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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강의를 옮겨 적었습니다.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모두 어제일만 같은데, 벌써 아홉달이 되었습니다.
이곳에 와서 심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교수님에 대한 고마움은 말할 것도 없고, 도반님들 덕분입니다.
이번 강의는 교수님 말씀대로 공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강의입니다.
공부하시는 도반님들은 반드시 알아야할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실 전부터 반드시 옯겨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공부를 위해서도 하나하나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하고, 한꺼번에 조망하여야 할 부분도 있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나 게을러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이번에 마도로스님께서 제가 올린 ‘사성제에 대하여(공부는 왜 하는가?)’를 보시고, 그 출처를 바로 떠올려 11강을 올려주시니, 역시! 하고, 기쁜 마음으로 옮겨적기 시작했습니다.
틈틈이 들으며 그때그때 뜻을 새기고 여러날 옮겨적었는데, 전의 강설 말씀도 그랬지만, 뺄 내용이 하나도 없고, 모두 보석같이 중요한 말씀이라서, 강의 전체를 거의 그대로 옮겨적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 것이라고는 그저 보시기 편하게 간단한 정리 2개(전에 정리한 것1개 포함)와 목차로 구분한 것 뿐이라 할 것입니다.
목 차
[1] 강의에 들어가기 전 (불교 수행의 목표)
[2] 아비달마고샤바샤 (Abhidharma Kośa Bhāsya 아비달마구사론)
[3]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번뇌의 소멸이다.
[4] 불교의 깨달음은 연기의 자각이다.
[5] 깨달음의 핵심인 사성제와 번뇌
[6] 무엇이 번뇌인가?
[6]-1. 번뇌를 크게 나누면 2가지이니, 견혹과 수혹이다.
[6]-2. 번뇌를 작게 나누면 열가지이니, 탐·진·만·치(무명·의·유신견·변집견·사견·견취·계금취)이다.
[7] 사문사과 (沙門四果)
[8] 번뇌(견혹 고집멸도4부 + 수혹 1부)와 수행(견도 + 수도)
[9] 구사론의 수행단계
[10] 구사론의 수행론인 차제증(次第證)과 초월증(超越證)
[1] 강의에 들어가기 전 (불교 수행의 목표)
불교 수행의 목표는 번뇌 제거다.
어떻게 해야 어떤 번뇌가 제거되는가?
이런 불교 수행하는 관점에서 볼 때, 전체 20번의 강의중 가장 중요한 강의이다.
[2] 아비달마고샤바샤 (Abhidharma Kośa Bhāsya 아비달마구사론)
구사론은 번뇌가 무엇이고 어떻게 끊는지?
지금으로부터 1700년 전에 세친 스님께서 아주 구체적으로 문자로 정리한 문헌으로,
이걸 정확히 해석할 경우,
누구든지 아라한까지 될 수 있는 수행을 할 수 있다.
아비달마고샤는 아비달라교학의 창고라는 뜻이다.
600수의 게송 해설집이다.
초기불교 부처님의 가르침 전체를 설일체유부의 관점에서 체계화 시켜 놓은 책이다.
설일체유부는 "일체"가 존재한다. 라고 설하는 실재론의 부파가 아니라,
"일체의 법"이 존재한다. 고 설하는 부파이므로, 정확하게 말하면 설일체법유부라 해야 한다.
법(Dharma)이란, 세상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이다.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사대(四大) 등이 모두 법이다.
이런 법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나나 컵, 이런 것이 실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즉 리얼리즘(실재론)과 전혀 무관하다.
법(Dharma)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법이다.
법(Dharma)이란, 거짓이 아닌 진실이란 의미의 진리가 법이다.
법(Dharma)이란, 법 비법할 때의 옳음도 법이다.
번역할 때는 문장 맥락에 따라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판단하여 번역해야 한다.
설일체법유부의 법은 다 해당되지만, “구성요소”의 성격이 가장 강하다.
부처님께서 분류하신 세상 구성요소다.
설일체유부의 교리는 이 부파에서 고안해 만든 교리가 아니라,
초기삼장인 아함경(장아함 중아함 잡아함 증일아함)과 니까야(장부 중부 상윳따 증지부 꾸닷가=잡부)의 가르침을 정리한 것이다.
소승이든 대승이든 금강승이든, 항상 초기삼장을 가장 중시하여, 무엇을 주장하든 초기삼장에 근거한 것임을 주장하였다.
이 초기 삼장 경율론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설일체유부의 논서인 아비달마구사론인 것이다.
구사론의 설명들을 초기삼장에서 다 찾을 수가 있다.
산설된 초기삼장의 가르침을 누구나가 알 수 있게 정리한 게 구사론이기 때문이다.
구사론에서는 법(Dharma)을 5위 75법으로 말한다.
5위 75법으로 나눔은
불교 수행할 때 세상을 이해할 때 윤회 해탈을 얘기할 때,
도대체 세상에 무엇이 있는 지를 알아야지만,
무엇이 윤회이고, 해탈이고, 어떤 것이 세상이고 어떤 것이 수행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5위 75법은 인도불교를 다시보다 10강에서 강설하셨습니다.)
[3]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번뇌의 소멸이다.
불교수행에서 깨닫는다고 할 때 절대 착각하지 말 것이,
깨달은 어떤 경지가 있다. 남이 모르는 걸 난 깨달았다 이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는데 너희들은 모르지 할 때 교만심이 생긴다.
이런 불교관을 갖으면 교만하게 된다.
이건 불교가 아니다.
그럼 깨달음이 뭐냐? 할 때. 그냥 번뇌의 소멸이다.
걱정 없어지는 것, 아주 단순하다. 잘나든 못나든 바보든 똑똑하든 관계가 없다.
그냥 번뇌 없어지는 것이다.
번뇌는 두가지다.
인지적 번뇌와 감성적 번뇌, 둘 다 제거하면 끝이다.
뭐가 되고 신통력이 열리고 이것 상관없다.
체험 등 유위법은 다 조건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은 지우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해탈과 다른 종교의 차이점이다.
다른 종교는 무엇이 되는 것을 말한다. 깨닫고 나면 뭐가 되는 걸로 안다.
나는 이걸 아는데 모른다고 자꾸 말하면서 현혹한다.
그거 아니다.
가르침을 전해주어 상대가 도움받아 인지가 열리고 감성이 정화되고, 이러면 불교를 전해준 것이다.
그게 아니고 깨달음이 이런 건데, 너희도 오라 할 경우에 이건 절대 아니다.
