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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한상원목사
우리들만이라도 행복하게 살아봐요 = 역대상2;13-17(180617)
PW : 믿음 BIW : 행복하라 AG : 스루야 & 아비가일
TS : 믿음이란 하나님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행복이란?
“남자한테 정말 좋은데,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네.”
이렇게 광고했던 모기업 대표가 방송에서 강의를 하면서 자기는 아직 행복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에 진행자가 ‘행복은 무엇이라고 정의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대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행복이란 자신이 정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현재 직원이 440여명인데, 그들 통장에 각각 5억원씩 넣어줄 수 있을 때 나에겐 행복이고 성공한 삶이다.”
행복이나 성공이란 개념은 각자가 추구하는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했을 때 비로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행복하고 성공하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에 따라서 만족할 수 있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정도의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행복으로 시작해서 행복으로 살고, 행복한 삶으로 마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삽시다. 아멘
P4.
역대상2;13-17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새는 맏아들 엘리압과 둘째로 아비나답과 셋째로 시므아와 넷째로 느다넬과 다섯째로 랏대와 여섯째로 오셈과 일곱째로 다윗을 낳았으며, 그들의 자매는 스루야와 아비가일이라 스루야의 아들은 아비새와 요압과 아사헬 삼형제요, 아비가일은 아마사를 낳았으니 아마사의 아버지는 이스마엘 사람 예델이었더라.”
위의 말씀에 의하면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7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사무엘상16;10-11에서는 막내아들 다윗을 포함해서 8명의 아들을 낳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새가 낳은 아들은 본래 8명이었지만, 아들 하나가 일찍 병사(病死)당했거나 실종(失踪)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역대기상에서는 7명의 아들의 이름만 기록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이새는 8명의 아들 외에 2명의 딸을 낳는다.
이새가 낳은 두 딸의 이름은 스루야와 아비가일이다.
오늘은 이새가 낳은 두 딸의 이야기이다.
이새의 두 딸은 아무래도 다윗이 막내아들이기 때문에 다윗의 누나인 것으로 보인다.
누나들이 낳은 아들들이 다윗의 훌륭한 장군들이 된 것만 봐도 누나들이 낳은 아들들이 다윗과 비슷한 연배가 아닐까 싶다.
첫째 딸 스루야는 아비새와 요압과 아사헬을 낳았고, 둘째 딸 아비가일은 아마사를 낳는다.
아비가일의 남편이요 아마사의 아버지는 이스마엘 사람 예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곧 아비가일은 이방인과 결혼하여 아마사를 낳은 것이다.
스루야가 낳은 3아들이나 아비가일이 낳은 아마사는 다윗 왕의 최측근에서 다윗 왕과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 위대한 장군들이다.
아비새와 요압과 아사헬과 아마사는 막내 외삼촌 다윗을 주군으로 최측근에서 모시면서 다윗 왕국을 건설하는 데에 1등 공신이 된 사람들이다.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벗어나서 블레셋 땅 가드의 아기스 왕에게 망명가게 된다.
다윗은 블레셋 땅에서 미친 척하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유대 땅 아둘람 굴에 들어가서 숨어 지내게 된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접한 다윗의 가족들은 사울 왕의 핍박을 피해서 다윗이 숨어 있는 아둘람 굴로 하나둘씩 몰려들게 된다.
400여명의 무리들이 다윗을 찾아와서 함께 지내게 된다.
이 때 다윗의 누나들도 자기 가족들을 거느리고 아둘람 굴로 찾아와서 다윗과 합류하게 된다.
이때부터 다윗의 누나들이 낳은 아비새, 요압, 아사헬, 아마사는 다윗과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면서 다윗왕국을 건설할 수 있는 주춧돌이 된다.
사울 왕이 블레셋족속과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고, 유다지파를 중심으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울 때 누나의 아들들이 공을 많이 세우게 된다.
유다지파 사람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울 때, 다윗의 형제들, 누나들의 가족들이 큰 힘이 되어주고 방패막이가 되어준다.
