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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사르다나팔의 비참한 최후를 다루었으며, 환상적인 이국 정서, 사랑과 비극이 어우러지는 흥미로운 그림이다.
기원전 7세기경 앗시리아의 왕인 사르다나팔은 적에게 포위되어 약 2년 정도를 궁전에 갇혀 살게 되었다. 적들이 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궁전에 쳐들어오기 전에 사르다나팔은 그의 애첩들과 애마를 모두 죽이고, 그가 가지고 있던 보물들을 한 군데에 모아 불태운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불 속에 타죽게 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이 그림은 이러한 이야기를 들라크루아만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환상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사르다나팔 왕이 기대어 누워 있는 붉은 융단 침대 주위에는 관능적인 나체의 여인들이 살해당하는 광란의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코끼리 머리 장식은 붉은 빛의 피로 물들어 있으며, 방바닥에 온갖 보물들이 어질어 있는 화면 왼쪽에는 흑인 노예가 백마를 끌고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다.
그림은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펼쳐지는 대각선 구도 속으로 격정과 죽음에 대한 고통을 미켈란젤로의 형식미로 표현했으며,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강렬한 색조를 통해 시각적인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이 광란의 장면을 지켜보는 사르다나팔의 우울함과 더불어 죽음에 몸을 뒤트는 여인의 풍만한 관능미는 에로티즘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만들면서, 사르다나팔의 이야기를 뛰어난 환상미로 표현하고 있다.
19세기, 서구에는 두 개의 사조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실증주의와 낭만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과학적 실증성과 합리성을 존중하는 실증주의 철학은 19세기 학자들 일반의 성향이었고, 낭만주의 철학은 합리성에 대비되는 열정과 낭만을 추구했습니다. 물론 빼어난 사유들은 이 두 측면이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낭만주의 사유에서 문학과 역사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수학을 모범으로 했던 고전적인 학문은 공간적 사유, 정적인 사유, 법칙적인 사유를 구가했으며, 이런 흐름은 19세기에 들어와 모든 담론이 역사를 배경으로 하면서 시간적 사유, 동적인 사유, 우발성이 깃들인 사유로 전환됩니다. 때를 같이해서 문학에서는 그때까지 사유의 변방에 머물러 있었던 광기, 꿈, 죽음, 폭력등을 형상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들라크루아의 그림에는 이러한 문학적-역사적 교양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그림들은 곧, 19세기라는 '시대의 형상화'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서구의 고전적인 화가들이 늘 그랬듯이 들라크루아 역시 고대에 심취했습니다. 그는 고대의 문학작품들과 역사를 섭렵했으며, 이러한 지식들로부터 영감을 이끌어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고대의 고전적인 미를 복구하려 했던 다비드, 앵그르 등의 고전주의와는 조화와 우아함보다는 역동성과 힘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서 미켈란젤로나 루벤스를 떠올리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 되겠습니다.
-작가소개-
파리 교외의 샤랑통에서 외교관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제재는 광범위하여 종교·신화·문학·역사로부터 풍속·인물·풍경·정물 등의 전영역에 걸쳤으며, 벽화장식을 포함한 유채화 853점 외에 데생화 6629점, 수채화·파스텔화 1505점, 판화류 133점, 화첩 60점에 이르는 작품을 제작하였고, 예술상의 깊은 성찰을 기술한 일기·평론·서간도 많이 남겼다. 고전파 화가인 P.N. 게랭에게 배웠으며 선배인 T. 제리코를 알게 되었고, 당시 고전파의 대명사격인 A.J. 그로의 전쟁화의 영향을 받았다.그는 냉담한 고전파 데생의 속박을 파괴하고, 강렬한 인체데생과 거기에 반향하는 자연 등을 동적인 구도로 종합하여 극적인 표현을 달성하였다. 색채를 중시하고 붓놀림을 가능한한 눈에 띄게 하여 강렬한 효과를 지향했으며, 때로는 보색관계에 주의해 색조 분열을 시도, 후에 나타나는 인상파로의 길을 열었다. 통제를 기피하여 개성의 해방과 고양을 추구하고, 회화의 예술적 본성을 잘 이해하여 개화에 주력한 그의 깊은 영향은 세잔·고흐 등 후대의 뛰어난 화가들에게서 나타났다.