사성제에서 번뇌를 멸하니, 고가 멸하더라 아주 단순하다.
이렇게 불교의 깨달음은 번뇌의 소멸이다.
[4] 불교의 깨달음은 연기의 자각이다.
붓다 깨달음의 핵심이 사성제다.
색계 사선(호흡이 끊어져야하기에 어려움)에서 삼명을 통해 인과응보를 보신 것, 연기를 자각한 것이고,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초선미지정(初禪未至定) 초선 바로 직전에서 머리굴려 분별로 중론에 대해 확실하게 파악할 때 깨달았다 한다.
나에게 동물적 욕망(오욕)만 빠지면 순수하게 사유하게 된다.
곰곰이 생각하는 것!
삼매가 본질이 아니기에 잡념 없어지는 첫단계인 초선미지정에서 깨달으면 된다.
중론이 연기론이지만,
연기에 대한 이해를 재생산하는 아주 희한하게 방식으로 저술된 문헌으로,
이거구나 하면 치고, 저거구나하면 쳐서 놔버리게 하는 연기적 문장 서술을 통해,
공성을 알게 하는 것이 중론인데,
이걸 정확히 파악할 경우에 연기를 안다. 연기법이 무엇인지를 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이 연기이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다 연기한다. 생각이든 감정이든 모든 것은 다 연기한다.
이게 불교의 핵심이기에 모든 게 다 연기하니까 실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이 다 무너진다.
본래무일물, 지금 이순간도 아무것도 없다.
엄밀히 보니 다 머리가 만든 것이고, 다 연기한 것이고, 그게 깨달음이기에,
꼭 부처님처럼 제 4선까지 올라가서 호흡을 멈추고 전생 기억이 나서 깨달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초선미지정상태에 들어가 연기를 자각하면 가장 쉽다.
또 연기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써놓은 문헌이 지금 남아 있는 게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다.”
이게 연기법이다 하지만, 그거 갖고 연기 모른다.
왜냐하면 말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말로 표현된 어떤 연기도 진짜 연기가 아니다.
그런데 중론이라는 것을 한번 보면,
“연기에 대한 이해가 영원히 재생산될 수 있게끔” 저술되었다.
참으로 희한한 테크닉의 저술이다.
그래서 티벳불교에서는 “초선미지정에서 중론을 보라.” 한다.
[5] 깨달음의 핵심인 사성제와 번뇌
고통을 없앨려면 번뇌를 제거해야 하고,
번뇌(탐진치만)를 제거할 때, 무상고무아인 신수심법에 집착하지 않기에 편안해지니 열반이다.
그리고 집성제의 통찰대상인 번뇌를 없애는 수행이 팔정도 즉 계정혜인 도성제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핵심이자 다른 종교에는 없는 유일한 교리가 이 사성제인데, 번뇌는 집성제에 들어간다.
고성제,
잡지 말라.
종교수행 체험도 없으니 잡지 말라.
어떤 것도 무상·고·공·무아(不淨·苦·無常·無我)이기에,
부정·고·무상·무아(無常·苦·空·無我)는
(因)원인이 있고, (集)여러 가지가 모여서 만들어지고, (生)발생하는 것이고, (緣)조건이 있다.
이게 집성제다.
인·집·생·연(因·集·生·緣)하는 게 번뇌다.
번뇌(貪·瞋·痴·慢) 때문에,
신수심법에 대해서 탐·진·치·만(번뇌)으로 대하기에 고통스런 것이다.
몸이 더러운 것인데 깨끗한 줄 알고서, 이성의 몸이든지 거기에 음욕을 내고, 어떤 느낌도 고로 변하는데 느낌을 추구한다.
상대적인 행복은 한참 지나면 괴롭다.
적절하게 벗어나야 한다.
무엇이든 상대적인 락은 반드시 고로 변한다.
“수가 궁극적으로 고통이다.” 하는 올바른 통찰이 생긴다.
그러나 번뇌가 있으면 수(느낌)가운데 뭔가 행복한 게 있는 줄 알고, 탐욕 때문에 모른다.
즉 번뇌 때문에 고통에 빠져산다.
집성제에서 다뤄야할 대상이 번뇌다.
번뇌로 인해서 신수심법이 부정하고, 고이고, 무상하고, 무아인 것을 몰라 집착하여 고통에 빠져 산다.
만일 번뇌 즉 탐욕 분노 교만 우치가 없으면,
부정한 몸을 부정하게 보고,
괴로움인 느낌을 괴로움으로 보고,
무상한 마음을 무상하게 보고,
실체가 없는 법을 실체가 없게 보게 되어, 집착하지 않기에 괴로움이 없게 되는 것이다.
반면 번뇌 즉 탐욕 분노 교만 우치가 있으면,
부정한 몸을 깨끗하게 보고,
괴로움인 느낌을 즐거움으로 보고,
무상한 마음을 항상하게 보고,
실체가 없는 법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게 되어 집착하기에 괴로움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를 없애면 신수심법에 집착하지 않기에 괴로움이 없게 되어 편안해지는 것이다. (멸성제)
집성제인 통찰대상인 번뇌를 없애는 것이 수행이다. (도성제)
♣ 이상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四聖諦)
「신수심법을 신수심법을
정·락·상·아(凈·樂·常·我)로보아 집착 苦 부정·고·무상·무아(無常·苦·空·無我)로보아 무집착 고滅
번뇌 集 번뇌 무
삼학道 」
集 번뇌가 있어
신수심법을 정락상아(凈·樂·常·我)로 보아 집착하니 괴로움이요, 苦
道 삼학을 닦아
번뇌가 없어 신수심법을 무상고공무아(不淨·苦·無常·無我)로 보아 집착이 없으니 괴로움이 없다. 滅
[6] 무엇이 번뇌인가?
번뇌를 소멸하려면 번뇌가 어떤 게 있는지 알아야 한다.
소멸할 대상인 번뇌를 알아야 한다.
크게 나누면 두가지이고, 작게 나누면 열가지 근본번뇌이다.
[6]-1. 번뇌를 크게 나누면 2가지이니, 견혹과 수혹이다.
번뇌 중 어떤 게 견혹이고 어떤 게 수혹인가?
견혹은 사성제에 무지한 인지적 번뇌이고, 수혹은 견혹에 근거한 감성적 번뇌다.
그러므로 번뇌에는 인지번뇌(견혹) 감성번뇌(수혹)가 있는데, 인지 번뇌에 근거해서 감성번뇌가 생긴다.
이것이 핵심이다.