사울 왕이 죽은 다음에 이스라엘에서는 아브넬 장군이 사울 왕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고 군대장관이 되면서 이스라엘 나라가 이스보셋의 나라와 다윗의 나라로 갈라지게 된다.
두 나라로 갈라진 이스라엘은 내전이 계속 일어나게 된다.
내전이 계속 되어지는 과정에서 스루야 여인의 막내아들 아사헬은 아브넬을 죽이려고 쫓아가다가 도리어 아브넬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아브넬 장군과 이스보셋 왕 사이에 관계가 좋지 않은 관계로 틀어지면서 아브넬 장군이 다윗 왕에게 찾아와서 이스라엘 나라를 다윗 왕에게 바치겠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서 요압 장군은 자기 동생 아사헬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아브넬 장군을 죽이게 된다.
이새의 딸들, 다윗의 누나들, 스루야와 아비가일 여인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과연 이 여인들의 삶은 행복했을까? 아니면 불행하게 살았을까?
D4.
① 이새의 딸로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스루야와 아비가일을 세상으로 보내주실 때, 이새의 딸들로 태어나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속사역을 위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을 통해서, 유다의 후손을 통해서, 이새의 후손을 통해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세계를 펼쳐 가시는 구원의 계획을 세우신다.
하나님은 스루야와 아비가일을 이 땅으로 보내실 때, 하늘 아버지께서 세우신 구원의 계획도를 따라서 이새의 딸로 태어나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가지신 구원의 계획에 동참할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을 주신다.
스루야와 아비가일이 다윗의 누나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온갖 모략을 할 때,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윗의 누나로 태어나서 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을 때, 자동적으로 다윗의 형들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누나들의 가족들까지도 사울왕의 표적이 되어서 온갖 핍박을 당하게 된다.
사울 왕이 점점 더 악하게 핍박해 올 때, 다윗의 형제들은 자기 가족들을 거느리고 아둘람 굴로 찾아와서 막내 다윗과 합류하면서 다윗과 동고동락을 함께 나누고 다윗의 사람들로 세워지게 된다.
② 다윗의 편에 서서 다윗왕국의 주춧돌이 되어가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다윗의 왕국을 통해서 통일 이스라엘왕국을 건설하려고 하신다.
아둘람 동굴로 모여든 군사들은 400여명이라고 한다.
이 400여명이라는 사람들은 군사들만 400여명이라는 말씀이다.
곧 400여명의 군사들에게는 α라는 식솔들이 포함된다.
어쩌면 400여명의 군사들보다 α가 더 많을 수 있다.
α에는 군사들의 부모님들, 아내들, 누이들, 자식들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윗의 주변에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다윗의 군사들은 400여명에서 600여명으로 확장되어진다.
그러니 α도 더 많아지는 것이다.
이들이 다윗 왕국의 주춧돌, 기초석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여기에 모인 군사들이 다윗이 세상을 떠나 하직할 때까지 다윗의 충직한 신하요 장군이요 군사들이 되어주는 기둥 같은 사람들이다.
기둥 같은 사람들 중에 스루야의 아들들과 아비가일의 아들이 대표적인 중심인물이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와 요압과 아사헬, 그리고 아비가일의 아들 아마사까지 다윗군사들의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장군들이 되어서 다윗을 도와서 통일왕국을 건국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새의 딸로 태어난 스루야의 아들들, 아비가일의 아들을 통해서 다윗왕국을 건설하고 계신다.
스루야의 아들 아사헬은 일찍 죽었지만, 요압은 항상 군대장관, 총사령관의 위치에서 다윗왕국의 중심부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다윗 왕을 보좌하게 된다.
③ 그러면 스루야와 아비가일은 과연 행복한 여생을 보냈을까?
스루야와 아비가일은 다윗이 유대의 왕,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왕의 누이들이 된다.
그러면 스루야와 아비가일은 왕의 누이들이 되었기 때문에 과연 행복했을까?
스루야의 첫째 아들 요압은 다윗 왕국의 군대장관이 된다.
