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54, 추억의 한잔
세칭 동방교에서 발간하는 신문 ‘주간 기독교’의 사무실이 종로 5가의 어떤 건물 5층에 있었는데 같이 빈집초월(무단가출)한 내 친구 D가 나와 용산 '수원정' 골방에서 같이 지내면서 나는 순회자와 제2성전 전도사로, 그는 이곳으로 출퇴근해서 일하던 곳이기도 하다.
우여곡절 끝에 군에 입대하여 마침 서울에 배치받아 군복무를 하고 있을때 주말마다 외박을 나오면 별다르게 갈곳이 없었던 나는 그때까지 D가 근무하고 있던 이곳 사무실을 아지트 삼아 먹고 놀고 자면서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한번은 종로5가 건너편 동대문 시장에서 곰장어구이를 시켜놓고 D와 둘이 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는데 나는 그때 군인이라 세칭 동방교에서는 자유의 몸, D는 아직 세칭 동방교에 머물고 있으면서 용산 '수원정'에서 숙식하고 있는 몸이라 소주를 마시지 않고 나 혼자서 소주 세병을 비웠다.
정신이 아리까리 했다. 추억 어린 부산이야기, 그리운 사람들의 소식, 용산 '수원정'에서 같이 지내던 이야기, 똥통 끌고 시흥농장을 왕복했던 이야기, 엎드려 뻐쳐서 김태문 삼손목사에게 빳다를 맞고 씩씩거리던 이야기, 도망갈 속셈을 가슴에 품고 사명대사를 설교하던 이야기, 경부선 열차에 몸을 싣고 정신없이 자면서 도망갔던 이야기, 군 생활의 무용담. . . 나 혼자서 횡설수설, D는 그것을 다 받아 주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많이 했을까.
통금이 가까워서 가게가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술판을 정리하고 나왔는데 동대문시장의 골목길을 지나가다 보니 연탄불 하나가 벌겋게 타고 있는것이 보였다. 통금이 끝나면 내일 새벽 4시부터 장사 시작할 때 사용 하려고 연탄에 불을 피워 보관하고 있던 것이었다. 술기운에 그것을 군화발로 냅다 차 버렸다. 노발대발한 아주머니가 연탄집게를 들고 사정없이 내 종아리를 후려 갈겼다. 그 와중에도 내가 발을 들어 잽싸게 피했다.
옆에 붙어있던 D가 그대로 맞았다. 상처가 나고 피가 흘렀다. 그래도 D는 미안하다고 사정사정하고 통금에 쫓겨 얼른 종로 5가 ‘주간 기독교’ 사무실로 돌아왔다. 겨울이라 스팀난로가 김을 칙칙내며 열을 발산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여기서 D와 같이 하루밤을 지낼 심산이다. D도 오늘 용산 '수원정'으로 돌아가지않고 업무핑계를 대고 못들어간다고 연락해 놓고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나를 위해 오늘 여기서 지낼 예정이다.
스팀난로가 설치되어 있는 곳의 옆으로 길게 놓여 있는 소파에 옷도 벗지않고 벌렁 누우니 왈칵 구역질과 함께 위장에 있던 내용물이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과음한 술꾼의 전매특허 '오바이터'였다. 오늘 저녁 내내 술도 안 먹고 말똥 말똥한 정신으로 횡설수설하는 내 술주정을 다 받아주었던 D가 마지막 봉사로 세면장에 가서 쓰레받기와 걸레를 가지고 와 그것을 치운다고 생고생을 했다. 얼마나 구역질이 났을까, 미안한 친구. . .
다음날 출근하는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찌 될 것인가, 그는 군소리 한마디 없이 그 토사물을 깨끗이 치워냈고 그 와중에 나는 정신없이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더구나 D는 오늘 나한테 붙들려 저녁에 용산 '수원정'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친구 대신 연탄집게에 두들겨 맞아 상처까지 나고 토사물을 치우고..., 미안하오 D氏.
아마 그때 연탄집게에 맞은 상처의 흉터가 지금도 어렴풋이 남아 있으리라.
이튿날 아침 일찍 근처의 목욕탕으로 가서 온탕에 몸을 담그니 만사가 녹작지근한데 다시는 소주병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반추해보면 잊을수 없는 추억의 한 토막이다. 그 D도 내가 입대하여 중고참의 서열에 막 진입하고 있을 즈음인 1여년후에 군에 입대를 해서 카투사로 복무하다가 무사히 병역의무를 마치고 세칭 동방교를 떠나 사회로 복귀했는데 후일의 이야기는 아마 따로 기록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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