무명은 모든 것의 뿌리이기 때문에, 감성이나 인지 다 해당된다.
모든 번뇌에는 밑에 무명이 깔려 있다.
배경에 깔리는 무명을 서로 응하는 상응무명이라 한다.
다른 근본번뇌와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것, 수혹과 견혹에 상응하는 무명이다.
또 무명은 가장 강력하기에 이런 견혹 수혹과 별도로 무명이 있다.
공통되지 않는(不共) 별도로 무명이 작동되는 게 따로 있어 독두(獨頭) 무명이라 한다.
견혹 수혹과 무관하게 홀로 작동하는 무명(무지어리석음)이다.
고집멸도를 정확히 알 때, 체득했을 경우에, 번뇌가 없다.
번뇌는 5부가 있다.
번뇌 5부 (견혹4부 + 수혹1부)
견혹은 인지적 번뇌인데,
고에 대해 모르는 것, 집에 대해 모르는 것, 멸에 대해 모르는 것, 도에 대해 모르는 것, 4가지가 있고,
여기에 근거한 감성번뇌가 1개가 있어 수혹이라고 해서,
견혹과 수혹이다.
그러므로 사성제에 대해 모르는 것은 견혹에 들어간다.
감성번뇌를 수혹이라 한다.
모든 수혹은 견혹에 근거해서 수혹이 생긴다.
모든 수혹은 토대속에 먼 토대로서 견혹이 있다.
① 견혹 (4부)
사성제에 대해 모르는 인지번뇌는 견혹이다.
고집멸도를 그대로 보면 되는데, 잘못 보면 견혹이 생긴다.
친연(親緣)의 번뇌이니 직접 조건이 되는 번뇌다.
고집멸도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
달리 미리혹(迷理惑)이라 하니, 이치에 혼미한 번뇌다.
② 수혹 (1부)
견혹에 근거해서 또 수혹이 생긴다.
견혹이 먼저 있고, 인지적으로 잘못보아 탐욕이 생기고 분노가 생기고 교만이 생기기에 중연(重緣)의 번뇌다.
고집멸도를 잘못보아 견혹이 생기고, 다시 견혹에 근거해 수혹이 생겨 조건이 거듭되기에 중연의 번뇌라 한다.
미사혹(迷事惑) 직접적인 사태에 혼미한 번뇌다.
머리가 잘못된 게 아니고, 지금 눈에 보이는 것 먹을 것이라든지 식욕 탐욕중 하나, 누가 못된 짓하면 분노가 일어난다.
이런 것들로 인해 일어나므로 미사혹이라 한다.
[6]-2. 번뇌를 작게 나누면 열가지이니, 탐·진·만·치(무명·의·유신견·변집견·사견·견취·계금취)이다.
A. 탐욕(貪)
탐욕은 재물이든지 이성이든지 권력이든지 명예든지 돈이든지 먹이든지 이런 것들인데, 나를 향해서 잡아끄는 것이 탐욕이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이다.
탐욕에 두 가지가 있다.
욕탐 = 다섯가지 지각기관에 좋은 것들, 식·성·재·명·수면욕 오욕락에 대해 탐하는 것이다. 동물적 욕탐이다.
유탐 = 내생에 다시 태어나 존재하고 싶은 미세한 탐욕이다.
B. 분노(瞋)
분노는 화내는 것으로, 저리가 미워 죽어 없애버리는것, 나로부터 멀어지게 미는 게 분노이다.
수학의 벡터처럼 힘의 방향이 반대이다.
AB. 탐욕과 분노
탐욕의 반대가 욕심안내는 게 아니라 분노하는 것이다.
탐욕과 분노는 내가 있기에 생긴 것이다.
나라는 구심점이 있기에 잡아당기고 미는 것이다.
나에게 좋은 것은 깨끗하다 좋다면서 끌어당기고, 나에게 싫은 것은 더럽다 싫다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자아가 있다는 착각을 깨야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
무아이다.
자아가 사라질 때 구심점이 없어지기에, 잡아끌고 미는 마음이 없어지기에 점점점 약해진다.
먼저 무아부터 깨닫고 끌고 미는 것이 서서히 달라진다.
탐욕 많으면 부정관을 써야 하고,
분노 많으면 자비관을 써야 한다.
대지도론에서는 대치법을 바꿔 쓰면 안된다고 한다. 맞게 끔 대치법을 써야 한다.
C. 교만(慢)
교만은
잘났다 하면 명예에 대해 올라가므로 탐욕이고,
무시하면 분노이므로,
분노와 탐욕이 섞여 있는 것이다.
D. 우치(痴)
우치는
무명으로부터 계금취까지 7가지다.
① 무명(無明) = 사성제에 대한 무지
② 의(疑) = 사성제에 대한 의심
③ 유신견(有身見)
오온으로 이루어진 심신복합체에 변치 않고(常), 단일하며(一), 자유자재한 내가 존재(主宰)한다고 보는 착각이다.
자아가 없는 것, 즉 무아를 모르는 것이다.
④ 변집견(邊執見)
죽음 이후에
지금의 나와 같은 나가
내생에 그대로 어디에 태어난다는 견해(상견이고 무변견)와
죽은 뒤에 완전히 사라진다고 보는 견해(단견)가
변집견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영혼이 없다.
그냥 찰라생멸하는 주의력과 수반된 감각의 지각의 흐름만 있다.
일초에 75번을 진동하는 이게 실재다.
지금도 내가 살았다 죽었다 말 못한다.
누구든지 실재 나의 마음 그 자체는, 항상 나의 주의력이 주시하는 것만 느낄 수가 있다.
그게 너무도 빠르기에 동시에 보고 듣는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에서도 동시에 못한다고 말한다.)
내 마음에서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는지 보는 것을 익히는 수행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찰라찰라 변하는 그놈 보는 것이다.
그놈이 무상하고 무아인지를 보는 것이다.
그놈이 내생에 이동한다는 것이다.
어디로?
사람과 짐승의 경우엔 수정란 세포에 딱 달라붙는다.
몸이 다 사라지기에, 내생은 없어 끝났어 하는, 단견 유물론 허무주의도,
굵은 내가 있어 내가 내생에 어디로 간다. 영혼이 어딘가 들어가서는 다시 다음 생을 시작한다는 상견도,
다 틀렸다.
들불이 번지듯이 이동하는 듯 보이나 이동하는 게 아니고, 꺼지며 새로운 불이 붙는 것과 같은 것이 우리 마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그러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세포들 이런 것에 왔다 갔다 하면서 어디 한군데 머물지 않고서, 산만하게 이 몸을 관리하고 있는데, 그 방식 그대로 죽은 다음에 이어진다.