그의 회화는 <구상력의 예술>이며 <자연은 사전이다>라고 할 만큼 자연을 구사하고, 현실을 초월해 현실보다도 진실한 상상세계 속에서 늘 추구하던 인간의 위대한 모습, 영광·패잔 속에 있는 영웅적 노력의 자세를 그렸다. 또 자신이 좋아한 과거나 동시대의 역사 속에서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건을 선택하여 제재로 삼고 구성했다. 이러한 풍경·구도·효과 등은 영국의 회화에서 적지않게 영향받은 것인데, 그의 문학적 교양과 함께 음악애호의 깊이를 반영하는 특색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쇼팽의 비장한 초상과 그의 자화상 등 혼까지 몰입된 작품을 남겼으며, 정물화·나부,풍속화 등도 다수 그렸는데, 사막의 아라비아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 등에서 풍속화를 예술적으로 시각화하였다.
1832년의 모로코 여행은 그의 상상력에 이국적 습속의 자극을 주어 다수의 이국적인 제재와 강렬한 색채효과를 발휘하여, 이후 서양화에 큰 의미를 주는 새로운 방면을 개척하였다. 낭만주의는 중세 취미를 부흥함과 동시에 그리스도교적 제재를 취급하였는데, 그의 예술 중 가장 뛰어난 것도 이 부류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말년에 그는 동판화, 특히 석판화 제작에 몰두하여 흑백대조가 강조되고 한층 환상적 표현기교를 보인 《파우스트석판화집(1827)》 《햄릿석판화집(1843)》 등의 걸작품을 남겼다.
낭만주의란 하나의 사조나 양식이라기보다 정신적 태도라 볼 수 있습니다. 낭만주의의 핵심은 아름다움은 상대적인 것이며 예술가는 자신의 미의식에 따라 주제와 표현방식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겠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당연한 사실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세계의 중심을 바꾸는 발상이었습니다. 20세기 미술이 보여주는 어지러울 정도의 '주관'의 강조도 거슬러 올라가면 낭만주의에서 출발한 것이지요.
당대의 문학 작품들, 소설과 시나리오를 즐겨 읽었던 들라크루아는 종종 문학적인 영감을 자신의 작품 세계에 끌어오곤 했습니다. 미술사가들은 이 작품의 모델이 햄릿, 혹은 월터 스콧이란 작가의 소설 라마무어의 시집에 등장하는 레벤스우드로 분장한 들라크루아 자신이라고 추정하고 있고 제목 역시, <레벤스우드, 또는 햄릿으로 분장한 자화상>이라 불려지고 있습니다. 레벤스우드(Ravenswood)는 스콧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으로 불행하고 비극적인 스페인 사람이었는데 들라크루아는 평생 빈곤과 고독으로 괴로워했던 자신을 그의 모습 속에서 투영시킨 모양입니다.
24세 때 처음으로 살롱에 입선한 작품입니다. 데뷔작이지요. 들라크루아는 단테의 『신곡』의 '지옥편'에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그렸다고 합니다.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에 대한 존경의 뜻이 포함되어 있기도 한 작품이고요. 단테는 신곡에서 동심원 9개로 이루어진 지옥을 상상하였으며 가운데 원에는 가장 죄가 무거운 원죄를 지은 사람들이, 그리고 가장 바깥쪽 원에는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들이 거하는 곳으로 묘사하였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이 그림에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아케론 강을 건너 5번째 지옥을 방문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붉은 두건을 쓰고 있는 사람이 단테, 그 옆에 있는 남자가 베르길리우스입니다.
아케론강은 저주받은 죽은 자들이 던져지는 곳으로, 그 곳에선 영영 죽지 않고 고통받으며 떠다니게 되죠. 이 끔찍한 망령들은 단테의 배에 오르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습니다. 절규하는 망령들의 뒤틀리고 다소 과장된 근육, 인체묘사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영향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자, 그가 고전에 어떤 힘과 역동성을 불어넣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살롱에 입선한 작품입니다. 당시 같은 살롱에 출품했던 앵그르의 '루이 13세의 서원'과 매우 대조적인 화풍을 보여주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화단은 앵그르가 이끄는 고전주의 계열과 들라크루아가 이끄는 낭만주의 계열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지요.
