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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상처의 향기☆]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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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향기]
문희봉 시집 / 오늘의문학시인선 375 / 오늘의문학사(2016.06.10)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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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향기
문희봉
딱따구리가 참나무 옆구리를 쫀 흔적이 깊게 패였는데
그 속에 어린 생명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딱딱 똑똑
큰 공가 벌이는 소리
새벽 공기를 가른 일이 한두 번이었던가
그곳에서 세상구경 시작한 딱따구리들이
고향집을 찾아왔나 보다
많은 식솔 거느린 증조모 뻘 되는 노조老鳥
희색이 만연하다
내 옆구리에도 절벽 같은 육아 흔적
풍란이 자란다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
매운 풍란의 향기 진하게 풍겨
절벽을 다독인다
아득한 거리에 마주한
상처의 향기가 곱다
감자 한 상자
문희봉
감자 한 상자 들여놓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진액이 상자 속에서
내를 이룹니다
봄바람 여름 땡볕 아래 살 태우며
키워온 정성들인데 세월 앞엔 속수무책입니다
정신 희미해진
노모 요양원에 모셨습니다
날이 갈수록 기력이 약해지면서
감자 썩듯 몸이 오그라듭니다
얼굴에 푸른 반점 돋아니니
그걸 잡고 헤헤 웃습니다
쪼드라드는 오줌
가랑이 사이로 질질 흘립니다
여름 땡볕 아래 허리 휘도록 그러모은 자식들
뒷집 지고 먼 산을 바라볼 때
다이어트 된 감자 한 상자
울다가 울다가 웃었습니다
지팡이 문상
문희봉
망루가 없는 독방
마른 우물 같은 동공에 이슬이 맺힌다
바람기 하나 없는 메마른 일상
사지는 꽁공 묶여 허우적거리고
향기 없는 몸뚱이, 서녘 하늘에 별이 진다
지나온 완행열차
간이역마다 뿌려진 향료
외로움에 빠진 노인의 향수
흐릿한 하늘에 안개가 내리고
시야는 점점 흐려져 간다
만월이었던 지난 날
습기가 달아난 벽면에 서걱이는 긴 노년
마디마디 찾는 이 없어
흔들릴 때마다 요란한 소음
빈 항아리 속에서
악취가 새어나온다
어느 노파
문희봉
매일 왕래하는 도로 한 구석
오늘도 노파는 무료한 시간과 사투를 벌인다
소총 아니
군화 신지 않았지만
얼굴은 천사표다
검버섯으로 낯으로 새색시처럼
가녀린 웃음을 낮게 깔았다
언제부터 이곳의 마님이 되었는지
하염없이 허공을 응시하다
길 가는 사람에게 눈길을 주며
목례와 함께 ‘복 많이 받으세요’다
몇 날이 지나 다시 그 길을 간다
여전히 지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눈동자에 고독의 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호수에 물이 말랐다
어느 생명의 최후
문희봉
새벽마다 헬스장 가는 길
장마철인 요즘
매일 만나게 되는 토룡
누굴 찾아가는 길인가
시멘트 바닥을 기고 있다
덥썩 들어 잔디밭으로 던져 낳는 수고
이튿날, 다시 그 자리
오늘은 길을 잃고 헤매다
딴 세상으로 가버렸구나
이름 없이 죽은 전사의 넋이여
어떤 절절한 사연 있었길래
저런 최후의 모습
더 이상 말하지 않으련다
변화무쌍한 이 계절
자식 잃고 통곡하고 있을
대문 없는 그 집에
황량한 바람이 분다
회색 그림
문희봉
지하도는 오늘도 사람에 취해
어지러움을 호소한다
오고 가는 사람들 틈에
연상인 남자와 같이 가는 여인이 있다
걸음걸이가 흔들린다
흐느끼는 얼굴에 알싸한 아픔이 흐른다
쉼터에 앉은 두 사람
갑자기 여인이 꺼이꺼이 흐느낀다
있는 힘 다해
방파제를 후려친 뒤
무너져 내리는 파도처럼
여인이 무너진다
말없이
쏟아져 내린 여인을 바라보는 남자
곳간문을 잠그듯 조심스레
블라우스 단추를 채우고 있다
투박한 손이 가늘게 떨린다
환한 세상
문희봉
가난한 땅에 축복이 내린다
초등학교 낮은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풍금소리
발목가지 젖고도 좋아라 날뛰는 강아지 꼬리가 길다
비스듬히 뚫린 구멍으로
켜켜이 쌓아놓는 유채색 희열
검은 바위 경사면에
뒤꿈치 울린 흰 염소의 목이 깨끗하다
은근한 바람까지 동참하며 세상을 춤추게 한다
흑백사진 속의 한 여인이
머리에 흰 눈 쓰고
고향집 토방에 오르고 있다
내가 오르는 절벽
세상을 창조한
자작나무와 은사시나무의 어깨동무
화장끼 짙은 여자가 말문을 열고
소복한 아이들 불속에 뛰어든다
환해지는 세상
탑이 생기고
건물이 생기고
높다란 계단을 오른다
겨울 가지 끝에 순백으로 피어나는 연인의 얼굴이 보인다
햇빛이 정상을 그러안으니
달려오는 기차 안에서 시냇물 소리가 난다
폐가 기행
문희봉
스레트 지붕 위 잡초들 천국이다
안마당에 복사꽃 붉게 피었는데
무쇠 솥은 입을 다물고
양은솥은 지껄이기는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영은 솥 속 볶다 만 땅콩 몇 알
그리움에 젖어 까맣게 탔다
찬장 옆 검정고시 준비하다 만 가계부
친구에게 쓰다 만 편지 한 소절
헛간에서 만난 쇠스랑 발가락이 붓고
낫도 얼굴에 생채기가 많이 났다
