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의 맛
--이영선의 시 세계
김보나
하늘과 땅, 그 사이 사람의 시
가을 하면 모과가 떠오릅니다. 그래서일까요, 잘 익은 과실처럼 선명한 노란 표지에 홀린 듯 책을 펼쳤습니다. 이영선 시인의 첫 시집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도서출판 지혜)가 그 주인공입니다.
시집을 펼치는 순간 독자가 마주하는 건 도심의 한가운데를 장식한 눈부신 빛입니다. 교회의 “붉은 십자가”와 “러브모텔의 네온사인”. 도심을 가득 메운 온갖 성스러운 빛과 상스러운 빛이지요. 1행과 2행 사이,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성과 속을 숨 한 번 들이마실 그 짧은 사이에 묘파하는 시인의 시선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한껏 높이 들게 한 「가지 사이에서 자란 작은 새처럼 사람들이」로 시작한 이 시집은 「달맞이꽃」으로 끝납니다. 마지막 시에 ‘덤불’과 ‘달맞이꽃’이 나오는 이러한 배치가 흥미로웠습니다. 시집을 여는 시를 읽을 때 높이 들었던 고개를 내리게 하고, 자세를 다시 낮추어 시집의 마지막을 장식한 달맞이꽃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독자의 시선을 끌어올렸다가 끌어내리는, 상승했다가 하강으로 마치는 이 시집을 살피며 제가 떠올린 것은 세종대왕께서 창제한 훈민정음입니다. 세종께서 자음 17자, 모음 11자를 새로 만들 때 가장 우선한 원리가 있습니다. 바로 ‘상형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세 가지 모음. ‘ㆍ, ㅡ, ㅣ’ 입니다. ‘아래아, 이, 으’ 이 세 글자는 모든 모음의 기본자로, 바로 ‘하늘, 땅, 사람’에서 각각의 모양을 따온 것입니다.
동양 철학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 요소인 ‘천지인’에서 유래한 문자인 한글, 그것의 원리를 최대화한 시집이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란 생각이 듭니다. 시선을 올렸다가 내리게 하는, 다시 말해 하늘에서 시작해 땅에서 끝나는 구성이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하늘 천(天), 땅 지(地)’의 요소가 이 시집엔 담겨 있습니다.
나아가 이 시집에선 하늘과 땅 사이에 선 ‘사람 인(人)’까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서 시선의 상승과 하강으로서 하늘과 땅을 한데 일컬었습니다. 이제 이영선의 시에서 ‘사람’의 모습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0리터 물통이 온수기 위에 물구나무 서서 면벽하고 있다
― 이 물 아침에 온 건가?
거꾸로 박힌 물의 시간을 의심하는 그가 온수 꼭지 밑에
사발면을 들이대고 빨간 코크를 누른다
급히 빠져나오려던 물이 물통 속에서 큰 멍울로 솟구치다가 한 사발만큼의 물만 빠져 나간다
사발면이 스티로폼 그릇 속에서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다
라디오에서 정오의 음악이 나른하게 흘러나온다
쭈뼛거리며 탕비실 문을 연 물류 기사가
― 새벽같이 달려도 기름 넣고 할부 내고 나면 굶어 죽겠네
운임이 적어도 너무 적어, 커피 한 잔 사 마실 돈이 없네
일회용 커피 믹서에 한 잔의 물이 또 빠져 나간다
바닥에 몇 방울 떨어진 커피가 말라가는 사이
몇 번의 문이 열리고 닫히며 몇 사람이 들락거리는 사이
투덜거리던 그가 어느새
입에 종이컵을 새처럼 물고
손을 까딱까딱 거리며 17톤 트럭에 앉아 있다
물 한 병이 사발면 한 그릇이 되고, 커피 한 잔이 되고, 누가 떨어뜨렸는지 모를 얼룩 한 방울이 되는 동안
켜켜이 쌓인 한 병의 물들이 각각의 이름으로 몸 바꾸는 동안
감단 근로직인 그 물통,
텅 빈 채 물구나무 서 있다
― 「감단 근로직」 전문
시는 10리터 물통이 올라간 정수기에 대한 묘사로 시작됩니다. 최신식 정수기는 아닌 모양입니다. 버튼만 누르면 얼음까지 나오는 그런 정수기 말고, 자기가 마실 물은 스스로 들어 거꾸로 메다꽂아야 하는 그런 오래된 정수기. 그래서 10리터짜리 물통은 ‘물구나무’를 서는 것이죠. 사물의 의인화로 이 시는 시작됩니다.