(단, 해탈열반 하지 못한 이상)
이걸 불교 전문용어로 상속(相續,싼타나santāna)이라 한다.
나중에는 무아와 무상에 입각해서,
나를 부를 때 자상속, 남은 남이라 하지 않고 타상속이라 한다.
무아와 무상에 입각하여 남을 호칭하기 위해, 이쪽에서 일어나는 상속(자상속) 저쪽에서 일어나는 상속(타상속),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또 하나 조심할 게,
무아라 하니 아무것도 없는 줄 아는데 그거 아니다.
계속 찰라 생멸하는 그 흐름은 있다는 얘기다.
자상속도 타상속도, 변치않아 추구할 무엇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놓으라는 소리다.
무아와 무상이나 상속하기에 무상 무아지, 이쪽도 저쪽도 상속의 흐름도 없어서 무아가 아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계속 명멸하는 마음의 흐름은 지금까지 수천 억겁을 끌고 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흐름의 불길을 꺼버릴 지 그냥 계속 타게 할 지 각자 결정하면 된다.
윤회할 지 열반할 지, 윤회할려면 탐진만치를 또 태우면 된다.
그게 재밌기 때문에...
탐욕의 결과는 행복이다. 먹이 먹고 섹스하고...
그거 끊어버리려니 아쉽다. 그래도 끊어야 한다.
왜?
나중에 봉변당하니까!
내가 인간으로 태어날 보장만 되면 절대 불교 수행할 필요가 없다. 살만하기 때문에...
그러나 내생에 그런 인간의 삶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끝내는 것이다.
생명의 세계에서, 아! 이건 아니구나!
내생에 또 인간? 거의 없다.
잡아함경 초기경전에 의하면 100억년 200억년 헤매다가 깍지벌레 귀뚜라미 뭐뭐... 헤매다가 로또 되듯 인간되는 것이다.
남들처럼 살 경우에 짐승처럼 큰 집사고 큰 차 굴리고 비교하며 이러고 살 때, 이때는 다시 거기 굴레속에 들어간다.
인신난득(人身難得) 인간몸 얻기 어렵고, 지도난문(至道難聞) 불법만나기 힘들다고 한다.
그러니 쾌락을 못 느끼는 것이 아쉽지만, 끝장내자 하는 게 열반이다.
변집견이 중요하다.
우리 인생의 끝에 대해 집착하는 것, 이어진다 끊어진다 집착하는 것,
답은 불상부단(不常不斷)이다.
들불이 옮겨붙을 때도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끊어지는 것도 아니듯이 그렇게 옮겨간다.
⑤ 사견(邪見)
“인과응보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삿된 견해이다.
인과응보가 연기법의 각론이다.
연기법에 인과응보와 중관학의 팔부중도, 아뢰야연기 등의 각론이 있다.
연기법중 하나가 인과응보다.
불교는 연역이다.
부처님께서 연기법을 깨달으신 뒤, 거기 근거해서 모든 불교사상이 나온다.
불교의 세계관, 인과응보, 불교의 수행론, 가치관, 불교 인식론, 등등 뭘 파악할 때도 연기법이다.
크다 작다, 선과 악,
악을 행하면 고통이 오고 선을 행하면 락이 온다. 이것도 연기법의 일종이다.
그래서 세상의 행동 가치론 인식론 존재론, 모든 게 다 연기법이다.
그래서 우리도 수행하는 이유가 연기법 자각할 경우에 모든 게 해결되기 때문에, 연기의 자각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므로 “연기를 부정하는 것이 사견”이라 해도 된다.
⑥ 견취(見取)
유신견, 변집견, 사견을 갖고 올바른 사상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있어도 자기 사상화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일반 사람들, 연예인은 얼굴을 자아로, 스포츠인은 몸이 자아가 된다.
자아관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유신견이 된다.
이런 걸 사상화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상화해서 남에게 떠들고 할 때, 즉 사상화 할 때 견취이다.
착하게 살면 손해봐 악하게 살아야 이익봐 등 철학자 사상가가 갖고 있는 것이 다 견취이다.
⑦ 계금취(戒禁取)
⦁ 잘못된 수행을 천상에 태어나는 원인으로 착각하든가,
⦁ 지계만으로 해탈이 가능하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 개 흉내내어 똥을 먹는 것, 개처럼 똥을 먹으면 천상간다고 하는 것이나,
소처럼 풀뜯어 먹으면 천상간다는 것(우계),
이러면 천상가는 게 아니라 습이 되기에, 개가 되고 소가 된다.
지계(持戒) -
지계(持戒)는 초선미지정까지 간다.
욕계 꼭대기까지 간다.
계지키는 목적은 욕계 탈출이다.
욕계는 짐승의 세계, 남녀 암수, 탐욕 분노가 있는 세계이고, 적자생존의 세계다.
여기 꼭대기까지 가는 게 지계의 목표다.
색계 무색계는 계의 토대위에서 철학적 사유를 하든지, 삼매에 들어가든지, 하는 게 색계 무색게다.
색계는 철학적 사유의 세계,
무색계는 삼매의 세계,
기본 전제는 계이고 계가 기본이다. 동물성에서 벗어나야만이 삼매도 진짜 삼매고, 철학적 사유도 순수한 철학적 사유다.
안그러면, 아직 동물성을 갖고 있으면서 욕계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철학적 사유를 많이 하고 책을 쓰면 목적이 잘난채하여 누구 꼬실려고 하는 것이다.
돈벌려고 하는 것이고,
삼매에 도인흉내 내갖고 신도들 현혹시키는 것,
이런 것이 전부 욕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수행 흉내내기라고 볼 수 있다.
계 강조하지 않는 어떤 수행자들이나 사상지도자들은 목적이 딴데 있구나 보고, 조심해야 한다.
⦁ 지계의 목적은 욕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나, 지계만 지켜도 열반한다는 것은 안된다.
지계 위에 유애(有愛), 그거 다 제거해야만 진정한 해탈열반이 된다.
지범개차(持犯開遮) -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못 알려진 게 열가지 번뇌중에 계금취다.
계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으로 잘못 가르쳐왔다.
경우에 따라 지범개차해야 한다고 잘못 가르쳤다.
지범개차(持犯開遮), 지키고 범하는 것, 열고 닫는 것, 이걸 잘 알아라.