바닥에 널브러진 쟁기에게 말을 거니
주인 어디 있는지 찾아달라며 눈시울 붉힌다
비 오는 날은
문희봉
갠 날이 그립다
나폴나폴 비상하던 이야기
축축하다면 꺼내 말릴 일이다
집착은 병이다
갠 날에 대한 향수
대지가 젖는다
육신이 젖고
마음이 젖고
젖은 대지에 입맞춤하면
그리움은 토톰해진다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사소한 것에도 관심 보이라는
작은 말씀
비릿하면서도 상큼하다는
촉촉한 사랑
비오는 날 만들 일이다
사랑
문희봉
냄비에 배, 대추, 파뿌리 양파와 생강을 넣고
잠길 만큼 물을 붓는다. 오래도록
끓여 잔기침으로 고생하는 아네에게 건넨다
목이 시원하단다. 뻥 뚫린 것 같단다
누군가에게 얘기를 듣고
베풀어 본 조그마한 친절
몇 모금 마시더니
목이 멘다
큰 돈 들이지 않고
베푼 사랑
감동하니 해소기침이 도망칠 거다
아내를 괴롭히는 지긋지긋한 잔기침이 사라진 거다
나의 하느님
문희봉
우리집에 하느님이 계시다면
누가 믿겠나
믿거나 말거나
우리집엔 정말 하느님이 계시다
그분의 말씀
그분의 행동
하느님이 틀림없다]
만취되어 돌아오면
얼굴 닦고 바지 벗겨 재운다
흙탕물로 돌아오면
그 큰 육신 덥석 안아다 샤워 시킨다
아프면 산호사 되고
실의에 빠지면 상담사 되고
화난 표정엔 웃음 전도사 된다
칠십 평생 베푼 세월
땅으로 살고
하늘로 살아온 나의 하느님
지게를 보며
문희봉
물 지개를 지고 일어설 때
작대기가
중심을 잡아 주었다
세상을 짊어지고
외다리 건너 육십령을 넘었다
짐을 부려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빈 지게는 떠났다
작대기도 대동 않고
어디로 가는지
석양을 향해 늙대재를 넘었다
경운기에 밀려난 지게
그래도 한때는
나뭇단 위에 진달래 피워
나비도 따르고 재비도 따랐는데
지금은 창고 한 구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 세상살이는 새옹지마다
호박을 따며
문희봉
설익은 당신이
내 몸에 상처를 냅니다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진물이 흐릅니다
길고 긴 여름날 더위와 가뭄과 싸워
얻어낸 결실을 무지막지 걷어냅니다
찢긴 내 몸 구석구석에서
통곡의 애환이 흐릅니다
분신을 잃은 아픔을, 눈물을
그대는 모릅니다
떨떠름한 온기가 상처를 휩쌉니다
의식이 몽롱합니다
줄기마다 눈물이 되어
당신 입술에 향기로 남기를 바랄 뿐입니다
불두화
문희봉
가끔씩 부처님을 뵈러 가는 날은
몸이 가볍다
가는 길 비 흠뻑 맞고
꽃들이 피고 있었다
내 몸도 근질근질 무엇이 튀어나오려는지
불쑥불쑥 무언가 내밀기 시작했다
꽃이었다. 몸에서 피는 것인가
마음에서 피는 것인가
내 몸 이곳저곳에서 채송화가 피고
맨드라미도 피었다
배꼽 아래에서는 눈부신 불두화가 피어나고
연초록에서 눈부신 흰색, 그리고는 누런색
절 마당에서 대웅전으로 오르는 길 양편
부처님 두상을 닮은 불두화가 내 몸에 핀다
부처님 앞에 공손히 절하고 내려오면서
다시 한 번 바라본다
그 여름
문희봉
높은 산을 내려온 바람이
고라니처럼 녹두밭을 뒤지고 다니는 저녁이다
극성스런 모기떼 이악스럽게 달려드는 멍석 마당
하늘의 별들이 가끔씩 더 먼 곳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쩌온 감자를 나눠주시고
‘오뉴월 하루 볕이 어딘데’란 주문呪文 같은 말씀하시며
어디 보자
불쑥 사타구니에 손을 넣어
감자 같은 내 물알을 만져보시던
아버지, 어머니
나무 같은 사람
문희봉
언젠가 말했다
세 가지 병을 갖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한 병은 거절결핍증이라고
나서는 일이 없다
자신이 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는다
큰 나무가 작은 나무를 깔보지 않고
작은 나무가 큰 나무를 부러워하지 않듯이
타고난 그대로 산다
어려워, 입을 열기 어려워
망설이다 꺼내는 부탁의 말
어깨가 움직인다, 웃음 짖는 다
- 그건 내가 할 일인데
언젠가 들려준 이야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숲으로 가고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큰 위안이라고
나무를 닮은 사람
아니, 우리들 사는 동네의 한 그루 나무
깔봄도, 부러움도 없는 한 그루 나무
적
문희봉
이 세상에
가장 큰 적은
타인이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남과의 약속은 잘 지키지만
자시노가의 약속에는
무신경인 사람들
남을 위해서는 몸까지 바치지만
자신을 우이해서는 인색한 사람들
지금 나는 7부 능선을 넘어서고 있지만
항상 출발선상에 있을 때를 생각함은
내가 우매한 사람이라는 것을
은연 중 알려주는 것이다
나를 제대로 다스리는 나
나를 제대로 가르치는 나
그래야
가장 큰 적과의 동침은 이루어진다
바보 같은 여자
문희봉
내를 건너야 합니다
징검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한 이십 개는 되는가 봅니다
비 오고 바람 부는 날 많았습니다
이제 여덟 개 건넜습니다
등에서는 땀이 흐릅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등짐을 풀어볼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럴 수 없었습니다
내 남자가, 내 분신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역풍이 부는 날 자빠질 뻔 했습니다
큰 비 퍼붓던 날도 그랬습니다