아비새는 군대장관인 형 요압을 보좌하면서 다윗의 30명의 친위대의 한 사람으로서 전쟁할 때마다 큰 전공을 세운 장군이다.
스루야 여인은 자기 아들들이 권력의 중심부에 있고, 막내 동생은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스루야 여인을 함부로 대항하지 못하는 권세를 누리게 된다.
어쩌면 날아가는 독수리도 떨어뜨릴 만큼 대단한 권력을 지닌 여인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을 한 손에 쥔 여인들, 권력을 한 손에 쥐면 과연 행복할까?
물론 권력을 한 손에 쥐었기 때문에 행복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선거에서 승리하여 권좌를 차지하면 과연 행복할까?
잠시 동안은 행복의 극치를 달릴 것이다.
그러나 좀 있으면 더 많은 적들이 생겨나고, 처리해야 될 일들은 태산 같고, 밤잠 못자면서 고민하고 갈등해야 될 문제들로 가득차지 않나?
그 권력 때문에 피눈물 흘려야 될 때가 많다.
스루야와 아비가일도 자신들이 가진 권력 때문에 피눈물 흘려야 할 때가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스루야의 셋째 아들 아사헬은 아브넬을 죽이려고 쫓아가다가 도리어 아브넬에게 죽임을 당한다.
아사헬은 막내이기 때문에 스루야 여인에게는 그 무엇보다 애정을 쏟으면서 키운 아들인데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아사헬이 죽었을 때 스루야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피를 토해내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승승장구하던 김종서장군이 단종 때에 수양대군에 의해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듯이, 요압장군은 다윗왕의 군대장관, 국방부장관의 권세를 누렸지만, 다윗의 노년에 반란을 일으키는 아도니야 편에 서게 되면서 솔로몬 왕으로부터 죽임을 당한다.
다윗 왕이 연로해지면서 압살롬이 아버지 대신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은 아비가일의 아들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세워서 아버지 군사들과 전쟁하게 된다.
압살롬은 긴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사람인데, 노새를 타고 상수리나무 숲을 지나가다가 긴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려서 노새는 지나가버리고 압살롬은 상수리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다.
요압장군은 상수리나무에 매달린 4촌 압살롬을 죽이면서 압살롬의 반란군은 진압되어진다.
압살롬이 죽임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온 다윗 왕은 아마사장군에게 압살롬의 편에 섰던 군사들을 독려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고 한다.
요압장군은 군사들을 독려해서 돌아오는 아마사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삼하20;8-10, 왕상2;5)
다윗의 왕국,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다윗 가문의 혈족들 사이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압살롬은 이복 형 암논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죽임을 당하고, 요압이 이종사촌지간인 아마사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도니야도 아버지 다윗을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죽임을 당한다.
다윗의 가계에서 형제들, 친족들 사이에서 서로 죽이고 죽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요인은 권력에 중심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권력의 중심부에 있지 않았다면 서로 죽이고 죽이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스루야 여인이나 아비가일 여인은 이새라는 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아들들 사이에서 서로 죽이고 죽여야 되는 참혹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과연 행복한 여생을 보내다가 하늘 아버지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셨을까?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스루야와 아비가일은 피눈물 흘리면서 가슴앓이를 해야 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스루야와 아비가일은 어쩌면 살아가는 동안 내내 가슴앓이를 하면서 불안하고 초조하고 온갖 염려 속에 살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권력 속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내야 하는지를 절실하게 느끼며 하나님께서 보내주신다는 메시야를 기대하며 살았을 것이다.
스루야와 아비가일 두 자매는 ‘이 세상의 권력, 권세는 한낱 잠시 있다가 흔적없이 사라져버리는 안개와 구름과 같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제는 오직 하늘 아버지를 믿는 믿음으로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하늘 아버지께서 보내실 메시야를 기대하며 영원한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열망으로 살았을 것이다.
세상이 주는 권세, 권력, 권좌가 결코 우리들의 삶에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에서 고통과 시름과 아픔으로 채워지는 불행을 보장할지도 모른다.