이 그림은 그리스의 키오스 섬이 터키 군의 습격을 받아 민가는 모두 불태워지고, 남자는 살육 당했으며, 여자들은 약탈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이 잔인한 사건에 대한 경계심과 분노를 담아 그리스를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림 전면에는 지쳐서 누워버린 키오스 섬 사람들을 체념과 고통, 고뇌가 뒤섞인 표정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여자를 납치해가려는 터키 기마병들의 잔인한 장면을 화면 왼쪽에 담아, 처참한 전투에 대한 사실감을 부여하였습니다. 이들 뒤로 펼쳐지는 불타는 민가와 전투로 피폐해진 황량한 들판, 검붉은 바다와 황혼이 지는 짙은 저녁 노을이 보여주는 우울함과 적막함이 그림의 주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받쳐주고 있습니다. 특히, 죽은 여인의 젖을 물고 있는 아기와 여인들의 공포 섞인 울부짖음, 눈을 뜨고 죽은 이의 멍한 표정을 묘사하면서, 들라크루아는 학살의 비참함과 공포, 비인간적인 죽음을 불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색채를 사용해 더욱 생동감 있는 주제로 재현해 내었습니다.
그리스에 대한 애정을 담겨 있는 작품입니다. 평생 알레고리를 애용했던 들라크루아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고요. 낭만주의는 현실을 넘어서려는 강렬한 욕망을 가지지만, 동시에 현실에 발을 디디려고 노력했던 인물들은 자연히 알레고리로 기울었습니다. 탈현실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하면서도 그러한 노력에 당대의 현실을 우회적으로 담으려 했다는 점에서, 알레고리가 들라크루아 예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낭만주의 회화의 빛나는 걸작인 이 그림은 시인 바이런의 <사르다나팔루스>에서 힌트를 얻어 제작됐다고 합니다. 아시리아의 군주인 사르다나팔루스는 수도 니네베가 적군의 손에 떨어지자 분신자살을 선택합니다. 그는 분신을 하기 전에 자신의 처첩들, 그리고 그가 총애하던 말들과 개들까지도 모두 죽여버리지요. 병사들이 여인들과 동물들을 죽이고 단말마의 고통이 화면 전체를 수놓습니다. 그 역동적인 장면 한가운데에서 사르다나팔루스는 마치 명상하듯이 한 팔을 머리에 괴고 누워 있습니다. 그가 장작더미 위에 있는 모습은 곧 그가 분신할 것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뒤에서는 벌써 불이 붙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죠. 한 여인은 왕의 침대에 두 팔을 펼친 채 엎드리고 목을 길게 뻗어 자신의 목을 자르기를 기다리고 다른 한 여인은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화면 전체가 생생한 역동성으로 가득하고 화려한 색상과 박진감 넘치는 구도가 화면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이 그림이 문제가 된 것은 우선 잔혹한 주제 때문이었지요. 침대 위에 지긋이 누워 최후의 순간을 즐기는 듯한 그의 모습은 고결한 미덕과 높은 이상에 빛나는 신고전주의적 영웅에 익숙한 관객들을 실망시켰고 눈에 거슬릴 정도의 강렬한 색채와 다이내믹한 붓질은 자로 재어 완성한 듯한 신고전주의적 질서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처럼 낭만주의자들은 고전주의의 규범들을 공격했으며 절대불변의 '이상적 미' 개념을 믿지 않았습니다. 시대, 민족, 개인에 따라 독자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한 18세기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이성 대신 감성에 절대적인 우위를 두었으며, 감수성과 상상력에 전에 없던 중요성을 부여하였던 것이지요.
화면의 대각선상으로 누워있는 여인은 침대 위에서 나른한 표정으로 흰 양말만 걸친 채로 묘사되었습니다. 밝은 광선이 가슴으로부터 전신을 감싸고, 하얀 침대 시트의 반사로 인해 모델의 모습은 강하게 부각되는데 빨간 커튼이 만들어내는 화려하고 강렬한 배경으로,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나부의 몸은 한결 돋보입니다. 그림 전경을 향해 튀어나올 듯한 두 다리에 신겨있는 하얀 양말은 이 그림의 중요한 액센트가 되는데, 그것은 이 그림의 모델의 신분이 평범한 여인은 아닐 거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대범한 붓터치와 간결한 선처리로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빨강과 짙은 녹색의 배합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뛰어난 색채 효과를 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서구의 역사에서 거대한 전환점을 이룹니다. 대혁명을 통해 탄생한 저항정신과 역사의식은 19세기 전체를 지배했죠.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1815년에는 비엔나회의를 통해서 보수적인 질서가 복고됩니다. 그러나 1830년의 7월혁명, 1848년의 2월혁명, 그리고 파리 코뮌으로 이어지는 줄기찬 혁명의 열기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까지 이어지죠. 이 풍운의 시대를 살다 간 들라크루아는 시대의 분위기를 자신의 화폭에 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시대의 아들'이었습니다.