밑동이 부실한지 돌이 흔들립니다
지난 세월 생사고락을 함께 한 사람들을
나는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심장이 멎을 듯한 고통이
창자를 끊어내는 아픔이
유명 폭포의 곤두박질보다 컸습니다
희미한 기억 속에 지나온 발자취가 보이는 듯합니다
아홉 번째 돌로 발을 옮겨야 합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도 그렇고
걷는 것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젊음이 오래 지속될 것이라 자부한 세월인데 브레이크를 잘게 밟게 됩니다
그래도 건너야 합니다
무릉도원의 춘시절 물결도 잔잔합니다
건너야 합니다
건너가야 합니다
바보같은 여자는 건너야 합니다
꽃잔디
문희봉
기울어져 가는 집안의 넷째
어머니가 소파수술비만 마련했어도
나는 세상에 없을 아이
흙만 가지고 놀아도
키가 자라지 않아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아이
밟히고 밟혀도 끄떡없는 아이
다산성 엄마는
오늘 또 동생을 낳았다
울타리 밑에 형제들 모이면
동네 사람들도 함께 모여
인물 좋다고 형제애가 남다르다고
한여름 우리가 걸어간 거리는
두 뼘도 안 된다
내 키는 작고 옆으로만 퍼져서
볼품이 없지만
엄만 날 사랑했다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벽에 기대 오줌을 누었다
그 때마다
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느 노인의 편지
문희봉
가끔씩 만나는 허리 굽은 노인
사람이 그립다 했다. 뿌리 없는 고독과 산다 했다
물 한 컵 앞에 놓고
지나간 세월을 함께 더듬었었다
한 동안 뜸했는가
짧은 편지 한 장 고이 접힌 채 밭 울타리에 걸려있다
“씨앗 좀 드리려고 조금 매달아 놓았으니 심어보세요.”
저 부드러우면서도 가녀린 사랑이
내 가슴을 열고 들어왔다
땅에 닿을 듯한 허리 곧추 세우고
치마 대신 통바지 입은 아흔 된 노인이 건넨 온기 있는 입김
흙냄새 물씬 풍기는 글자들을
봉안하여 끌어안고 나는 산을 내려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허름한 벽에 바짝 붙어 자라고 있는 봉숭아처럼
붉은 모가지를 달고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풍상에 낡아버릴 대로 낡아진 노인의 편지를 받은 뒤로
난 편백나무 숲에서 정기를 받고
내려온 아이처럼 눈이 빛났다
그리고 오늘 빨랫줄에 걸려
나풀나풀 춤추는 노인을 받아 안았다
구두
문희봉
세월이 저만큼 흐른 날 오후
내 구두는
어디를 그리 쏘다녔는지
노구의 안면만큼이나
구겨져 있다
어릴 적 신던 검정고무신은
고향집 친구들 따라 이미 떠났고
학창시절 신던 단화도
첫사랑 소녀와 도시로 갔다
언제부터인지
부끄러운 발이 보일까
돌부리에 넘어질까
아래만을 바라보며 살아오는 너에게도
잔주름이 생겼구나
이번 휴가 땐
성형외과에 같이 가자꾸마
.♣.
=================
■ 自序
고희가 되었다.
그런데 내 시는 아직도 약관이다.
언제쯤이나 치자 닮은 향을 풍길 수 있을까.
오늘도
내일도
꿈속을 헤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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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봉 詩集 [※상처의 향기※]
[ 작품해설 ] -
유장한 리듬으로 직조織造한 인생 파노라마
― 문희봉 시집『상처의 향기』
시인 엄 기 창
1. 시의 리듬
시가 일반적인 산문과 다른 점은 운율 있는 언어로 표현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시의 생명력은 운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정형성이 강조되는 시조나 한시에서는 시의 음악성이 절대적이었다. 아무리 내용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정형성에서 벗어나면 좋은 시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현대시는 이미지를 중시하기 때문에 운율은 내재화되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운韻이나 율격律格으로 나누어 두운, 요운, 각운, 음성률, 음수율, 음보율 등으로 구분하기는 하지만, 운율의 유려함이 반드시 좋은 시의 필수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시가 우리 문학의 한 장르로 뿌리를 내리던 현대문학의 여명기엔 3,4조나 7,5조의 음수율에 맞추어 시를 쓴 분들도 많지만, 시대가 변화하면서 산문시, 담시와 같은 유장한 내재율의 시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런 시의 장점은 작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와 지성적 주제를 무리하지 않게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시인들 중 특히 내가 좋아하는 시인 중에 문희봉 시인이 있다.
둥글게 모여앉아 도란도란 피우는 이야기꽃
목젖을 넘는 맥주 한 모금이 어쩌면 이리도 부드러운가요
이골 저골 스쳐 견뎌온 난관 밀쳐버리고
밥숟갈 속에 녹아 흐르는 행복이 나를 어부바해 줍니다
고개를 드니 찬란한 자연풍광이 동공 속에 잠깁니다.