이번 선거에서 우리들이 지지하는 어떤 후보가 떨어졌다면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우리들이 지지하던 어떤 후보가 당선이 되었다면 그 후보가 초심견인하는 자세로 자신이 내세운 공약대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 한다.
L4 & B4.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악하다.
악할 때로 악한 세대이다.
악할 때로 악해진 세상에서 권력의 유혹에서 이겨낼 수 있도록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권력의 세계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정적이 될 수 있는 그 누군가는 반드시 죽여야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죽여야만 되는 세계이다.
먼저 정적을 죽이지 않으면 그 정적에 의해서 도리어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먼저 정적을 죽여야만 되는 냉혹한 세계이다.
이런 서로 죽이고 죽이는 피의 전쟁, 살육의 역사는 정치세계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사건들이지 않나 싶다.
우리나라 조선의 역사에도 보면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해서 친형제, 이복형제들을 죽인다.
수양대군에 의해서 계유정란 사건으로 인해서 수많은 충신들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조선시대에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정적(政敵)들을 쳐내기 위해서 계속 피비린내 나는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오늘날의 정치세계에도 적폐청산, 친일파청산이라는 미명아래 건국대통령을 비롯해서 자신들의 반대쪽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있는 실정이다.
정권, 권력이라는 인간의 탐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정적(政敵)들을 무참히 죽이는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이런 냉혹한 세계를 살아야 되는 현실에서 이들은 과연 행복한 인생일까?
물론 행복한 인생인가? 불행한 인생인가? 하는 것을 하루 이틀의 삶으로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는 없다.
어떤 때는 행복한 인생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불행한 인생일 때도 있다.
사람들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웃을 때도 있는가하면 울 때도 있게 마련이다.
스루야와 아비가일의 아들들은 다윗 왕국의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장군들이다.
권력의 가장 중심부에 서 있는 사람들이 스루야의 아들들, 아비가일의 아들이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세계에서 살아야 되는 스루야와 아비가일은 과연 행복하게 살았을까?
오늘날 정치세계에서 내가 먼저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상대방이 나를 죽일 수 있는 냉혹한 세계에서 내가 먼저 상대방을 죽여야만 되는 현실세계에 살아가는 정치인들은 과연 행복할까?
치열한 권력암투는 나라와 민족의 정치세계는 물론이거니와 죄인인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난다.
직장에서, 생업터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암투에서 살아남아야만 성공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가장 신선하고 거룩해야만 되는 교회에서도, 교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쩔 수 없는 죄인들이 모여서 살아야 되는 사회라는 공동체에서는 서로 약간씩만 양보하고 뒤로 물러서면 다함께 행복하고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양보하거나 뒤로 물러서려고 하지 않는다.
조금만 양보하거나 뒤로 물러서면 마치 자기가 바보취급당하고, 패배자가 되는 것 같아서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다.
마치 양보하면 패배자가 되었다는 수치심을 느껴서 좀처럼 양보하거나 뒤로 물러서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런 냉혹한 세계를 살아야 되는 사람들은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과연 우리들은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권력을 한 손에 쥔 사람이든, 권력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는 사람이든,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었든지 간에 사람은 행복하려고 사는 것이다.
불행하게 살려고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난 불행해지고 말거야. 나 말리지 마! 난 반드시 불행해지고 말거니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모든 사람들은 똑같지는 않지만 자기 나름대로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행복하게 살려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자녀를 양육하고, 돈을 버는 것이다.
불행하게 살려고 결혼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불행하게 살려고 자식을 낳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불행하게 살려고 열심히 일하면서 돈 버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불행하게 살려고 자신이 꿈꾸는 목표와 목적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어쩌다가 간혹 이런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려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다.
행복하게 살려고 자신이 정해놓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고 실적을 올린다.
행복하게 살려고 자신이 꿈꾸는 목표를 향하여 쉬지 않고 달려가는 것이다.
