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원초적 여성상, 아니마
남성이 첫눈에 사랑에 빠져들게 만들다
◇ 산드로 보티첼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
세련되고 부드러운 인간관계를 원한다면 내면에 감춰진 원초적 여성상(아니마) 또는 남성상(아니무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 투사를 거두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마는 남성의 내면에 있는 여성적 요소, 아니무스는 여성의 내면에 있는 남성적 요소를 일컫는다. 아니마는 본능적이고 생물학적인 에덴동산의 이브나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된 낭만적 절세 미녀 헬레네, 동정녀 마리아, 지혜의 여신 소피아와 같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남성이 첫눈에 사랑에 빠져드는 것은 내면의 여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현실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속의 여성상, 아니마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문열의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서 윤주에게 모든 것을 건 형빈의 사랑이 그러했다. 윤주는 형빈의 꿈속에서 고귀한 천사, 천박한 탕부 또는 지루한 일상을 같이하는 아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형빈의 꿈속에 나타난 윤주는 아니마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에바 부인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도 아니마의 모습이다.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의 꿈속의 여인이자 어머니, 연인 또는 여신의 상(像)으로 나타나는데 아니마의 다양한 모습을 나타내는 예라 할 수 있다.
《파우스트》에 나오는 청순한 그레트헨과 절세 미녀 트로이의 헬레네는 모두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원초적이고 보편적 아니마를 나타낸다.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필립이 진정성이 없고 제멋대로이면서 허영심이 강하고 천박한 인상의 카페 여종업원 밀드레드에게 빠진 것도 아니마에 사로잡힌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남성의 아니마는 삶에 활력을 불어넣고 창조적인 면을 일깨워 준다. 《데미안》에서 일탈로 퇴학당할 위기에 처한 싱클레어는 아름답고 영리하고 고결한 느낌의 베아트리체를 짝사랑하면서 삶에 대한 태도가 하루아침에 달라진다.
술집 출입과 밤늦게 돌아다니던 행동을 더는 하지 않고 모든 일에 정결함과 고귀함을 부여한다. 말 한번 건네 보지 못한 마음속의 이상적 여인으로 나타난 아니마의 긍정적인 면을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형빈도 찾아 헤매던 윤주를 미국 땅에서 다시 만나면서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어느 때보다 의욕적으로 일하게 된다. 아니마란 그런 것이다. <계속>
글 | 김창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