- 「센트럴파크 301동 1802호」일부
<흩어져 사는 아들 딸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적막강산이던 집에 활기가 넘치>며 도란도란 모여앉아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한 서민의 단란한 모습이 전혀 급할 것 없는 담담한 리듬 속에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시에서 여울물처럼 운율이 너무 급박하다면 편안함은 오히려 깨어질 것이다. 완만하고 유장한 리듬 속에 자신의 삶을 독백체에 담아 표현하였기에 오히려 신선한 것이다. 늘 유쾌하면서도 낙천적인 그의 성격이 삶의 파노라마를 펼쳐 가는데 가장 적합한 선율을 창조해낸 것일까. 이 시인의 시는 자신의 인생 모습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이토록 유장한 리듬으로 진화하였는지도 모르겠다.
2. 시심詩心의 고향 신석리
문희봉 시인은 1989년『월간에세이』 수필 추천으로 먼저 문단에 등단하여 이듬해인 1990년『한맥문학』시 추천으로 시와 산문을 함께하는 시력 30년에 가까운 중견 수필가요 시인이다. 40여 년의 교직생활 동안 장학사, 교감, 장학관, 교장 등을 두루 거치며 바쁜 일정 속에서도 시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은 분이다. 그러다 문득 돌아보니 고희古稀에 이르러 있다. 고희古稀라는 말은 두보杜甫가 지은 「곡강시曲江詩」에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서 온 말로서, 사람은 예로부터 70세까지 살기가 드문 일이라는 뜻이다.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 70을 사는 것은 일상이 되었지만, 이 나이쯤 되면 누구나 지난 삶을 회고하며 삶에 대한 가치를 재인식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작업의 일환으로 그는 시집『상처의 향기』를 상재한다. 이 시집에는 고희가 되어 되돌아보는 삶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다. 이 시인의 시심은 당진 신석리에서 발아發芽하고 있다.
창공을 닮았던 지붕
저녁노을 넉넉하게 흡수하고
아침 햇살 받아마시던 넉넉한 가슴
툇마루에 적막 앉히고
주름 새기던 세월
소국의 향기 묻어나온다
나라님이 기거하던 사랑舍廊
콜록콜록 기침소리 배어나오고
부지런했던 저녁 시간
왁자지껄 소쿠리가 걸어 나온다
물정 모르던 별빛
성호를 그으며 떨어지던 사랑
동네 아이들 웃음소리 새어나오고
갈 길 먼 나그네
피곤 풀며 웃음 짓던 곳
이미 무너진 것들
땅과 악수 준비하고
제 몸 부려놓으며 짓는 한숨
그 속에 내 유년이
파랗게 웃고 있다.
- 「신석리 시편 · 1 - 古家」 전문
타향에 나와 떠돌다가 유년을 회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고향집이다. 창공처럼 파아란 희망이 똬리를 틀고 있던 곳, 저녁노을마저 아침햇살로 받아 마실 수 있던 곳이기에 언제 어디서 생각해도 그리운 곳이다. 아버님의 기침소리 묻어나던 사랑은 친구들이 와서 놀고 가고 나그네마저 하루 유할 수 있게 넉넉한 인정이 배어있던 곳이다. 내가 문희봉 시인을 늘 존경하는 것은 타인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봉사할 줄 아는 것인데, 이는 피곤한 나그네에게 쉴 곳을 마련해주시던 선친先親의 따스한 마음을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땅과 악수할 때가 다 되어 한숨지으며 바라보는 고향집엔 유년의 모습이 살아있다는 향수鄕愁 어린 시이다. 절제와 응축을 지향하는 시가 아니라고 쉬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느릿느릿 풀어쓰는 시일수록 좋은 시로 완성하기가 더 어렵다. 이 시는 <툇마루에 적막 앉히고/ 주름 새기던 세월/ 소국의 향기 묻어나온다>든지 <나라님이 기거하던 사랑舍廊/ 콜록콜록 기침소리 배어나오고/ 부지런했던 저녁 시간/ 왁자지껄 소쿠리가 걸어 나온다> 또는 <그 속에 내 유년이/ 파랗게 웃고 있다.> 등의 감각적 이미지를 군데군데 보석처럼 박아 긴장감을 잃지 않은 점이 훌륭한 시로서의 요건을 갖추었다 하겠다.
일반적으로 문학작품에 대한 평설은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유년에 뿌리를 두면서도 형식미학과 표현감각이 돋보이는 또 다른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
집집마다 원추리꽃이 지천이었고
사람들은 푸르디 푸른 하늘 아래
호박 잎새만한 생을 펼쳐 들고
리듬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쥐불놀이하던 고향 언덕
황토색 언덕들
고향집에는 어머니가 양파 속 같은 그늘에서
빨래를 개고
토방 위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들은
강아지들과 오수를 즐기고
뒤란에서는 닭들이 생산라인을 가동하고 있었다
가끔씩 찾는 고향
개펄 같은 허허로움이 무딘 시각을 맛사지한다
반갑다고 온몸 흔들어주는 나무의 손을 잡고
젊어서는 바빠서 못 오고
지금은 너무 멀어 자주 못 온다니까
살구나무는 웃으며 말한다. 자기는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멀어도
봄만 되면 찾는다고
-「미안합니다」전문
4연 21행으로 구성된 이 작품도 오랜만에 고향에 찾아가서 발견한 유년의 모습이 가득 펼쳐져 있다. <집집마다 원추리꽃이 지천>이었고 사람들은 <호박 잎새만한 생을 펼쳐 들고/ 리듬을 안고 살아간다> 이 시는 고향의 그리움을 불러오는 쥐불놀이, 황토색, 토방, 빨래, 신발, 닭, 개펄, 살구나무 등의 향토적 어휘들과 상생작용을 일으켜 누구나의 삶의 근원이 될 어린 시절의 모습을 신선하게 형상화해 놓았다. 우리가 보통 시에서 사용하는 어휘는 시적 어휘이거나 일상적 어휘인데, 문희봉 시인은 일상적 어휘들을 그 시에 가장 잘 맞는 옷과 같은 시적 어휘로 변모시키는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다. 그의 유년 시에는 <불쑥 사타구니에 손을 넣어/ 감자 같은 내 불알을 만져보시던// 아버지「그 여름」>도 있고, 오색실과 바늘, 산수유꽃 사랑, 개구리울음, 풋내 나던 사랑을 담고 있는「누이의 가방」도 있다.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토속적 소재들은 다 거기 살고 있다. 이런 소재들은 문희봉 시인의 시적 성장을 가져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것들이다. 그의 시는 이런 시어들을 적절하게 무늬로 박아 적절한 비유와 상징의 형식미를 갖추었기에 더욱 감칠맛이 있다.
