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죠인(大乗院)은 1087년에 사콘에노쇼우쇼우(左近衛少将) 후지와라 마사카네(藤原政兼)의 아들 류젠 호인(隆禅法印, 1038-1100)에 의해 나라(奈良) 고후쿠지(興福寺)의 문적사원(門跡寺院)으로 창건된 이후, 헤이안시대부터 에도시대에 이르기까지 번영했고, 산가인(三箇院) 중 하나로 불리며, 나라공원(奈良公園) 아라이케(荒池) 남쪽, 기엔잔(鬼園山) 남쪽에 위치하여 번영했으나, 현재는 대승원(大乗院) 연못만 남기고 폐사되었다. 류젠은 법상종의 승려로, 고후쿠지 난인(興福寺南院)의 엔엔 소즈(円縁僧都)에게 사사하여 유식(唯識)・인명(因明)・법상 교학(法相教学)을 익혔다. 이후 1073년에는 유마회(維摩会)의 강사(講師)를 맡았으며, 1082년에는 릿시(律師)로 임명되었고, 고후쿠지의 벳토(別当) 및 호인(法印)을 거쳐 곤노 다이소즈(権大僧都)로 승진하였다. 1087년에는 부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재의 나라현청 근처, 고후쿠지 내 이치조인(一乗院) 동쪽에 다이조인(大乗院)을 창건하고 초대 주지가 되었다. 이를 통해 다이조인은 이치조인(一乗院)과 함께 문적사원(門跡寺院)로서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또한 1096년에는 고후쿠지의 곤노 벳토(権別当)로 임명되었으며, 동시에 야마토노쿠니(大和国)의 하세데라(長谷寺) 및 다이안지(大安寺)의 사무도 겸임하였다.
산가인(三箇院)은 고후쿠지(興福寺) 다이죠인(大乗院)·류게쥬인(竜華樹院)·겐코지 젠죠인(元興寺禅定院)의 세 사원을 가리키는데, 특히 다이죠인은 이치조인(一乗院)과 함께 문적사원(門跡寺院)에 해당하며, 고후쿠지 영지(興福寺領) 및 장원(荘園)은 헤이안 시대 말기 이래 서로 얽히면서도 사문의 직할 영지(寺門領), 이치조인 및 다이죠인 양 문적사원의 영지(一乗院・大乗院両門跡領) 등으로로 나뉘게 되었다. 본 기록은 다이죠인이 소유했던 장원 등에 관한 사료이며, 서두에는 위에서 언급한 세 문적사원의 계승 관계 및 기타 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류게쥬인은 다이죠인의 말사(末寺)로, 젠죠인 또한 1180년 다이라노 시게히라(平重衡, 1158-1185)에 의한 남도 소각 사건(南都焼討, 1181) 이후, 다이죠인이 고후쿠지 내부에서 젠죠인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이 사원 또한 다이죠인의 문적사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치조인(一乗院) 및 기타인(喜多院)과 함께 고후쿠지 사원(興福寺院家) 내에서 상위에 위치하였다.
3대 섭정(摂政) 후지와라 모로자네(藤原師実, 1042-1101)의 아들 진판(尋範, 1093-1174)이 입문한 이후, 대대로 셋칸케(摂関家) 후지와라(藤原) 가문의 자제가 문주(門主)가 되어 학문을 닦았으며, 구조가(九条家) 및 이치조가(一条家) 출신의 문주들이 젠죠인(禅定院) 및 류게쥬인(龍華樹院) 등의 원주직(院主職)을 겸임하였으며, 하세데라(長谷寺), 에이큐지(永久寺) 등의 말사(末寺), 장원, 사찰 승려, 방인(坊人), 그리고 각종 상공업 조합을 관장하면서 이치조인과 함께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특히 구조케(九条家) 계통의 세력이 강한 사찰로 자리 잡았다. 제4대 원주(院主)인 후지와라 다다미치(藤原忠通, 1097-1164)의 아들, 신엔(信円, 1153-1224)의 시대에 다이조인은 문적사원(門跡寺院)로 지정되었으며, 이치조인(一乗院)과 번갈아 가며 고후쿠지(興福寺)의 별당직(別当職)을 맡았으며, 특히 몬슈(門主)는 셋칸케 및 쇼군가(将軍家)의 자제들로부터 선발되었다.
1180년, 다이라노 시게히라(平重衡, 1158-1185)가 남도(南都)일대에서 일으킨 난토야키우치(南都焼討)으로 인해 나라(奈良) 토다이지(東大寺), 코후쿠지(興福寺)의 당탑가람, 승방 등 닥치는 대로 불태우면서 다이죠인 또한 전소되었으며, 이후 1181년 고후쿠지 보제원(菩提院) 남쪽, 겐코지(元興寺) 별원(別院)인 젠죠인(禅定院)이 있던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연못 주변에 3개의 당우(堂宇)와 1기의 탑이 세워져 있었으며, 시라카와 법황(白河法皇)이 기증한 에치젠국(越前国) 가와구치 장원(河口荘)을 비롯하여 다수의 장원을 소유하며, 슈토(衆徒) 및 고쿠민(国民)을 지배하였다. 이치조인과 함께 야마토국(大和国) 슈고쇼쿠(守護職)로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접어들면서 다이묘(大名)들이 영지를 형성함에 따라 사원 영지는 점차 쇠퇴하였으며, 1580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제출된 다이쇼인의 영지는 950석(石) 규모였다. 에도 시대에 이르러 그 세력은 사찰 내부로 한정되었으며, 막부에서는 미노쇼(美濃荘, 대와국) 951석을 주인사령(朱印寺領)으로 인정하였다.