들라크루아가 얼마나 일관되고 확고한 정치의식이 있었는가는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리면서 “내가 조국을 위해 직접 싸우지는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조국을 위해 그림을 그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 데서도 볼 수 있듯이, 그에게는 분명 시대의 공기를 호흡하려는 의식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이 그림에는 당대 프랑스 혁명에 참여했던 여러 계층의 인물들이 상징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한가운데에 자유의 여신이 깃발을 들고서 민중을 이끌고 있습니다.
혁명에 관한 정치적 관심에서가 아니라, 해방되어 가는 '자유'에 대한 공감이 이 그림에서는 사실적이며,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혁명이 만드는 풍경을 전면에 담으면서도 근본적인 핵심은 '자유의 여신'에 있는데, 그녀를 프랑스 삼색기를 손에 들고 전진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죠. 반쯤 흘러내린 옷 사이로 보이는 여신의 풍만한 가슴은 관능적인 육체미라기보다는 강렬한 의지를 지닌 건강미를 먼저 생각나게 합니다. 뒤편에는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가 총을 들고 결연한 자세로 뒤따르고 있으며, 어린 소년도 권총을 들고 환희의 소리를 지르는 표정에서는 혁명이 가져다주는 흥분과 희망 등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한편 죽은 이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고, 후면으로 피어오르는 안개와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색채를 배경으로 삼아 밝게 빛나는 여신과 강렬한 대비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데, 이는 혁명의 숭고함과 신성함을 더욱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들라크루아는 앵그르와 쌍벽을 이루면서 제 2제정 초의 지배적인 회화 양식을 선보였습니다. 1855년 살롱에 출품되었던 이 유채 스케치는 사나운 야생 동물의 걷잡을 수 없이 날뛰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맹수와 맞붙어 싸우는 인물과 같은 이국적인 주제, 힘이 넘치는 빠른 붓질, 화려한 색채 등은 낭만주의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줍니다. 뒤엉켜 싸우고 있는 호랑이의 격정적인 움직임, 놀라 뛰어오르는 말, 여기 저기 나뒹구는 사람들은 소용돌이치는 구성 속에 하나로 얽혀 있습니다. 굽이치는 붓질로 인하여 형태를 나타내는 선은 사라지고, 대신 색채가 형태를 살려내고 있죠. 들라크루아는 앵그르가 고수한 선으로 대상을 나타내는 고전적인 기법에서 벗어나 풍부한 색조로 형태를 완성시켰습니다. 훗날 세잔느와 쇠라 같은 작가들은 이러한 방식을 본받았으며, 들라크루아가 보여주었던 색채의 드라마틱한 힘은 야수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하게 됩니다.
<묘지의 고아>는 <습작>이라는 이름으로 살롱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으로 묘지에 있는 가난한 소녀의 비극적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젊은 처녀가 묘지를 배경으로 입은 벌려진 채 초점이 없는 커다란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강렬한 슬픔과 허무, 비탄의 분위기는 들라크루아 작품들 특유의 화려하고 힘찬 색채와 붓터치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치밀하면서도 어둡게 채색된 그림입니다. 그가 23세에 '고아'를 주제로 그린 두 작품 중의 하나로, 그 자신이 7살 때 아버지를, 16살 때는 어머니를 여윈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1832년 모로코 황제를 방문하는 샤를 드 모르네 백작이 이끄는 사절단에 합류하여 북아프리카를 여행, 알제리와 탕헤르 지역까지 둘러보고 옵니다. 그는 프랑스와 전혀 다른 이국적인 풍토와 사람들, 그리고 강렬한 태양 아래 선명한 색채들을 접하고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여행의 기억과 감동을 500여 점이 넘는 많은 스케치와 소품들로 남겼는데,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단연 빛나는 걸작입니다.
세 명의 여인이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며 여유 있는 한 때를 즐기고 있는 실내는 회교도 부인들의 규방 정도로 생각되는 할렘입니다. 들라크루아는 이방인이나, 외부의 남성이 출입 할 수 없는 그 곳에 들어가기 위하여 특별 허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붉은색과 초록색, 그리고 황금색으로 칠해진 여인들의 옷의 색감은 일찍이 인상주의자들보다 앞서 보색 대비와 색채 이론에 주목하였던 들라크루아의 지적인 탐구를 상기시킵니다. 특히, 여인들의 옷에 줄무늬를 그릴 때 가해진 분절된 붓질들은 인상주의자들의 자유분방한 붓질,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는 기법을 앞서 보여준 것입니다. 여인들의 의상과 다양한 악세서리들, 빨간 덧신, 그리고 전경에 놓여진 빨아 피는 담배로 보이는 북아프리카 특유의 물건들이 이채롭습니다. 방안의 벽면과 바닥에 깔린 카페트, 그리고 여인들의 옷에 이르기까지 화면의 대부분의 공간은 이슬람의 전통적인 장식 문양으로 채워져 있죠. 이러한 추상화된 디자인 패턴들은 단순하고 절제된 느낌을 주기보다는 관능적이고 이국적인, 모호한 분위기를 돋보이게 합니다.