그의 인생 파노라마의 시작은 이렇게 가난하지만 정서적으로 안정을 이루었던 유년시절로부터 펼쳐지고 있다.
3. 생명의식의 향기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해답을 찾고자 했다. 유치환은 그의 시「생명의 서」에서 생명 탐구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통해 ‘본연한 생명’으로서의 ‘나’를 발견하려 한다. ‘아라비아 사막’이라는 극한 상황을 설정하고, 극한상황의 극복을 통해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것이다.
최형철은 그의 시집『찔러본다』에서 자연의 순환 질서에 의해 직조해가는 생명의 직물織物과정을 통해 다른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였다.
문희봉 시인의 시 속에서도 생명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해결하려는 시 몇 편을 발견할 수 있어 새로웠다.
그해 가을 장태산에 깊이 들어갔다가
나뭇잎을 덮고 누운 어린 고라니 주검을 보았다
육탈된 뼈는 희고 가늘었는데
그의 마른 가죽이 단단히 붙잡고 있었는데
그 검던 눈동자가 있던 자리에
어린 잡목들의 세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무 뿌리들이 조금씩
그의 몸속으로 들어올 때
얼마나 간지럽고 고통스러웠을까
나도 아무런 대책 없이
생의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가
누군가에게 나를 내어줄 때가 된다면
간지럼도 고통도 참으며
나무들에게 내주고 싶다
미물들에게 내 몸을 맡기고 싶다
-「장태산에 가서」전문
인용된 시에서는 약해서 죽은 어린 생명에 대한 연민과 죽음에 대한 달관이 나타나 있다. 인정 많고 따스했던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그리고 누이와 어울려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낸 시인은 감수성이 풍부했으리라. 장태산에 갔다가 죽어 하얀 뼈만 남은 고라니와 그 몸을 차지하려고 세력다툼을 하는 잡목들을 보면서 <얼마나 간지럽고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연민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도 고라니처럼 생명을 다하게 될 때에는 자연에게 몸을 맡기고 싶다는 죽음에 대한 긍정적 인식도 나타나 있다.
여기에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생명이란 존중받아야 할 소중한 존재이고 소멸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죽음도 결국 자연 순환의 길목에 있는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으니 순응해야 한다는 깨달음. 모든 생명의 주인은 결국 자연이고 생성도 소멸도 자연의 이치 안에 있다는 말이니 이것이 결국은 자연동화의 동양적 사상의 한 조각이 아닐까.
이 시인의 시집 위를 거닐다 보면 이러한 향기를 풍겨주는 시들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명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은 매우 관념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인의 시 속에서는 지나치게 관념으로 흐르는 것을 피하고 있다. 때로는 추상적이지만 그러나 추상을 피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날카로운 감각적 이미지로 환치하여 표현함으로써 보이고 들리고 만져질 수 있도록 형상화하고 있다. 문희봉 시인의 형식적 미학의 뛰어남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느끼겠다.
가끔씩 부처님을 뵈러 가는 날은
몸이 가볍다
가는 길 비 흠뻑 맞고
꽃들이 피고 있었다
내 몸도 근질근질 무엇이 튀어나오려는지
불쑥불쑥 무언가 내밀기 시작했다
꽃이었다. 몸에서 피는 것인가
마음에서 피는 것인가
내 몸 이곳저곳에서 채송화가 피고
맨드라미도 피었다
배꼽 아래에서는 눈부신 불두화가 피어나고
연초록에서 눈부신 흰색, 그리고는 누런색
절 마당에서 대웅전으로 오르는 길 양 편
부처님 두상을 닮은 불두화가 내 몸에 핀다
부처님 앞에 공손히 절하고 내려오면서
다시 한 번 바라본다
-「불두화」전문
위의 시 속에는 불교적 사유가 드러나 있다.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날 비가 내리고 비속에서 새 생명이 탄생한다. 새 생명은 꽃으로 피어난다. 채송화가 피고, 맨드라미가 피고, 불두화가 피는데, 이 모든 꽃들은 자신의 몸속에서 피어난다. 몸속에서 피어나는 꽃들은 부처님을 만나기 때문에 피어나는 것이니 생명의 창조주는 바로 부처님이다.
근질거리는 몸속에서 불쑥불쑥 피는 꽃들은 법열의 기쁨이며 꽃이 자신과 하나가 되는 자연과의 동화, 물아일체의 경지다. 부처님에 대한 사유와 자연 동화 사상은 불교와 도교라는 동양사상 한 묶음으로 묶을 수 있는 것들이니, 위 시에서는 16행 단연의 길지 않은 동양적 사상이라는 토양 속의 시 한 편에 찬란한 생명들을 피워낸 것이다.