이건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부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알라는 얘기다.
지범은 250계 348계 계목이다. 수행자의 경우 다 암기해야 한다.
개차는 살인하지 말라.에 종류가 여럿이 있다.
낙태, 식물인간장기이식, 과실치사(지붕에서 일을 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죽었다.) 등
이런 여러 경우에 대해 부처님께서 이건 살인이다. 이건 살인이 아니다. 펀례를 해주신다.
그러므로 지범은 형법이고, 개차는 판례이다.
내가 아니라 부처님이 주체이다.
낙태는 살인죄다.
지붕에서 기와 수리 발을 헛디뎌 지나던 사람이 거기 맞아 죽었다. 벌을 주지 않는다.
과실치사는 살인이 아니나 낙태는 살인이다.
과실치사는 살인이 아니다. 문제없다. 괜찮다. 하신 것이 개(開)다.
낙태는 차(遮), 즉 문제가 된다. 안된다 하신 것이다.
계에는 출재가 막론 철저히 속박되어야 한다.
참회하고 다시는 어기지 않겠다. 해야한다.
목숨이 끊어질지언정 계를 범치 않겠다. 해야 한다.
[7] 사문사과 (沙門四果)
A. 아라한 - 응공, 번뇌의 적을 죽인 분,
B. 아나함 - 불환과, 내생에 욕계에 안 오기에 불환
하계의 오하분결(五下分結, 하계인 욕계에 해당하는 다섯가지 번뇌)인
욕탐,
진애,
의심,
무아를 모르는 유신견,
다른 종교에 현혹되는 계금취견을 끊음,
즉
무아를 알고 의심이 없고 계금취견을 끊었기에 불교에 대한 말뚝 신심이 있으면서,
동물성이 다 끊어지고 화도 안낸다.
그러나 오상분결(五上分結, 상계인 색계 무색계에 해당하는 다섯가지 번뇌)은 남아 있다.
색계에 대한 욕망인 색탐(철학적 사유의 세계는 하고 싶다),
무색계에 대한 욕망인 무색탐(삼매에 빠지고 싶다),
근본 무명,
교만(잘난채),
마음이 들떠있는 도거(머리가 빨리 굴러간다)는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색계 무색계가 상계이므로, 상계에 해당하는 번뇌 다섯가지가 있는 것이다.
참고로, 보살계본지범요기(원효저)에,
자찬훼타(自讚毁他),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비방하는 것이 십중대계에 들어간다.
보살은 절대 그러면 안된다.
단, 예외가 있으니, 불교에 신심을 주기 위해서라면 죄가 안된다고 한다.
C. 사다함
일래과, 한번 욕계에 온다.
욕계에 대한 수혹(감성번뇌) 끊고 다음생에는 색계이상 올라간다.
D. 수다원
예류(입류)과, 견성한 분이다.
의심과 유신견과 계금취견을 끊은 분이다.
공과 무아를 알아 세상 다 무너지는 본래 무일물 알아 돈오 견성했다는 것이다.
의심과 계금취견을 묶어 불교에 대한 철통같은 신심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성 아는 견성하고, 믿음이 확고하면 수다원이다.
동물적 행복을 다 누리며 견성하고 믿음만 확고하면 수다원이다.
(차드멍탄은 전세계 수다원 100만명 만들겠다 선언^^)
가장 중요한 게 견성하는 것이다.
공에 대한 통찰, 무지가 타파될 경우 다른 것은 저절로 된다.
입류(예류)는 흐름에 들어왔기에, 다른 것은 저절로 된다는 의미다.
비유로 말하면, 겐지스강이 흘러가는데 결국 바다에 가듯, 퐁당하면 가만있어도 떠내려가 바다까지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공을 알면, 세상 다 무너지면, 안심해도 된다.
반드시 내가 아라한 되기에...
공을 알기 전까지는 세상이 확고부동하게 보이나, 공을 알면 세상이 무너진다.
아무 것도 없구나. 시간도 없구나!
확고부동한 모든 것이 다 무너진다.
공에 대한 파악이 뭐냐면, 번뇌의 집단에 라이타로 불붙인 것이다.
불씨 하나가 온산을 태우는 것이다.
불씨 붙인 게 예류과다.
공에 대한 통찰 한번 생기면, 다른 종교는 뭐라 해도 너무나 우스워 보인다.
그래서 의심도 계금취견도 없고, 불교에서 절대 떠나가지 않고 나중에 아라한까지 간다.
여기 보듯이 불교수행론에서도 중요한 게 삼계설이다.
삼계에 대해 정확히 파악해야만, 수행론부터 네 종류의 성자에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 이상의 번뇌와 사문사과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번뇌는 다음과 같이 두가지에서 열가지 근본번뇌로 말해진다.
두 가지로 보기 : 견혹(봐서 사라지는 번뇌=인지장애=인지번뇌) · 수혹(닦아서 제거하는 번뇌=정서장애=감성번뇌)
세 가지로 보기 : 탐 · 진 · 치
네 가지로 보기 : 탐 · 진 · 만 · 치
여섯 가지로 보기 : 탐 · 진 · 만 · 무명 · 의 · 악견
열 가지로 보기 : 탐 · 진 · 만 · 무명 · 의 ·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 견취 · 계금취
더 세분할 수도 있으나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힘들어 이렇게 10가지로 나눈 것이다.
이 10가지 근본번뇌와 더불어 사문사과를 함께 보이면 다음과 같다.
