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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개요
ㅇ 언 제 : 2024. 5. 17(금)
ㅇ 누 가 : 무공수훈자계룡지회 45명
ㅇ 어 디 : 황산대첩전적지(전북 남원시 인월면 소재)
ㅇ 날 씨 : 맑음
답사정보
황산대첩(荒山大捷)
고려 말 우왕 6년(1380년)에 전북 남원에서 벌어진 왜구와의 대규모 싸움입니다.
14세기 중반부터 왜구는 한반도 연안과 도서지역을 휩쓸다가 급기야 내륙까지 넘나들면서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습니다.
당시 고려는 총체적 난국이었는데요, ‘왜구는 강한 도둑이고 부패한 관리들은 약한 도둑’이라 했을 정도로 도둑들이 설쳐 민심도 크게 요동치던 때였습니다.
그러자 조정에선 지방출신의 신흥무장 ‘이성계’를 3도(충청, 전라, 경상)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임명하여 왜구섬멸에 들어갑니다.
지리산 북서쪽 황산에서 격전이 벌어졌는데요, ‘이성계’는 부상을 당하면서도 군사들을 독려하여 대승을 거둡니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왜구의 도발도 점차 수그러듭니다.
진포(鎭浦), 홍산(鴻山)과 함께 고려 말 왜구를 격퇴시킨 3대 대첩(大捷)으로 불립니다.
대승을 기리기 위해 선조 10년(1577년) 남원 운봉 화수마을에 황산대첩비가 세워졌습니다.
답사여정(앨범)
전적지답사
‘무공수훈자회 계룡지회’에서 주최하는 ‘전적지답사’일입니다.
화창한 봄날 -, 2년여 만에 전우들과의 만남인지라 무척 반갑습니다.
계룡시장님을 비롯하여 시의원님들이 나오셔서 격려해주시네요.
으쓱 & 우쭐 -. ㅎ
오늘 답사지역은 지리산자락에 위치한 남원시 인월면인데요, 예전 산악회 따라 지리둘레길 트레킹 때 주위풍경에 홀딱 반했던 곳이라 더욱 설렙니다.
이동하면서 황산대첩에 대해 회장님으로부터 간략하게 설명을 듣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약간의 허구(虛構)가 있어 보인다는 주장도 있지만, 대단한 승리였습니다.
고대부터 일본과의 악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네이버(Naver)’사태로 또 한일관계가 삐걱거렸는데요, 이때다 싶어 반일감정을 정치에 이용하려는 무리들은 숟가락 얹기에 바쁘기도 했습니다.
과연 이렇게 하는 게 진정한 극일(克日)인가를 다시 한 번 곰곰이 되씹어봅니다.
그나저나 차창너머 푸른 산하를 바라보는 노병들의 마음은 두둥실 들뜹니다.
인월면
오랜만에 찾는 전북 남원시 인월면에 있는 ‘비전’마을입니다.
‘인월(引月)’은 황산전투 당시 ‘이성계’가 해질녘까지 싸우다가 승기를 잡은 후 달[月] 뜨기를 기원하여[引] 완승을 거뒀다는 유래가 전합니다.
소백산맥 끝자락에 자리한 지리산(智異山)이 근육질을 자랑합니다.
전북(남원), 전남(구례), 경남(하동, 함양, 산청) 등 3개도 5개 시군에 걸쳤는데요, 둘레가 800여리에 이를 정도로 엄청 큽니다.
대간 능선 따라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개울 하나 건너지 않고도 갈 수 있다지만, 아흔아홉 골이 있다할 정도로 계곡도 많습니다.
지리산 계곡 따라 흐르는 맑은 물줄기는 섬진강과 남강의 원류(源流)가 되기도 합니다.
남강의 시작인 람천은 지리산 고리봉에서 발원하여 '구름에 둘러싸인 봉우리'란 뜻의 운봉고원을 적시며 흐릅니다.
산속마을이지만,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하여 농경지도 많습니다.
소백산자락에 있는 풍기, 춘양 등과 더불어 십승지(十勝地)로도 알려진 곳입니다.
삼재(전쟁, 굶주림, 질병)를 피할 수 있다고 했는데도, 운봉은 유독 병란(兵亂)이 잦았다니 특이합니다.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
마을초입에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가 널따랗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적의 정식명칭은 ‘남원(南原) 황산대첩비지’라고 하네요.
기록에 의하면 얼마나 참혹했던지 왜구시체가 언덕을 이뤘고, 그 핏물이 냇물로 흘러 7일간이나 핏기가 가시지 않았다죠.
조선왕조 선조 10년(1577년)에서야 승전비가 세워졌는데,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어 파석만 나뒹굴었으나 다시 복원하여 새롭게 단장했답니다.
당시 민초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요?
당연히 민심 또한 흉흉할 수밖에 없었을 터인데, 황산대첩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새삼 국방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그리고 늙었지만, 각오를 다집니다.