시든지 수필이든지 소설이든지 문학작품이 일단 뜨기 위해서는 타임이 가장 중요하다. 타임에 맞는 문학작품은 그 시대의 이슈에 영합해야 하는데, 전통적 생명의식이나 동양적 사상이 무슨 현대적 사고의 흐름에 꽃처럼 아름다운 그림자로 떠가겠는가.
문희봉 시인의 시는 젊은이들의 감성에 억지로 맞추려는 욕심이 없다. 오래 역사에 남기고 싶다는 욕심도 없다. 굳굳하게 자신의 세계를 지켜가며 삶의 모습을 파노라마로 펼쳐간다. 너무도 욕심 없는 자연 그대로의 시이기에 문희봉 시인의 시가 더욱 귀하다.
4. 인간 본질에 대한 사랑
나는 종려나무가 자라는 곳에서 온 정직한 사람입니다. 죽음을 맞기 전 나는 내 영혼의 시를 노래할 것입니다. 나의 시는 푸른색에서 불타는 분홍색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나의 시는 숨을 곳을 찾아 산을 헤매는 상처 입은 사슴입니다. 땅위의 가난한 사람들과 나의 운명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깊은 산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시냇물은 바다보다 더 큰 기쁨을 줍니다.
- 호세 마르티 -「소박한 시」
인용 시는 쿠바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호세 마르티의 시이다. 호세 마르티는 평생 쿠바의 독립을 위해 몸 바쳤던 인물로 쿠바의 좌파나 우파가 모두 존경하는 쿠바의 정신적 지주이다. 쿠바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시절, 그 참혹한 현실 속에서 그는 조국과 인간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노래했다. 그의 소망은 ‘가난한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거짓으로 쓸 수 있는 시가 아니다. 나보다 힘든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만이 시 속에 진정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희봉 시인은 고등학교 선배로서 내가 존경하는 형님이다. 한국문인협회 대전지회장을 할 때 부회장으로, 대전문학 편집위원장으로 있을 때는 편집위원으로 그의 곁에서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을 여러 번 확인한 바 있다. 그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남에게 미룰 줄 모르는 사람이다. 힘든 사람들을 외면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이는 극진한 인간애를 지니셨던 선친으로부터 유전적으로 이어받은 성품이기도 하지만, 그의 고향마을과 정 많은 가족들을 끌어안고 살아가면서 인도주의적 가치관이 더욱 성장하지 않았을까.
그의 시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찍힌 발자국들을 군데군데서 발견할 수 있다.
가끔씩 만나는 허리 굽은 노인
사람이 그립다 했다. 뿌리 없는 고독과 산다 했다
물 한 컵 앞에 놓고
지나간 세월을 함께 더듬었었다
한 동안 뜸했는가
짧은 편지 한 장 고이 접힌 채 밭 울타리에 걸려있다
“씨앗 좀 드리려고 조금 매달아 놓았으니 심어보세요.”
저 부드러우면서도 가녀린 사랑이
내 가슴을 열고 들어왔다
땅에 닿을 듯한 허리 곧추 세우고
치마 대신 통바지 입은 아흔 된 노인이 건넨 온기 있는 입김
흙냄새 물씬 풍기는 글자들을
봉안하여 끌어안고 나는 산을 내려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허름한 벽에 바짝 붙어 자라고 있는 봉숭아처럼
붉은 모가지를 달고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풍상에 낡아버릴 대로 낡아진 노인의 편지를 받은 뒤로
난 편백나무 숲에서 정기를 받고
내려온 아이처럼 눈이 빛났다
그리고 오늘 빨랫줄에 걸려
나풀나풀 춤추는 노인을 받아 안았다
-「어느 노인의 편지」전문
현대에는 고독과 친구하며 살아가는 노인들이 많은 시대다. 그러나 이웃들에게 ‘씨앗 좀 드리려고 조금 매달아 놓았으니 심어보세요.’하고 몰래 사랑을 보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런 온기 있는 입김을 받아들이고 정기를 받아 눈이 빛날 수 있는 것은 시인 자신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시에선 시인이 바로 노인이요, 노인이 바로 시인이다. 두 사람은 인간애라는 밧줄 속에 함께 묶여있는 공동체이다.
이 시는 마치 따뜻한 수필 한 편을 읽는 느낌이 나는 시이다. 유장한 내재율 속에「~다」로 끝나는 평서형 종결어미와「~가」로 끝나는 의문형 종결어미, 이 단순한 종결이 가슴을 더 촉촉하게 적셔주는 역할을 해 주는 것은 아닐까.
