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Fantasy)은 그 단어가 가지는 의미로 보아 고금의 작곡가들 중 특히 형식보다는 사람의
감정표현을 중요시하는 낭만주의 음악가들의 음악적 소재의 전유물인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슈베르트는 그의 가곡 「방랑자」의 선율을 피아노로 옮겨온 「환상곡 방랑자」에서 그만의
서정적인 유연한 음률을 유감없이 표현하였다. 곡은 일반적인 피아노 소나타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나 슈베르트의 가슴속에서 샘솟듯이 솟아오르는 악상은 일정한 규범이나 형식보다는
이러한 환상곡풍의 작품에서 더욱 빛나 보였다. 로맨티스트인 슈만의 피아노곡 「환상소곡집」은
이 감수성이 예민한 음악가의 가장 생기 넘치고 천재성이 발휘된 청년기 때의 작품으로, 당시의
슈만은 클라라 슈만과 열애 중이었다. 46세의 나이로 정신병원에서 쓸쓸히 죽어간 이 낭만파
대가의 불운한 만년과 인생의 황혼기에 쓰여진 작품들을 생각하면 이 작품은 꿈과 음악이 잘
조화된 보석과도 같이 빛나는 존재일 것이다.
폴란드의 민속무곡에 바탕을 둔 폴로네이즈의 마지막 곡인 「환상 폴로네이즈」는 쇼팽의 악화된
건강, 여류작가인 조르즈 상드와의 9년간의 밀애가 끝날 것만 같은 예감 속에서 탄생하였다.
「군대」나 「영웅」 폴로네이즈가 남성적이고 힘찬 곡인데 반하여 이 곡은 부드럽고 꿈결같은
멜로디가 전편을 수놓은 쇼팽 피아노곡의 최대 걸작이며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였다.
이 곡의 완성 후 쇼팽은 조르즈 상드와 결별하고 2년후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바하의 건반악기를 위한 작품 목록을 보면 환상의 숫자가 많음에 놀라게 된다. 바로크의 두터운
외투를 입은 이 근엄한 거장도 신과 귀족과 당시 사회 관습과 엄격한 음악 형식을 조금은
벗어나고 싶었을까? 그의 많은 환상곡 중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는 낭만적인 요소와 치열함이
두드러진 특히 뛰어난 명곡으로서 이들에서 우리들은 오히려 바하의 인간적인 몸짓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한 「푸른 옷소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의 작곡가인 본 · 윌리암즈는 17세기의 퍼셀 이후
이렇다 할 음악가를 배출하지 못한 영국의 자존심을 지킨 작곡가답게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을 작곡하여 뿌연 안개에 휘감긴 영국의 농촌과 정서를 꿈꾸는 듯한 서정미 넘치는 선율로
잘 표현하였다.
안익태의 「환상곡 한국」은 그의 나이 30세 때인 1936년에 작곡(해방 후 개작)되어 그가
어느 나라에서 지휘하든지 반드시 이 곡을 연주하여 그의 애국심을 보여 주었다. 이 곡은 단군의
개국으로부터 민족의 역사적 시련과 독립의 쟁취, 한국동란 등 민족의 발자취를 음악적으로
묘사하였고, 특히 곡의 마지막 부분은 애국가를 주제로 한 합창으로 웅대하게 대미를 장식한다.
19세기 음악계의 반항아인 베를리오즈는 어느 날 극장에서 첫눈에 반한 영국 여배우에의 애정의
표시로 「환상교향곡」을 작곡하였고, 이에 감동한 그 여배우는 그와 결혼하였으나,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고, 헤어져 버려 그 여인은 소설제목같은 환상의 여인이 되어 버렸으니,
이 곡이야말로 얼마전 TV에서 한창 유행했던 ‘거의 환상적’인 작품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 ‘서상중’의 ‘음악이 있는 공간'에서
https://youtu.be/66JgH8v2l28?si=C_HWPq1ep5Ix8Qw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