파비각(破碑閣)과 어휘각(御諱閣)
왜구토벌 역사에서 황산대첩은 획기적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대규모의 왜구선단이 현재 충남 서천 ‘진포(鎭浦)’로 침입합니다.
척당 승선인원이 30~40명이라면 대략 15,000명에서 20,000명에 이르는 병력입니다.
단순 도적무리가 아니었다는 증거입니다.
100여척의 전선밖에 없었던 고려였지만, ‘최무선’의 화통(火筒)과 화포(火砲)가 있어 왜구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진포전투에서 고려수군의 공격으로 함선을 잃은 왜구들은 약탈을 감행하며 남원방면으로 이동합니다.
고려군의 총사령관인 ‘이성계’는 의형제인 여진족출신 ‘이지란’과 함께 사병조직인 가별초(家別抄)를 이끌며 왜구토벌에 나섭니다.
재상이었던 ‘정몽주’도 종군했다는데, 달을 끌어올려 어둠을 밝혀 활을 쏘았을 정도로 처참한 전투였다죠.
람천엔 강물대신 핏물이 흘렀고, 바위도 피에 물들어 피 바위[血岩]가 되었습니다.
이듬해에 현장을 방문한 ‘이성계’는 자신과 휘하장수의 이름을 암벽에 새겼는데, 그게 바로 ‘어휘각(御諱閣)’입니다.
선조 대에 이르러서야 이곳에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가 세워집니다.
이후 1943년 패망을 앞둔 일제가 전국 경찰에 항일의식을 북돋는 유물들을 파괴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리자 1945년 1월 높이 4.25m의 대첩비도 폭파됩니다.
1957년 ‘파비각(破碑閣)’을 지어 깨어진 비석 파편들을 모아 보관합니다.
전각 안에 나뒹구는 비석조각들이 아픔을 증언하는 듯합니다.
조선건국
황산대첩에서 대승한 ‘이성계’는 여원치(女院峙)를 넘어 선조(先祖)의 땅 전주로 향합니다.
남원을 왕래할 땐 반드시 거치던 길목이었습니다.
왜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이성계’가 일약(一躍) 구국의 영웅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지금은 전주 한옥마을 입구인 오목대(梧木臺)에서 전주 ‘이’씨 종친들과 지역 토호들을 모아놓고 한나라 고조 ‘유방’이 부른 '대풍가(大風歌)'를 떼창(^^)했다고 전합니다.
나라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뜻을 은근히 내비친 건 아닐까요?
황산대첩 이후에도 홍건적과 여진족 격파 등 ‘이성계’의 무공은 끝없이 이어지는데, 허약한 고려의 문무백관들은 ‘이성계’에게 줄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성계’가 꿨다는 꿈 이야기가 묘한 여운(餘韻)을 남깁니다.
“산중에서 산양을 만나 힘껏 덮쳤더니, 뿔과 꼬리는 잘린 채 몸뚱이만 있더라!”
깜짝 놀란 ‘무학’대사가 “양(羊)자에서 뿔과 꼬리를 떼면 임금 왕(王)자가 된다!”며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어찌되었던 황산대첩으로 왜구세력이 궤멸하자 동아시아는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이는 조선조 창건에 밑바탕이 되기도 했는데요, 결국 ‘이성계’는 12년 후 왕이 됩니다.
람천 물줄기는 말이 없네요.
전촌 동편제마을
옆에 있는 ‘전촌(前村)’ 동편제마을도 들립니다.
국악마을로 선정되어 국악거리축제도 열린다는 곳입니다.
자그마한 동산에는 판소리 동편제의 창시자인 가왕(歌王) ‘송흥록’과 그의 제자 국창(國唱) ‘박초월’의 생가 터가 있습니다.
지리산 정기가 내려오는 운봉에서 태어난 ‘송흥록’은 자신만의 독특하고 청담(淸淡)한 창법으로 판소리 가락을 완성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로 나온 서편제(西便制)는 알아도 동편제(東便制)는 생소해하는데요, 수식과 기교가 많아 여성적인 소리로 알려진 서편제와는 달리 남성적이고 힘이 넘친다죠.
‘송흥록’집안에서 5대를 이어 ‘동편제’ 명창이 배출되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비전마을은 명창 ‘박초월’선생이 성장한 곳이기도 합니다.
어려서부터 소녀명창으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중요무형문화재 5호(수궁가) 기능보유자로 여성 판소리계에 큰 울림을 준 출중한 사람입니다.
오찬(고향마루)
전적지답사의 하이라이트(^^) 오찬시간입니다.
남원시내에 자리한 ‘고향마루’ 추어탕(鰍魚湯) -.
미꾸라지를 삶아 육수를 내고는 뼈째 갈아 넣어 끓이는 한국전통 국물요리입니다.