탐 (욕탐°°·유탐°°°= 끌어당김 - 대치법은 부정관)· --- 감성번뇌
진 (분노=내침 - 대치법은 자비관)·°°
만 (교만=끌어당김과 내침)·°°° ※ 도거 (들뜨고 불안정한 마음)°°°
무명 (사성제에 무지)°°° --- 감성번뇌 ( ↑ 탐·진·만과 함께함) = 수혹 : 중연 ← 인지번뇌 ( ↓ 견·의와 함께함, 무상응) = 견혹 : 친연
의 (사성제의심)·°
견 = 유신견(아트만)·°
변집견(단·상견)·
사견(인과부정)·
견취견(유신견,변집견,사견을 옳다 집착)·
계금취견(잘못된 수행으로 천상에 난다거나, 지계만으로 해탈한다고 잘못 앎)° --- 인지번뇌
★ 예류 °없어짐 ★일래 °°약화 ★불환 °°없어짐 ★아라한 °°°없어짐 」
[8] 번뇌(5부 = 견혹 고집멸도4부 + 수혹 1부) & 수행(견도 + 수도)
하계 욕계 36혹 (견혹 32 + 수혹4탐·진·만·무명) - 견도 + 수도(1散地x9품)
상계 색계 31혹 (견혹 28 + 수혹3탐·만·무명) - 견도 + 수도(4禪x9품)
상계 무색계 31혹 (견혹 28 + 수혹3탐·만·무명) - 견도 + 수도(4定x9품)
1. 번뇌 (삼계의 견혹88 + 수혹10 = 총98)
욕계 견혹32 (고=탐·진·만·의·무명·유신견·변집견·사견·견취견·계금취견)
(집=탐·진·만·의·무명·사견·견취견)
(멸=탐·진·만·의·무명·사견·견취견)
(도=탐·진·만·의·무명·사견·견취견·계금취견)
수혹4 (탐·진·만·무명)
색계 견혹28 (고=탐·만·의·무명·유신견·변집견·사견·견취견·계금취견)
(집=탐·만·의·무명·사견·견취견)
(멸=탐·만·의·무명·사견·견취견)
(도=탐·만·의·무명·사견·견취견·계금취견)
수혹3 (탐·만·무명)
무색계 견혹28 (고=탐·만·의·무명·유신견·변집견·사견·견취견·계금취견)
(집=탐·만·의·무명·사견·견취견)
(멸=탐·만·의·무명·사견·견취견)
(도=탐·만·의·무명·사견·견취견·계금취견)
수혹3 (탐·만·무명)
2. 수행 (삼계의 견도16찰라 + 수도162)
견도 : 견혹을 제거하는데 고집멸도 각 단계에 대한 통찰은 무간도 해탈도가 있다.
견도의 관찰순서는 16번째까지 있다. 이러하므로 견도가 15찰라에서 열린다 하는 것이다.
수도 : 욕계 1散地(산만한경지)x9품, 색계 4禪x9품, 무색계 4定x9품,
(1散地 4禪 4定의 총 9가지 경지마다 하하·하중·하상 중하·중중·중상 상하·상중·상상의 번뇌의 세기를 나타내는 9품이 있다.)
그리고 각 품에 대한 통찰은 무간도 해탈도가 있다.
그러므로 9+36+36= 81품(81단계감성번뇌) x 2(무간도,해탈도)= 162라,
수도는 총162단계이다.
삼계 162단계이므로, 아라한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수다원은 숨쉬며 할 수 있으나,
일래과 지나 불환과와 아라한은 4선 4정 다 가보아야 하므로, 수도는 얼킨 실을 풀듯이 오래걸린다.
무간도는 고·집·멸·도나 수혹(탐·진·만·무명)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틈이 없이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직시하는 것이다.
해탈도는 고·집·멸·도나 수혹(탐·진·만·무명)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보았기에 다시는 오해하지 않게 되어 벗어나는 것이다.
한마디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간도 해탈도란 직시하고 벗어나는 것이다.
(경 말씀에 무간도 해탈도에 대해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부처님 밖에 없다. 아라한도 안된다고 한다.)
[9] 구사론의 수행단계
1. 지계행
계를 지키다가,
2. 문혜
불교배우고,
3. 사혜
따져보고,
4. 신기청정
주변정리하고 먹을 것 충분하고 춥지도 덥지도 않게 만들고 나쁜 친구 다 멀리한 다음에,
5. 지식념 or 부정관(호흡을 가라앉힌다.)
호흡을 세던지 시체를 관하던지 하여 정신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6. 사념처
그 다음에 사념처 수행을 한다.
신수심법에 대해서 부정 고 무상 무아라고 통찰한다.
이게 별상염주다.
그 다음에 신수심법을 몰아갖고서 무상 고 공 무아라고 통찰한다.
이걸 총상염주라 한다.
이게 고성제에 대한 이해이다. (위빠사나 수행)
사념처 수행은 고성제만 해당한다.
남방불교에서는 이 고성제를 직시하는 순간에 훌쩍뛰어 견도까지 간다고 한다.
돈오이기 때문이다.
돈관 돈현관 단박에 왜?
고통을 보면 번뇌가 그 순간에 끊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해지기 때문에, 또 보는 것 자체가 도고, 번뇌가 끊어지면서 편안해지는 게 멸이고,고집멸도가 한순간에 일어나는 게 지금 남방상좌부에서 가르치는 수행법이라서, 거기는 사념처경만 보아도 된다.
그런데 구사론에서는 점법이다.
사성제를 머리굴려 갖고 분석적으로 알고,
점점 분석적 통찰이 깊어지면, 난·정·인·세제일법이 된다.
이게 다 사성제에 대한 분석적 통찰이다. (사선근으로 사성제 전체에 대한 개념적 이해)
고성제에 대해서 네가지 무상고공무아
집성제에 대해 네가지 인집생연
멸성제는 멸정묘리
도성제는 도여행출
하나하나 따지면서 생각하다 보면, 점점 깊어진다.
⦁
첫 번째가 난인데, 따뜻할 난자이다.
이 산만 넘어가면, 견성의 불이 타고 있다.
불나방처럼 저기에 내 몸을 던지면 나의 동물적 번뇌가 다 없어진다.
이 뜨거운 불기운이 산너머까지 느껴진다.
그래서 난이다. 따듯할 난
⦁
더 이 사성제를 깊이 분석하니 정(꼭대기,머리)까지 올라간다.
정의 단계에선 오른쪽으로 굴러갈 수도 왼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대승보살도를 수행하는 사람은 정까지만 수행하지 그 이상 가지말라.
그렇게 얘기한다.
이게 아비달마 대비바사론 구사론에 나온다.
왜 그럴까?
지옥을 못가기 때문에 대승보살도는 내생에 지옥도 가야 된다.
정넘어가면 절대 삼악도로 안가기에 중생제도 할 수 없다.
이렇게 얘기한다.
이게 초기불교 소승불교에서 하는 애기다.
이게 참 위대한 가르침이다.
⦁
그 다음에 다시 더 통찰하니 참을 인이 된다.
인의 경지가 되면 불퇴전이 된다.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인의 경지가 되면 내생에 삼악도에 절대 안떨어진다.
최소 인간이상이 된다. 여기선 넘어져 굴러가봤자 오른쪽으로 굴러가기에 그렇다.
이게 왜 인이냐면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견성의 불길이 타는 것을 참는 것이라 참을 인을 쓴 것이라 생각된다.
불나방이 뜨거워 뜨거워 하면서 불에다가 몸 던지는 것이다.