이치조인과 함께 고후쿠지 별당직(別当職)뿐만 아니라 긴푸산(金峯山) 검교(検校), 하세데라(長谷寺) 별당직 등을 겸직하는 승려를 다수 배출하였고, 고후쿠지의 주도권을 두고 이치조인과 경쟁하였으며, 때로는 양 사원 간 무력 충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428년에는 도쿠세이잇키(徳政一揆), 1434년에는, 견명선(遣明船) 파견을 위해 사원 영지 48곳에 세금을 매긴 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장원 주민들의 봉기, 1451년에는 츠치잇키(土一揆)로 인해 소실되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는 실력 있는 두 명의 인주인 교카쿠(経覚)와 진손(尋尊)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나라(奈良) 일대의 좌(座)를 차례로 지배하여 크게 번성하였다. 다이죠인이 소실되었던 1451년 다음해에 바로 20대 문적(門跡) 진손(尋尊, 1430-1508) 대승정(大僧正)의 의뢰를 받아, 무로마치 시대의 쇼군(将軍)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신임을 받아 도보슈(同朋衆)로 등용된 저명한 정원사였던 젠아미(善阿弥, 1386-1482) 부자가 연못과 전각을 더욱 화려하게 정비하여 지천회유식(池泉回遊式) 정원을 조성하였으며, 유좌(油座), 히노키모노좌(檜物座), 옻칠좌(漆座) 등 다수의 대승원 공예조합을 관장하였다. 또한, 나라의 중심 시장인 나카이치(中市)를 운영하여 사원 유지와 재정을 확보하는 등 뛰어난 경영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 정원은 당시 쇼군(将軍)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 1436-1490)를 비롯하여 여러 귀족들이 자주 감상하러 방문하였으며, 에도 시대(江戸時代)에 접어들면서, 다이죠인은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바탕으로 수키야즈쿠리(数寄屋造) 양식의 건축물이 새롭게 조성되었다. 현재 나라국립박물관(奈良国立博物館)에 이축(移築)된 다실(茶室) 핫소안(八窓庵, 含翠亭) 역시 원래 다이죠인에 있었다. 한편, 제35대 문적(門跡) 류온(隆温, ?-1875)은 정원의 각 구역에 사계절의 풍경을 배치하여 대승원 사계진경도(大乗院四季真景図)를 제작하였는데, 이는 에도 시대 말기의 대승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 회화를 통해, 근세 말기까지도 대승원의 정원이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메이지 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남도 제일의 명원(名園)으로 칭송받았다. "대승원 사사 잡사기(大乗院寺社雑事記)", "경각사요초(経覚私要鈔)"를 비롯하여, 중세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는 기록 및 고문서가 현존하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현재 국립공문서관(国立公文書館)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폐불훼석(廃仏毀釈)으로 폐사되었고, 제60세 문주이자 구조 나오타다(九条尚忠, 1798-1871)의 아들, 류호(隆芳, 1840-1903)가 환속하면서 다이조인은 소멸하였다. 이후 류호는 화족(華族)으로 편입되어 마쓰조노 나오요시(松園尚嘉)로 개명하며 남작(男爵) 작위를 받았고, 부지는 남작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이 무렵 부지 내의 많은 건물이 철거 혹은 매각되었다. 1872년부터 나라 전역에 학제(学制)가 실시되면서 소학교가 설치되었고, 1874년 7월 7일에는 저택 일부를 활용하여 코신샤(更新舎) 학교가 세워졌다. 1883년에는 부지 내 저택을 철거하고 아스카 소학교(飛鳥小学校)가 옮겨왔으며, 1900년 아스카 소학교가 현재의 키데라쵸(紀寺町)로 옮겨가면서, 이 곳은 폐허가 되었지만, 1905년에는 나라시(奈良市), 미야코 호텔(都ホテル), 간사이철도(関西鉄道) 간의 나라호텔 건설에 관한 각서를 체결하고, 1906년에는 호텔 부지로 간사이철도에 매각되어 1909년에는 아사카야마(朝香山) 산정 일대에 호텔이 세워져 외국인을 대상으로하는 영빈관으로서 영업을 시작하였다.
옛 정원에는 호텔 테니스 코트 및 퍼터 골프장이 조성되기도 하였으나, 전후 지천회유식 정원의 일부 구역이 정비되었으며, 모리 오사무(森蘊) 등의 연구 성과도 힘입어, 1958년에 국가 명승(名勝)으로 지정되었다. 1973년부터는 *일본 내셔널 트러스트(日本ナショナルトラスト)*가 관리하고 있으며, 명승 대승원 정원 문화관(名勝大乗院庭園文化館)을 건립하였다.. 1995년부터 나라 문화재 연구소(奈良文化財研究所)의 발굴 조사와 병행하여, 다이죠인 사계진경도(大乗院四季真景図)를 근거로 한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다. 2000년 가을 조사에서는 동쪽 연못(東池)과 서쪽 연못(西池) 사이에서 두 개의 작은 언덕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도랑이 발견되었다. 이듬해 조사에서는 작은 폭포와 중도(中島)를 갖춘 연못이 발견되었으며, 이곳은 북쪽 연못(北池)으로 명명되었다. 2010년에 복원 사업이 완료되어, 헤이조 천도 1300년 기념 행사(平城遷都1300年祭)와 더불어 일반 공개가 시작되었다. 원래 다이죠인의 경내 일부는 현재 나라(奈良) 호텔 부지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