원래 제대로 끓이는 전문식당에서 먹어줘야 되기에 일부러 고른 식당이랍니다.
겨울이나 가을에 자주 먹는다지만, 이젠 사철음식이 되었습니다.
자양강장, 정력증진, 몸보신은 물론 치매예방에도 좋아 오래전부터 사랑받아온 음식입니다.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하다는데요, 전라도식 추어탕은 칼슘까지 풍부하여 뼈 건강에도 좋다죠.
간결한 밑반찬도 상큼하여 좋습니다.
추어탕에 넣어 먹을 소면이 빠진 게 조금은 아쉬웠지만, 추어튀김으로 시작하여 탕까지 잘 먹었네요.
원기 충만~!
광한루원(廣寒樓苑)
시간이 남으니 춘향테마파크를 구경하라네요.
우린 광한루와 어제 끝난 춘향축제 뒷마당을 구경하려 실실 움직였습니다,
오랜만에 ‘광한루원(廣寒樓苑)’ 정문이면서 북문인 청허부(淸虛府)로 들어섭니다.
대부분 광한루원을 춘향전 무대로만 알고 있고 있지만, 실은 조선시대 지방관아에서 조영(造營)한 관아원림(官衙園林)입니다.
1419년에 설립되어 6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데, 1983년 사적 303호로 지정됐다가 2008년에 명승 33호로 재분류된 국가유산입니다.
사부작사부작 둘러봅니다.
광한루(廣寒樓, 보물 281호)는 아쉽게도 통행을 막아놓았네요.
세종 때 ‘정인지’가 경치에 반해 마치 달나라의 미인 ‘항아’가 살고 있는 월궁(月宮)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를 닮았다하여 지은 이름이랍니다.
남원부사 ‘장의국’이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들여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고는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烏鵲橋)를 놓았습니다.
연못에 세워진 다리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다리를 건너봅니다.
우리나라 조경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는 평가에 걸맞게 참 멋집니다.
경회루(한양), 촉석루(진주), 부벽루(평양)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중 하나라는데요, 광한루의 다양한 스토리 콘텐츠는 어느 곳보다도 독보적입니다.
러브스토리가 달콤하게 익어갔던 신선의 땅을 나섭니다.
사랑도 사랑할 나이에 사랑하는 것이 어울린다는 말을 되뇌며 광한루를 뒤로하는 노인네들의 발걸음이 왠지 처량해 보이네요. ㅎ
춘향제
춘향축제 뒷정리가 한창인 요천 따라 꽃길을 걷습니다.
축제는 끝났지만, 다양한 꽃들이 아직 남아 봄 냄새를 풍깁니다.
‘몽룡’과 ‘춘향’이도 나와 반기네요.
부교(浮橋)도 철거 중이라 건너질 못해 아쉽습니다.
'춘향, COLOR愛 반하다!‘
올해 94회를 맞는 축제의 주제라는데, 역사가 이렇게 깊은 줄은 몰랐네요.
1931년에 처음 시작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표 문화축제랍니다.
춘향전을 주제로 조성한 관광지입니다.
광한루에서 건너편 남원관광지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Thema공원을 조성했습니다.
요천에 5개(만남, 맹약, 사랑/이별, 시련, 축제)의 장을 만들어 ’춘향‘과 ’몽룡‘의 사랑일대기를 재현했답니다.
내년에 함 와봐야겠네요.
에필로그
‘호국의 달’ 6월이 다가옵니다.
호국(護國)은 외부의 위협이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고 지키는 일입니다.
지난해 수해현장에서 수색작업 중 순직(殉職)한 해병대원을 놓고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업무 중에 순직하면 대개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어 기립니다.
군에 보낸 외동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도 9개월이 넘었건만 아직도 마무리를 못 짓고 있습니다.
오히려 정권차원의 의혹 4가지를 더해 '이채양명주'란 슬로건까지 만들어 총선기간 내내 활용했습니다.
자식 잃고 어버이날을 보냈을 부모 심정을 가늠하기 어렵지 않거늘, 수사 외압여부와 함께 특검과 거부권 같은 정쟁의 소재만 남발하고 있습니다.
유족들은 언론과 정치권에서 아들 이름이 나오는 것조차 괴롭다고 호소합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유족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작금의 행태에 울화가 치밉니다.
적과 첨예하게 대치중인 우리나라에서 고귀한 희생에 추모하고 기리지는 못할망정 정쟁에 활용할 생각만 하다니... 어쩌다가 나라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나라를 이끌고 나갈 젊은 세대들에게 부탁합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한 목숨 초개(草芥)와 같이 버렸던 선배전우들의 위국헌신(爲國獻身)의 기백을 절대 잊지 말라고 -.
올해도 왠지 씁쓸한 6월이 될 것 같네요.
행사를 위해 수고하신 임원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토욜(5. 18) 오후에 갯바위가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