요즘 젊은 시인들 중엔 머리에서만 드라이한 실을 뽑아내어 시의 옷감을 짜는 시인들도 많이 있는데, 문희봉 시인의 시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넘어 사물에 대한 곡진한 사랑까지 드러나 있다. 이 시인의 시는 가슴으로 쓴 시라서 시를 통해 그의 다정다감함이 시에 가득 배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세월이 저만큼 흐른 날 오후
내 구두는
어디를 그리 쏘다녔는지
노구의 안면만큼이나
구겨져 있다
어릴 적 신던 검정고무신은
고향집 친구들 따라 이미 떠났고
학창시절 신던 단화도
첫사랑 소녀와 도시로 갔다
언제부터인지
부끄러운 발이 보일까
돌부리에 넘어질까
아래만을 바라보며 살아오는 너에게도
잔주름이 생겼구나
이번 휴가 땐
성형외과에 같이 가자꾸마
-「구두」전문
우리가 소지한 사물 중에 아마 구두만큼 고생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물건에게까지 애정을 느끼는 사람은 흔치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그만큼 각박하고 메마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오랜 세월을 함께한 구두를 보니 자신의 얼굴만큼이나 주름져 있다. 여기서 시인은 과거에 떠나보낸 신발과 함께 곁을 떠난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그러다 우연히 자신도 구두처럼 낡고 구겨져 있음을 발견하고 다시 젊음을 찾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시의 내용은 단순하지만 독백체와 담화체를 적절히 섞어 오랜 세월을 함께한 구두에 대한 애정을 더욱 진실되게 표현하였다. 이 외에도「꽃잔디」에서는 ‘꽃잔디’처럼 형제를 많이 불려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친구야, 지금 만나자」에는 막역한 친구에 대한 애정이 잘 드러나 있다.
5. 삶에 대한 깊은 통찰
바쁜 일상에 쫓겨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날 거울을 보면 자신의 인생에도 가을이 왔음을 문득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란 누구나 늙는 것을 싫어한다. 우탁의 탄로가嘆老歌를 보면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듸 없다/ 져근덧 빌어다가 마리 우희 불니고져/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라는 늙음을 한탄하는 내용이 있다. 이를 보면 옛날 사람이나 현대 사람이나 늙음에 대한 부정적 감정은 동일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살펴보면 늙는다는 것을 무조건 배척하기만 할 일은 아니다. 삶의 나이테가 늘어갈수록 그만큼의 연륜이 쌓이고, 연륜이 쌓인 만큼 인생사에 대한 통찰도 깊어지기 때문이다.
문희봉 시인이 어느새 고희古稀를 맞았다. 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이르기 어려운 나이이기에 고희古稀에 상재한 시집『상처의 향기』에는 인생사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있는 시편들이 많아 새로웠다.
감자 한 상자 들여놓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진액이 상자 속에서
내를 이룹니다
봄바람, 여름 땡볕 아래 살 태우며
키워온 정성들인데 세월 앞엔 속수무책입니다
정신 희미해진
노모 요양원에 모셨습니다
날이 갈수록 기력이 약해지면서
감자 썩듯 몸이 오그라듭니다
얼굴에 푸른 반점 돋아나니
그걸 잡고 헤헤 웃습니다
쪼드라드는 오줌
가랑이 사이로 질질 흘립니다
여름 땡볕 아래 허리 휘도록 그러모은 자식들
뒷짐 지고 먼 산 바라볼 때
다이어트 된 감자 한 상자
울다가 울다가 웃었습니다
-「감자 한 상자」전문
인생의 가을을 맞으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슬픔으로 다가온다. 위의 시는 늙어 바짝 마르고, 기력이 약해지고, 정신마저 온전하지 않았던 어머니에 대해 무심했던 아들 중 한 사람으로서의 회한을 그린 시이다. 감자에 인격을 부여하여 노모와 감자를 동일화하고 <감자 썩듯 몸이 오그라듭니다/ 얼굴에 푸른 반점이 돋아나니/ 그걸 잡고 헤헤 웃습니다/ 쪼그라드는 오줌/ 가랑이 사이로 질질 흘립니다>와 같은 사실적 묘사를 통해 소름이 돋을 만큼의 애상을 느끼게 한다. 또한 <여름 땡볕 아래 허리 휘도록 그러모은 자식들/ 뒷집 지고 먼 산 바라볼 때/ 다이어트 된 감자 한 상자/ 울다가 울다가 웃었습니다>와 같은 풍자와 냉소를 통해 이제야 진하게 다가오는 과거에 대한 진한 회한을 느끼게 한다.
인생에 대한 통찰이 담겨있는 문희봉 시인의 또 다른 작품을 살펴보면,
작은 키로 까치발 섰다가
약한 몸으로 바람에 휘둘리다가
이제사 구실 하는가 했는데
흐르는 세월이 성한 몸
삭신 아프게 하였다
뒤돌아보면 길지 않은 삶
잃은 것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바람처럼 다가오는 세월에 안겨 보고
구름처럼 멀어지는 세월에 투정도 해봤다
어지러운 세상 빗질하다 보니
꽃 피워 한 세월 일으켜 세웠고
꽃 지며 한 세월 접는 것도 익혔다
날 세운 칼바람이 강하다 한들
허리 꺾지는 못 한다
삭막한 세상 모두 감싸고
살아온 세상 그래도 아름다웠다
시간과 더불어 빛은 시들기 마련
기우는 몸 만신창이 된다 해도
오늘도 성글어진 벌판에 서서
-「갈대」전문
시인 자신이 갈대가 되어 지나온 삶을 회고하는 시이다. 약한 존재로서 고난에 휘돌리다가 자부심을 느낄 만 했는데 다시 세월에 상처 입은 몸이 되었지만, 잃은 것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는 깨달음을 통해 시인의 긍정적 가치관이 나타나 있다. 그런 가치관을 가졌기에 <어지러운 세상을 빗질하다 보니/ 꽃 피워 한 세월 일으켜 세울> 수 있었고, <삭막한 세상 모두 감싸고/ 살아온 세상 그래도 아름다웠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희봉 시인이 고희古稀가 되어 깨달은 세상은 때로는 고통스러웠지만 결과로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지나온 삶을 회상하며 아름다운 삶이었다고 확신을 갖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신석리에서 태어나 단란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눈부신 질주」「신바람」과 같은 시에서처럼 신바람 나게 인생을 살았다. 교육계에 투신하여서는 수많은 동량들을 길러내었으며, 장학사, 교감, 장학관, 교장 등의 임무를 과오 없이 완수하였고. 시인, 수필가가 되어 대전문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할 수 있었다.