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일 뿐 아니라 『저널(Journal)』이란 일기로 더욱 유명합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의 작품과 정신 세계를 돌아보는 일기를 쓸 만큼, 자의식이 강했던 화가였죠. 그는 6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현재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작가의 하녀였던 제니 르 귀유에게 주었던 작품이라고 합니다. 평소 자신의 외모에 비관하였던 들라크루아는 그러한 외모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는지 옷차림에 대단히 신경을 썼다고 하는데요. 이 작품에서 들라크루아는 전통적인 3/4 정면 자세로, 약간 몸을 튼 포즈를 취했습니다. 녹색 조끼를 받쳐입은 멋스러운 감각, 오똑한 콧날과 분명한 골격, 다소 턱을 치켜든 의식적인 포즈에서 화가의 강한 자의식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보들레르는 들라크루아의 예술세계의 핵심을 '숙명과 절망적 고뇌'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 숙명과 절망적 고뇌는 항상 잔혹성이 바탕에 깔린 에로티시즘을 동반하고 있죠. 들라크루아가 존경했던 화가 제리코 역시 이러한 주제를 <살인광>, <미친 여자>라는 작품을 통해서 시각화하였고 들라크루아는 이러한 잔혹미를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표현해냈습니다.
이 그림의 주제는 남편 이아손의 변절에 정신이 나가버린 메디아가 자기 자식들을 살해한다는 고대 그리스 신화입니다. 어두운 바위틈의 동굴 속에 풍만한 육체를 드러낸 메디아, 한 손에 칼을 움켜쥐고 아이들을 잡은 그녀의 모습에서 관능미와 비장미가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들라크루아가 죽기 1년 전 완성한 이 작품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 처절한 한 순간을 포착,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려는 의지로써 그린 듯합니다. 구도상으로는 르네상스 대가들이 '성모자'를 테마로 한 그림을 그릴 때 즐겨 사용한 삼각구도를 쓰고 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전통적인 삼각 구도를 받아 들여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 낭만주의의 격정적인 화면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1832년 모로코 여행은 들라크루아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각인시켰습니다. 이 작품은 훗날 모로코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그린 작품입니다. 유대인 가정의 젊은이의 결혼을 축복하기 위해 가족 친지가 모인 가운데 피로연이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인물이 무질서하게 각자 다른 자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지만 인물들의 움직임은 한데 어우러져 리듬감 있는 구성을 보여줍니다. 밝은 회 벽과 초록색 난간, 그리고 중앙에 앉은 연주자의 빨간색 조끼가 이루어내는 대담한 색조의 대비는 들라크루아의 빛나는 색채 감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도 십자군에 의하여 함락되고, 그때 프랑스의 총 사령관 보오드왕 백작은 군마를 타고 입성합니다. 빛나는 승리의 영광을 가슴에 안은 승리자의 둘레에는 패전 뒤의 피비린내 나는 광경뿐이죠. 그림의 왼쪽에는 항복을 외치며 한 손을 쳐든 노인, 그 앞에는 번듯하게 나자빠진 여자의 시체, 그 앞쪽에는 서로 부둥켜안고 관대한 자비를 비는 터키인의 모자, 오른쪽에는 장군이 온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죽은 동포를 부둥켜안고 힘없이 엎드린 여자, 모든 것이 아수라의 거리에 휘몰아치는 피비린내 나는 살기였습니다. 풍경에는 로마 풍의 건물의 일단이 보이고, 그 뒤쪽의 먼 곳에 보스포러스 바다가 파랗게 반짝이고, 그 위에 먹구름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장식을 위해 제작된 이 그림은, 역사적인 사건의 치밀한 고증과 과학적인 원근법의 효과적인 사용으로 들라크루아를 위대한 역사화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대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여러 차례 왕정과 제정이 바뀌는 혼란스러운 한 세대를 살았던 그가 과거를 반추하는 역사화 속에서 동시대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현실을 비추어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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