. 다시 내려 왔다.
만불전 앞으로 오니 절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만불전 뒤편이라고 하여야 하나 모르겠다.
묘승당, 들어가 보질 않았다. 지장보살도(문화재)가 이 전에 있다.
보광전, 1826년 지을 때 만세루였다.
대웅전
보문사 대웅전 영산회상도
보문사 대웅전 신중도
대웅전 뒷벽
삼성각
산령각과 석굴 가는 길
산령각
석굴, 경주 불국사 석굴암과 똑같이 만들었다고 한다.
석굴암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똑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대리 만족할 수는 있다.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같은 모양으로 탑을 만들었다.
선불장을 짓고 있다. 공사장 옆 건물들이 보문사이고 그 뒤에 미타사가 있다.
보탑 앞에서 본 성북구 보문동 경치
그림같이 선불장이 완공되면 보문사 전체 깔끔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기대한다. 짧아도 2~3년 후에나 기대할 수 있겠다.
보문사 지장보살도(普門寺地藏菩薩圖)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0호
1867년 보문사 중단탱(中壇幀)으로 그려졌다.
19세기 경기 지역 화승인 경선당 응석(慶船堂應釋) 이 금어 비구(金魚比丘: 불화를 그리는 승려를 일컫는 말)로 참여하였다.
보문사 대웅전에 봉안된 신중도와 영산회상도와 같은 해 그린 것으로 보인다.
보문사 대웅전 신중도(普門寺大雄殿神衆圖)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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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4일, 하루 동안에 서울시 성북구 전통사찰 다섯 곳을 돌았다.
이제 성북동에 있는 정법사 한 곳 남았다. 이곳은 시인 백석과 그의 연인, 법정스님과 인연이 있는 실상사가 근처에 있다.
성북동 비둘기도 잘 있는지 궁금하고 간송미술관도 들릴 수 있다면 보고 싶다. 언제 인연이 될 지 모르겠다.
보문동에서 버스를 타고 장위동시장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린다.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사랑제일교회;, 이 이름이 부끄럽다. 대한민국 법도 무시하고 폭력을 저지르고, 과도한 보상금 요구.
서민만 죽어났다. 장위동개발사업, 애초부터 이 교회를 빼고 진행했으면 시끄럽지도 않고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을 텐데.....
알박기, 조롱, 아랑곳하지않는다. 극단적인 발언도 서슴없이 하는 전 씨 성을 가진 목사.
보상금 공탁, 명도소송, 명도 집행,거센 반발엔 엄청난 폭력이, 원하는 금액을 주겠다고 협의, 협약하였지만
더 달라고 다시 요구한 사랑제일교회, 개발사업 단체도 불이 났다. 없었던 일로 하자고. 이제 소송으로 또 몇 년 갈 것이다.
그런 교회를 실제 보고 있으니, 하느님, 하나님,,,,,,저승사자는 뭐 하고 있냐고 묻고 싶다.
아들과 석계역에서 만나 수육으로 저녁, 방학동 아들집으로 와서 짐을 쌌다. 강남까지 아들이 배웅하였다.
밤 10시 30분 심야 고속버스로 귀가하였다. 새벽 3시에 김해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