되돌아보면 그의 인생은 분명 성공한 인생이다. 이는 바람 속에서도 꽃을 찾아내는 그의 긍정적 가치관이 이룩해 낸 눈부신 성과이다. 이런 마음으로 빚은 시이기에 그의 시를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6. 유장한 리듬으로 직조織造한 삶의 파노라마
위에서 문희봉 시인의 시는 편안하다고 했다. 시의 내용이 환해서 편안하고, 시의 리듬 또한 유장해서 편안하다.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하고 밝은 그의 인생사가 급할 데 없는 시조창의 가락처럼 늘어져 짜여졌는데 불안하고 불편한 그늘이 머무를 곳 어디 있겠는가.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고, 불행 속에서도 행복을 찾아내는데 세상의 응달인들 어찌 양달로 바꾸지 못하겠는가.
딱따구리가 참나무 옆구리를 쫀 흔적이 깊게 패였는데
그 속에 어린 생명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딱딱 똑똑
큰 공사 벌이는 소리
새벽 공기를 가른 일이 한두 번이었던가
그곳에서 세상구경 시작한 딱따구리들이
고향집을 찾아왔나 보다
많은 식솔 거느린 증조모 뻘 되는 노조老鳥
희색이 만연하다
내 옆구리에도 절벽 같은 육아 흔적
풍란이 자란다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
매운 풍란의 향기 진하게 풍겨
절벽을 다독인다
아득한 거리에 마주한
상처의 향기가 곱다
-「상처의 향기」전문
문희봉 시인의 시는 상처에서도 향기가 난다. 상처 난 옆구리에서 새 생명이 자라서 향기가 나고, 수많은 가족들이 뒤엉겨 함께 살아서 향기가 난다. 절벽 같은 상처에 풍란을 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문희봉 시인이 원천적으로 품고 있는 따스함이다. 그의 삶의 무늬는 늘 밝은 태양빛이고, 그의 삶의 향기는 늘 은은한 풍란의 향기이다. 그는 시집『상처의 향기』에서 유년 시절부터 고희古稀에 이르기까지 삶의 파노라마를 유장한 산문적 운율로 직조해 내었다. 그의 시는 이 편안한 리듬으로 오히려 생명력을 얻었다. 이는 첫 시집『지천명의 노래』에나 두 번째 시집『천리향』, 세 번째 시집『일출』에서도 올곧게 지켜가는 자신 만의 길이다. 응축과 절제의 시로 으스대는 시의 풍조 속에서 산문처럼 풀어 쓰는 시의 정절을 지켜가기에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겠는가. 그러나 이 시인의 시적 형상화 방법은 유장한 목소리가 그의 시에 가장 어울리는 형식적 미학이기에 나는 이 시인의 시적 정절을 오래도록 지켜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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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기울어져 가는 집안의 넷째
어머니가 소파수술비만 마련했어도
나는 세상에 없을 아이
흙만 가지고 놀아도
키가 자라지 않아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아이
밟히고 밟혀도 끄떡없는 아이
다산성 엄마는
오늘 또 동생을 낳았다
울타리 밑에 형제들 모이면
동네 사람들도 함께 모여
인물 좋다고 형제애가 남다르다고
한여름 우리가 걸어간 거리는
두 뼘도 안 된다
내 키는 작고 옆으로만 퍼져서
볼품이 없지만
엄만 날 사랑했다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벽에 기대 오줌을 누었다
그 때마다
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 「꽃잔디」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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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희봉 시인∥
ㅇ충남 당진 출생, 호는 夏情
ㅇ공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ㅇ충청남도교육청 장학관, 중등학교장 역임
ㅇ공주대학교교육대학원, 중부대학교, 우송대학교 출강
ㅇ‘월간에세이’ 수필 추천(1988)
ㅇ‘한맥문학’ 시 추천(1989)
ㅇ‘다시올문학’ 평론 추천(2009)
ㅇ한국문인협회인문학콘텐츠개발위원
ㅇ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ㅇ대전수필문학회 회장 역임
ㅇ대전광역시문인협회 회장 역임
ㅇ한국문화예술진흥원 우수작가 수혜(1994)
ㅇ한국현대수필작가 100인 선정(교음명작신서)
ㅇ한국현대수필가 100인 선정(수필과비평사·좋은수필사)
ㅇ素雲문학상, 大田문학상, 眞露문학상, 대전광역시문화상(문학) 등 수상
ㅇ제1시집 ‘지천명의 노래’(2003)
ㅇ제2시집 ‘천리향’(2005)
ㅇ제3시집 ‘일출’(2011)
ㅇ제4시집 ‘상처의 향기’(2016)
ㅇ제1수필집 ‘작은 기쁨, 큰 행복’(1994)
ㅇ제2수필집 ‘감나무 위에서의 명상’(2001)
ㅇ제3수필집 ‘페달을 밟으며’(2007)
ㅇ제4수필집 ‘아마릴리스’(2009)
ㅇ제5수필집 ‘수채화 같은 세상’(2011)
ㅇ제6수필집 ‘자연이 들려주는 오케스트라’(2015)
ㅇ제7수필집 ‘겨울이 춥지 않은 이유’(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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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희봉 시인님 '상처의 향기' 제4시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짝짝짝!!!
<상처의 향기> 제4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참 열정이 많으신 선생님 부럽습니다
제 4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