물구나무라는 위태로운 느낌으로 시작된 시는 이내 “그”를 호명합니다. “사발면”을 끓여 아침을 먹는 그가 지나간 뒤, 탕비실 문을 연 건 “물류 기사”입니다. “새벽같이 달려도 (…) 할부 내고 나면 굶어 죽겠”다며 운임이 너무 적어” 그렇다고 투덜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의 배경은 탕비실이고, 시는 우리네 노동자와 그 노동 환경을 조명하는 것입니다. 사발면과 인스턴트커피로 삶을 지탱하는 노동자, 그들의 삶이 위태로운 것은 비단 적은 운임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몇 번의 문이 열리고 닫히며 몇 사람이 들락거리는” 탕비실에서의 환경에서 우리는 노동의 사물화를 봅니다. 저마다 주어진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그저 “기사”님으로 불리는 현실은 노동자가 스스로의 일에서 자아를 찾을 수 없고 그저 사회의 부품처럼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지시합니다. 탕비실을 들락거리는 사람들 또한 쉽사리 ‘동료’라고 부르기 힘든 존재들입니다. 자기 말고도 “몇 사람”이 더 일하고 있다는 조건. 그것은 노동자에게 ‘고용 불안’으로 이어집니다. 평생 종사한 일은 이것뿐인데, 나이는 점점 들고, 더 일하고 싶어도 언제 해고될지 알 수 없고 혹시 아프면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언제 다른 ‘기사님’에게 대체될지 모른다는 불안. 10리터짜리 물통이 “텅” 비면 이내 다른 물통으로 바뀌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물화된 인간은 위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언제 자기 자리가 다른 사람으로 갈음될지 염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17톤 트럭”을 운행해 먹고사는 물류 기사를 바라보는 것은 1행에서 “면벽” 수행을 하던 “물통”입니다. 인간의 사물화, 사물의 인간화가 발생한 것이죠. 이와 같은 ‘역전’은 시의 말미에서 물통이 “감단 근로직”으로 변하는 시의 논리를 뒷받침합니다.
감단 근로직이 무엇인지 찾아보았습니다. 감시와 단속 업무를 하는, 경비원이나 주차장 관리자 등을 가리키는 말이군요. 그러니까 물통은 탕비실로 대변되는 노동 현장에서 이곳을 지나는 인간 존재들을 관찰하는 역할을 맡고 있던 겁니다.
이영선의 시에서 눈에 띄는 것으로 불교적 세계관 역시 빼놓을 수 없을 듯합니다. 시의 1행에서 “면벽”이 나왔는데, 이는 벽을 마주보고 좌선하는 일을 뜻합니다. 물통은 어째서 수행을 하는 것일까요. 사물을 벗어나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일까요. 속세에서 끝내 해탈을 바라는 것일까요. 이러한 불교적 세계관은 시의 결말부에서 더 도드라지게 드러납니다.
“물 한 병이 사발면 한 그릇이 되고, 커피 한 잔이 되고, 누가 떨어뜨렸는지 모를 얼룩 한 방울이 되는 동안”, “켜켜이 쌓인 한 병의 물들이 각각의 이름으로 몸 바꾸는 동안”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를 풀어 쓴 말처럼 보입니다. 업에 따라 다른 존재로 “몸 바꾸”다 마침내 사람으로 태어나 수행을 거듭하여 깨달음을 얻고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란 비밀스럽고 초월적인 꿈이 이 시구에 배어 있는 듯합니다.
이영선 시인의 시 세계에서 발견되는 불교 모티프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하려 합니다. 가을을 맞았으니 시인을 따라 충북 제천의 정방사 가는 길을 함께 올라봅니다.
가로질러 오를 수 없는, 그러나 여전히 길인 곳
「정방사 가는 길」에서 화자는 절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독자는 따라 걷습니다. 이 절엔 목조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하나 우리는 조붓이 앉은 불상에까지 가닿을 수 없습니다. 독자들이 마주하는 건 신성이 아니라 자신과 대응되는 다른 성별입니다. 조금 비약하자면, ‘가지 않은 길’을 간 또 다른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오래된 매점 앞을 지나 언제나 있던 것 같은 그저 그런 작은 다리 하나 만난다 갈색 줄무늬가 있는 작은 다람쥐 두 마리 지나간다. 속이 보이지 않는 검은 승용차 한 대 지나가고 무거운 짐을 실은 오토바이 한 대 지나가고 유리문을 내린 1톤 트럭이 지나간다. 자동차 매연인지 담배 연기인지 모를 것이 뿌옇게 지나간다.
