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생산이 유라시아 우월의 원동력”…유럽의 신대륙 지배 정당화했다는 지적도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총, 균, 쇠’는 어려운 학술연구를 쉽게 풀어 설명했다는 점에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대학생들이 즐겨 읽는 책”이란 출판사의 광고문구가 어긋나지는 않은 것 같다. 1997년에 출간되었고, 이듬해인 1998년에 퓰리처 상을 수상했다. 2005년엔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다큐로 제작되기도 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유대인으로, 아버지가 몰도비아에서 일어난 반유대 폭동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왔기 때문에 유럽 백인들이 가지는 인종 차별주의를 배격했다. 그런 관점이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의 기본 골격을 형성한 것 같다. 그는 문명 발전의 차이를 설명하며 인종적 편견 대신에 환경결정론을 강조했다.
다이아몬드는 문화인류학자이자, UCLA 지리학 교수로서 세계사에 제기된 큰 의문점(big question)의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이 책을 정리했다. 그 의문점은 무엇 때문에 16세기까지 유라시아와 아메리카-오스트레일리아 사이에 커다란 문명의 갭이 유지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다이아몬드의 문제 의식은 뉴기니 원주민인 얄리의 질문에서 시작한다. 얄리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들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저자는 이 질문의 대답을 찾는 과정을 이 책에서 서숧했다. 유럽인들이 대형 선박을 건조해 대양을 건너고, 총을 만들고 새균을 퍼트려 원주민을 대량살상하는 반면에, 아메리카와 호주의 원주민들은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이 문명의 격차로 인해 채집과 수렵에 의지하던 신대륙의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의 출현에 맥 없이 몰락하고 말았다.
문학사상 출판본
책을 읽으며 저자의 박학한 지식과 풍부한 증거 제시에 놀랐다. 다이아몬드는 유라시아의 구대륙과 아메라카 신대륙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사건으로 1532년 11월 16일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 피사로가 페루에서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를 생포한 사건을 꼽았다. 교활한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은 후 몸값으로 엄청난 양의 황금을 뜯어내고 살해해 버렸다. 그리고 원주민의 분열을 이용해 제국을 접수해 버렸다.
피사로의 성공은 총기, 철제 무기, 말 등의 군사기술, 유럽인들이 퍼트린 전염병, 해양기술, 유립인들의 중앙집권적, 문자 등에 기인한다고 다이아몬드는 지적했다. 총, 균, 쇠의 압도적 우위로 200~300명에 불과한 유럽 병사들이 수십만의 원주민 제국을 멸망시킨 것이다.
앞서 스페인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킨 것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아즈텍에선 병원균이 큰 무기였다. 1520년에 스페인령 쿠바에서 감염된 한 노예가 멕시코에 도착해 아즈텍족을 절반 가까이 몰살시켰다. 코르테스가 왔을 때엔 아즈텍 생존자들은 전염병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병은 유럽인들을 건너뛰어 원주민만 죽였다. 쿠이틀라우악 아즈텍 황제도 전염병으로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외래인들은 손쉽게 제국을 정복했다.
유럽인들의 원시문명 정복은 하와이에서도 그랬고,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도 그러했다. 다이아몬드는 문명이 우월한 지역을 유라시아란 애매한 카테고리로 표현했지만, 그가 적시한 예는 유럽에 맞춰졌다. ‘총, 균, 쇠’가 유럽인의 인종적 우월감을 부정했지만, 다른 의미에서 16세기 이후 유럽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다.
다이아몬드는 유라시아, 좁게는 유럽이 신대륙보다 우위에 서게 된 것은 식량 생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름으로써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 잉여 농산물로 인해 지배계급이 생기고 군대를 먹여살릴수 있게 되었고, 기술개발을 전념하는 부류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쇠로 만든 무기가 개발된 것은 농업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가축화-작물화의 발원지로 서남아시아의 초승달 지대, 중국, 중앙아메리카, 남미의 안데스산맥 일대, 미국 동부 등 5군데로 파악하고, 다른 서너 곳의 가능성을 인정해 9군데 정도로 보았다. 식량 생산을 일찍 시작한 지역에서 총기, 병원균, 쇠를 발전시켰고, 그 결과 문명의 유산자와 무산자가 구별되는 차이가 생겼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의 논리에 공감하지 않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농업생산이 총, 균, 쇠의 인류정복 무기의 원천이라면 잉카와 아즈텍 문명의 바로 인근에 농업이 시작되었는데도 왜 아메리카의 문명들은 쇠와 총을 갖지 못했을까.
병원균은 가축에서 발생했다고 다이아몬드는 주장한다. 고대에 가축화된 포유류는 14종인데, 소와 말, 양, 돼지, 염소, 단봉낙타, 쌍봉낙타, 라마와 알파카, 당나귀, 순록, 물소, 야크, 발리소, 인도소 등이다. 이중 소, 말, 양, 돼지, 염소의 5종이 전세계에 두루 확산되었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고대 포유류 가축 14종이 고르게 분포되지 않았다. 남아메리카엔 단 1종밖에 없었으며,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엔 1종도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라시아엔 14종 가운데 13종이 분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유라시아에 많은 종류의 가축이 사육되었고, 그로 인한 전염병이 많이 생겼으며, 유라시아 인종들은 일찍이 전염병에 면역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은 그들이 가져온 병원균에 면역력이 전혀 없었다.
총, 균, 쇠는 원주민 사이에서도 먼저 갖는자와 늦게 갖는자의 차이를 구별했다. 다이아몬드는 편집후기에서 1818~1830년 사이에 일어는 뉴질랜드 마오리족 사이에서 벌어진 머스킷(포테이토) 전쟁을 예로 들었다. 뉴질랜드 북부 마오리족은 유럽인들에게서 일찍 머스켓 총을 구입했고, 감자 재배 방법을 익혔다. 머스킷 총은 이를 갖지 않는 부족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무기였고, 감자는 장거리 이동을 가능케 했다. 그동안 식량 보급이 어려워 멀리까지 공격에 나서지 못했던 마오리족은 감자를 들고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뉴질랜드의 원주민 전쟁은 총기와 병원균, 금속을 먼저 가진 종족이 승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에 비해 유럽인과 접촉이 늦었던 남부 섬의 마오리족은 북부 종족을 이기기 위해 뒤늦게 총과 쇠를 도입해 대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