왜 견성해서 성자되면 그 다음부터 뭐하는가? 그거 생각하여 먹이와 섹스가 좋지만 삼악도에 들어가기 싫어 불나방처럼 불에 타면서 꿋꿋하게 가므로 아프다.
고통이 있다 그 금욕의 고통을 참기에 인이라고 본다.
나중에 견성해서 끝장낼 때 금욕을 해야한다.
내가 인의 단계인지 아닌지 알려면, 나한테 금욕의 맑은 고통을 참는 그런 삶이 있는가 보면 된다.
그렇게 살면 내가 내생에 삼악도 안가겠구나 하면 된다.
남 볼때만 젊잖고 속으로는 별 생각을 다하고 별 꿈을 다꾸면 아니다.
꿈속에서도 깨끗해야 한다. 안되면 난 아직 멀었구나 하면 되겠다.
⦁
세제일법은 마지막 한 찰라에 사성제에 대한 통찰이 끝나는 게 세제일법이다.
아직은 성자아니지만, 세속에서 끝에 마지막단계라는 말이다.
7. 견도 (사성제통찰의 완성)
인지정화 단박에 15찰라에 걸쳐 일어나고,
8. 수도
감성정화
9. 무학도
더 이상 배울 게 없는 아라한의 경지가 되었다. 라고 얘기할 수 있다.
[10] 구사론의 수행론인 차제증(次第證)과 초월증(超越證)
1. 구사론의 수행론은 차제증과 초월증이 있다.
차제증(次第證)은 점차적으로 올라가는 것이니,
15찰라의 견도가 예류향 -> 1찰라의 견도가 예류과로 수도의 시작, 이런 것이다.
외도 수행자가 감성번뇌를 많이 없애 비상정까지 올라갔다.
이런 수행자가 갑자기 불교를 알게 되었다.
사성제 통찰을 한다.
그때는 15찰라가 예류향이 아니라 비상정까지 올라가 봤기에 그때는 불환향이 된다.
마지막 16찰라가 불환과가 된다.
이런 것을 초월증(超越證)이라 한다.
다시 간단히 말해,
예류향의 15찰라가 견도고 예류과의 1찰라가 수도다.
그러나 수도를 먼저하여 감성정화가 된 이들은 그에 따라 일래향 일래과나 불환향 불환과가 되므로 초월증을 한다.
2. 유루도 (흔상염하심으로 감성정화)
아랫 단계를 싫어하고 위로 올라가는 이런 마음이 수도이다.
이걸 유루도라 하고, 불교 이전부터도 원래 있던 것이다.
유루도는 인지번뇌를 아직 제거하지 못한 도이다.
무루도는 사성제의 통찰이 개입이 되어야 무루도가 된다.
그래서 유루도일 경우에 어쨌든 수도인데, 이건 어떻게 올라가느냐면,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삶이 있는데, 위가 좋고 아래가 싫음 마음이 들어야 한다.
흔상염하심이다.
아래를 버리고 위로 올라간다.
아래의 단계는 추고장(거칠고 고통스럽고 장애다) 라는 마음이 들고,
위의 단계는 정묘리(고요하고 오묘하고 벗어나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그래서 흔상염하한다.
이러면 마음으로 수도를 한다.
감성정화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3. 도공계와 정공계 (저절로 갖추어지는 계)
감성정화할 때는
삶의 단계를 나눈 다음에, 즉 동물적 삶, 철학자의 삶, 삼매의 삶으로 나눈 다음에,
아래 삶이 싫은가? 벗어나야 하나? 해서, 위로 올라가면 된다.
또 위로 올라갈 때는 계가 저절로 갖추어진다.
이런 계를 도공계 정공계라 한다.
정공계는 색계의 삶을 좋아할 때 저절로 계를 지킨다.
음욕이 끊어져 버리고, 재물욕이 끊어져 버리고, 이걸 정공계(定共戒)라 한다.
이와 같이 색계에서 저절로 갖추어지는 계를 정공계라 한다.
마찬가지로 무색계에서 저절로 갖추어지는 계를 도공계(道공계)라 한다.
계 지키기 힘든 분들은
항상 철학적 사유하거나 하루 종일 삼매에 들어가 있다든지 이럴 경우, 계가 저절로 갖추어지지만, 극히 힘든 일이다.^^
이 허공중의 보찰에서 보석같이 귀한 말씀 들을 수 있게 해주신 교수님께 지심정례하고, 함께 공부하시는 도반님들께도 합장합니다._((()))_
ps)
이 강의 말씀을 마음에 각인하고 공부하니,
공부길에 경책도 되고,
무엇을 어떻게 보고 공부해야 되는지 등등 많은 도움이 됩니다.
도반님들가운데 저같은 이가 있으시면, 마음에 각인하고 공부하시면 역시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첫댓글 옮겨 적으신 11강 아직 다 읽지 못했습니다.
읽다보니 너무 감사하여 우선 감사 댓글 올립니다.^^
청정님 수고 너무 많이 하셨습니다.
교수님 강의 영상을 반복해서 듣지만 휙휙 지나가니 어려운 점이 있었는데,
정리하여 목차로 구분까지 해주셔서,
읽으면서 음미도 하고 중간중간 감사기도도 하며 공부할 수 있으니 편안하고 새롭습니다 .
청정님 고맙습니다.
_((()))_
도반님, 모두 교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저도 도반님처럼, 교수님께서 지난한 고초를 감내하며 밝히신 보석같은 가르침을 갖다쓰는(공부하는) 사람입니다.
그저 제가 먼저 잘 쓰고자(잘 공부하고자) 옮긴 것입니다.
오시는 도반님들께서는 모두 한결같이 교수님의 가르침이 귀한 줄 아시는 분들이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올립니다.
늘 교수님의 가르침이 널리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_()_
볼 때마다 감탄하고, 옮겨 적을 때마다 감탄합니다.
그래서 적는 일이 놓치지 않고 거듭거듭 듣는 일이지만 보석하나 건지듯 조심스럽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없을 때는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교수님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듭니다.^^
이와 같은 귀한 가르침을 세상에 남기신 교수님께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도반님처럼 그런 마음으로 갖다 쓰신다면(공부하신다면), 교수님께서도 좋아하실 것입니다.