그는 왼쪽으로 난 숲길로 접어들고 나는 곧바로 난 길을 달음질쳐 올라간다.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결국 우리는 정방사 돌계단을 올라 낡은 해우소 앞에서 만날 것이다
그의 근심과 나의 근심은 해우소 얇은 나무 벽을 사이에 두고 씨이 울다가 싸아 울다가 결국 비릿한 숲 냄새로 만날 것이다
겹겹이 이어지는 능선을 타고 와 해우소를 지나는 바람이 저 멀리 청풍호까지 실어 나른다는 생각을 하는데
누가 던졌는지 모를 솔방울 하나 굴러 내리는 소리 들린다
우리가 가로질러 오를 수 없는 길을 솔방울 하나가 유유히 굴러내려 가고 있다
― 「정방사 가는 길」 전문
산사로 향하는 “작은 다리”가 나옵니다. 다리를 건너면 이제부터 속세와 이별입니다. 그렇게 부처님을 만나고 청정한 마음을 닦으러 걸어가는 일만 남은 듯한데, 시인은 이런 기대가 무색하게 사찰을 향해 가는 길을 무심하게 묘사할 뿐입니다. “매점 앞을 지나 (…) 작은 다리 (…) 검은 승용차”로 일축되는 이 길은 독자가 기대했을 청정도량의 모습이라기보단 흔한 관광지의 모습에 더 가깝습니다. 산의 맑은 공기는커녕 “매연인지 담배 연기인지” 모를 매캐한 공기만 가득할 뿐. 절에 가는 길이 이렇게 황량하다니요.
이어지는 2연에서 시인은 돌연 “그”를 불러냅니다. “그는 왼쪽으로 난 숲길로”, “나는 곧바로 난 길로” 올라갑니다. 남과 여, 서로 다른 성별로 사바세계에 태어나 왼쪽과 오른쪽, 둘로 갈라진 길을 저마다 향하지만 시인은 이렇게 단언합니다. “결국 우리는 정방사 돌계단을 올라 낡은 해우소 앞에서 만날 것이다.” 오르고 올라도 인간이 결국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지고한 신의 세계가 아니라 고작 해우소일 뿐이라는 듯. “씨이” “싸아” 참았던 요의를 해결하는 소리는 일견 여름의 매미 울음과도 닮았습니다. 어쩌면 시인에게 인간은 그저 지상에서 짧게 울다 가는 매미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로버트 프로스트 식대로 “가지 않은 길”이 아니라 “우리가 가로질러 오를 수 없는 길”이라 쓰는 것입니다. 오래 품은 줄도 몰랐던 근심 하나 안고 올라, 부처님 가까이 간다 해도, 울음 한 번 토해내고 저마다의 속세로 돌아가 자기만의 생을 지속해 나가야 하는 존재. 언뜻 길고 곤고해 보여도 그 모든 과정이 수행이라는 듯 함부로 오를 수 없는 신의 길을 또 다시 향하는 존재. 그것이 이영선의 시에서 걸어가는 하늘과 땅 사이의 ‘사람’입니다.
연화화생(蓮華化生) ―업장을 맑히고 새롭게 탄생하라
이 시집은 “밤”으로 시작해 “소스라치게 노란” 밤으로 끝납니다. 충주 “모현정”에 “덤불”이 있고 거기엔 “평생 울지 못하는 암매미”가 산다고 합니다(「달맞이꽃」). 수컷 매미만 울음소리를 낼 수 있다는 생물학적 특징을 감안하며, 왜 암컷 매미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는지 살펴봅시다.
시집을 닫는 「달맞이꽃」 전에 실린 「그녀」를 볼 차례입니다. 그녀, 엄마. “85세 김**”. 그녀가 “한 겹 한 겹 겹쳐 입은 흰 옷”으로 화하기 앞서 시인은 “확성기” 소리를 듣습니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왔어요 왔어요 …가 왔어요”. “무엇이 온 것인지 무엇이 간 것인지 알 수 없어” 그것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생명의 탄생과 소멸, 윤회를 고지하는 천상의 소리입니다. 엄마가 떠난 후 “그녀”라는 말은 시인에게 주어지고 시인은 다시 그러한 처지를 “암매미”에 투영하는 듯합니다. 영혼이 떠났을 하늘을 본 뒤 몸을 땅에 모시며 시인은 인간의 처지를 벗어나 “매미”로 화합니다.
윤회, 그것은 굴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이나마 알고 있습니다. 그 끝에 어떤 생은 극락세계 연꽃에서 신비롭게 태어날 거란 사실에 대해서 말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5부로 구성된 시집을 다 읽은 뒤, 책장을 덮으며 저는 중얼거렸습니다. “아, 시고 떫다.” 이것이 이영선 시인이 전하려던 생의 맛이라는 듯.
□ 약력 및 주소 외
약력 ― 202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의 모험 만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