우리들은 행복하게 살려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성삼위 하나님을 믿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위하여 신앙생활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일꾼이 되고,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면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바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열심히 믿음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불행하게 살려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들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믿음으로 힘든 과정을 이겨내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들이 힘들고 어려운 고난과 역경과 시련을 믿음으로 견디면서 이겨내는 것은 행복하게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이다.
비록 오늘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행복한 내일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자녀, 행복한 하나님의 일꾼, 행복한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 믿음 위에 믿음의 탑을 하나하나 쌓아가면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가는 것이다.
믿음의 대선배이신 모세를 통해서 이렇게 선포하고 계신다.
신명기33:29에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항하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러주고 계신다.
하나님은 시편1;1-3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너는 복 있는 사람”이라고 불러주고 계신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을 향하여 복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러주고 계신다면 우리들은 누가 뭐라 해도 복 있는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다 부러워할 정도로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다 행복한 사람도 아니고, 다 불행한 사람도 아니다.
평생 먹고 먹고 먹고 계속 먹으면서 살아도 남을 만큼 엄청난 재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다 행복한 사람도 아니고, 다 불행한 사람도 아니다.
평생 골 골 골 하면서 허약체질로 종합병동과 같이 온갖 질병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해도 다 불행한 사람이 아니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수없이 많다.
뇌성마비로 태어나서 장애인으로 자란 송명희 시인은 자기 자신은 하늘의 신령한 세계를 보고 들을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예쁘게 자라면서 고등학생 때 교회성가대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던 김지선 자매는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전신화상을 입고 몇 번에 걸친 수술과정을 통해서 얼굴이 이글어졌지만, 전신화상을 입기 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지금이라도 교통사고 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니다. 지금이 더 행복하고 좋다.”라고 말한다.
하루 벌어서 하루 살아가는 하루살이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사람들은 최극빈 국가로 알려진 방글라데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런가하면 가장 불행지수가 높은 사람들은 의식주문제에 전혀 걱정 없이 살아가는 서구 구랍파 사람들이라고 한다.
최극빈 국가로 살아가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자살하는 비율이 아주 적지만, 먹는 것에 넘쳐나는 서구 구랍파 사람들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살율은 매우 높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회원국 중에서 가장 높아서 1위이다.
대통령을 했던 사람까지도 자살해서 영웅이 되는 나라이다.
그러면 왜 자살할까? 행복하니까 자살할까? 불행하다고 느껴지니까 자살할까?
행복하니까 자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무언가 불행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토끼풀이라는 세 잎 크로바는 행복이라는 의미를 가진 식물이다.
세 잎 크로바는 어디에도 널려있는 잡초이다.
세 잎 크로바는 너무 많아서 농사하는 농부들이 귀찮아하는 잡초이다.
곧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면 행복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것들이 다 행복이라는 것이다.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행복하고, 잠을 잘 수 있는 것도 행복하고, 멋지고 예쁜 옷을 입을 수 있는 것도 행복하고, 배울 수 있는 것도 행복하고, 걷을 수 있는 것도 행복하고,...
행복이 아닌 것이 어디에 있던가?
그런가하면 행운을 상징하는 네 잎 크로바는 반드시 세 잎 크로바 속에 끼여 있다.
네 잎 크로바는 잘 보이지 않아서 찾지가 쉽지 않다.
찾기가 쉽지 않지만 네 잎 크로바는 반드시 있다. 네 잎 크로바는 있는 곳에 또 있다.
네 잎 크로바는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는다. 네 잎 크로바를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이 말은 곧 행복 속에 행운이 끼여 있다는 것이다.
행복 속에 끼여 있는 행운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그 행운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모든 것들을 행복하다는 생각과 마음으로 살면 행복한 사람이 된다.
믿음의 사람은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다.
믿음은 행복이다.
믿음은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목이다.
믿음은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믿음은 행복을 추구하는 자의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믿고 신뢰하고 의뢰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 신앙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 우리의 주님,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요 도움처가 되시는 성령 하나님은 우리들이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 행복한 일터, 행복한 사회, 행복한 나라가 되는 것을 가장 좋아하시고 기뻐하시고 원하신다.
우리들이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들은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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