도반님, 함께 공부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_((()))_
🙏🙏🙏
@마도로스 도반님, 도반님께는 제가 더 감사하지요^^
위 댓글에서 도반님은 제게 고맙다고 하시나,
모든 것은 교수님께 감사할 일아지 제가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위와 같이 썼는데,
다시보니 제가 보아도 너무 무겁게 쓴 것 같습니다,^^
교수님에 대한 고마음을 생각하여도,
가장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것은 공부에 더욱 정진하는 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물론이고, 교수님뿐아니라 누구든 언젠가 만났을 때 그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하루하루 시간을 허투로 안쓰고 정진하는 것만이 가장 잘 사는 것이 아닌가합니다.
저의 결론은 정진입니다!
도반님, 공부가 더욱 나아가시고, 오늘도 귀한 하루입니다._((()))_
@청정 청정님 갑자기 마도로스 코스프레 하십니까? ㅎㅎ
일전에 제 글을 보시고 콕 집어내셨듯이(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불교 공부를 폭넓게 하지는 못했고 단지 교수님 강의를 통해 부처님 가르침 공부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곳에 글을 올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었는데 지금 이러고 있네요.
카페 가입도 청정님의 강의채록이 큰 동기가 되었고 공부심의 자극을 받다보니 자주 들어오고 있습니다. ;;;
그저 체계불학 공부가 너무 좋아서입니다. 확실히 청정님께서는 저보다 공부의 폭이 훨씬 넓으시고 무엇보다 교수님의 체계불학을 깊이 이해하시고, 회원님들과 같이 체계불학을 공부하시길 원하는 마음이 크셔서 제가 공감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수님께 감사한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청정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말씀하신대로 하루하루 정진이 중요하겠습니다.
귀한 하루입니다.^^
_((()))_
@마도로스 도반님, 코스프레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성찰은 맞습니다.
저는 빈말은 못합니다.
도반님은 타고난 근기가 저보다 나으십니다. 공부를 편견없이 아주 잘 배우십니다.
그래서 공부를 저보다 잘 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불교에 대한 제반지식이 쌓이지 않아서 그런 것인데, 그것은 사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체계불학만 열심히 배우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날 불교 서적 읽는 게 좋아서 많은 책을 보았지만, 교수님의 체계불학보다 더 부처님의 가르침을 휼륭하게 전하는 가르침을 보지 못했습니다.
도반님은 복이 많으신 것입니다.
게다가 저보다 편견없이 공부하시기에 교수님의 가르침을 배움이 더 나은 것입니다.
마치 백지에 교수님의 가르침만 그려짐과 같은 것입니다.
아마도 바로 바로 떠오르는 것은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수님의 가르침을 저보다 더 많이 아신다고 하는 것이지요^^.
다만 저도 마찬가지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앎으로 승화시켜서 체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자꾸 하다보면 체계불학이 공부가 될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체계불학이 공부를 위한 앎의 불학이고, 신앙과 수행의 불학이기 때문입니다.
@마도로스 도반님, 저의 공부는 저의 공부입니다.
도반님의 공부는 도반님의 공부입니다.
나혼자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읽을꺼리로 왜 자기성철인지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사실 전에는 교수님에 대한 고마움만으로 강의를 하나하나 옮겨적었습니다.
그러다 도리어 제가 교수님께 큰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부할 마음도 나고 두서 없던 공부가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마움으로 올린 것이 아니고, 제가 공부하고자 또 도반님들을 생각해서 옮겨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적다보니 마치 제가 교수님께서 어렵게 이루신 보석같은 것을 가져다 쓴다는 마음이 저도 모르게 들더군요,
또 도반님의 댓글에 고맙다는 말씀이 전과 같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전같으면 그렇게 도움이 된다 하시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했을텐데...
왜 그런지 저도 잘 몰랐습니다.
역으로 교수님께서 들으실 말을 제가 듣는다는 그런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뭔가 잘못되었다!
그럼 전에는... 전에는 안그랬는데...
왜 이렇지? 곰곰이 생각하다보니(교수님의 귀한 가르침을 이런데 써서 죄송합니다), 알았습니다.
@마도로스 전에 옮겨 적을 때는 그저 그 일이 교수님의 고마움에 보답하는 하나의 일이라, 누가 고맙다 하면 내가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 좋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공들여 이루신 공부를 내가 가져다 쓴다(내 공부를 위해)는 생각이 들어,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교수님이 들으실 말을 내가 가져다 쓰면서 들으니 이건 아닌 것이지요,
거기서 혼란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교수님이 고마워서 올리고, 나와 도반님들을 위해 옮겨적고 올리고,
하나는 올림이 교수님을 위해서, 하나는 올림이 나와 도반님들을 위해서, 동기가 다르니 고맙다는데 대한 반응도 다른 것이지요,
둘 다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정말 해결할 욕심을 갖고 곰곰이 생각하니, 정진이란 두 글자입니다.
교수님이 고마워서 올리거나 나와 도반님들을 위해 올리거나, 어떤 마음으로 올리든 정진하여 돕겠다는 마음이라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티벳에 왜 활불의 전승이 생겼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내적 갈등은 정진으로 해결된다 할 것입니다.
@마도로스 도반님, 재미있으셨습니까?
이런 일이 저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정진하면, 교수님께도 좋고 저도 좋고 도반님들도 좋고 모든 분들에게 좋은 일이란 확신입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는 자등명(自燈明)하고 법등명(法燈明)하라. 그리고 쉼없이 정진(精進)하라.”
도반님, 늘 밝게 응해주시고, 정진하여주셔서 감사합니다._((()))_
@청정 제가 사이드 관련 댓글을 썼다 지웠다 했던 민망한 일이 생각 나서, 이해해주시리라 믿고 농담 삼아 '코스프레'라고 해 본 것입니다.
역시 청정님은 '감사''고마움'에 대한 본인의 마음 변화(마음 공부)를 이렇게 도반들을 위해 자세히 풀어주셨네요.
유익하게 잘 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만난 불교공부가 교수님의 체계불학인 것이 복 받은 일이라고 하시니 정말 제가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참 좋습니다.
청정님도 좋고 도반님들도 좋고 교수님께도 좋으니 오로지 정진해야겠습니다. 보찰에 꽃비가 내리고 향기 가득한 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하루 되셨기를 바랍니다.^^
_((()))_
@마도로스 도반님이 좋다하시니,
교수님도 좋고 저도 좋고 도반님들도 좋을 것입니다.^^
좋고도 좋은 곳이 바로 이곳 체계불학의 보찰입니다.
오늘도 귀한 하루였습니다.
내일도 귀한 하루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_((()))_
청정님 수고하셨습니다.
별말씀을^^
美물 도반님, 함께 공부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_((()))_
요약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지공 도반님, 함께 정진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